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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2 길오로. 무제
- 2013.06.25 스란오로. 전리품 完
- 2013.06.24 레골엘. 착각.
- 2013.06.24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7
- 2013.06.19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6
- 2013.06.18 길갈오로. 다툼. 2
- 2013.06.16 스란엘. 악몽 4
- 2013.06.13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5
- 2013.06.11 스란오로. 전리품 1
- 2013.06.10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4 2
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사방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군사들과 은빛 휘장을 두른 엘프들이 서로에게 활과 칼을 겨눴다. 아무리 보아도 수적으로 엘프들에게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헛점을 노리기에는 충분했다. 죽음을 감행한 엘프들의 공격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갔다. 어자피 돌아가기 힘들 거라는 것을 오로페르는 알고 있었다. 멍청한 놀도르 상급왕에 대한 신다르 일족의 선물이라 명명하자며 그의 가신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긴것은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적진에 은밀히 침투하여 최대한의 피해를 내는 것, 그것이 오로페르의 목표이자 그를 따르는 그린우드 병사들이 명받은 최후의 임무였다. 신다르의 손으로 승패를 결정하자. 라는 저돌적인 왕의 뜻에 엘프들은 쓰러지면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고 숨이 끊어지려는 그 순간에도 적의 목숨을 노렸다. 그러나 용맹함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군대는 아니었다. 이미 절반 이상의 수가 무너졌고 비명과 열기가 가득한 이곳에 희망은 없었다. 이젠 죽음까지 한 발자국만을 남겨두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침착하게 자신의 품안으로 날아든 오크의 팔을 던져버리고 오로페르는 다시한 번 숨을 몰아쉬며 뛰어내렸다. 피에 젖은 칼날이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몇 번이고 검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터라 그린우드의 사기는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큰 목소리로 독려하며 앞을 헤쳐보지만 오로페르에게도 버거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것은 이쪽이다. 상황을 눈치챈 적들은 순식간에 무장을 한 채, 침입자들에게로 뛰어들었다. 애써 잡은 우위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오로페르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어자피 버리기로 한 목숨. 아까울것은 없었다. 다만 한놈이라도 더 쓰러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빌었을 때, 눈 앞에서 녹슬은 쇳덩이가 번뜩였다.
"주군!!!!!!!!!!!!!!!!!!!!!!"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에 반사적으로 막아선 검이 오크의 칼날을 가로막았다. 아니 막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팔에, 검에 닿은 것은 오크의 더러운 살덩이가 아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소리를 지른 가신의 몸뚱이였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날붙이에 가슴을 뚫리고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며 고통스러워하는 가신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무..사하시군요. 한마디 말을 내뱉고 다시 꾹 다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해 볼 시간도 없이 가신은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꿰뚫은 오크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천천히 무너지는 가신의 몸뚱이를 붙잡고 소리지르며 검을 휘둘렀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동작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무너져내린 엘프 둘 따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떨리는 손으로 채 감지못한 가신의 눈가를 지그시 눌러준 오로페르는 혼자 보내지 않겠다며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이를 악물고 일어나 위협당하고 있는 궁병들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갑자기 막힌 공격에 오크떼들이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 몰려들었다. 막 앞에서 달려오는 놈의 정수리에 내리찍으려고 준비하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오크의 이마 정 중앙에 꽂혔다. 그 한 발의 화살을 기점으로 뒤쪽에서 화살비가 쏟아져내렸다. 용케 엘프들은 걸러낸 채, 적들을 겨냥하는 화살에 당황한 그린우드의 전사들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지원군이 없을텐데..? 막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오로페르의 눈에 낭패의 빛이 어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푸른 문양이었다.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린돈의 군사들은 서둘러 살을 날려 적들을 위협했다. 동요하는 군사들에게 당황하지 말라며 크게 외치는 오로페르가 다시 침착하게 남은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무하리만치 짧은 시간이 지나고 작은 부대하나가 완전히 궤멸된 후에서야 그린우드의 병사들은 고개를 들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서로를 쳐다보는 그 눈빛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린돈의 군사들이 끼어드는 순간 많은 동료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탄식하며 미간을 부여잡은 오로페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어라 소리지르려는 순간, 목 뒤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희미해진 시야에 무섭도록 차가운 길 갈라드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몇번이고 쿵쿵대며 벽을 울리는 소리에 길갈라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풀어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서겠지. 움찔대며 신경을 쓰려는 부관에게 눈짓을 하자 큼큼 목소리를 더듬어가며 사후보고를 마쳤다. 간결하게 요약된 보고서 마지막에 거칠게 사인을 하고서야 길 갈라드는 부관을 내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방으로 향했다.
더러운 천으로 뒤덮인 길쭉한 자루가 방 한 구석 침대 위에 덜렁 있었다. 무언가 하고 있는지 꿈틀거리며 얇은 천이 움직이는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기척을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길갈라드는 묶여있는 자루로 다가가 끈을 풀기 시작했다. 더운 공기가 훅 뻗어나오고 군데군데 피로 얼룩졌지만 여전히 빛나는 은발이 드러났다. 정신을 차린지 꽤 오래되었는지 무어라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과하게 몸을 비틀어 자루를 빠져나오려 애쓰던 오로페르는 겨우 상반신이 바깥으로 노출되고서야 정신을 다잡고 길 갈라드를 노려보았다. 분노의 가득찬 시선을 받아내는 이 치고 무표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길갈라드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어내고 입을 막은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호의를 보이자 마자 돌아온 것은 저주의 언사를 내뱉는 과격함이었다.
"네놈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성문 정도는 열 수 있었다!!! 이게 무슨짓이냐!!"
"....당신이야 말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정잡배도 아니고."
"놀도르의 대왕을 자칭하는 그대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언사가 아닌가. 이런식으로 뒷통수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군."
"말은 바로하셔야지요. 뒷통수를 맞은건 저이지 않습니까."
자신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받아내며 길갈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이 멀쩡한 것을 보니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는 모양이군. 한참동안이나 저주의 말이 섞인 이야기를 내뱉는 오로페르덕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길갈라드는 몸부림치는 그를 도와 감싸고 있던 자루를 벗겨내었다. 궁지에 몰린 그를 보자마자 뒷목을 쳐 기절시킨 후, 남들의 이목에 띄지 않도록 수레에 던져넣고 진지로 귀환한 터였다. 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외려 처리하기에는 수월했다. 사라진 군대에 대해선 비밀 임무를 띈 채, 은밀히 이동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고 그 인솔을 그린우드의 왕께 맡기었다 하면 또 그만이었다. 어자피 살아남은 이들은 정신을 잃은 주군을 확인한 뒤 스스로 무기를 던졌다. 한 가지의 문제라면 많은 수의 군대를 잃고 홀로 서야 할 왕의 거취 뿐이었다.
겨우 빼낸 자루를 뭉쳐 근처에 던져둔 길갈라드는 손을 털며 굽어진 허리를 폈다. 귀 뒤로 넘겨준 보람도 없이 다시 흐트러진 은빛의 머리칼에 가리워 오로페르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자루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발길질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얌전했다. 다시한번 머리칼을 정리하려 뻗은 손길에 무언가 딱,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묶여 늘어진 몸이 작게 움찔하더니 그대로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에 엎어진 몸뚱이를 일으켰다. 다 터진 입술에 무언가가 물려있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왕의 목걸이. 작은 유리로 된 장식 속에서 검은 가루가 산산히 흘렀다.
"이런 젠장."
입속으로 우악스럽게 손가락을 쑤셔넣으며 목 안쪽을 긁어냈다. 소리를 높여 입구에 대기하던 부관을 불렀다. 막 헛구역질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크게 당황한 부관이 그 길로 달려가 엘론드를 데려왔다. 다급하게 응급상자를 가지고 들이닥친 엘론드가 다가왔을 때에는 이미 억지로 물을 주입하고 토해내게 하는 중 이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으니 염려말거라. 그보다 저것을 먹었다. 무엇인지 확인해보거라."
