할레골. 무제.

톨킨버스 2013. 11. 13. 00:57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거에요?"

막 솜씨좋게 꽃관을 엮어내던 손가락이 멈췄다. 청회색의 눈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면 어린 왕자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버린것을 애써 수습한 할디르는 그대로 관을 내려놓은 채 왕자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제가 떠나길 원하십니까?"
"아니요."

도리질치며 더욱 더 내밀어진 입술이 붉게 빛났다. 분명 자신의 동생 뻘인 나이의 엘프는 어둠숲에서조차 귀히 보살펴진 연유에서였는지 순진함이 빛을 발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을 되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이번 한번 뿐이랴. 정해진 답을 내어놓을때 까지 왕자는 같은 질문을 계속 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갑자기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왕께서요?"
"귀한 인연은 눈 깜짝 할 새에 사라진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요. 그렇기에 기회가 오면 꼭 잡아두어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어요. 할디르를 잡고 싶은데 할디르는 내가 한눈 판 사이에 가버릴 것 같은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할디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시무룩 해진 얼굴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비쭉비쭉 눈치를 보면서도 풀죽은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지만 오해한 채로 놔두는 것은 곤란했다. 할디르는 관을 마저 엮은 후, 왕자의 머리 위에 얹고는 화들짝 떠오른 시선을 향해 웃어주었다.

"저는 싫어하는 이에게 꽃을 선물할 만큼 착하지 않은데."
"이거.. 내거에요?"
"싫으시면 가져가구요."
"아니. 아니에요!"

더듬더듬 꽃잎 하나라도 상할까 조심스레 움직이던 손이 불현듯 멈추었고 새파란 시선이 할디르를 향했다. 일렁이는 눈빛 속에서는 조금전까지 보지 못했던 기쁨이 춤추고 있었다.

"정말 날 주는 거에요..?"
"네. 왕자전하거에요."
"...좋아하는 분에게 선물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저번에.. 그.. 이야기했잖아요. 되게.. 좋아하는 분이..계시다고."

아이 앞에서는 행동 하나도 허투루 하지 말라 내려오던 도리아스의 격언이 눈앞을 스치는것을 느끼며 할디르는 한숨을 쉬어냈다. 하도 귀엽고 깜찍하게 굴길래 에둘러 조금 장난을 친 것 뿐인데 진심으로 가슴 속에 새기고 있었을 줄이야. 이래서야 이제껏 노력한 것이 다 허사가 되어버린 격이었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쉰 할디르는 불쑥 레골라스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조금 비뚤어진 모양새를 바로잡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분은 아직 어리세요. 제대로 말도 못꺼냈는걸요."
"어려...요?"
"아직 성년조차 되지 않았어요."
"....제 또래네요."
"그렇죠?"
"예뻐요?"
"예뻐요. 엄청."
"...좋겠네요."

금새 시무룩해진 얼굴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왕자의 자존심은 생각보다 높아서 지금 쓰다듬으면 성질을 낼지도 몰랐다. 안타까움에 입술을 축이며 할디르는 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왕자전하는 약혼자가 있나요?"
"없어요. 그런거." 
"그래요? 의외네요."
"뭐가요?"
"그냥요."

그저 웃으며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다가도 금새 다시 시무룩해진 모습은 쉬이 풀리질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디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성인이 되는 날에 정식으로 청혼하려고 생각중이에요."
"얼마 안 남았네요."
"받아줄까요?"
"...할디르는 멋있으니까 받아줄거에요."
"저는 가디언 일 뿐인데요."
"아니에요! 멋있으니까! 음.....좋아할거에요."
"정말요?"
"네! 정말로 멋있어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끄덕이는 모습에 반짝임이 가득했다. 아이의 맹목적인 믿음인가. 아니라면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어 한 대답일까.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어린 왕자님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 하나가 중요했다.

"고마워요. 레골라스. 나를 좋아해줘서."
"할디르도 나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당연해요. 우린 친구잖아요?"
"맞아요. 친구."

혀끝에 번지는 친구 라는 발음이 간지러운 듯, 왕자는 쑥쓰러이 웃어보였다. 조금 눈치를 보다가 일어서 옷에 붙은 풀들을 떼기 시작한 레골라스는 숲으로 들어가 엊그제 발견한 아기새를 보러 가자며 할디르를 졸랐다.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확인한 레골라스는 앞서 달려나가 재촉했다. 쏟아지는 햇살이 왕자의 머리칼 위에서 꽃과 함께 춤추며 날아올랐다. 홀린 것 같은 시선으로 할디르는 나풀거리는 몸짓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겼다. 몇 십년의 짧은 순간이 지났을 때, 왕자의 머리 위에 얹은 것과 같은 꽃들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니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지만 혹여나 꿈꾸던 소원이 이루어져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이제껏 보았던 모습들 중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이의 모습일거라고 할디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간절히 꿈꾸는 자에게 소망하던 미래가 온다고 했던가. 머릿속으로 계속 원하는 것을 되뇌이는 할디르의 얼굴에도 왕자와 똑같은 금빛의 미소가 어렸다. 아직은 쉬이 내뱉지 못한 수줍고도 상냥한 소망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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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밤.

톨킨버스 2013. 10. 29. 00:30

막 씻고 안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이내 멈추었다. 고요해야 할 방 안에서 숨소리가 들려오자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엘론드는 안쪽으로 향했다. 곱게 개어진 이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누군가가 잠들어 있었다.

"준비해드린 침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응."
"그럼 다른 곳으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감겼다 떠진 눈에 촛점이 들어오자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또 무슨 변덕일까 싶어 한참 쳐다보면 굳게 닫혀있던 입술에 웃음이 서렸다. 고작 방이 춥다고 투정하며 소매를 잡아끄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저녁때 무언갈 잘못 먹었나...

"그러니 이 방을 써야겠어."
"여긴 제 침실입니다만."
"알고 있어. 그러니 쓰겠다는 거야."
"....그럼 제가 다른 방으로 가죠."
"아니, 그대의 방인데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무게에 이끌려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조금씩 찌푸려지는 미간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여전히 얄미웠다. 왠일로 조용히 지나가는가 했더니만. 나오려는 한숨을 누른 엘론드는 조심히 잡힌 손묵을 빼내려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손님을 모시는데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제가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손님이 원하는 것을 고려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원하는게 뭡니까."

개인적인 공간에서까지 입씨름을 하고 있자니 피곤해진 몸은 돌연 딱딱한 말을 내뱉었다. 반쯤은 진심이 섞여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스란두일은 오히려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다 잡은 손목을 휙 당겨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무너진 몸이 그의 위로 기울어졌다.

"이게 무슨.."
"리븐델은 계곡이라 그런지 밤의 추위가 꽤나 견디기 힘들어."
"..어둠 숲의 날씨보다 배는 따듯할 것 같습니다만."
"그 곳의 추위는 이미 익숙해졌어. 춥고 어둡고 냉기가 흐르지. 하지만 이곳의 추위는 여간해선 익숙해지는 법이 없군."
"그냥 본론만 이야기하는게 어떨까요."
"같이 자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스란두일은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엘론드를 쳐다보았다. 어정쩡한 자세에 불편한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이미 품안에 갇힌 몸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럴 거였으면 무슨 추위 핑계는..

"잠만 잘 겁니다."
"그럼 뭘 또 하게?"
".....놔 주십시오."
"정말 추운데 믿질 않으니 놓을수가 있나."
"알겠으니까 좀 놓으십시오. 불편합니다."
"진작 그렇게 말 하지."

