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산책은 어쩐일인지 계속 이어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되는 그 시간 즈음 엘은 슬그머니 정원에 나타나 미소짓곤 했다. 홀린듯 나서긴 했지만 이토록 매일같이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터라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지루하기만 한 궁에서의 낮생활보다 오히려 밤의 은밀한 산책이 좀 더 기다려졌다. 일국의 왕자가 남들의 이목을 피해 밤이슬을 밟는 것은 어찌보면 구설수에 오를 법한 행동이었지만 어찌됬든 무료하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란두일은 가볍게 웃어넘기며 매일 밤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의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옛 시가에서부터 현재의 정세까지. 아무리봐도 일개 시종으로는 보이지 않는 견문과 지식의 깊이에 스란두일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가벼이 생각하고 내던진 말들이 심도있게 돌아오면 이쪽도 긴장하기 마련이라, 골똘히 생각하며 문답을 나누었다. 막 던져진 질문에 마무리 된 답을 내놓은 스란두일은 혀를 내두르며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네겐 당해낼 수가 없구나. 조금 쉬자꾸나."
"제가 너무 깊이 파고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내 주관과 다르게 생각하는 이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건 귀한 경험이지. 내 많은 것을 배웠다. 네 지식의 깊이가 이토록 깊을 줄 생각하지 못하고 무리수를 던졌던 것이 오히려 나를 수세에 몰리게 했구나."
"그저 송구합니다."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칭찬을 하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단정했다. 과하게 희노애락을 표현치 않는 단아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토록 마음이 맞고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는 좀체 마주치기 어려운 법이라 조금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낮까지. 아니 며칠 밤낮을 공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의 나라가 아니었다. 힘과 권력을 휘두르기보다 조용히 위엄을 지키고 체통을 중시해야하는 일국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늘 상기해야 했다. 굳이 욕심을 낸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란두일은 억지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권력이나 상하관계로 얽매이지 않은 관계. 어찌보면 친우親友 라 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천하를 가진 왕자에게는 함부로 가질 수 없는 것. 막연히 생각하던 그 자리에 어느새 타국의 청년이 스며든 것을 느끼며 스란두일은 작은 한숨을 내 쉬었다. 자꾸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다른 것들로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숲으로 향하는 다리 근처까지 당도했다. 이곳을 지나면 꽤 오랜 시간을 돌아와야 했다. 그제서야 스란두일은 매번 자신의 의지대로 정원을 돌아다녔음을 깨달았다. 타국의 사신이야 늦잠을 자든 말든 상관할 자가 아무도 없었지만 엘은 아닐텐데. 아직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지위에 있는지도 묻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그 문제를 깨달은 자신을 책망하며 스란두일은 급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멈춘 행동에 조금 놀란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우습게도 온갖 상념이 사라지고 엘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말문이 막혀버린 왕자를 대신해 입술을 연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이었다.

"혹 어딘가 미령하십니까?"
"그보다 달이 이미 기울기 시작했는데 괜찮겠느냐?"

그제서야 스란두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엘의 얼굴에 슬그머니 웃음이 돌았다.

"제 사정을 염두에 두고 계신줄은 몰랐습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지금까지의 온 거리와 앞으로 가야할 거리를 가늠하던 입술이 이내 호선을 그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숲으로 가는 대신 연못은 어떻습니까. 달이 밝아 그 곳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역시 곤란한게로구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꾸중을 하실분이 계십니다."
"그것을 곤란하다고 하는것이다."
"그렇습니까."

몰랏다는 듯 웃어보였지만 이내 제가 아는곳으로 안내를 하겠다는 엘의 행동에 덩달아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은 너무 오래 붙잡아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스란두일은 엘에게 먼저 방향을 잡으라 자리를 비켜주었다.
곧게 뻗은 머리칼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달빛을 받아 필시 흑단처럼 빛나는 모양새는 요요하게 빛났다. 검은색은 귀족의 색이라고도 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절제된 미학과 고귀함이 엘의 수려한 얼굴과 합쳐져 도도한 멋을 풍겼다. 본국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새까만 머릿결에 마음을 빼앗긴 스란두일은 어느새 연못에 다다른 줄도 모르고 한참 그의 뒤를 따랐다.