다시한번 물을 먹이고 등을 세게 두드려는 손짓이 빨라졌다. 곁에서 남은 가루를 찍어 맛을 본 엘론드의 낯색이 희게 질렸다. 가지고 온 상자를 열어 이것 저것을 섞어내던 엘론드가 흰 종이위에 해독제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정신이 든 오로페르가 이를 악물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엘론드! 그걸 물에 타라!"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오로페르의 뺨을 몇대 갈기던 길갈라드는 도무지 진정하지 않는 모습에 오로페르의 위쪽으로 올라탔다. 움직이려는 얼굴을 붙잡고 숨쉬지 못하게 코를 막은 뒤 엘론드가 받쳐준 그릇에 담긴 물을 머금고 입술을 겹쳤다. 반항하려는 몸짓은 길고도 끈질겼으나 부족한 산소에 몸이 잘게 떨려왔다. 기어코 입을 열고만 틈새로 물이 줄줄 흘렀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고서야 경련이 멈추고 몸에서 힘이 풀렸다. 마지막 모금까지 넘긴것을 확인한 길갈라드가 그제서야 우악스럽게 잡았던 턱과 코를 놓아주었다. 잔기침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 오로페르의 눈동자에 촛점이 제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길갈라드는 조용히 엘론드를 물러나게 했다. 너저분해진 얼굴과 시트에 떨어지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뜨거운 눈물이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마십시오."
"...나이어린 전사들도, 함께 그린우드에 입성한 친우들도 모두 떠나보냈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쓸데없는 짓은 네놈이 하고 있지 않느냐!!!"
"잃은 백성만 백성입니까!!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은 이들은 당신의 백성이 아닙니까!!!!"
저도 모르게 잡아올린 멱살에 숨이 막히는지 열오른 얼굴사이로 거둬지지 않는 적개심이 보였다. 여전히 냉정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한 번이라도 나를 살갑게 봐준 적이 있었던가.
잡았던 멱살을 풀고 도로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굴러다니는 천조각을 들고 다시 기침을 시작한 틈을 타 길갈라드는 재갈을 물렸다. 허튼짓을 하게 둘 순 없었다. 인간과 요정의 동맹. 그 이전에 놀도르와 신다르의 동맹. 이 자리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있었는지 그가 모를리 없을터. 묶여진 매듭을 쓰다듬으며 다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몸부림쳐도 이젠 소용없었다.
"이 지옥의 끝에서 혼자서 도망치게 제가 놔둘 것 같습니까?"
"ㅇ..ㅇㅡ.읍..읍!!!!!"
"그린우드에서 지원군이 온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돌려보냈습니다. 어린 왕자에게는 길고도 잔혹한 싸움이 아닙니까."
거짓말처럼 몸부림이 멈추었다. 크게 떠진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눈을 하는 때도 있구나. 새삼 길갈라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늘 자신을 쏘아보던 눈이었다. 한참 그렇게 오로페르를 쳐다보던 눈은 잠깐 감겼다 평소의 눈으로 돌아왔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당분간은 제 침소에 계셔야겠습니다. 대단한 분이 벌이신 소동을 수습하려면 제게도 시간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주십시오. 오로페르."
처음으로 멋대로 불린 이름에 오로페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끝에서 굴러가는 발음을 되뇌어보던 길갈라드는 슬며시 미소를 입술에 띄웠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겁니다. 그대에게도, 그대의 왕자에게도 말입니다. 협박조의 문장을 주억거리며 엉킨 은색의 머리칼을 모두 풀어낸 길갈라드는 남은 천조각을 길게 찢어 침대의 기둥과 오로페르의 손목을 연결시켰다. 몇번이고 묶인 매듭을 확인하고 오로페르가 보이지 않게 얇은 이불을 덮은 후에서야 몸을 일으켰다. 무어라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왕이 있는 곳을 잠시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방안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이의 흐느낌만이 아주 가늘게 퍼졌다.
오로페르가 길갈 명령 어기고 결사대 이끌고 나갔다가 부하들과 함께 죽을 각오였는데 길갈이 도중에 오로페르만 구해서 온거 보고 싶어요ㅠㅠㅠㅠ오로페르는 부하들 다 죽이고 자기만 살아 돌아오면 뭐하냐고 길갈한테 제발 죽게 해달라고 하면서 막 자살하려고 하니까 길갈이 자기 침소에 가둬놓고 입에 천 물려놓고 양손 구속하고 다리에 족쇄 채워서 꼼짝 못하게 해놨는데 안전을 위해서 였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속에 위험한 욕망이 이글이글...아... <- 라는 카르님 리퀘..인데....:Q.....욕망 어디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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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흐흣..조..조금만..앗, 천천히.!"
"왠일이야. 네가 이정도로 엄살을 피우고?"
숲의 요정은 젖은 머리칼을 슥 쓸어올린 뒤 옅은 청색의 튜닉을 좀더 걷어올렸다.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서슴없이 안으로 제것을 밀어넣으려 부여잡으면 꼭 꽃처럼 붉게 피가 몰렸다. 언제고 그리웠다. 임라드리스의 별. 쉬이 볼 수 없는 처지여서 그런지 더 애틋했다. 궁합이 잘 맞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먼저 시작한 건 엘로히르였다. 아주 어릴적 재미난 일이 없을까 산책나온 밤에 노골적으로 유혹당했다. 왕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손님에게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벌어진 다리와 뜨거운 키스에 거절할 수 있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 후로도 가끔. 임라드리스의 사절이나 손님으로 왔을 때마다 이렇게 밀회를 즐겼다. 그러고보면 이 관계도 꽤 오래되었군. 불현듯 떠올린 어린시절을 망상하며 레골라스는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품안에 들어오던 몸은 어느순간 단단한 청년의 몸으로 변했다. 여전히 처녀처럼 조여오는 안쪽을 느끼며 레골라스는 서서히 속력을 올렸다.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허리를 놀리면 새된 비명이 새어나왔다. 입속으로 들어간 손가락에 말랑한 혀가 감겼다. 몇번 잡아당겨 놀려주면 야한 소리가 났다. 그만하라 도리질치는 모습이 어여뻐 턱을 돌리고 키스해주었다. 곧 익숙하게 얽혀오는 혀는 언제나 달콤했다.
빼내진 손은 가슴으로 향했고 탄탄한 배를 주물거렸다. 세게쥐어 잡아당기면 안쪽이 쫀득하게 조여왔다. 파르르 떨리는 등줄기 사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과연 얼마나 많은 엘프들이 이 장면을 보았을까.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질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술궂게 박자를 놓치며 고통을 주면 힘이 들어간 어깨가 또 경직되는것이 그대로 보였다. 레골라스는 그럴때에 이를 박아 넣는 것이 가장 좋았다. 파득 울며 경련하는 먹잇감이 고통을 호소해보지만 레골라스는 날카로우 송곳니로 맨살을 자근자근 씹었다. 피가 배일 것 같이 깊숙하게 물린 상처는 마치 순흔처럼 붉었다. 하얀 살결에 새겨진 상처는 마치 주인의 표식 같이 보였다.
경련하는 손이 더듬더듬 뒤쪽을 향했다. 내밀어 겹치면 꼬옥하고 잡은 손에서는 땀이 배어났다. 서서히 한계인 것을 느낀 레골라스는 허리를 굽혀 다시한번 키스했다. 단아한 이마가 찡그려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위와 아래는 늘 다른 법이라 레골라스는 웃음을 삼킨 키스를 다시 한번 보내며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안쪽에서 뜨겁게 퍼지는 느낌에 엘로히르는 몸을 선득하니 떨었다. 한참의 여운이 지나서야 손은 묶인 앞쪽으로 향했다. 구겨진 비단천이 풀어짐과 동시에 떨어지는 정액에 둘 다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신 묶지마."
"솔직히 말해서 감도도 더 좋았어."
"그거 아니어도 잘해."
"대단한 자신감인데?"
바닥에 깔린 모포를 둘둘감고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간만의 스릴넘치는 섹스는 이대로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피곤함을 선사했다. 하지만 나가봐야 했다. 잠깐의 스릴을 즐기느라 공식적인 행사를 미룰수는 없었다. 먼저 일어나 지저분하게 구겨진 튜닉과 로브를 털어낸 레골라스는 엘로히르에게 먼저 건넸다. 아무말 없이 머리를 새로 땋기시작한 엘로히르는 곧 구겨진 옷을 몸에 걸쳤다.