웃으며 깍지 낀 손을 풀자 조심히 곁으로 돌아 눕는것을 확인한 스란두일이 이불을 끌어올렸다. 부러 등을 돌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와 허리를 껴안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엘론드는 파득 놀랐다. 목 뒤에 닿을 듯 말 퍼지는 숨소리에 긴장하면서도 좀 더 바짝 붙으려는 몸짓에 매섭게 손등을 내리쳤다. 작게 혀차는 소리와 함께 조금 떨어진 온기는 적당한 간격을 만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방으로 돌아가세요. 쓸데없는 오해를 만드는 건 원치 않습니다."
"천하의 스란두일이 임라드리스의 현자와 밤새도록 술 한잔 하는것이 특이한 일은 아닐텐데 뭘 그리 신경을 써."
"제가 술을 먹지 않았으니까요."
"내일 아침 방을 나서기 전에 포도주라도 한잔 해야겠군. 완전범죄를 위해."
"....."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말고 어서 눈을 붙이도록 해. 정말 오늘은 잠만 잘거니까. 아 혹시 좀 아쉽다거나..."

저도 모르게 나가버린 팔꿈치가 정확히 목표물을 가격했는지 스란두일은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한참을 낑낑거리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따스함이 등 뒤로 번졌다.

"하여간 성질은."
"돌아가기로 한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스란두일이 엘론드의 목 뒤에 얼굴을 묻었다.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작은 온기를 남겼지만 무어라 깨닫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지며 서늘한 기운을 남겼다.

"잘자. 엘론드."
"...안녕히 주무시길."

무어라 반응하지 못한 떨떠름한 답을 알아챈 작은 웃음이 닿은 곳을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나눈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지그시 부여잡은 온기가 둘을 감쌌다. 가을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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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잠.

톨킨버스 2013. 10. 28. 00:54

"그만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방금 넘겼던 포도주의 뒤끝이 사라지기도 전에 친우라는 자는 저리도 무심한 이야기를 뱉어냈다. 픽 웃으며 늘어진 팔을 들어올린 채,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곤조곤히 입을 열었다. 이 친구야. 난 아직 멀쩡해.
당치도 않는 말을 들었다는 듯, 엘론드의 입꼬리가 올라왔다. 어느새 또 가득 채워진 술이 잔 위에 넘실거렸다. 이 친구 오늘 아주 날 만도스의 전당으로 보내버릴 작정이군.
모른 척, 손을 가져다 대면 저도 모르게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여댔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크게 웃었다. 스스로 주고도 못 미더워 하면 내가 어찌 마실까. 설핏설핏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그러다 어깨를 부여잡는 손길에 고개가 들렸다.

"방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군. 스란두일."
"그럴까? 하긴 자네도 피곤할 때가 되었군."

비척비척 일어서 부축도 마다한 채, 발을 디뎠다. 어자피 조금만 가면 도착하는 곳이 이 몸의 목적지였다. 바깥으로 향하지 않는 발걸음에 엘론드는 선뜻 옆으로 다가왔지만 힘을 잃은 몸뚱이가 좀 더 빨랐다.

"왕이 누워 잠을 청한 곳은 예로부터 귀한 기운이 서린다는 소문이 있지."
"그 귀한 영광을 얻게되니 소신, 기쁨이 커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전하."
"그렇겠지. 왕의 기운이란 본디 성스러우면서도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부디 자리하신 그 곳 뿐만 아니라 다른 곳 여러군데에까지 영험한 기운을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안타깝지만 오늘의 나는 이곳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내려놓았다. 눈을 붙이고 난 다음 이라면 모를까. 그대의 청은 조금 힘들지 싶구나."
"......."
"왜, 혹 내가 그대의 침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불편한 것이냐?"

짐짓 근엄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엘론드는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모처럼의 하대에 장단맞추어 주기로 마음먹은 후 조심스레 대꾸했다. 생각해 보니 그다지 싫은 것은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며 스란두일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그대에게 선물을 하나 하도록 하지."
"그리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아니다. 무리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내 그대에게 이 품을 허하겠다."
"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엘론드의 표정을 생경하게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그저 웃으며 팔을 벌렸다. 남의 침대 위에서 제자리마냥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며 엘론드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숲의 왕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몇번 자신의 곁을 톡톡 두드리고 난 뒤에 보란 듯 웃어보이는 모습은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몇 번을 진득하게 내려다보았지만 좀처럼 비킬 생각이 없어보이는 친우의 모습에 엘론드는 선선히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은혜가 하해와 같사오나 소신, 그저 눈을 붙일 수 있는 공간만 필요할 뿐입니다."
"그대는 내가 특별히 아끼는 이인데 그리 홀대할 수는 없지. 개의치 말고 이리 오라니까."

몸을 일으켜 그저 우두커니 서있는 엘론드의 손을 잡아 채, 곁으로 이끌었다. 선선히 딸려오는 몸이 천천히 침대위로 무너져내렸다. 곁에 몸을 누이고 온기가 닿을 정도까지 가까워지고서야 스란두일은 뿌듯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좋은 꿈을 꿀거야. 분명."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내가 있는데 악몽을 꿀 리가 없어. 당연한 것을 믿지 못하는구나."
"그리 자신하십니까."
"물론."

자신만만한 눈빛 사이로 손가락이 다가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가만히 지켜보는 시선이 간지럽다는 듯, 한번 움츠렸다 펴진 손끝은 슬금슬금 내려가 얌전하게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꾸욱 부여잡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따스한 기운이 퍼졌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던 스란두일은 고개를 조금 올려 엘론드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동그랗게 뜬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저 부여잡은 손아귀에 힘을 준 스란두일은 슬쩍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되려 당당한 모습에 웃음이 터진 건 엘론드였다.

"그리도 좋아하니 내가 다 뿌듯하구나. 슬슬 노곤한 몸을 편히 쉬게 해도 좋을 듯 하니 먼저 잠드는 것을 허락하마. 눈을 감거라."

끝까지 가신을 일부러 재우는 왕의 모습으로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눈가를 덮었다. 순식간에 새카매진 시야에 웃음이 멈춘 엘론드는 잠시 망설이다 슬그머니 미소를 띄웠다.

"안녕히 주무십시요. 숲의 왕이시여."
"그대도 좋은 밤이 되길."

다정한 말들이 오가고 한참 후에야 어린아이들 처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란히 누운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단단하게 얽힌 손깍지에만 조금 힘이 들어갔을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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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글로르. 밤.

톨킨버스 2013. 10. 20. 02:23

어미의 손길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추운 날씨를 따라 이동하는 군대 안에서 철저한 이방인 취급당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닿을 따스한 손길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나마 마글로르만이 바쁜 와중에 먼 눈으로 그들을 챙겼다. 마에드로스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모양새로 그들을 잊은 듯 했다. 순식간에 메말라버린 환경은 쌍둥이들을 체념하게 만들었고 적응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도리아스의 일원이 아닌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광야를 헤치는 떠돌이 일족이 되어버린 듯 보였다.

해가 저물 즈음.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마글로르는 자신의 막사로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손장난을 하다 들킨 모양으로 굳어버린 그들에게 모처럼 더운 물에 목욕도 하고 조금은 풍족한 저녁을 챙겨줄 수 있겠다며 유쾌하게 웃어보였지만 아이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법은 없었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조용함에 그는 크게 신경쓰는 내색 없이 먹을 것을 늘어놓고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작은 옷을 찾느라 등을 돌려 부산스레 몸을 움직였다. 그의 말대로 평소의 먹던 것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형태의 음식을 마주한 아이들의 입가에 그제서야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들의 표정이 없어진 것은 환경 덕분이었지 성격 탓이 아니라는 걸 마글로르는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떠들거나 서투르게 식기가 부딧히거나 하는 아이다운 행동은 없었지만 부드러워진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어린 쌍둥이가 맘 편하게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이미 찾은 옷들을 주물거리며 오랜시간 짐을 뒤적였다.

꽁꽁 싸매진 옷을 벗기고 나면 가느다랗고 통통한 몸 두개가 뽀얗게 피어났다. 광야의 먼지도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 어찌보면 당연했다.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마른 몸들은 내심 안쓰러웠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엉성하게 땋여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조금은 뜨거운 물을 끼얹으며 거칠고 투박한 손바닥이 이곳 저곳을 문지르면 줄줄 땟국물이 빠졌다. 그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목욕통 안에서 좀체 나오려 하지않던 아이들은 결국 손발이 쪼글쪼글해지고 발갛게 열이 오르고 나서야 마글로르 손에 번쩍 들려 밖으로 꺼내졌다.
열오른 양 뺨이 사과처럼 붉었다. 수건으로 채 닦지 못한 물기를 닦고 잠옷을 입혀 나란히 앉히면 그제서야 제법 처음의 생기 넘쳤던 그 모습이 보였다. 나란히 등 돌려 앉은 아이들의 작은 어깨를 보며 마글로르는 머리를 말렸고 그새 나른해진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얼기설기 움켜잡고 조심스럽게 발장난을 했다.

