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산책은 어쩐일인지 계속 이어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되는 그 시간 즈음 엘은 슬그머니 정원에 나타나 미소짓곤 했다. 홀린듯 나서긴 했지만 이토록 매일같이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터라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지루하기만 한 궁에서의 낮생활보다 오히려 밤의 은밀한 산책이 좀 더 기다려졌다. 일국의 왕자가 남들의 이목을 피해 밤이슬을 밟는 것은 어찌보면 구설수에 오를 법한 행동이었지만 어찌됬든 무료하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란두일은 가볍게 웃어넘기며 매일 밤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의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옛 시가에서부터 현재의 정세까지. 아무리봐도 일개 시종으로는 보이지 않는 견문과 지식의 깊이에 스란두일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가벼이 생각하고 내던진 말들이 심도있게 돌아오면 이쪽도 긴장하기 마련이라, 골똘히 생각하며 문답을 나누었다. 막 던져진 질문에 마무리 된 답을 내놓은 스란두일은 혀를 내두르며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네겐 당해낼 수가 없구나. 조금 쉬자꾸나."
"제가 너무 깊이 파고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내 주관과 다르게 생각하는 이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건 귀한 경험이지. 내 많은 것을 배웠다. 네 지식의 깊이가 이토록 깊을 줄 생각하지 못하고 무리수를 던졌던 것이 오히려 나를 수세에 몰리게 했구나."
"그저 송구합니다."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칭찬을 하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단정했다. 과하게 희노애락을 표현치 않는 단아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토록 마음이 맞고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는 좀체 마주치기 어려운 법이라 조금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낮까지. 아니 며칠 밤낮을 공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의 나라가 아니었다. 힘과 권력을 휘두르기보다 조용히 위엄을 지키고 체통을 중시해야하는 일국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늘 상기해야 했다. 굳이 욕심을 낸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란두일은 억지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권력이나 상하관계로 얽매이지 않은 관계. 어찌보면 친우親友 라 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천하를 가진 왕자에게는 함부로 가질 수 없는 것. 막연히 생각하던 그 자리에 어느새 타국의 청년이 스며든 것을 느끼며 스란두일은 작은 한숨을 내 쉬었다. 자꾸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다른 것들로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숲으로 향하는 다리 근처까지 당도했다. 이곳을 지나면 꽤 오랜 시간을 돌아와야 했다. 그제서야 스란두일은 매번 자신의 의지대로 정원을 돌아다녔음을 깨달았다. 타국의 사신이야 늦잠을 자든 말든 상관할 자가 아무도 없었지만 엘은 아닐텐데. 아직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지위에 있는지도 묻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그 문제를 깨달은 자신을 책망하며 스란두일은 급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멈춘 행동에 조금 놀란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우습게도 온갖 상념이 사라지고 엘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말문이 막혀버린 왕자를 대신해 입술을 연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이었다.

"혹 어딘가 미령하십니까?"
"그보다 달이 이미 기울기 시작했는데 괜찮겠느냐?"

그제서야 스란두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엘의 얼굴에 슬그머니 웃음이 돌았다.

"제 사정을 염두에 두고 계신줄은 몰랐습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지금까지의 온 거리와 앞으로 가야할 거리를 가늠하던 입술이 이내 호선을 그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숲으로 가는 대신 연못은 어떻습니까. 달이 밝아 그 곳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역시 곤란한게로구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꾸중을 하실분이 계십니다."
"그것을 곤란하다고 하는것이다."
"그렇습니까."

몰랏다는 듯 웃어보였지만 이내 제가 아는곳으로 안내를 하겠다는 엘의 행동에 덩달아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은 너무 오래 붙잡아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스란두일은 엘에게 먼저 방향을 잡으라 자리를 비켜주었다.
곧게 뻗은 머리칼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달빛을 받아 필시 흑단처럼 빛나는 모양새는 요요하게 빛났다. 검은색은 귀족의 색이라고도 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절제된 미학과 고귀함이 엘의 수려한 얼굴과 합쳐져 도도한 멋을 풍겼다. 본국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새까만 머릿결에 마음을 빼앗긴 스란두일은 어느새 연못에 다다른 줄도 모르고 한참 그의 뒤를 따랐다.

"어떠십니까. 진한 녹음도 좋지만 때론 이리 정취가 있는 곳도 괜찮지 않습니까?"

빙글 돌며 소개하는 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이 향한 곳은 정말이지 그림같은 곳이었다. 정갈하게 파인 작지않은 연못에 고기들이 물살을 만들며 노닐고 있었다. 달빛이 온전히 내려앉은 못 한 가운데에는 아담한 전각이 있었다. 작기만 한 궁인줄 알고 있었는데 조금씩 안을 헤집으면 필시 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나온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는 듯 스란두일이 엘을 바라보자 여느때처럼 그는 해사하게 웃었다.