"엘라단은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잠깐 멈칫거린 손놀림은 이내 다시 움직여 마지막 매듭을 감았다. 선연하게 올라오는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자 레골라스는 되려 움찔 놀랬다.
"뭐 쌍둥이니까.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임라드리스의 왕자가 이렇게 몸을 굴리고 다닌다는게 사실 대놓고 떠들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병신, 지도 즐겨놓고서 어디서 발뺌이야."
"그러니까 엘라단이 알고 있으면 셋이 하잔거지. 어때?"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엘로히르를 쳐다보던 레골라스의 얼굴 위로 그나마 잘 개켜두었던 튜닉이 내리꽂혔다. 맞바로 받아쳐 뒤집어 쓰는 꼴을 면한 레골라스가 억울한 얼굴로 엘로히르를 쳐다보았지만 막 일어나 바지를 털고있던 엘로히르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에게 말을 건넸다.
"형은 건드리지마. 그럴 일 없어. 나조차도 만족 못시키는 꼬맹이주제에 어딜. 그리고 형 건들면 너랑도 끝이야. 알았어?"
날선 반응을 보이며 제 할말만 하고 밖으로 나서는 엘로히르의 등 뒤로 레골라스는 그저 긍정의 말을 몇번 뱉어주는 것 밖엔 할수있는 것이 없었다. 하여튼 형 사랑은 지긋하다니까.
공식적인 만찬이 시작되자 머크우드의 왕 스란두일과 왕자 레골라스는 가장 상석에 앉아 놀도르들이 준비한 연회를 구경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임라드리스의 로드 엘론드와 그의 자녀 엘라단, 엘로히르, 그리고 아르웬이 나란히 앉아 함께 구경을 했다. 여전히 연회에는 심드렁한 레골라스는 슬쩍슬쩍 곁눈질로 엘로히르를 훝었다. 어쩜 저렇게 아닌척 웃고 떠들수 있을까. 마치 아까와는 딴 사람 같잖아.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마주친 엘로히르와 눈이 마주친 레골라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살짝 갸웃 하고 다시 아르웬과 이야기를 시작한 엘로히르를 다시 곁눈질로 살펴보던 레골라스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인 엘라단을 발견하고 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나가던 시종이 와인을 따라내며 엘라단의 어깨를 툭 친 모양이었다. 시종이 어쩔 줄 모르며 괜찮으시냐고 부산을 떨자 졸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침착하게 웃으며 별 일 아니라 이야기하는 엘라단의 눈동자가 살짝 고통으로 흔들렸다. 소동이 무마되고 나서도 몇번이나 손을 올려 어깨를 주물러대는 몸짓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했다. 하지만 옆에서 살짝 자신을 잡아오는 스란두일 덕에 시선은 다시 연회석으로 향했다.
연회가 끝나고 먼저 일어난 레골라스를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긋하게 목례를 올리고 자리를 벗어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레골라스는 잠시 고민을 했다.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오랫만이라 한번 쯤 더 안고 싶었다. 어떻게 연락을 해야할까 생각하며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무렵 엘로히르와 아르웬이 손을 잡고 막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좋은 기회였다.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르웬에게 작게 인사한 레골라스는 오빠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아르웬은 곱게 웃어보이며 엘로히르에게 금방 들어와서 동화책을 읽어줘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한 채 안가로 쪼르르 들어갔다. 여전히 미소를 풀지 않는 엘로히르가 동생을 배웅하고 자신에게로 돌아섰을 때, 레골라스는 뭔지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엘로히ㄹ.."
"엘로히르! 거기서 뭘 하는거야!"
"아, 형!"
살짝 찌푸린 얼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레골라스와 엘로히르를 번갈아 쳐다보던 엘라단은 레골라스에게 짧게 목례를 한 후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찾으신다. 지난번 너의 사냥 이야기를 머크우드의 왕께 들려드리고 싶으신 모양이야. 어서 가봐."
"하..하지만 레골라스님이 내게 볼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혹 급하신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따로 시간을 만들어도 되겠습니까?"
"아. 네. 괜찮습니다. 가보세요 엘로히르. 나중에 따로 찾아뵙죠."
"그럼."
곤란한 얼굴로 웃어보이던 엘로히르는 짧게 목례한 뒤 왔던 길로 뛰어들어갔다. 한참 그 곳을 바라보던 엘라단은 확 구겨진 얼굴로 레골라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멍청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엘...라단..?"
"닥쳐. 이름 부르지마."
성큼성큼 레골라스를 지나쳐 걷는 엘라단을 멍청하게 쳐다보다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고 쫒아가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윽.."
"하?"
"..왜. 네놈이 해놓고 까먹었냐? 으..."
날카로운 눈매로 꿰뚫을 것 처럼 자신을 노려보다 찌푸려진 미간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올곧게 펴졌다. 손으로 계속 잡힌 어깨를 주무르며 레골라스의 손을 떼넨 엘로히르, 아니 엘라단은 겨우 고통을 멈추곤 등을 곧게 펴 일어섰다.
"눈응 옹이구멍이라 달고다니는 걸테지. 병신."
"...엘로히르..아니 엘라단.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병신이 깨닫지 못할때 알려주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앞으로 이렇게 개인적으로 불러내는 일은 없었으면 해. 그럼 이만."
"엘라단!!!!"
"귀 안먹었어. 소리지르지마."
가야겠다는 말만을 한 채, 정작 움직이지 않는 엘라단을 쳐다보며 레골라스는 한참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엘로히르가 아니라 엘라단이...그러니까 아까 그게..
".......혹시 내가 이때껏 착각을 했던거냐?"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프린스 레골라스."
겨우 한숨을 쉬어낸 엘라단은 차가운 모습으로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며 새하얗게 질려버린 머릿속을 추스르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고보니 잠깐만, 설마 여기저기 하룻밤을 청하러 다닌다는 이야기도 다 거짓말인건가?
생각해보니 그랬다. 오늘 안았던 몸은 간만에 힘겹게 열린 듯, 뻑뻑하게 느껴졌다. 잘 풀리지 않아 툴툴대는 레골라스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엘로히르, 아니 엘라단은 한마디 툭 던졌을 뿐이었다. 네가 실력이 없어서 내 몸이 동하질 않나보다. 이랬는데.. 혹 그게 아니라면...정말 오랫만이었다면..
난생 처음으로 부끄러움에 피가 귀 끝까지 몰렸다. 엘라단의 뒷모습이 사라지고서도 한참동안이나 레골라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사과부터 해야했다. 입술을 깨물고 결심 한 듯, 엘라단이 향했던 안가로 발걸음을 떼었다. 일단 엘라단을 만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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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7
눈을 감아도 들리는 것은 철컥이는 군장들의 소리밖에 없었다. 선두에서 말을 타고 꼿꼿이 등을 세우는 자신의 왕을 주시하며 스란두일은 투구를 고쳐올렸다. 작은 소모전들을 치루고 인간의 군대와 조우하러 가는 길목이었다. 적은 수의 오르크패거리들과 몸풀기를 한 나 어린 엘프들은 작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했다는 자부심, 직접 칼을 들고 활을 쏘아올려 승리에 영향을 주었다는 뿌듯함. 그것은 전쟁을 고깝게 봐 왔던 자신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럴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조곤히 속삭이곤 했다. 병사들이 기분 좋아하는 것을 막지 말아라. 사기는 곧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하지만 너는 아니된다. 너에게는 병사들과 판세를 휘어잡을 전술과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야하는 두뇌가 필요하다. 작은 승리에 도취되지 말고 큰 흐름을 보아라. 그것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모두가 맞는 말 이었다. 하지만 스란두일은 피곤을 느꼈다. 아버지가 하는 말씀은 왕으로서 완벽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다르의 왕가가 고작 인간을 도우러 나서는 전쟁이라는 점은 정말이지 참기 힘든 수치라고 생각했다. 일루바타르의 자손인 엘프와 그 엘프중에서도 고귀하기로 치면 손에 꼽을 정도인 신다르의 힘은 소중한 것일진대 고작 인간. 그리고 빌어먹을 놀도르. 그런 것들을 위해 동맹군을 결성하고 머리맞대고 회의를 해야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 참이었다.