느슨하게 머리를 땋고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몸 위로 겉옷을 하나씩 덧입히며 마글로르는 잘 자라고 인사했다. 언젠가서부터 늘 그래왔듯 머리 위를 한번씩 쓰다듬고는 아이들이 잠자리로 들어가 모포를 덮는 것 까지 지켜보고 훅 입김을 불어 아른대는 촛불을 집어삼켰다. 겨우 반짝이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새까맣게 내려앉은 어둠이 사방을 채웠다. 막사가 비좁고 모자른 덕분에 아이들은 따로 머물 곳이 없었고 돌봐줄 만한 이도 없었기에 마글로르는 늘 자신의 막사로 아이들을 데려왔다. 자신 또한 모든 것이 서툴었지만 누군가를 위한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방이 고요해지면 다시 조심스레 부싯돌을 부딧혀 불을 피워올렸다. 아까보다는 조금 어두워진 불빛이 날름날름 혓바닥을 내밀며 사방을 밝혔다. 자연스럽게 향한 시선이 보이기라도 한 듯, 조금 짧게 덮인 모포의 틈새로 도톰한 발 두 쌍이 꼬물거리다 사라졌다. 내일이면 다시 자취를 감출 반짝임을 끈질기게 주시하던 마글로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괜시리 아이들의 모포를 추켜올려 주었다. 미세하게 달라진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역시 못 들은 척, 제 자리로 돌아왔다. 내일은 조금 더 넉넉한 크기의 모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아이들은 잠을 자고 어른은 일을 해야지. 저 멀리 국경에서 들어온 보고서를 펼치며 나무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신의 밤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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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코안나. 밀회.

톨킨버스 2013. 9. 25. 03:26

너무도 낡은 곳 이었다. 죽은 짐승들의 시체와 오물들이 산을 이뤘고 악취 또한 진동을 했다. 헐거운 못 두어개로 간신히 고정한 문은 마치 오래된 종이처럼 건들기만 해도 바스라졌다. 그분이 계신 곳이라곤 믿겨지지 않았다. 이토록 허술하고 낡고 더러운 곳은 그분의 숨결조차 닿아선 안됬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하리만치 잔인했다. 애써 차오르는 울분을 억누른 채, 부서지는 문을 곁으로 던져버린 안나타르는 안쪽으로 향했다.

몸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질 않았다. 이곳에는 어자피 아무도 오지 않을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그랬다. 발라들은 이곳에 그 흔한 보초하나 세워두질 않았다. 죽음의 땅. 파멸이 가득한 대지. 살아있는 존재들은 절로 근처에 오길 꺼리는 곳. 절망만이 가득한 이 제일 깊숙한 곳에 나의 주군이 있었다.
길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발걸음이 절로 향했다. 어느새 바빠진 걸음걸이는 휘청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힘이 샘솟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거짓말 처럼 넓은 홀이 나타났다. 그 끝에 새카만 어둠으로 몸을 감싼 인영이 보였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미친듯이 그 끝으로 향했다. 마치 인형처럼, 조각처럼 미동도 없이 쇠사슬에 구속된 모습이었다. 억눌린 분노는 탄식의 소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분노와 슬픔으로 떨리는 몸뚱이가 죄스러웠다. 겨우 앞으로 나아가 차마 손조차 내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발밑에 엎드려 울다 겨우 용기를 내어 천천히 입맞췄다. 부르트고 갈라진 발 끝은 마치 돌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그것이 더 서러워 왈칵 떨어지는 눈물을 부볐다. 그토록 원했던 온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그러다 작은 파열음을 들었다. 입맞췄던 발에 금이 생겼다.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보람도 없이 쉽사리 균열은 커졌고 금세 부서졌다. 엉겁결에 감싼 손 끝에서 느껴진 온기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주...군..?
마치 새로운 생명을 받아 태어나는 것 처럼 부서진 조각들은 별처럼 산산히 흩어졌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새하얀 발. 그 발이 보였다. 늘 자신이 입맞췄던 발. 늘 향유를 발라드렸던 그..발.

천천히 고개가 들렸다. 좁은 발목을 지나 종아리 선으로 올라갔다. 툭 도드라진 무릎이 보였고 단단한 허벅지가 보였다. 골반을 지나 늘 끌어안고 싶어했던 허리가 있었고 귀를 대면 늘 다정하게 울리던 심장소리를 품은 가슴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언제나 웃어주시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천천히 속삭이고 계셨다.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Annatar..

 

 

나를..
부르셨다..

 

 

 

 

 

 

너무 부끄러운데 새벽 감성이 아니면 쓸수가 없을까봐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조각비님이 제게 멜코안나를 주셨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ㅜ
내일보면 펑하고싶어질지도 모르겠는데ㅜㅜㅜ완전 유치한거 아는데 으어어어으어ㅠㅠㅠㅠㅠㅠㅠㅠ
허락받고 그림 가져왔어용 헤헤 ㅠㅠㅠ 

* 클릭해서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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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아엘윙. 아침.

톨킨버스 2013. 9. 22. 20:51

"에아렌딜. 그만.."

새하얗게 빛나는 햇살이 부서지는 곳에 새까만 머리칼이 빛났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것은 마치 고운 비단처럼 흐트러졌다 펴지길 반복했다. 햇빛에 잘 말려 포근한 이불은 서걱이며 부산스레 움직였고 간혹 높은 웃음소리가 섞였다. 한참을 불쑥 불쑥 움직이던 이불 속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금과 흑. 사방으로 흐트러지며 겹쳐지던 머리칼이 빠르게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아으.ㅇ..."

달싹이는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허리에 감겨오는 따스함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닿아오는 단단한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면 자신만 바라보는 눈동자가 사르르 감겼다.
코 끝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면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보답이라도 하듯 턱과 목 근처에 키스하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그의 머리칼을 손안 가득 움켜쥐면 반사적으로 손끝이 골반을 부여잡았다. 침의 사이로 스며든 손가락이 톡톡 노크하듯 두드리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간지럽다는 듯 허리를 비틀면 놓칠세라 쫒아왔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조르며 다리를 얽었다. 옴짝달싹 하지 못할 정도로 다잡은 팔 안에서 엘윙은 그저 웃어버렸다.

"아침인데 안 일어 날거야?"
"오늘은 조금 늦장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가씨?"

그제서야 품 속에서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여주는 이의 모습이 얄미워 엘윙은 귀를 잡아당겼다. 아무렇게나 자라 삐죽삐죽 흩어진 머리칼이 손끝에 함께 감겼는지 금세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놀란 손끝이 떨어져나가고 귀 뒤로 머리칼을 정리해 넘겼다. 하지만 얼얼한 아픔이 좀체 가시질 않아 보였다.

"아파?"
"응."
"어쩌지."
"어쩌긴. 벌 받아야지."
"응?"

금세 몸을 돌려 엘윙의 위로 올라간 에아렌딜이 짖궂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멀뚱하게 바라보던 엘윙의 머리칼을 걷고 에아렌딜은 동그랗게 솟아오른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가슴선을 매만지던 손은 턱을 조금 들어올렸고, 눈가와 뺨에 키스하던 입술은 귀 끝으로 향했다. 부러 소리를 내며 짖궂을 정도로 집요하게 애무하던 에아렌딜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새카맣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한참을 키스하고 나서야 에아렌딜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귀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겨우 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얽힌 감정이 재미있는지 씩 웃어보이는 모습은 마치 짖궂은 소년과도 같았다.