"어떠십니까. 진한 녹음도 좋지만 때론 이리 정취가 있는 곳도 괜찮지 않습니까?"

빙글 돌며 소개하는 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이 향한 곳은 정말이지 그림같은 곳이었다. 정갈하게 파인 작지않은 연못에 고기들이 물살을 만들며 노닐고 있었다. 달빛이 온전히 내려앉은 못 한 가운데에는 아담한 전각이 있었다. 작기만 한 궁인줄 알고 있었는데 조금씩 안을 헤집으면 필시 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나온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는 듯 스란두일이 엘을 바라보자 여느때처럼 그는 해사하게 웃었다.

"왕께서 그 자리에 오르시고 가장 먼저 손보신 곳입니다. 때때로 머리가 어지러우실 때 산책을 나오신다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이곳은 왕의 소유가 아니냐. 이런곳에 마음대로 출입을 해도 되는것이냐."
"지금은 괜찮습니다. 밤에는 그 한 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 한 분도 지금은 오지 못하시지요."
"너의 안위를 묻는 것이다."
"저는 괜찮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예상외로 딱 잘라 끊는 화법에 스란두일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일까. 이 야심한 시각에 왕의 정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자란 말인가. 그리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더냐. 너는 대체..
잠깐 스치운 생각은 엘이 발걸음을 옮기자 다시 사르르 흩어졌다. 천천히 뒤를 좆으며 지나는 풍경에 시선을 주며 마음을 가다듬자 이내 한가로움과 평안이 밀려왔다. 높은 자면 어떻고 낮은 자면 어떠할까. 네가 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진데. 혼자 상념하고 혼자 깨닫고 혼자 부끄러워 하는것이 어느새 버릇이 된 것 같다고 느끼며 스란두일은 다시 시선을 바로했다. 여전히 곧게 뻗은 머리칼이 눈 앞에서 흔들렸다.
연못의 둘레를 따라 정자로 향하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끊임없이 움직인 터라 조금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계단을 밟았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쓸 수 있도록 정갈하게 펴놓은 자리는 아마도 왕의 자리이겠지. 새삼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스란두일은 내색하지 않고 엘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올랐다. 맞은 편이 아닌 자신의 곁에 자리한 이는 적어도 자리에 없는 왕을 배려하는 듯 보였다. 상석이 비어진 기묘한 위치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피곤하십니까."
"괜찮다. 너는 어떠하냐."
"오랫만에 밖에 나와 맑은 공기를 접하니 기분이 상쾌하여 좋습니다."
"원래 밖에 나오질 못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일이 있어 나오지 못했을 뿐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슬쩍 내리깔았다 뜨인 눈에 맑은 생기가 돌았다. 쳐다보던 모습 하나하나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마치 잘 그려진 초상화 속 미인이 아닌가. 하나하나 생김새를 관찰하던 스란두일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이곳의 관습은 우리와 달라 눈이 즐겁구나. 단정하게 내려빗은 머리가 네게는 꽤 잘 어울린다."
"전하께서도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머리를 함부로 풀지 않는다. 머리를 풀 때가 정해져 있는데 아비의 죽음. 어미의 죽음. 그리고 정혼하는 밤. 이 세 번 뿐이란다."

조곤조곤 설명을 하는 스란두일의 모습을 엘은 그제서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시선을 맞추었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관찰을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스란두일은 조금 긴장했다. 자연스럽게 경직된 입가의 근육을 눈치챘는지 이내 시선을 돌린 엘은 답지않게 조금 손장난을 치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비가 되실분이 조금은 부럽습니다. 귀한 모습을 보시게 되는 것 아닙니까."
"보고싶으냐?"
"농입니다. 그저 이곳에서는 혼인을 하고도 머리를 완전히 틀어올리지는 않는 터라 흥미가 일었습니다.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어릴때부터 하고 다녀서 그런지 그다지 부담이 되진 않는구나. 궁금하냐?"
"조금은요."