물론 그린우드의 왕은 오로페르. 나의 아버지이시니 그린우드의 백성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건 나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들보다 한꺼풀 더 왕가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지고나니 무엇이든 고깝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 자신의 궁에서 쉬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말도안돼.
어찌하여 그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게 고개를 젓고 마음을 비웠다. 그 아이는 그저 대용품이고 한낯 이용가치있는 '친구' 일 뿐이었다. 더이상 빠져들어선 곤란했다. 그건 맘속에 품고있는 이에게도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갑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아이가 만들어 준 것은 최고로 가볍고 편안한 것이었지만 마음의 무게가 담긴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한번 거래를 받아들인 이상, 이것을 받은 것은 정말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그저 친구로서, 연인인 척 하는 자의 의지로 내게 온 것이었으니 그 정도는 감내해야했다.
쓸데없는 생각일랑 집어치운 채, 스란두일은 그저 앞을 향했다. 저 멀리 인간들의 군대가 보였고 놀도르의 진영이 다가왔다. 엘론드가 저기에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놀도르의 군대와 인간들이 만들었다는 군대는 별 볼일 없어보였지만 오직 그는 예외였다.
그저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못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됐다. 스란두일은 미끄러지는 말고삐를 다시 거세게 움켜쥐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최전방은 이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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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막사가 세워진 엘프들의 주둔지는 밤의 날개 아래 몸을 숨겼다. 평소였다면 한밤중에까지 은은하게 울려퍼졌을 엘프들의 노래가 오늘따라 들리지 않았고, 보초병 몇명을 제외하고는 밖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군데군데 횃불이 타올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 외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는 것이 기이했다. 아마도 한낮에 치뤄진 전투가 매우 길고 지루하고 피곤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그 힘든 와중에도 밝게 불이 들어온 막사가 있었다. 꼭 신다르와 놀도르 주둔지의 정 가운데에 세워진 막사는 다른것보다 화려하고 크기가 컸다. 평소라면 그곳 입구에도 보초가 서 있어야 했지만 기밀유지와 원활한 회의를 위해 상관들 모두가 함께 주변을 물렸다. 그러했기에 그 안에서 격렬이 터져나오는 다툼의 소리는 막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대체 왜 안된다는 겁니까?! 이쪽으로 우회하여 진군해야 가장 안전하단 말입니다!!"
"네놈이 그런 소리를 지껄이니 애송이라는거다. 그렇게 가고싶다면 놀도르 군이나 끌고가도록. 나는 그렇게는 못 가."
"오로페르님!!!"
젊은 청년이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며 탁자를 내려쳤다. 다리를 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로페르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더 울컥한 청년은 홱 고개를 돌린 채, 문가까지 성큼성큼 돌아다녔다. 몇 번을 움직이고 나서야 진정된 숨소리로 돌아온 청년이 다시 탁자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몇번이고 입속에서 말을 골랐지만 쉬이 말을 섞고싶지가 않았다. 청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페르는 그저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근처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술이십니까!"
"그럼 말이나 계속 하던가."
"신다르들은 이렇게 늘상 태평합니까?"
"놀도르처럼 떽떽거리지는 않지."
"....지금 그 언사는 제 종족을 모욕하신겝니까."
"그대가 먼저 시작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태연히 잔을 따라 입에 대는 것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타오를 듯 빛났다. 팽팽한 기싸움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오로페르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채워진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끝까지 비워낸 뒤, 그는 잔을 밀어냈다. 청년의 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잔에 오로페르는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의심의 눈초리를 그대로 받아내며 잔을 채운 엘프는 놀도르의 대표로 나온 청년을 가르치는 투로 비꼬기 시작했다.
"그대가 전투를 치뤄보지 않아서 모를 수도 있겠군. 키르단은 대체 자네에게 뭘 가르쳤는지 알수가 없어. 좁은 협곡이란 말이지. 자네말대로 몸을 숨기고 대군이 이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야, 더군다나 이쪽 산맥은 험준하여 발견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 여기 까지는 맞아. 하지만 이곳은 모르도르에 근접한 산맥이다. 저 멍청한 오크떼들이 생각하는 머리는 없어도 제 집 앞마당은 훤히 꿰뚫고 있을텐데 그 좁은 계곡으로 지나갔다가 위쪽에 가파르게 늘어진 절벽을 따라 혹여나 화살이 날아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나? 더군다나 앞에서 기다린다면? 뒤를 밟아 궁지에 몬다면? 이런것 까지 생각 해 본 적이 있나?"
"........"
"그러니 신다르는 이 길로 가지 않는다. 아니 우리 그린 우드의 병사들은 더더욱 보낼 수 없어. 지형적으로 열세인 곳. 게다가 놀도르의 대표라 나온 어린 왕자의 의견에는 더더욱 찬성을 보낼 수 없단다. 알겠느냐?"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청년을 비웃은 오로페르는 큭큭 웃어보이며 청년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제 입으로 다시 가져갔다. 음주는 어른이 된 뒤에 천천히 배우려무나. 어깨를 툭툭 치고 펼쳐진 지도를 휙 접어버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듯, 오로페르는 그렇게 대강의 소지품을 챙겨 천막을 나서려 했다.
".....그럼 협곡으로 가지 않겠단 말씀이십니까."
이를 악물은 청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오로페르는 빙긋 웃으며 뒤돌아 답했다.
"아니, 협곡으로 간다. 단 네놈들과 같이 가지 않는다. 협곡은 위험하긴 하나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다. 일부를 선발로 보내 동향을 파악한 뒤, 한 길로만 가지 않는다. 본군은 그 길로 향하되, 궁수와 말을 탄 기수들을 사방에서 호위하게 할 것이다. 새벽에 미리 절벽으로 정찰병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지금으로선 가장 안전한 길이 될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 이니까."
네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란다. 애송아. 라는 명백한 도전을 알아들었는지 다시 차갑게 식었던 청년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네까짓 어린놈이 대왕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오로페르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인간과 엘프의 동맹. 절대악을 뿌리치기 위해 나온 전쟁. 명예와 동맹을 지키러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놀도르에게 적대적이었다. 하물며 이런 애송이와 동등한 위치를 겨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치욕이었다. 나이보다 조금 똑똑하긴 하지만 연륜이 달랐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정통성조차 의심받고 있는 핏줄이 아닌가. 제깟놈이 어디서 이런곳에 끼어들어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이정도로 따끔하게 혼을 내주었으면 어느정도 알아들었겠지. 아니라면 곤란해지는데. 머리를 긁적인 오로페르는 기지개를 켜며 막사문을 걷어올리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모든 행동이 멈춰버렸다.
"몰락한 머크우드의 군주라 여기저기 빌붙기가 대단하십니다."
".....애송이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머크우드의 군주 오로페르."
"네놈이 지금 신다르와 그린우드를 모욕한것이냐."
"군주께서 먼저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전 말입니다."
"이놈이..!"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청년 또한 잔뼈로 다져진 몸이었지만 그런 것 쯤은 아무런 문제되지 않았다. 세게 내리치고 맞닿은 뺨이 돌아가고 나서야 오로페르는 청년의 멱살을 틀어 쥔 채,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다시한번 그 잘난 혓바닥으로 말해보거라. 에레이니온. 네놈이 뭐라고 했는지 말이다."
"말조심하십시오. 당신이 신다르의 수장이듯 저 또한 놀도르의 수장입니다. 큭-."
"수장? 수장 좋아하시네. 그것이 개나소나 되는 것인 줄 아느냐?"
"....분명 경고를 드렸습니다."
차가운 은발과 흑발의 머릿결이 지척으로 가까워져 엉킬듯 나부꼈다. 코끝까지 멱살을 잡아 당긴 오로페르가 비틀린 입술을 열었다.
"경고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싶군요. 놀.도.르.의.수.장. 길. 갈라드. 님.?"
"그대가 원하시는대로 해드리죠."
"원하는 것? 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 주겠다고? 오 그야말로 고마운 일이로군 그래?"
"그것 말고 말입니다."
싸늘하게 웃은 검은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멱살을 잡고있는 것은 이쪽인데 어쩐지 오로페르는 등쪽에 서늘하게 맞닿은 날붙이의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내리십시오. 오로페르 전하. 지금 이순간부터 모든 무장은 해제당할 것이며 신다르는 저희 군에 재 편성될 것입니다. 혹 불만이 있으시다면 당장 이 몸뚱이에 쇠붙이를 쑤셔넣어드리지요."