"못됐어."
"어쩌지?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혼을 무를수도 없는데."
"엘론드랑 엘로스한테 이를거야. 아다가 나 괴롭혔다고."
"그것만은 참아줘. 요전에도 하루종일 잔소리를 들었다고."

금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한번 허리를 감고 밀착해오는 에아렌딜을 보며 엘윙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전에 지나가듯 투정부린것을 쌍둥이들은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에도 얼마나 약한척을 하던지.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엘윙은 코끝에서 움직이는 색바랜 금발을 쓰다듬었다.

"또 언제 나가?"
"이제 곧."
"금방 올거야?"
"응. 금방 올게."
"거짓말."
"거짓말같아?"
"응."

너무도 당연하게 나온 답변에 조금 놀랐는지 에아렌딜이 고개를 들었다. 깜빡이는 눈동자를 한참이나 쳐다본 시선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슬그머니 떨어져 미안한 듯 바라보는 모습에도 엘윙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저하며 입을 연 것은 에아렌딜 이었다.

"미안해."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과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 엘윙은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단하게 굳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까칠해진 얼굴을 매만졌다. 만져도 만져도 그리웠다. 사랑하는 이의 체취가, 온기가, 모습이 그립지 않다고 하면 그것이 진정 거짓일 터였다. 하지만 엘윙은 모든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의 모습은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었으니까.

"금방 오지 않아도 괜찮아."
"엘윙."
"돌아오기만 하면 돼."
"...돌아올게. 꼭."
"정말?"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럼 맹세의 키스를 해 주세요."

말갛게 웃으며 접히는 눈동자를 보며 그제서야 안심한 에아렌딜은 그녀의 손을 잡아올려 입술을 묻었다. 한참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엘윙은 부러 마음에 들지 않는 투로 입을 열었다.

"요즘 뱃사람들은 촌스럽게 맹세의 키스를 손등에다 하나봐요."
"사실 뱃사람들은 이렇게 안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는데요?"
"음.. 공주님이 하시기엔 조금 거칠 것 같은데요."
"지금 절 무시하는 거에요?"

날카롭게 올라간 눈동자엔 장난끼가 돌았다. 뾰족하게 내밀어진 입술을 쳐다보던 에아렌딜은 정말 어쩔 수 없단 모습으로 경고했다.

"못 견딜거 같은데."
"뱃사람들의 맹세 정도야. 뭐."
"그래요? 그럼 하죠. 맹세."

갑자기 다가온 얼굴에 엘윙의 입술이 먹혀들었다. 키득거리며 달아나려 했지만 단단히 끌어안긴 목과 허리는 좀체 움직일 틈을 주지 않았다. 품에 가두었으면서 계속 안으로 파고드는 몸짓에 겨우 뻗어나온 하얀 손가락이 에아렌딜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신음소리 섞인 웃음은 서로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부스럭대는 작은 소리와 조급하게 서로의 온기를 갈구하는 모습이 이제는 선명하게 떠오른 아침 햇살속에 담겼다. 따스한 여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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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론드. 폭우.

톨킨버스 2013. 9. 13. 12:10

늘 임라드리스가 따스하고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깊은 슬픔의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토록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비가 내리는 날엔 끊임없이 들려오던 엘프들의 노랫소리마저 불분명하게 사그라드는이었다. 몇 천년을 견뎌온 날 중에 기쁘고 좋은 날만 있을까. 이유없이 우울하고 시름에 잠겨 가라앉은 분위기에 이미 많은 것을 겪어온 이들은 그저 담담히 웃어보였고 나이어린 엘프들은 덩달아 숙연해졌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빗소리. 눈 앞을 가로막은 어두컴컴한 천둥과 번개. 세상의 불행은 모두 임라드리스에 가져올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을 닫아 어둑어둑한 서재에 작은 불들이 드문드문 안을 밝혔다. 오래된 책을 필사하던 엘론드의 앞에 누군가가 주저하듯 다가왔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책을 바라보던 시선에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너울거리자 엘론드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곤란한 모습을 한 글로르핀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글로르핀델."
"......"

유독 요즈음 글로르핀델은 엘론드를 어려워했다. 아니 글로르핀델 뿐만이 아니었다. 임라드리스의 모든 엘프들이 그를 어려워했고 눈치를 보았다.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꺼내어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였고 슬픔이었다. 떠나는 그녀의 손끝에 입 맞추며 그녀를 위해 이겨내리라 맹세했건만 슬픔이란 존재는 쉬이 흐트러지거나 사그라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맞서 싸우고 이겨내려 안간힘을 써 보아도 그 거대한 것을 홀로 상대하기엔 마음속에 뚫려버린 구멍이 너무나도 크고 깊었다. 한번 부숴진 마음이 다시 한번 자극을 받으면 죽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또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초연해진 마음으로 엘론드는 아주 천천히 상처를 추스르고 있었다. 시간은 또 지나겠지. 세월이 가고 망가진 그 마음 한구석에도 얇디 얇은 종잇장이 하나둘 쌓이면 언젠가는 겉모습이라도 원래처럼 돌아오겠지.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이겠지. 그것이 슬픔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이미 알기에. 엘론드는 그저 미동없이 잔잔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걱정해서 오신거라면 괜찮습니다. 아직 정신도 멀쩡하고 식사도 꼬박꼬박 하고 있으니까요."
".... 주군."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평소에도 글로르핀델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함께는 아니었지만 늘 곁에서 지켜보던 이였다. 눈썹의 까딱이는 정도, 시선의 떨림. 그런 것들을 보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을지 지레짐작이 가능했다. 평소처럼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그를 올려다 보았지만 여느때와 달리 그의 시선 속에서는 비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밖으로 향했는지 몰랐다. 미친듯이 내달린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소리가 쟁쟁 울렸다. 저녁을 먹었는데.. 방에도 없고, 아이 셋이 한꺼번에....
억눌러왔던 불길한 공포가 온 몸을 엄습했다. 차갑게 식은 손 끝이 덜덜 떨려왔지만 입에서는 반대로 더운 숨이 터졌다. 흔들리는 시야앞에 놓인 것은 거대하고 강한 비바람이었다.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비가 시야를 가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엘론드는 그저 앞을 향해 달렸다.