작게 웃어보이고 시선을 돌린 옆모습에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렸다. 꽤나 괜찮은 그림일 듯 싶었다. 새까만 머리칼을 곱게 틀어올린 채, 은색의 관으로 고정시키고 술을 늘어뜨린다면 필시 이국의 왕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조금 흥미가 일어 골똘히 생각하던 왕자는 빙긋 웃으며 엘을 쳐다보았다.

"어떠하냐. 한번 해보겠느냐? 내게 여분의 장신구가 있을 터인데."
"예?"
"나는 어자피 머리를 풀지 못하니 대신 네가 머리를 틀어보면 어떻겠느냐."

즉답 대신 웃기만 하는 엘을 앞에둔 채, 스란두일은 홀로 즐거워졌다. 가져온 것들 중에 공들여 세공한 은관이 있을 터였다. 흥미는 욕구로 이어졌고 기대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마음은 그득히 채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며 엘은 제멋대로의 결정에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도 보고싶으십니까."
"기대가 되서 그런다."
"...그저 틀어올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럼 내일 밤은 어떠하냐."
"내일 말입니까."
"내가 머무르는 전각으로 오너라. 혹여 남의 눈에 띄면 네가 곤란하지 않겠느냐."

혹 안달내는 것 처럼 보일까 진중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충분히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가늠해보던 입술에서 겨우 승낙의 말이 나왔다. 조금 늦게 찾아뵈도 괜찮겠느냔 말에 성급히 고개를 끄덕이던 스란두일은 자신의 행동에 우스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필시 소꿉놀이 하는 계집아이같은 모양새가 아니던가. 괜시리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것을 지켜보던 엘이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무얼 그리 안달하시냐며 늦지 않게 가겠다고 답하는 모습에 멋적은 미소를 짓던 스란두일은 어쩐지 민망한 마음에 멀찍이 밖으로 시선을 던져 놓았다.
참으로 편안한 시간들이 흘렀다. 일찍 들여보내겠다는 아까의 다짐은 눈 녹듯 사라졌고 둘은 또 오래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로 나흘 째의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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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린디르. 닿음.

톨킨버스 2013. 8. 31. 02:06

어쩌면 이리도 소질이 없을 수 있을까.

검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은 임라드리스의 지형적 특성상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활을 좀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건네봤지만 시위조차 제대로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반쯤 장난으로 가르쳐주마 라고 선생질을 해보았는데 그마저도 소용없을 정도로 이렇게..! 이렇게! 소질이 없었을 줄이야..
시무룩해진 얼굴 표정에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못가르쳐 그런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겨우 머리를 굴려 찾아낸 것이 말이었다. 어자피 드넓은 초원이 근처에 있는 임라드리스에서 말은 필수요소이지 않은가.
해서 이렇게 마굿간에서 순해보이는 말을 꺼내온 것 까진 좋았는데..

"....할디르...님.. 이거 ...으아아.."

...못 탄다. 이것마저.

말고삐를 쥔 채 어쩔줄을 몰라하는 표정으로 울먹이며 쳐다보는 눈동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약하게 움직이는 말의 움직임에 그대로 휘둘려서는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어느 엘프에게서 볼 수 있을까. 이럴때면 옛 선인들의 격언이 머리를 스쳤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에루시여.. 린디르의 약점은 체력입니까?

한참을 비딱하게 서서 린디르를 바라보던 할디르는 결국 한숨을 쉬고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이제서야 땅으로 내려오는 줄 알고 눈에 띄게 안도하던 이는 곧이어 받침대에 올려진 할디르의 발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렇게 에스코트 해주지 않으셔도.. 린디르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날린 할디르가 린디르의 뒤쪽 안장에 그대로 올라타버렸으니까.

당황한 모습으로 굳어버린 어깨 위로 고삐를 잡아당기느라 가까워진 할디르의 숨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고삐를 잡으세요. 낮게 드리워진 목소리에 절로 손이 움직였다. 덜덜 떨며 잡은 고삐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그대로 할디르는 천천히 조여진 말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다각다각. 움직이는 말의 걸음걸이에 몸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할디르가 좀더 바짝 앞으로 앉아 린디르의 허리를 받치고 자세를 잡아주었다. 천천히 길을 따라 작은 동산으로 향한 말의 걸음은 느리기 그지없었지만 이미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 손바닥 덕택에 린디르는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되십니까."
"..ㄴ..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리 잡고 있으니 떨어지지 않습니다."