"왕께서 그 자리에 오르시고 가장 먼저 손보신 곳입니다. 때때로 머리가 어지러우실 때 산책을 나오신다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이곳은 왕의 소유가 아니냐. 이런곳에 마음대로 출입을 해도 되는것이냐."
"지금은 괜찮습니다. 밤에는 그 한 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 한 분도 지금은 오지 못하시지요."
"너의 안위를 묻는 것이다."
"저는 괜찮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예상외로 딱 잘라 끊는 화법에 스란두일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일까. 이 야심한 시각에 왕의 정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자란 말인가. 그리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더냐. 너는 대체..
잠깐 스치운 생각은 엘이 발걸음을 옮기자 다시 사르르 흩어졌다. 천천히 뒤를 좆으며 지나는 풍경에 시선을 주며 마음을 가다듬자 이내 한가로움과 평안이 밀려왔다. 높은 자면 어떻고 낮은 자면 어떠할까. 네가 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진데. 혼자 상념하고 혼자 깨닫고 혼자 부끄러워 하는것이 어느새 버릇이 된 것 같다고 느끼며 스란두일은 다시 시선을 바로했다. 여전히 곧게 뻗은 머리칼이 눈 앞에서 흔들렸다.
연못의 둘레를 따라 정자로 향하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끊임없이 움직인 터라 조금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계단을 밟았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쓸 수 있도록 정갈하게 펴놓은 자리는 아마도 왕의 자리이겠지. 새삼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스란두일은 내색하지 않고 엘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올랐다. 맞은 편이 아닌 자신의 곁에 자리한 이는 적어도 자리에 없는 왕을 배려하는 듯 보였다. 상석이 비어진 기묘한 위치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피곤하십니까."
"괜찮다. 너는 어떠하냐."
"오랫만에 밖에 나와 맑은 공기를 접하니 기분이 상쾌하여 좋습니다."
"원래 밖에 나오질 못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일이 있어 나오지 못했을 뿐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슬쩍 내리깔았다 뜨인 눈에 맑은 생기가 돌았다. 쳐다보던 모습 하나하나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마치 잘 그려진 초상화 속 미인이 아닌가. 하나하나 생김새를 관찰하던 스란두일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이곳의 관습은 우리와 달라 눈이 즐겁구나. 단정하게 내려빗은 머리가 네게는 꽤 잘 어울린다."
"전하께서도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머리를 함부로 풀지 않는다. 머리를 풀 때가 정해져 있는데 아비의 죽음. 어미의 죽음. 그리고 정혼하는 밤. 이 세 번 뿐이란다."

조곤조곤 설명을 하는 스란두일의 모습을 엘은 그제서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시선을 맞추었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관찰을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스란두일은 조금 긴장했다. 자연스럽게 경직된 입가의 근육을 눈치챘는지 이내 시선을 돌린 엘은 답지않게 조금 손장난을 치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비가 되실분이 조금은 부럽습니다. 귀한 모습을 보시게 되는 것 아닙니까."
"보고싶으냐?"
"농입니다. 그저 이곳에서는 혼인을 하고도 머리를 완전히 틀어올리지는 않는 터라 흥미가 일었습니다.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어릴때부터 하고 다녀서 그런지 그다지 부담이 되진 않는구나. 궁금하냐?"
"조금은요."

작게 웃어보이고 시선을 돌린 옆모습에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렸다. 꽤나 괜찮은 그림일 듯 싶었다. 새까만 머리칼을 곱게 틀어올린 채, 은색의 관으로 고정시키고 술을 늘어뜨린다면 필시 이국의 왕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조금 흥미가 일어 골똘히 생각하던 왕자는 빙긋 웃으며 엘을 쳐다보았다.

"어떠하냐. 한번 해보겠느냐? 내게 여분의 장신구가 있을 터인데."
"예?"
"나는 어자피 머리를 풀지 못하니 대신 네가 머리를 틀어보면 어떻겠느냐."

즉답 대신 웃기만 하는 엘을 앞에둔 채, 스란두일은 홀로 즐거워졌다. 가져온 것들 중에 공들여 세공한 은관이 있을 터였다. 흥미는 욕구로 이어졌고 기대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마음은 그득히 채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며 엘은 제멋대로의 결정에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도 보고싶으십니까."
"기대가 되서 그런다."
"...그저 틀어올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럼 내일 밤은 어떠하냐."
"내일 말입니까."
"내가 머무르는 전각으로 오너라. 혹여 남의 눈에 띄면 네가 곤란하지 않겠느냐."

혹 안달내는 것 처럼 보일까 진중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충분히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가늠해보던 입술에서 겨우 승낙의 말이 나왔다. 조금 늦게 찾아뵈도 괜찮겠느냔 말에 성급히 고개를 끄덕이던 스란두일은 자신의 행동에 우스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필시 소꿉놀이 하는 계집아이같은 모양새가 아니던가. 괜시리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것을 지켜보던 엘이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무얼 그리 안달하시냐며 늦지 않게 가겠다고 답하는 모습에 멋적은 미소를 짓던 스란두일은 어쩐지 민망한 마음에 멀찍이 밖으로 시선을 던져 놓았다.
참으로 편안한 시간들이 흘렀다. 일찍 들여보내겠다는 아까의 다짐은 눈 녹듯 사라졌고 둘은 또 오래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로 나흘 째의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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