이미 많은 엘프들이 주위를 뒤지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횃불이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보였다 사라졌다. 근처에 있었다면 진즉에 발견이 되었을 터였다. 간단한 보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엘론드는 무작정 깊은 숲 속으로 향했다. 어두운 숲은 마치 괴물과도 같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조금씩 조금씩 엘론드의 곁을 지키던 엘프들이 흩어졌다. 몰려 다니는 것 보다 나뉘어 찾는 것이 더 나았다. 여기 저기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귀를 찢을 듯 들려오는 빗소리에 그 소리들이 섞여 끔찍한 공포심을 일깨웠다. 이것은 고통에 울부짖던 켈레브리안의 목소리였다.
마주칠 자신이 없어 덮어두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 나의 연정. 연인. 그 가녀린 몸이 할 수 있던 일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 밖엔 없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토록 찾아 헤메다 발견한 모습은 끔찍하리만치 처참했다. 두려움. 공포. 울분. 한데 어우러져 가늠조차 하기 힘든 분노로 그는 칼을 들었고 순식간에 악을 징벌했다. 하지만 남은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놀랄만치 초연한 시선. 겨우 웃어보이던 부르튼 입술. 그것 뿐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살려줘요. 엘론드. 제발, 여기에.. 아악!!!!!!!!!!!!!!!!!!!!!!!!!!!!!!!
아득하게 멀어진 정신에 다리의 힘이 풀려갔다. 그 때에 천둥이 큰 소리를 내며 근처의 나무에 내리 꽂혔다. 그 순간 주위가 환하게 타오르다 곧 사그라들었다. 분노. 포효. 아니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 일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환청에 잠식당하지 말라는 상냥한 목소리. 따끔한 충고. 다시 엘론드는 도리질치며 정신을 다잡았다. 꾹 쥐인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그냥 환청이다. 약해진 마음에 스며든 악의 속삭임일 뿐이다. 강해진 정신에 더이상 악의 사념들은 접근하지 않았다. 엘론드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목 끝 까지 차오른 숨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쫄딱 젖어버린 몸에서 더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디 있는걸까. 어디로 간걸까. 아르웬까지 사라졌다면 필시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비오는 밤을 무서워 하는 아이였다. 늘 어미의 품에 꼭 안긴 채,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었다. 나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엘론드를 괴롭혔다. 하필 왜 오늘이었을까. 가장 궂은 날. 가장 좋지 않은 날. 왜 이런 날에 아이들 모두가 사라진걸까.
후들거리는 다리에 더이상 뛸 수 없어져 엘론드는 걸었다. 한참을 걷고 걸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참고 참았던 슬픔이 비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나 다행이었던 건,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가득 채워진 슬픔은 닦아낼 필요도 없었다. 목메어 부르지도 못했던 이름들을 나직이 읊으며 엘론드는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문득 어깨에 옷이 걸쳐졌다. 돌린 시야에는 글로르핀델이 있었다. 다가오는 줄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제 할일을 한다는 듯, 글로르핀델은 쳐다보는 엘론드의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에게 로브를 입혔다. 추위로 덜덜 떨리는 입가를 안쓰러히 쳐다보다 차가워진 손을 깍지껴 잡고 힘을 주어 당겼다. 찡그려진 미간에 겨우 한숨을 내쉬고서야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어째서 그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빠른 걸음으로 향하는 걸음 하나하나에 엘론드는 자책감을 담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다. 엄마의 품이 그리울 것이 당연했다. 안쪽 정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엘론드가 손수 베어 만든 나무 그네가 있고 켈레브리안이 유독 좋아하던 정원 속의 오두막 속에서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생각할 수록 자신이 한심했다. 자신의 깊은 슬픔에 빠져 아이들의 마음 하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자를 세상은 현자라 칭송했다. 이런 어처구니없을데가..

로브도 벗지 못한 채, 아이들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 막 잠이 들었다는 세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옹기종기 누워 눈감은 채, 이불을 덮고 있었다. 무너지듯 곁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고사리같은 작은 손들이 이불 위에서 움찔대고 있었다.
맞대어 온기를 느끼려는 손길을 글로르핀델이 제지했다. 아이들이 놀랄 겁니다. 그 말 한마디에 내밀었던 손이 다시 거둬들여졌다. 따스한 기운이 아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다가설 수도 없을 정도의 따스함. 나는.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떨리는 두 손이 얼굴을 감쌌다. 숨조차 마음껏 내쉬지 못한 울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나갔다. 곁에서 묵묵히 바라보던 글로르핀델이 조심스레 밖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사같이 잠든 아이들의 모습은 큰 위로이자 깊은 슬픔이었다. 여전히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대지를 적셨다. 지독한 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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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의 밤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궁에 당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왕을 배알하고 나온 그 짧은 시간동안 밖은 온통 캄캄해져 있었다. 숙소를 안내하는 엘프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 할디르는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곳과는 전혀 다른 숲의 모습에 조금은 흥미로워했다.
이방인을 위한 숙소는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머크우드의 특성상 왕실의 중요한 곳들은 깊숙한 지하에 숨겨져 있었고, 혹여나 자리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이렇게 구분해놓았다고는 했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미 숲에 진입하면서부터 모든 무기들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였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암기정도만 몸에 숨기고 들어온 할디르의 눈에도 머크우드의 대우는 유별났다. 그저 지나던 방문자도 아니고 사신의 임무를 띄고 온 자에게까지 엄격하게 적용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였다.

혼자가 된 후에야 겨우 긴장되었던 숨을 고르게 내쉬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수발을 드는 이가 식사를 하시겠느냐 물어왔지만 내키지 않아 물리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고서야 식욕이 돌아왔다. 어자피 넉넉히 챙겨온 램바스가 있으니 괜찮겠지란 안일한 생각으로 그는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확 트여진 창에서는 달빛이 따스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의 생활은 익숙했지만 또한 이토록 높은 곳에 의도적으로 지어진 곳은 처음인지라 풍경은 여전히 색달랐다. 창밖에 보이는 것은 그저 푸른 숲의 거대한 모습일 뿐. 로스로리엔에서처럼 작은 새싹이나 아름다운 꽃들은 찾아볼 수 조차 없는 삭막함이 감돌았다. 그제서야 할디르는 머크우드 라는 지명의 뜻을 가슴속에 아로새겼다. 어둠이 훝고 지나간 공간은 손댈 수 없이 공포와 절망에 짓눌려있는 것 처럼 보였다.
로스로리엔의 왕과 여왕께서는 이런 모습들을 걱정하고 계셨다. 자신들이 수호하고 있는 영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머크우드의 전례를 주시하고 있으셨고 또한 염려하고 계셨다. 언제 어디에서 악의 세력들이 마수를 뻗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두개의 세력이 연합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냐며 화친을 제의하시려 했지만 생각보다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워낙 감정의 골이 깊었던 사이였다. 아직도 불신이 두 세력 사이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것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왕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어자피 쉬이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깃을 적셔가는 것처럼 조금씩 교류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마음을 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웃어보이시던 주군의 말씀을 상기하며 할디르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로 했다. 모처럼의 근무에서 벗어난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은 생각을 편히 고치자마자 긴장을 서서히 풀어냈다. 적어도 사신의 깃발을 가져온 이에게 문전박대를 하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곳 같았다.

잠깐 긴장의 끈을 늦춘 사이 아주 미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감기려던 눈이 번쩍 뜨인 채, 방의 입구로 다가가 천천히 등을 벽으로 붙였다. 이곳에 다른 손님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곳으로 오는것이 분명했다. 식사도 거른다고 했으니 더이상 볼 일이 없을텐데.. 역시 아직까지도 불신이 자리하고 있는것인가 생각하며 할디르는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암기를 꺼내고 준비했다.
발걸음이 점점 이곳으로 다가왔다. 잠시 멈칫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행동에 먼저 달려들어야 할지 아닐지를 고민하던 것도 잠시, 거짓말처럼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실례합니다. 왕께서 내리신 것이 있어 늦은 시간임에도 이리 들렀습니다. 주무시던 중이 아니시라면 잠시 괜찮을까요?"

무엇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따로 없으셨지만 상대의 말투는 꽤나 온화하고 침착했다. 침입자로서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할디르는 겨누었던 암기를 다시 숨기고 조금 시간을 지체했다가 문을 열었다. 바로 코 앞에 서있던 엘프가 빙긋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들의 만남에 별이 빛나는군요. 스란두일의 아들 레골라스라고 합니다. 로스로리엔의 할디르. 이시지요?"

웃어보이는 모습이 햇살처럼 환했다. 자신의 이름까지 말할 줄 몰랐던 할디르가 조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소개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졸지에 빼앗겼군요. 그렇지만 다시한번 스스로 하지요. 로스로리엔의 할디르입니다. 그대가 머크우드의 왕자님이십니까."
"왕자라고 하기엔 조금 쑥스럽네요. 그냥 레골라스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괜찮으시다면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가도 좋을까요?"

선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에 들린 바구니를 슬쩍 들어보였다. 간단한 식사거리와 함께 들어있는 포도주 병을 확인하고 난 후에서야 할디르의 표정에도 미소가 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붙이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직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지만.
손님이 들어올 수 있게 슬쩍 자리를 비키자 당연하다는 듯, 그는 안쪽의 테이블로 향해 이것저것을 꺼내놓았다. 달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서 등을 지고 열중하는 모습에서 언뜻 왕의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서자 막 준비를 마친 손을 뻗어 자리를 권했다. 졸지에 마주보고 앉게 된 자리에서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따갑네요."
"실례했습니다. 남을 관찰하는것은 제 일중 하나라서.."
"아니에요. 기분이 상했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일 줄 알았다. 천천히 웃으며 왕께서 그리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계시진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는 포도주의 병을 뜯고 가져온 잔을 채웠다. 막 반쯤 차오른 잔을 건네받고 조금 고민하던 새에 조금 도톰한 입술이 다시 열렸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머크우드에서도 중히 여기는 사항입니다. 왕께서는 정무에 바쁘시어 쉬이 이런 자리를 마련하실 수 없는 터라 이곳에서는 제가 맡고 있습니다."