".....누구냐."
"저희 부대에 빛나는 사자 한마리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군주여."
빠르게 멱살을 풀어낸 길갈라드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동안 엘론드는 밧줄로 오로페르를 제압시켰다. 기습으로 순식간에 무장해제된 오로페르가 호통을 치며 저항해왔지만 신다르의 군대는 아무도 그의 호령을 듣지 못했다. 결국 탁자에 볼썽사낲게 엎어져 결박당한 오로페르를 물끄럼히 주시하던 길 갈라드는 그의 어린 책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엘론드. 이만 물러가거라. 나는 이 자와 좀더 할 이야기가 있다."
"주군.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는 신다르의 수장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도 방법이 있으니 나를 믿어봐주지 않겠느냐."
"...."
"오늘은 푹 쉬거라. 곧 나도 들어가마."
"...존명."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진 어린 책사가 향했던 방향을 잠시 쳐다보며 미소짓던 길갈라드는 바로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엎드려 결박당한 오로페르의 뒤쪽으로 돌아와 탁자에 기대두었던 작은 검 한자루를 들어 검집에서 빼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와서 무서워지신겁니까. 전하."
".....닥쳐라."
"입은 살아계시니 좋습니다. 앞으로도 주욱 살아계시면 좋겠습니다만.."
"네놈이 신다르의 정예병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뇨. 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싸우지도 않을 겁니다. 왜 싸워야합니까? 그저 모두 거둬들이면 되는것을 말입니다."
"...이놈이.."
"시끄럽습니다. 전하. 아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전하의 말투. 꽤나 거슬립니다. 알고 계십니까?"
"네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오로페르는 묶인 줄을 끊어낼 듯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어찌나 꼼꼼하게 묶어놨는지 전혀 미동도 없는 몸을 느끼며 아주 조금 절망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길갈라드의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졌다.
"앞으로 못하는 말을 하게 되실분은 전하십니다."
손이 허리께로 다가섰다. 흠칫, 굳는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길갈라드의 입에 걸린 미소가 좀더 크게 벌어지고 환해졌다. 그대로 몸을 굽혀 상체를 밀착한 뒤 탁자에 바짝 붙은 오로페르의 귓가에 조심히 입술을 가져다 댄 뒤, 그가 속삭였다.
"말로해서는 못알아먹으시는 분이니 몸으로 친히 가르쳐드려야지요. 안그렇습니까? 아, 저는 비명대신 교성이면 좋겠습니다만, 부디 편하신 대로 내뱉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전하."
칼날이 천천히 옷 사이를 파고 들었다. 하반신을 그대로 그어내리는 느낌에 오로페르의 심장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설마. 설마..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로브의 절반이 찢겨져 나갔다. 갑작스레 찬 공기에 노출된 살갗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오로페르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벗겨진 둔부에 닿은 손길은 저도 모르게 몸을 경련시켰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 거라는 것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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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가빠왔다. 헐떡대는 소리보다 심장소리가 더 쿵쿵 울렸다. 칼을 잡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더운 바람과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전장은 그야말로 시체의 산을 이뤘다. 하나하나 맞부딧혀오는 것들을 베어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언덕을 넘어서면 지원군이 우리를 눈치채 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뒤에서 갑자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돌아본 뒤쪽에서 오크정예병들이 달려들었다. 하나하나 무너지는 익숙한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쳤다. 여유는 없었다. 자신에게 막 달려드는 오크를 하나 밀쳐내고 그 뒤에 서 있던 오크를 베어냈다. 푸직-.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소리와 느낌이 칼 끝을 통해 전달됐다. 삶의 고단한 무게. 쉽게 베어지는 목과 흐르는 피의 지옥 한 가운데에 자신이 있었다. 갑자기 모든 소음들이 멀어지며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우성치는 오크들이 돌연 방향을 돌렸다. 자신보다 먼저 언덕 위를 향해 달려갔다. 그 곳에는 나의 주군이 있었다. 은빛의 아에글로스를 당당히 들고 적을 향해 그것을 휘두르는 모습은 흡사 검무인 듯 했다. 그것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주군께서 이곳에 계시다면 나 또한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했다.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파르라니 검기를 내뿜는 아에글로스가 움직이면서 피의 분수가 쏟아졌다. 그 서슬에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오지 못했다. 얼른 그의 곁으로 가야했다. 주군의 곁으로 가서 빈틈이 생긴 곳을 방어해야 했다. 갑옷에 둘러쌓여 둔해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지척이었다.
딛은 땅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지진에 산처럼 쌓였던 시체들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서둘러 중심을 잡으려 해보았지만 몸은 지진으로 벌어진 틈새로 빨려들어갔다. 누군가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막 밟고 올라서려는 찰나, 좌우에서 뻗어진 손들이 한꺼번에 나에게로 향했다. 무기를 빼앗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무력하게 만들었다.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주군!!!! 아무리 소리높여 불러도 대왕은 돌아보지 않으셨다. 입을 막으려는 더러운 손들을 뿌리치고 계속 그에게 소리질렀다. 마악 오크를 베어든 아에글로스를 잠시 땅에 꽂은 뒤,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든 대왕의 뒤에서 칼날이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매우 슬프고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천천히 쓰러지는 주군의 뒤로 흉측한 몰골의 오크가 눈을 번뜩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서 소모전을 하고 있던 오크들이 갑자기 그곳으로 모두 달려들었다. 엘프들의 칼날에 팔이 베어지고, 다리가 베어지고, 심지어 허리 깊숙히 화살을 날려도 그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숨이 붙은 채, 고통을 삼키고 있는 주군이 보이지 않도록 둥글게 둘러싼 오크무리들은 양손에 무기를 들었다. 달려나가려 힘껏 발버둥쳐보았지만 주박이라도 걸린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다리 사이로 대왕은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믿을 수 없단 표정. 두려움이 가득 차 떨리는 동공. 이미 피를 토해 새빨갛게 물든 입술이 움직여 간신히 들리지 않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
그 순간 오크들은 들고있던 무기를 대왕에게 한꺼번에 내리꽂았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주군의 몸과 충격에 감기지 못한 눈동자가 피부로 와 닿았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 공포. 두려움. 그 모든것이 오로지 나를 향했다.
"에레이니온!!!!!!!!!!!!!!!!!!!!!!!!!!!!!!!!"
모든것을 뿌리치고 대왕께 가려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늪에 빠진 것 처럼 발을 뗼 수 없었다. 물에 잠긴 것 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행동이 느려졌다. 칼날이 주군의 몸속에 밖혔다 다시 빼내지고, 그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는 것을 그저 볼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모든것이 사라져갔다. 해변가에 쌓여 파도에 쓸려가버리는 모래들처럼. 모든것이 사라졌다. 오크들도 무너져내렸고 대왕도 투명해졌다. 희미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암흑으로 돌아왔다. 온몸을 구속하고 있던 정체 모를 것 들도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다. 감기지 못한 그의 두 눈만이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가슴속에 슬픔이 눈처럼 쌓여갔다. 조용한 어둠이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주변을 잠식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나는 기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주군께 용서를 빌어야했다. 감기지 못한 그의 눈을 감겨드려야 했다. 제가 못나서. 제가 부족해서. 주군께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는데. 제가 대신 그 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는 무릎이 아파왔다. 하지만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이만큼 움직이면 또 저만큼 두 눈동자는 멀어져만 갔다. 새까만 어둠속에 녹아들 듯, 녹아들지 않는 눈동자를 찾아 한참을 기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랑스러운 엘론드. 넌 나의 희망이란다. 엘론드. 네게 책사를 맡기기로 했다.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엘론드. 상처받지 말거라. 세간에 도는 소문들은 그저 흘려보내거라. 너는 누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린돈의 일원이자 뛰어난 임라드리스의 군주가 될 것이다. 끊이지 않고 들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린돈의 군주여. 놀도르의 대왕이자 나의 하나뿐인 주군. 길 갈라드. 제발. 제발 제 곁으로... 곁으로..
네가 죽였어.
갑자기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없이 움직이던 몸이 우뚝 멈추었다. 아니야.. 무슨..
