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만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방금 넘겼던 포도주의 뒤끝이 사라지기도 전에 친우라는 자는 저리도 무심한 이야기를 뱉어냈다. 픽 웃으며 늘어진 팔을 들어올린 채,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곤조곤히 입을 열었다. 이 친구야. 난 아직 멀쩡해.
당치도 않는 말을 들었다는 듯, 엘론드의 입꼬리가 올라왔다. 어느새 또 가득 채워진 술이 잔 위에 넘실거렸다. 이 친구 오늘 아주 날 만도스의 전당으로 보내버릴 작정이군.
모른 척, 손을 가져다 대면 저도 모르게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여댔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크게 웃었다. 스스로 주고도 못 미더워 하면 내가 어찌 마실까. 설핏설핏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그러다 어깨를 부여잡는 손길에 고개가 들렸다.
"방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군. 스란두일."
"그럴까? 하긴 자네도 피곤할 때가 되었군."
비척비척 일어서 부축도 마다한 채, 발을 디뎠다. 어자피 조금만 가면 도착하는 곳이 이 몸의 목적지였다. 바깥으로 향하지 않는 발걸음에 엘론드는 선뜻 옆으로 다가왔지만 힘을 잃은 몸뚱이가 좀 더 빨랐다.
"왕이 누워 잠을 청한 곳은 예로부터 귀한 기운이 서린다는 소문이 있지."
"그 귀한 영광을 얻게되니 소신, 기쁨이 커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전하."
"그렇겠지. 왕의 기운이란 본디 성스러우면서도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부디 자리하신 그 곳 뿐만 아니라 다른 곳 여러군데에까지 영험한 기운을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안타깝지만 오늘의 나는 이곳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내려놓았다. 눈을 붙이고 난 다음 이라면 모를까. 그대의 청은 조금 힘들지 싶구나."
"......."
"왜, 혹 내가 그대의 침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불편한 것이냐?"
짐짓 근엄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엘론드는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모처럼의 하대에 장단맞추어 주기로 마음먹은 후 조심스레 대꾸했다. 생각해 보니 그다지 싫은 것은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며 스란두일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그대에게 선물을 하나 하도록 하지."
"그리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아니다. 무리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내 그대에게 이 품을 허하겠다."
"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엘론드의 표정을 생경하게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그저 웃으며 팔을 벌렸다. 남의 침대 위에서 제자리마냥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며 엘론드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숲의 왕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몇번 자신의 곁을 톡톡 두드리고 난 뒤에 보란 듯 웃어보이는 모습은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몇 번을 진득하게 내려다보았지만 좀처럼 비킬 생각이 없어보이는 친우의 모습에 엘론드는 선선히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은혜가 하해와 같사오나 소신, 그저 눈을 붙일 수 있는 공간만 필요할 뿐입니다."
"그대는 내가 특별히 아끼는 이인데 그리 홀대할 수는 없지. 개의치 말고 이리 오라니까."
몸을 일으켜 그저 우두커니 서있는 엘론드의 손을 잡아 채, 곁으로 이끌었다. 선선히 딸려오는 몸이 천천히 침대위로 무너져내렸다. 곁에 몸을 누이고 온기가 닿을 정도까지 가까워지고서야 스란두일은 뿌듯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좋은 꿈을 꿀거야. 분명."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내가 있는데 악몽을 꿀 리가 없어. 당연한 것을 믿지 못하는구나."
"그리 자신하십니까."
"물론."
자신만만한 눈빛 사이로 손가락이 다가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가만히 지켜보는 시선이 간지럽다는 듯, 한번 움츠렸다 펴진 손끝은 슬금슬금 내려가 얌전하게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꾸욱 부여잡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따스한 기운이 퍼졌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던 스란두일은 고개를 조금 올려 엘론드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동그랗게 뜬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저 부여잡은 손아귀에 힘을 준 스란두일은 슬쩍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되려 당당한 모습에 웃음이 터진 건 엘론드였다.
"그리도 좋아하니 내가 다 뿌듯하구나. 슬슬 노곤한 몸을 편히 쉬게 해도 좋을 듯 하니 먼저 잠드는 것을 허락하마. 눈을 감거라."
끝까지 가신을 일부러 재우는 왕의 모습으로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눈가를 덮었다. 순식간에 새카매진 시야에 웃음이 멈춘 엘론드는 잠시 망설이다 슬그머니 미소를 띄웠다.
"안녕히 주무십시요. 숲의 왕이시여."
"그대도 좋은 밤이 되길."
다정한 말들이 오가고 한참 후에야 어린아이들 처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란히 누운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단단하게 얽힌 손깍지에만 조금 힘이 들어갔을 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