물론 선뜻 믿기는 어려우실테지만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보인 그가 먼저 잔을 들어 술을 넘겼다. 한 잔을 완벽하게 비우고 난 뒤에서야 다시금 잔을 채우며 건배를 청했다.

"조촐해서 마음에 안드실 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비로소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졌다. 꼿꼿하게 앉았던 할디르는 그제서야 자세가 조금 풀어짐을 느꼈다. 그가 하는대로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딧혔다. 맑은 크리스탈의 파열음이 공간을 채워나갔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골라스.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받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목을타고 넘어간 술의 온도가 비어있는 안쪽을 생각보다 후끈하게 데우고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할디르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레골라스가 웃어버렸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조금 덜 독한 술을 가져오는건데.."
"아니, 못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
"실은 어둠이 내린 숲에서는 악몽을 꾸지 않으려 독한 술을 마시지요."
"그대도 악몽을 꿉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를 지녔다고 생각하며 할디르는 그가 권해준 음식들을 천천히 들었다. 두런두런 꺼내는 이야기들은 끊길 새가 없이 시간을 가득 채웠고 어느새 자신조차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지않은 체류기간동안이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 같아 마음 한곳이 편안해졌다. 혹 그를 통해서라면 주군의 뜻을 전하기에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라는 계산 또한 숨어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머크우드의 왕자이자 왕에게 가장 근접한 이였으니까.
천천히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엘베레스의 별이 하늘 저 건너편으로 넘어갈 시간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좀처럼 지치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을 상대하는 레골라스를 보며 할디르는 조금 놀라움을 느꼈다. 아까 보였던 모습이 거짓이 아니었던 걸까. 상대의 기척을 예민하게 느끼며 레골라스는 다시 잔을 채우며 할디르를 바라보았다.

"왜 취하지 않나 궁금하십니까?"
".. 생각보다 예민한 편이네요."
"이곳에 있다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이지요. 어느 누구도 사실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어둠은 생각보다 많은것을 변화시키나 봅니다."
"변화. 변화라. 변화라기보단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해두죠. 동물이든 엘프든 인간이든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하는 신의 피조물이 아닙니까."
"심각한 곳으로 끌고 갈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심각한 곳으로 이끌었군요. 사실 전 술이 꽤 세서요."

유쾌한 모습으로 웃어보이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 할디르의 잔에 손을 뻗어 홀로 건배를 하고 잔을비운 레골라스는 장난끼 가득한 눈빛으로 할디르를 쳐다보았다.

"안 믿겨지십니까?"
"...조금은 놀랍네요."
"혹 그대가 독한술도 괜찮다 하시면 나중에 내기를 하는것도 좋겠네요. 머크우드의 좋은 술은 왕의 창고에 다 모여있으니까요."
"그 정도입니까?"
"그래봤자 아버지는 한번도, 아니 왕께는 한번도 이겨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수정해야겠군요."
"혹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줄 알고계셨습니까?"
"아니, 말술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툭 내던져진 말끝에 레골라스의 웃음이 걸렸다. 무엇이 이상한 지 알지 못한 할디르는 그저 레골라스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을 웃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골라스는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아. 사실 이제껏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처음이라서요."
"...제가 혹 말실수를 한거라면 죄송합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혀요."

도리어 웃어보이며 눈을 맞춰오는 모습엔 자격이나 지위의 면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토록 친근하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실로 오랫만이라며 신경쓰지 말라는 모습은 소탈하기까지 했다. 겨우 긴장이 풀어진 모습을 눈치챘는지 레골라스는 몇번 더 소리내어 웃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면 우리 친구하는게 어때요?"
"친구요..?"
"네. 친구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데 할디르는 어때요? 저 괜찮지 않나요?"

잠시 내밀어진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지만 특유의 자신만만함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머크우드의 엘프들은 다 이렇게 호전적인건가. 조금 고민하던 머릿속은 깔끔히 지워버린 채, 할디르는 이내 내밀어진 손을 움켜잡았다.

"다시한번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레골라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동시에 웃어버렸다. 꾹 잡혔다가 금방 비어버린 손에는 다시 잔이 들렸고 그것들은 인사하듯 부딧혔다. 맑은 소리가 들려오는 밤공기 속에서 조금의 따스함이 배어나왔다. 며칠의 여정이 심심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할디르는 입술을 축였다. 독한 술들이 조금은 달콤하게 감겨들었다. 머크우드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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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더미를 가득 품에 안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발걸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레스토르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오 에루시여. 지금 제 눈에 스친 것이 헛것이길 바랍니다. 제가 요즘 피곤하긴 했죠. 며칠 내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잖아요. 이러실 순 없어요. 남들이 보았으면 살짝 미친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고개를 흔들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에서야 에레스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혼자서 착각을 한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가짐을 가슴과 머리에 몇번이고 새기고서야 슬그머니 불길한 예감이 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이 절망했다. 
아무도 없는, 아니 지금 이시간이라면 당연하리만치 비어있어야 할 안쪽의 뜰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나뭇잎을 뜯어먹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엘크였다. 엘크!!! 엘크!!! 그래 엘크!!! 빌어먹을 어둠숲의 왕인지 뭔지 나부랭이가 타고다니던 그 엘크!!! 사슴같은거!! 뿔만 엄청 큰 그거 말이다!!! 갑자기 차오르는 분노에 손 안의 서류더미들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진정하자. 제발. 응. 에레스토르. 심호흡 하고. 아닐수도 있잖아. 응? 그렇게 한참동안 마인드컨트롤을 걸었지만 안타깝게도 효과는 보이질 않았다. 저 엘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빌어먹을 그 분께서 임라드리스에 발걸음을 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스스로를 속일수는 없었다. 한참이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던 엘프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채, 안쪽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무슨일이 있어도 한마디 해야 할 성 싶었다.

 

평소였다면 일의 경중과 순서를 따라 정리되었을 서류들은 당장 급한 것 몇 개만 추려진 채,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일주일 후에 있을 회의에 맞추자면 밤을 새도 아까울 시간들 이었지만 지금은 로드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매번 같은 시기였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며 손님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임라드리스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그 자는 매번 이렇게 뻔뻔하게 숨어들어왔다. 대체 경비병이 있는데 어떻게 눈에 띄지않은 채 이곳까지 향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조차 없었다. 물론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임라드리스에 입성을 했다면 조금은 대우 할 명분이라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매번 그래왔듯 앞으로의 일정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힘들었다. 분명 로드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을테지.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고 친우로 온 것이라 둘러대며 같은 방을 쓰고 매 시간을 붙어 있으며 로드의 신경을 쓰이게 만들테고. 거절하는 법이 없는 로드는 휴식을 취하셔야 할 시간조차 그 자에게 할애할 것이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화가 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 이었다. 좋은 때 다 놔두고 왜 매번 제일 바쁠 시기에 오는걸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데. 언젠가부터 벼르고 있던 울분이 터질듯 달아올랐다. 로드면 어떻고 엘븐 킹이면 어떨까. 나는 임라드리스의 가신이고 나의 주군을 섬기는 이인데. 가신의 충언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은 누구에게도 없을 터였다.
서가를 나서는 걸음이 침착하리만치 가라앉았다. 어자피 흥분해서 다다다 쏘아대기만 한다면 비웃음을 당하는 쪽은 이쪽일 게 뻔했다. 대체 어떻게 비꼬아야 예를 갖추는 듯 하면서도 기분이 제대로 나쁠까를 생각하며 안가로 향하고 있던 무렵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에레스토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무서운 얼굴로 어딜 가십니까? 에레스토르 경?"