네가 그를 죽게 만들었어.
아니야.
네가 빨리 갔었더라면 그는 잡히지 않을 수 있었어.
아니야.
소리를 질렀더라면 그가 피할 수 있었어.
아.아니야..
원래는 네가 죽었어야 해. 네가 너 대신 그를 그곳으로 보낸거야.
틀려.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변명따위 둘러대지마라. 너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니야!!!!!!
허공에 거짓말 처럼 주군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피를 토하며 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는 모습에 저절로 손이 뻗어졌다. 하지만 나의 손은 주군께 닿지 않았다. 마치 영혼인 듯, 허무하게 통과되어버린 모습에 좀더 다급하게 그를 향했다. 아무리 해도 닿지 않았다. 주군, 나의 대왕이시어. 제발. 제발..
고통에 물들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입술이 열렸다. 그 속에서 방금 전까지 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엘론드. 나의 보석. 네가 나를 죽게 만들었구나. 네가 나를 이 고통속에 밀어넣었어. 듣기조차 무서운 내용들을 내뱉는 얼굴이 나를 비난했다. 아닙니다. 주군. 에레이니온. 저는 아닙니다. 저는..당신을...당신을..
일그러진 얼굴이 고통을 호소했다. 기침할 때마다 후득 떨어지는 그것은 뜨겁고도 새빨간 피였다. 피는 마치 실제의 것인 양, 나의 손과 얼굴. 모든곳에 튀었다. 끈적하게 젖은 손을 들어올려 주군을 향해 뻗었다. 아닙니다 주군. 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제발. 주군. 제발..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 마냥 주군은 나의 손을 피했다. 놀라 다가가지 못한 손이 움찔거리며 허공에 머물자 누군가가 손을 낚아 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어느순간 나타난 오크들이 아까 주군을 해하려 할 때처럼 나를 둘러쌓고 내려다보았다. 단단했던 바닥이 진흙창으로 변했다. 오크들은 천천히 내 위로 진흙따위를 던졌다. 칼을 쓰는 것 조차 아깝다 했다. 손과 발을 밟아 고정시키고 어떤이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칼날을 눈 앞까지 내밀었다. 물이 점점 차올랐다. 몸이 서서히 잠기고 귀가 멍멍해졌다. 누군가가 몸 여기저기를 세게 강타했다. 쿨럭이면서도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귀에 누군가가 자꾸 속삭였다. 네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어서 내게로 와다오. 엘론드. 나는 네가 필요하단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정신이 계속 몽롱해졌다. 나는 죄를 지었다. 나의 주군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못나서. 제가 잘못 생각해서. 에레이니온. 제가. 제가...
숨이 서서히 쉬기 힘들어졌다. 이것이 끝인가 라는 생각에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주군의 곁으로 가면 나를 꾸짖으실까. 용서해주시지 않을까. 대왕을 따라 온 나를 그저 곁에 두시지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들이 점차 희미해졌다. 생각하는것 조차 이제는 힘겨웠다. 막혀오는 숨에 편해지려고 애썼다. 죽음이란게 이런 것일까. 대왕도 이런 기분을 느끼셨을까...
갑자기 뺨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끌어올려진 멱살에 막힌 숨을 몰아쉬고 요란스레 기침을 해댔다. 컥컥거리며 산소를 들이마시려는 폐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에 자연스럽게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누군가 퍽퍽 소리가 나도록 등을 두드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그제서야 뺨이 다시 아파왔다.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촛점을 잡은 시선은 이곳이 침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무슨 꿈을 꾼 것만 같은데.. 무슨 꿈을 꾸었더라. 슬픈...아픈...
가까스로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숨을 내쉬자 자연스럽게 등을 두드리던 손길이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누구인가 확인하려고 하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따스함이 온 몸을 감싸안았다. 끌어안겨 품 속에 갇혀버린 몸이 흠칫 하고 놀랐다.
"자네의 탓이 아니야.'
끌어안은 이의 몸이 잔잔하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선 달콤한 향내가 나는 듯 했다. 품을 벗어나려는 행동이 일순간 멈추었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제어를 잃은 채,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들이 빈틈없이 맞물린 옷깃 사이를 적셨다.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해졌다. 느릿한 박자로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나는 어쩐지 더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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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5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사방에서 악이 창궐하여 인간과 엘프의 동맹이 실현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깊숙한 곳에서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고, 전쟁의 요지가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르도르 또한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안나타르는 모르도르의 사업채 절반을 감축했고 옮길만한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에 스란두일과 엇갈렸던 적이 꼭 세 번. 오늘이 지나고 나면 네번째가 될 터였다.
막 바깥에서 돌아온 안나타르가 검은 후드를 걷어올리며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하인들을 통해 스란두일이 와 있다는 것을 들은 직후였다. 검게 쳐져있는 베일을 들어올리고 안쪽 깊숙한 곳으로 향하면 느릿하게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숫제 제 집이지. 코웃음을 치며 안나타르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어룽대는 빛이 가까워지면서 그가 있는 곳을 짐작케했다. 만면에 웃음을 띈 안나타르의 얼굴이 푸른 눈의 엘프와 조우했다.
"오늘도 일찍 가신 줄 알았습니다."
"헛걸음을 한 것이 벌써 세번째이지 않느냐."
"그렇게까지 되었습니까."
밉상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안나타르는 후드를 바닥에 벗어둔 채 스란두일에게 달려가 안겼다. 가볍게 뒤로 미끌어진 스란두일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좀더 깊숙히 밀어넣으며 안나타르의 무게를 감내했다. '그 날' 이후 안나타르는 알듯 말듯 어리광이 조금 늘었고 스란두일 역시 조금은 편하게 안나타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진실이라 매듭진 관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스란두일과 안나타르는 진실을 거짓으로 연기하며 관계를 지속해왔다. 그것은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주기도 했고 또한 아무런 생각없이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꽤 괜찮은 방법 같았다.
품에안긴 안나타르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스란두일은 가볍게 그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 근처에 와닿았다. 며칠 고생을 했는지 못본새에 조금 까칠해진 것 같은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손끝으로 조물조물 만져대자 안나타르가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그린우드의 군대도 출정을 한다 들었습니다."
"과연 모르도르의 꽃은 모르는 정보가 없군."
"예하도 가십니까?"
"왜, 걱정이 되느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주 조금 시무룩해진 모습에 스란두일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품에 안은 이를 똑바로 곁에 앉혀둔 채 눈을 마주쳤다. 붉은색 동공 안에 들어오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이 흡족해졌다. 다정한 이다. 생각보다. 남들이 뭐라고 여기든 모르도르의 꽃은 가시가 많을 뿐, 다정한 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나도 선봉에 설 것이다."
"그렇습니까.."
"몇 년만 기다리거라.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궐하는 악의 세력은 은밀하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들었습니다. 쉬운 상대는 아닐겁니다."
"그러나 인간과 엘프가 동맹을 맺는 정도의 연합이다. 이쪽도 만만치는 않을테지."
"아무렴요. 예하가 계시는 곳인데 쉬이 패하진 않겠지요."
그제서야 엶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스란두일을 바라보는 안나타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물끄럼히 바라보며 그저 웃던 안나타르는 잠시만 계시라며 홀연히 일어나 좀 더 안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온기에 스란두일은 안나타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도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의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소문은 흉흉해졌고 노랫소리가 들리던 왕궁 안에는 날카로운 쇠붙이들의 맞부딧히는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이곳을 자주 찾게 될는지도 몰랐다. 많은 아픔이 있을거라 했다. 겪어보지 않은 무서운 전쟁의 분위기는 스란두일을 짓눌러왔다. 막연한 공포. 두려움. 짓누르는 슬픔. 모든것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그 기분 더러움에 왕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했다. 겉으로 의연해야 하는 일국의 왕자. 정사에 바빠 눈코뜰 새 없이 일에 매달리는 군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왕성보다는 이곳이 나았다. 거짓. 이라는 진실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이가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이 곳, 모르도르였다.