할디르는 천천히 웃으며 말을 걸어왔지만 린디르는 점점 난감해졌다. 부러 꼿꼿이 세운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고 잔뜩 긴장한 어깨가 결려왔다. 여전히 허공에서 움직이는 느낌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악물어 보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긴장을 풀고 리듬을 타라며 툭툭 건드린 어깨. 귓가에서 바짝 울리는 낮은 목소리. 목덜미에 닿을 듯 말듯하게 스쳐가는 숨.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기묘할 정도로 예민하게 다가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참 말없이 발길 가는대로 걷던 말은 이내 심드렁해졌는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할디르는 할디르대로 난감해졌다. 좀 더 갔으면 했는데.. 바짝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뒤에서도 눈에 선했다. 돌아가야하나 어째야 하나를 고민하던 것도 잠시, 이내 마음을 굳히고 말의 옆구리를 차냈다.

"으아아아아!!!!!!!!!!!!!!!!!!"

갑작스럽게 빨라진 움직임에 린디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비싯비싯 흘러나온 웃음이 귓가를 스쳤다. 꼭 잡고 내려치는 고삐는 할디르가 잡고 있었으니 넘어질 일은 없었다. 로스로리엔에서 어린 엘프들에게 기마를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호되게 말을 한번 겪고 나면 그뒤로 어린 아이들조차 말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린디르의 잘 땋인 머릿결이 시야를 가리는 법이 없도록 할디르는 상체를 낮추고 린디르에게 밀착한 채, 속도를 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을 타다 언덕 어귀로 돌아오자 할디르는 천천히 고삐를 죄었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꽉 잡힌 손에서 뛰었다. 한껏 상쾌한 기분으로 그제서야 린디르의 반응을 살피던 할디르는 발갛게 달아오른 귀끝과 목덜미를 확인하곤 슬쩍 몸을 기울였다. 설마 무서워서 울어버린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으..."

차마 말 할 수 없을정도로 새빨갛게 되어버린 얼굴에 고민했다. 말을 타면 흥분하는 체질이어서 얼굴에 열이..오른다던..가...음....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던 린디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그..몸 좀..떼...어주세요.."
"몸이요?"

그제서야 모습을 보아하니 착 달라붙어있는 모습이 묘했다. 황급히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건만 움찔거리는 등이 어쩔줄을 몰라했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하는 시선 끝에는 완벽하게 밀착되어있는 은밀한..뭐 잠깐만..?
순식간에 안장 끝으로 밀려올라간 몸에 정말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으로 파르르 떨리던 등이 잠잠해졌다.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린디르가 아주 천천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치를 보는데 내 얼굴마저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당연히 로스로리엔에선 이런일이 없었다. 건장한 성인 두명이 아닌 어린아이와 타니까.. 그러니까..

"저.!"
"도..! 돌아가죠!"
"아, 네네네!!"

동시에 내놓은 목소리가 엇갈리자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최대한 떨어진 채, 다시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움찔 움찔 닿는 곳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아. 말도 안돼. 그러니까..

올때는 잠시였는데 돌아오는 길은 한참이었다. 마굿간의 앞에 도달하자마자 재빠른 몸짓으로 내려온 할디르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린디르에게 손을 뻗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린디르가 손을 붙잡고 받침대로 내려왔다.