서글서글한 눈매가 순하게 휘어지며 아는척을 해댔다. 가던 방향을 틀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등 뒤로 햇살이 반사되어 흩어졌다. 화려한 금색의 머리칼이 너울대는 모습만 보면 늘 에레스토르는 정신이 산란해짐을 느꼈다. 되도록이면 보고싶지 않은 얼굴인데.. 오늘은 필시 재수가 없는 날임에 틀림이 없었다.

"볼일이 있어서요. 그럼."
"그렇다고 인사도 나누지 않으시고 그리 매정하게 가십니까. 저 상처받습니다."

정말이지 상처받은 모습으로 비맞은 강아지마냥 축 쳐진 눈썹에 한숨이 나왔다. 매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은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명확했다. 자신을 막으러 온 것이다. 아마도 그 자의 명을 받았을테지. 안그래도 지끈지끈하던 머리가 더더욱 아파왔다. 지금은 이자에게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매정하게 한 적 없습니다. 글로르핀델 공. 저는 볼일이 있으니 이만 실례하지요."
"지금 그 태도조차 매정하신데요."

우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모습이 거짓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여간해선 길을 비켜주지 않을거라는 것을 깨달은 에레스토르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로드께 가야합니다. 비켜주십시오."
"로드께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잠시 해야할 일이 있으니 에레스토르 경을 보필하라구요."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그 명은 로드께서 내리신 것이 아닐겁니다."
"맞는데.."
"아 쫌!!!!! 비키라구요!!!"

미적대며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있는 글로르핀델을 보며 에레스토르는 결국 폭발했다.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사납게 노려보는 모습은 상급자에게 보일만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 짜증을 받아내는 글로르핀델 또한 이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그저 웃어보일 뿐 이었다.
 
"안 돼. 안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 빌어먹을 왕인지 뭔지 쫒아내고 말거에요."
"말조심해야지. 그래도 엘븐 킹이시다."
"알게 뭐람."
"이건 뭐 나 조차도 믿지 않을 녀석이군."
"사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재육화고 나발이고 살아 돌아왔다는 걸 대체 어떻게 믿느냔 말이야."
"난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처럼 죽었다 돌아온 것도 아니고 몇시대에 걸친 생을 견디며 왕의 자리에 오르신 분을 함부로 칭하는 것은 좀 그런데. 요즘 엘프들은 공사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 편인가? 아니면 그대가 버릇이 없는걸까."
"신경 끄시죠. 어르신. 요즘 유난히 나한테 간섭이 심한 거 알아요?"
"어르신은 아니지. 말은 바로해라 꼬마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재육화 하고부터 몸 나이는 아직 현역이란다."
"꼰대질 하는 그 성격은 어르신 맞는 것 같은데."

혀를 차며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보며 글로르핀델은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다리를 비딱하게 짚은 채, 자신을 노려보던 에레스토르는 한참을 그리도 쳐다보다가 비켜주지 않을 요량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가로 통하는 길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덕에 겨우 안도한 얼굴에는 평소처럼 미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주 잠깐 글로르핀델을 방심시킨 에레스토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길이 나지 않은 숲 근처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은색의 머리칼을 보며 글로르핀델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서렸다. 설마 길도 아닌 곳으로 향할 줄은...
머릿속으로 로드의 서재까지 가는 모든 루트를 떠올린 글로르핀델은 방향을 틀어 급히 달렸다. 에레스토르가 도착하기 전에 막아서야만 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로드의 서재 근처의 정원으로 통하는 숲이었다. 모처럼 숨가쁘게 뛰었더니 차림이 엉망이었다. 조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턱 끝까지 차고 올라오는 숨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회의를 끝마치고 바쁜것이 좀 해결되고나면 다시 몸의 단련을 시작해야겠다고 에레스토르는 마음 먹었지만 그것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한가로이 운동이나 할 시간이 있을 턱이 없지. 그럼.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에레스토르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흐트러진 의복을 정리했다. 이윽고 흰색의 돌들로 꾸며진 서재가 눈앞에 보였다. 높은 천장을 가진 서재는 해가 잘 들수 있도록 크고 넓은 창을 넣어 설계한 곳이었다. 평소같았음 활짝 열려 빛을 들일 창들이 오늘따라 드문드문 닫혀있었다.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금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니까. 로드는 지금 그렇게 놀고 계실 시간이 없다고.. 그럴 시간이 있으셨으면 잠이라도 좀 주무셨으면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어젯밤까지 자신과 함께 밤을 꼬박 새다시피 자료정리에 몰두하신 터였다. 꾸벅꾸벅 졸고있는 자신을 따스하게 쳐다보시며 어깨를 두드려 이만 눈 좀 붙이라고 억지로 떠밀어 쫒아내신 분이셨다.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며칠을 일하고 계신 로드의 사정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쳐들어온 쪽이 나쁜 거였다. 주군의 가신이기 이전에 정말이지 염치없는 자를 몰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화가난 덕에 걸음걸이가 다시금 거칠어졌다. 이쯤되면 굳이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체면이 있고 염치가 있으면 접근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 쯤은 알아채겠지. 막 입구에 당도해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려던 찰나, 누군가 뒷쪽에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앗차, 너무 여유를 부렸군. 뒤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에레스토르는 다시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기 좀 서지?"
"댁 같으면 서겠어요?"
"응."
"전 아니거든요?"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달리는 에레스토르는 빠르지는 않았지만 워낙 작은 체구덕에 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하지만 잡아야 했다. 하여튼 남의 속을 알지도 못하면서. 혀를 차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재로 향하는 문으로 도착하기 바로 직전의 거리에서 글로르핀델은 에레스토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강하게 끌어당기며 발버둥치는 몸을 제압했다. 차라리 적이였다면 기절이라도 시켰을 텐데, 품안에 들어온 이는 아쉽게도 곱게 다루어야 할 린돈의 엘프였다. 흔들리는 주먹에 강타당한 옆구리의 고통을 지그시 참으며 글로르핀델은 에레스토르가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입을 막고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에레스토르의 몸은 허공을 날듯 앞으로 향했다. 설마 물어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던 글로르핀델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꽤 당황한 모습으로 달려가는 에레스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뒤따르려 했지만 저 제멋대로인 엘프는 과감하게도 추진력을 얻는 용도로 글로르핀델의 정강이를 사용해 버린 터였다.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버린 몸에 알싸한 고통이 뒤따랐다. 어이없이 당한 모습에 스스로도 우스운 듯, 혀를 차내며 글로르핀델은 다시 몸을 일으켜 뒤를 따랐다.

 

짜증을 내며 서재에 발을 들인 에레스토르는 기어이 자신의 로드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모습을 보자마자 무심코 부르려던 목소리가 어느순간 턱하니 막혀버렸다. 갑자기 멈춰버린 발걸음에 뒤따라오던 글로르핀델 마저 아슬아슬하게 제 자리에 멈춰버렸다. 멍하니 굳어버린 에레스토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아쥐던 글로르핀델은 시선을 돌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스란두일과 눈을 맞췄다. 무릎을 베고 누워 뒤척이는 엘론드를 감싸안으며 단호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젓는 오만함은 정말이지 화가 날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승리감을 충족시켜버린 찝찝함에 글로르핀델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억지로 당겨안으며 두 엘프는 서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경 답지 않게 조용하십니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말투로 말을 걸어보지만 굳어진 표정은 풀릴줄을 몰랐다. 나참, 정말 애라니까. 들리지 않는 작은 한숨을 쉬며 글로르핀델은 성큼성큼 앞지른 채 멈춰서 시선을 맞췄다.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섥힌 짙은 회색의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렀다.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자 겨우 열린 입에서는 여전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묻었어요? 엘프 처음봐요?"
"멀쩡하네."
"그럼 충격먹어서 울고불고라도 할 줄 알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날 뭘로 보고.."