낑낑대며 안나타르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다소 큰 상자였다. 다시 자세를 바로한 채, 무엇인지 쳐다보던 스란두일의 발 밑에 그것은 놓아졌다. 적지않은 양의 쇠붙이가 걸쳐져 있었다. 웃는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안나타르의 얼굴과 상자를 번갈아 보며 스란두일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예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
"저 멀리 드워프들의 왕국에서만 나오는 귀한 갑옷이라고 하더군요. 그 어떤 날붙이로 뚫리지 않는 미스릴을 사용했다고 하여 받아둔 것입니다. 마침 예하가 생각이 나 따로 빼 두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광물이군. 미스릴이라.."
"나머지 것들은 혹여 필요하실 지 몰라 제작해 놓은 갑주입니다. 물론.. 신다르군의 갑옷이 있으시겠지만. 혹시 몰라서..."
수줍어하는 시선이 이리저리 튀었다. 차마 마주치지 못한 채, 선물이라며 건네는 것들에 스란두일의 기분이 유쾌해졌다. 조심히 일어나 안나타르의 손을 잡고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에 다가가 짧게 입맞췄다. 살포시 감았던 눈이 떠지며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까.. 안나타르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혹 입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한번쯤은...입은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어려울 것은 없지."
흔쾌히 허락하는 스란두일의 로브를 안나타르가 벗겨냈다. 안의 간단한 옷만들 입은 채, 미스릴을 입히고 갑주를 하나하나 채워주었다. 다리와 팔. 어깨와 손목구를 채운 뒤 가장 마지막에 가슴에 대는 갑주를 들어올렸다. 겉에는 신다르의 문양이 새겨져 화려하게 빛났다. 그러나 진실은 속 안에 있었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던 안나타르가 스란두일에게 입히기 직전 그것을 보여주었다. 갑주 안쪽 한 구석에는 직접 새긴 듯한 문양이 보였다. 안나타르의 문양이었다.
"..새길까 말까 망설였는데...안보이는 곳이기에.."
"이왕이면 크게 새기면 좋았을걸."
"..예하."
"이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갑주를 받아들고 아로새긴 문양을 손끝으로 쓸었다. 안나타르의 이름을 딴 문양이 그대로 마음 속에도 새겨지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안나타르에게 시선을 옮기자 슬쩍 붉어진 얼굴이 미세하게 끄덕였다.
"네가 족하면 되었다. 이것까지 입혀주어야지."
살포시 받아든 채 다가오는 안나타르의 손길에 스란두일은 몸을 내맡겼다. 바짝 조여오는 차가운 금속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오싹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완벽하게 무장한 스란두일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조심히 품으로 안겨왔다. 스란두일이 그토록 지겨워하던 차가운 금속과 날붙이들이 덜컹이며 안나타르를 보듬었다. 한참 동안이나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전쟁은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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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오로. 전리품 1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그린우드에도 며칠에 한번쯤은 해가 드는 날이 있었다. 그런날은 나무밑으로 숨어들어 몸을 움츠리던 새들도 밖으로 나와 노래를 했고 제법 살랑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초여름의 해는 높게 떠올라 모처럼의 맑은 하늘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쉬이 오지 않는 기회를 빌어 영지에 웅크려있던 엘프들은 삼삼오오 짝을지어 밖으로 향해 고즈넉한 숲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먹고 마시며 빛을 즐겼다. 그들과 쉬이 어울리는 법은 없었지만 아주 가끔씩 남들이 접근할 수 없는 숲속 깊은 곳, 평평한 풀밭에는 그린우드의 왕과 그의 어린 왕자가 손을잡고 산책을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요?"
"아니아니, 이렇게 이렇게 하는거라니까."
"아다, 조금만 천천히.."
"옳지. 그래. 그렇게."
어린 왕자는 갓 20살이 될법한 외모로 아비의 곁에 무릎꿇어 조잘대었다. 왕관도 밀쳐놓은 채, 왕이 만들고 있는 것은 짐승들을 잡기위한 덫이었다. 가볍게 끈을 묶어 신다르 특유의 매듭을 지어놓으면 혹 지나가던 작은 짐승들이 걸릴지도 몰랐다. 아직 활 잡기에 익숙치 않은 어린 왕자를 위해 아비가 만드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몇번의 서투른 손짓으로 만들어진 매듭은 빈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왕은 알고 있었다. 절대 끊어지지 않는 엘프의 기술로 만들어진 줄과 신다르의 매듭방식으로 이어진 덫은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튼튼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듯하고 굳건하게 매듭진 아비의 덫과 자신의 덫을 비교하던 왕자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다시 새 줄을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혼자서 해볼래요."
"가능하겠느냐?"
"...무슨 왕자가 이런것도 혼자 못한답니까."
"그럼 혼자 해보거라."
비죽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채, 왕은 낑낑대며 매듭을 엮는 왕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어릴적의 자신을 보는것만 같았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느낌이셨을까. 잘 되지 않는지 또 작게 성질을 내고 이제는 스스로 줄을 잡아 빼내어 다시금 엮는 왕자를 보며 왕은 어릴적의 기억을 조금씩 상기시켰다. 그때에는 나도 이렇게 혼자 끙끙대며 골몰했었지. 아마도 완성시킨 뒤 아버지에게 들고가서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지 꼭 안아주셨는지...어쩐지 그것만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말이다.
"아다, 잠깐 두손을 빌려주세요."
왕자가 말을 건네고서야 왕은 정신을 차린뒤 왕자를 바라보았다. 제법 모양이 잡힌 매듭을 들고 싱글벙글 거리는 왕자의 말대로 왕은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히죽, 싱그러운 웃음이 양 뺨을 타고 번졌다. 삽시간에 두 손목을 옭아맨 매듭이 바짝 조여졌고 불시의 기습에 놀란 왕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벌렁 넘어가버렸다.
"어이쿠-"
"헤헤, 잡았다."
의기양양하게 왕의 가슴팍에 앉아 손목을 구속한 매듭의 끝을 틀어쥔 채 웃어보이는 왕자를 보며 왕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알싸한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잡히고 말았구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비쭉 내밀어보이자 왕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봐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열었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왕자전하.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요."
"그렇게 말하셔도 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까딱이며 고개를 모로 두번 흔든 왕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옭아맨 왕의 손목을 머리 위로 낑낑 올렸다. 졸지에 가까워진 얼굴이 마주보았다. 엄한 표정으로 아비를 쳐다보다 빙긋 웃은 왕자는 이내 익숙하다는 듯, 조그마한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 아비의 입술 위에 겹쳤다. 꾸욱 누른 살덩이의 감촉이 촉촉하게 닿았다. 기습을 당한 왕은 멍하니 웃음담긴 얼굴을 쳐다보다 삽시간에 묶인 팔을 벌려 왕자를 껴안고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버렸다. 꺄앗! 아직은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가 웃음으로 변모했다. 높고 낮은 웃음소리가 번갈아 풀밭을 울리며 빛 사이를 오갔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따스하고 선명한 유년시절의 기억이었다.
"기억 나십니까. 아버지."
"....스란두일."
이미 청년이 되어버린 왕자는 꼭 어릴적과 같은 매듭으로 아비를 옭아매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포근하고 따스한 풀밭이 아닌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란 것이고, 반쯤 찢겨져버린 옷매무새였다. 다정하고 사랑이 담긴 눈빛은 왕자에게만 존재했고 그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서 뿜어져나오는 것은 포식자를 바라보는 두려움 가득한 먹잇감의 눈빛이었다. 훌쩍 커버린 왕자는 손목을 구속한 끈을 틀어쥔 채, 왕의 머리위로 올려 거세게 눌렀다. 느껴지는 고통에 작게 신음소리가 퍼지자 왕자의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스란두일..정신차려라. 나는.."
"당신은 위대한 머크우드의 왕이십니다. 저는 머크우드의 하나뿐인 왕자이지요. 그리고."
목울대가 넘어갔다. 긴장한 심장이 드러나버린 왼쪽 가슴팍을 거세게 울렸다. 유심히 아비의 모든 것을 살펴보던 스란두일이 마치 어릴적 그 때 처럼 오로페르에게 향했다. 코 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오로페르의 고개가 살짝 모로 틀렸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스란두일은 나머지 손으로 턱을 고정해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지금은 당신을 차지한 포획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입술이 맞닿았다. 어릴적의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오로페르는 거부하지 못했다. 차가운 냉기속에 숨어있는 미세한 떨림은 마치 어릴적 자신에게 부비던 온기와도 같았기에, 왕은 차마 왕자를 밀쳐낼 수 없었다.
스란오로. 전리품2 로 이어집니다 => http://secretgarden1.tistory.com/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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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4
"너무 적습니다."
대뜸 와서 한다는 말이 저것이다. 요망한 것이 또 무슨 투정을 속살거릴까 고대하던 스란두일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무릎위에 매달려있는 이를 밀어낼 재간도 없었다. 오늘은 애교를 부리기로 작정을 했나보다며 짧게 혀를 찬 스란두일이 까맣게 흩어진 머리칼을 손 끝으로 훝어내렸다.
"무엇이 말이냐."
"보석 말입니다. 너무 적습니다. 예하."
"충분한 것 같은데."
"제게 주실 것이 그런것 들 뿐이라면 이제부터 예하를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뜯어내기로 작정을 하였구나."
"그런 셈이지요."
돌직구를 날리면 그대로 받아쳐온다. 그런 점이 안나타르를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꾸밈없는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부족하면 부족하다. 마음에들지 않으면 내던져버리는 그 성미가 묘하게 끌리는 게 신기했다. 곱게 웃어보이며 적다 투정하는 보석들은 왕실에 납품되는 것들 중 최상의 것들로 가져온 것이었다. 절대 적을리가 없을 터인데 이리 교태를 부리는 것을 보면 무언가 따로 원하는 바가 있을 법 했다. 짐짓 모른 체, 곁의 상자를 뒤적여 이것 저것을 그의 몸에 대어본다. 붉은색의 루비, 연녹색의 비취. 하나같이 안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입이 비쭉 나와있으면서도 또 스란두일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대어주는 보석이 가장 돋보이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바꾸어주는 것을 보며 또 보람을 느꼈다. 하여간 어찌 할 수 없는 여우였다.
"이리 잘 어울리는데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모르겠구나."
"예하의 연심이 들지 않은 보석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연심이라. 왜 그리 집착하는가?"
"연모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데에 집착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전히 무릎에 매달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연모라. 어려운 것을 말하는 입술을 보며 욕정만을 느끼는 자신이 순간 낯부끄러워졌다. 연모라. 그 어려운 것을 네가 원하면 어찌하느냐. 나는 너를 그리 보고있지 않건만.
"나를 연모하느냐?"
"예하는 어떠십니까. 저를 연모하십니까?"
"나는 너를 연모하지 않는다."
"사실 저도 예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근데 어찌 자꾸 연심을 찾느냐?"
"그러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빙글 웃어보이며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선 안나타르는 손을 뻗어 스란두일의 얼굴을 감싼 채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라 올려보던 눈동자는 시선에 얽혀들었다. 자신을 가둔 붉은빛의 눈동자는 한껏 달콤하고 은밀해보였다. 고운 눈매가 접히면 그 역시 일그러졌다. 점차 다가오는 얼굴에 피하지 않은 채 입술을 벌리면 꼭 그 틈새로 맞는 살덩이가 들어와 안쪽을 휘저어간다. 손을 올려 다가온 머리칼을 부여잡고 세게 누르면 그역시 응수하며 안쪽으로 향해 입안을 내어준다. 한참이고 떨어질 줄 몰랐던 입술이 불현듯 떨어졌다. 촉촉히 젖은 입술이 움직여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밖에서는 모르도르에 예하의 연인을 숨겨두었다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신경쓰이는것이냐."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만?"
"혹 예하께서 불편하시다면 그런 것 처럼 행동해드릴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그러십니까...?"
"..안나타르?"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픽 웃어보이며 가운이 떨어져있는 곳 까지 걸어가 가볍게 걸친 안나타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걸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스란두일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것을 확인 한 뒤 또 한번 웃어보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경쓰이십니까?"
"그러고보면 너는 한번도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보석도, 진귀한 것들도 모두 내가 알아서 준비한 거였지."
"그랬습니까?"
"들은 바로는 그랬다. 모르도르의 꽃은 제 몸을 내어준 대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원한다 했다. 하지만 너는 어찌해서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것이냐?"
싸늘해진 말투. 의심의 눈동자. 안나타르는 미소를 띈 채, 웃었다. 흔한 표정이었다. 상대를 의심할 때의 표정. 어린 왕자여. 아직 본심을 숨기는 방법도 배우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어찌 왕자라 할까. 제왕학을 배운 왕가의 일원이라 할까.
딱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안나타르는 여몄던 가운을 다시 풀어헤치고 스란두일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피하지는 않지만 경직된 근육이 보여 더더욱 유쾌해졌다. 그래봤자 그대는 나의 맛 좋은 먹잇감 중 하나야. 좀더 몸부림치고 불안해해라.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 이니까.
"저는 처음부터 예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하의 연심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나도 몇번이고 말했다."
"그럼 거짓을 주십시오."
"거짓?"
"예하가 절 연모하고 있다는 거짓 말입니다."
"...그것은 네게 득될것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보석을 주마. 물질이야말로 네게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더냐."
"물질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겐 필요없는 것이지요. 모르도르의 이 거대한 곳. 제가 재물따위를 원했다면 진즉에 그곳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거짓이라도 예하의 연심을 얻고싶습니다. 그것조차 주실수 없다면. 이제 저를 찾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슬핏 웃어보이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허벅지 위로 엎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왕자야 네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뿌리칠 수 있을까. 저 먼곳. 린돈에 위치한 너의 그 마음속 정인에게 달려갈 용기는 없으면서도 나를 외면할 수 있을까. 아니, 넌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그런' 자니까.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꽤 무덤덤해진 손이 안나타르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천천히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안나타르의 눈이 감기며 미소가 감돌았다. 몇번이고 말을 골라 낸 스란두일의 입술이 열렸다. 그로서는 꽤나 무거운 말 이었다.
"...나는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을 평생 줄 수 없다."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지고 싶으냐."
"예하. 기억 나십니까? 제 방으로 오셔서 절 처음 안으시던 밤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지."
"처음엔 우스웠습니다. 고작 왕자의 지위를 가지고 저를 취하려 하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예하의 생각보다 저는 이곳에서 오랜 기간을 버텨왔습니다. 어지간한 상대는 돌려보내고 알아서 처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저 가만히 예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안나타르.."
"예하께서 제게 연심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마 저는 이리하고도 예하가 절 다시 찾아주시면 또 바보처럼 웃어보이겠지요. 그런 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욕심이란 걸 좀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란 걸 아는데. 그것이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
"재물. 보석. 필요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가져보고싶은 것이 있는데 장사꾼이라면 욕심내보는 것은 당연한게 아닙니까?"
"안나타르...."
"한번의 욕심입니다. 예하께서 제게 혹여라도 작은 연정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번쯤. 그 마음이 거짓임을 알고있어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장사란 그런것이니까요. 작은 것에 기대를 거는 법이니까요."
"..내가 그래서 그것을 줄 것 같으냐."
진득하게 내뱉어진 말에 안나타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를 환히 지어보였다. 눈빛이 떨렸다. 벗어날 수 없다.
"네, 한번 이라면. 예하께선 주실 것 같았습니다."
머리칼을 쓸던 손이 멈추었다. 녹아내릴듯 예쁘게 웃음짓는 안나타르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몸을 겹치고 살을 섞던 이였다. 닳고 닳은 창녀라고 생각했다. 모르도르의 꽃은 피어난 것이 꽤나 아름답고 유혹적이라 그것을 꺾으려 달려드는 이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밀쳐낼 수 없었다.
"....거짓이다. 내가 말하는 모든것들은."
안나타르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꿈꾸는 듯한 모습으로 눈빛이 바뀌었다. 다시금 손을 올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주 잔잔하게 몸이 떨려오는것이 느껴졌다.
"...사랑한다. 안나타르."
차오르는 눈물이 금세 무릎위로 뚝뚝 떨어져내렸다. 채 감지 못한 시선이 스란두일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 이것은 거짓인데...
머리보다 손이 빨랐다. 고개가 숙여졌다. 울고있는 이의 눈가에 입술이 닿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또다른 손이 다가와 그를 옥죄었다. 뜨거운 키스를 받아내고 있는 눈가에선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스란두일은 알 수 없었다. 중요한것은 안나타르가 "자신" 때문에 눈물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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