시무룩해진 표정은 그대로인데 내뱉는 말에는 가시가 콕콕 들어박혔다. 하여튼 저놈의 자존심은. 글로르핀델은 다시금 웃어보였다. 눈 앞에 있는 어린 엘프는 기분이 나쁠런지는 몰라도 자신은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엘프를 본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서인지 너무나 신선했다. 매번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라니까.
허공을 바라보던 눈동자에 점점 생기가 돌아왔다. 촛점이 잡히며 자신의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글로르핀델이 못마땅한 듯 다시 인상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무어라 내뱉고 싶어하는 입술이 오물거렸지만 이내 꾹 다물리는 것을 확인한 글로르핀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 에레스토르는 그를 무심하게 지나쳐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왜 따라와요?"
"걱정이 되서."
"진짜 오지랖 넓은거 알아요?"
"어른으로서 당연한 거야."
"내가 앤줄아나. 내 나이가 몇인지 알기나 해요?"
"나보다 적겠지 뭐."
"저 바빠요. 가서 할일이나 하시죠. 글로르핀델 공."
"오늘 그대를 도와 자료정리를 하는것이 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젠장."
"지금 욕한거야?"
"제가요? 언제요? 기억이 잘 안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에 할말을 잃은 글로르핀델이 제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찔리긴 했지만 복잡한 머릿속에 짐을 더하고 싶지 않던 에레스토르는 이제 그만 좀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글로르핀델은 정말로 서가까지 쫒아올 작정인지 다시 에레스토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진짜 괜찮아?"

한참을 걷다 들린 목소리는 조금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퉁명스럽게 뭐가요. 받아친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들리길 바랬다. 곁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머릿속의 정리는 아까 서재를 나오면서부터 끝나 있었다.

"전하가 매번 짖궂으신 것만은 아니야. 물론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알아요."
"그래?"
"걱정이 된 것 뿐이에요. 며칠 밤을 꼬박 새우신 분이세요. 자기 안위는 생각도 안하시고 가신들만 챙기시는 분인데 평소처럼 생각없이 귀찮아 보이는 행동을 했더라면 정말로 가만 있지 않았을거에요."
"그래서 조금은 안심했어?"
"네."

불쾌하지만, 조금은 짜증이 났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모습에 수긍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신들의 걱정을 만류하시며 서류를 넘기시던 손이 힘없이 소파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무릎 위로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눈을 감으신 모습이 그토록 편안해 보인 적도 처음이었다. 며칠을 볼멘 소리로 청을 올려도 그저 웃으며 자신을 혹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편안히 감은 두 눈 위로 빛이 들까 손으로 덮어주는 배려에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은 질투가 났지만 어자피 자신은 그렇게 로드를 편안하게 만들어드리지 못 할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로드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실 수 있다면 자신은 그저 수긍하는 것 밖에 방법은 없었다.

"생각보다 회복하는 게 빠른걸."
"결과에 빠르게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린애나 보이는거에요. 이유야 어찌됐든 로드께서 주무실 수 있으니 그걸로 됐어요."
"다시봤어. 에레스토르."
"제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글로르핀델 공? 저는 허락해 드린 적이 없는데요?"
"아, 미안."
"됐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어자피 서가에 와도 도움이 안될 게 뻔하니까. 로드의 명이라 하셨으니 서재에는 당분간 가지 않을테니 안심하시구요. 그럼 이만."


제멋대로 툭툭 뱉어놓은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에레스토르의 뒷모습을 보며 글로르핀델은 웃어버렸다. 뭐야 저 꼬맹이. 진짜.
겪으면 겪을수록 재미난 아이였다. 순전히 버릇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또 속깊은 면모도 보이는 것이 제법이었다. 한없이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점점 더 호기심이 생겨갔다. 잠깐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머릿속이 간단하게 정리됐다. 도움이 안되도 어쩔 수 없지. 로드의 명을 따라야하는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천천히 에레스토르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새 곁에서 일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펴는 글로르핀델의 뒤쪽으로 엘크가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지나갔다. 오늘도 평온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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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아아--

며칠사이에 구물구물거리던 날씨는 결국 시원스레 빗줄기를 쏟아 내고야 말았다.
꽤나 거세게 내리는 것을 보니 검은구름을 잔뜩 몰고온 듯 보였다.

"이번 비는 좀 오래가겠는데요?"

막 결재를 끝마친 서류들을 모아 정리하며 엘론드가 말을 건넸다.

"아아. 그렇군.."

다소 피곤한 눈으로 막 펜을 내려놓은 길 갈라드는 앞에 놓인 찻잔을 쳐다보다가 단번에 마셔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론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제 그만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도 일찍 회의가 있으시잖아요."

그 말에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뜨곤 살짝 웃어보였다.

"그러도록 할까.."

하품을 하면서도 길갈라드는 침실로 향하는 법 없이 비척비척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서 한 곳을 멍하니 응시했다.

"대왕?"

"......."

"에레이니온. 뭐하세요?"

"응?.. 아...아니야..아무것도."

"뭐에요.."

다소 당황한 듯 하던 얼굴은 다시 예의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와 조용조용히 말을 꺼낸다.

"엘론드. 오늘은 내 방으로 와서 자거라."

"네?

"비가 오잖아."

".....네."

"옷갈아입고 와. 난 먼저 들어가마."

"알겠어요."


빙글 웃어보이곤 기지개를 켜며 침실로 들어가는 길갈라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론드는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단 한줌의 햇볕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한 면을 차지한 넓은 유리창은 두꺼운 린넨 커텐으로 덮여져 있었고, 그때문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 위에는 그의 왕이 널부러져서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매번 같은 자세로 쓰러질 수가 있을까. 조금 큭큭 거리며 웃던 엘론드는 얼른 미소를 지우고 제대로 이불을 덮어올렸다.

"뭐..같이 자자고 해놓으시고.."

그의 옆으로 들어가 눕고 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갑자기 밀려오는 따스한 온기에 길갈라드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떠졌다.

"벌써왔어?"

"그럼요."

"그래그래.. 그럼 자자."

그리고는 자신의 팔속으로 엘론드를 가두어 버렸다.

"...숨막혀요."

"어쩔 수 없어. 그냥 자."

"...비올때마다 외로움 탄다는건 핑계죠?"

"그럴리가. 정말로 외로운걸..."

"아무래도 핑계같아요."

"이런이런, 핑계라니 말도 안된단다. 더 놀아주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이걸로 참아줘?"

살짝 이마에 키스하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웠는지 엘론드는 머리를 폭 숙여서 제 얼굴을 숨겼다.

곧 익숙하다는 듯 길갈라드의 허리에 작은 손이 감겨왔다.
길갈라드 역시 엘론드의 어깨를 안고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외로 강했던 천둥소리에 길갈라드의 눈이 절로 떠졌다.
아니, 강한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옷깃을 잡고 바르르 떨고있는 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더 심해지고 있는 듯 했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눈을 꼭 감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있는 엘론드를 보면서 안쓰러운 듯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던 길갈라드는 엘론드의 귀를 잡고 꼭 막아주었다.

얼마나 오래된 잠버릇일까..
사실,엘론드는 천둥치는 소리만 들으면 발작했다.
자신은 모르고 있는 일이다. 아마 엘로스는 알고 있었겠지만..
깨있을 때 듣는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이 자고있을 때 천둥소리가 들리면 이렇게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저 과거의 어느날을 혹 떠올리는 걸까...

어떻게 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을 덜어주기위해 길갈라드가 할 수 있는건 단지 귀를 막아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

아아, 아가야. 비올때 외로움을 타는건 너이지 않니..

또 한번, 작은 천둥이 울고갔다.
그에 따라 움찔거리는 작은 몸이 너무 안쓰러워서 이불에 파묻고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겼다.


소리가 잘 안들리는 모양인지, 떨림이 점차 잦아져간다.
이제는 숨소리마저 고르게 돌아왔다.

깨어나기 전까지는 조금 심했던 모양이지만, 서서히 멀어져가는 천둥소리를 미세하게 들으면서 다시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적어도 나와 있을 때는 괴로워하지 말아줘.
언제나 웃는 모습만 보여줫으면 좋겠다.
나의 아가야.


너는 자는 모습이 정말로 예쁘니까 말이야.

 

* 06년도 글 패러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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