"가..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아닙니다."
"저..저 그만 해야할 일이 있어서..!"
"아, 네!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한 린디르는 겨우 눈을 한번 마주치고나서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멍하니 린디르가 향한곳을 바라보던 할디르는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밖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결국 성질이 난 말이 낮게 울며 할디르를 툭툭 치자, 그제서야 할디르는 안장을 내려준 후 말을 몰아 마굿간으로 향했다.
정리를 끝마치고 나서야 웃음이 났다. 에루시여. 운동을 전혀 못해도 할 수 있는게 최소 한가지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귀엽네요. 거기까지 생각하던 할디르는 저도 모르게 열오른 느낌에 괜히 부채질을 하며 린디르가 사라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자피 저렇게 도망쳐도 저녁 식사때에는 볼 수 있겠지. 하루종일 헛고생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예감에 기분이 좋아진 할디르의 마음을 마치 말이 안다는 듯 높게 울었다. 숲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따스한 주홍빛 석양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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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하프를 배운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악기를 배우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 악기로 정한 터였다. 남 부끄럽지 않을 수준의 연주를 갖추었지만 좀처럼 내 보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밤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하프를 연주하고 온전히 느껴지는 기쁨을 느끼는 취미도 없었다. 좋은 실력을 썩히는 줄로만 알았던 그 때,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방안에 전시된 하프가 눈에 띄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은 예삿 물건이 아님을 알렸다. 오래도록 만지지 않아 옅게 먼지가 쌓인 곳을 손 끝으로 쓸어내다가 안나타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었다. 평소와 같이 곱게 눈을 접어보이며 다가와 허리를 껴안는 손짓에 서둘러 감싸안았다. 조곤조곤히 묻는 물음에 그저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의외네요. 악기와는 먼 성격 같았는데."
"그리도 놀라우냐."
"사실 안믿겨집니다.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를 시험하는게냐."
"어려울 것 없지 않습니까? 진정 줄을 타실줄 아신다면 말입니다."

호기롭게 도발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마도 마음 속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목소리일 터였다. 즐거이 웃으며 악기를 꺼내고 먼지를 털며 준비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단단한 손끝으로 튕겨보이며 이리저리 조율해보다 안돼겠는지 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실로 마음에 따스함이 가득 차게 만들었다. 안나타르. 모르도르의 꽃. 한마디 말보다 웃음 하나, 행동 하나로 나를 홀리는구나. 지조적인 속마음이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안나타르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간단히 조율음을 잡고 줄을 튕겼다.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던 음색들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천천히 서글픈듯 하면서도 희망이 깃든 도리아스의 노래였다. 어릴적 부터 듣고자라 익숙한 화음들. 하지만 이제는 감히 부르지 않는 아름다운 곡조.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 끝을 따라 한음 한음이 겹쳐져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섞였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 방에는 둘 밖에 없을 텐데, 의심하면서도 쳐다본 곳에는 안나타르가 있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에 하마터면 손 끝이 떨릴 뻔 했다.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있지..?

 

세상을 밝히던 두개의 나무가 시들고,

사방이 캄캄해 절망에 빠질 무렵,

엘프들조차 보이지 않는 모든것을 두려워하고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네.

하지만 그 속에서 믿음을 주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

그 고귀한 이유 하나만이,

세상을 밝힐 새로운 빛이 되었네.

 

천천히 눈 뜬 채로 내뱉는 가사는 완연한 도리아스의 노래였다. 리듬을 타는 목소리. 안나타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는 부분까지 당도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릴적 아이를 무릎위에 앉힌 채, 웃으며 손동작을 가르쳐주시던 나나의 모습. 그 모습과 비슷한 형태로 움직이며 나풀나풀 제자리를 돌았다. 저도 모르게 악기연주를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색이 끊겨도 당황하는 법 없이 제 스스로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안나타르는 그렇게 한참동안 춤을 추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온전히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고되고 지쳐가는 전장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마도 도리아스의 노래를 기억하는 또 다른 엘프 중 하나겠지. 천천히 밤공기를 타고 퍼져나온 노래는 그떄의 그 노래였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 조차 많지 않은 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노래. 주변에서 하나 둘 흥얼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새카만 밤 하늘에 펼쳐진 광활한 엘베레스의 빛 아래 서글프게 쉬고있는 슬픔의 조각들. 그 속에 자신이 있었다. 빛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희망.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희망을 찾아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늘어지는 화음에 음을 실었다. 이렇게 울려퍼진 노래가 어디에든 닿기를. 평화가 있는곳에 닿아 방황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빛이 되기를. 바라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터였다.

뒤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어린 병사인가. 부르던 노래를 멈춘 채, 돌아본 고개가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어째서. 이곳에. 네가.

"보고싶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다가와 안기는 온기는 그리울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평소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딱딱한 갑옷이 맞닿았지만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느슨하게 땋아진 머릿결이, 긴장할때 예민하게 올라가는 눈꼬리. 언제나 웃고있는 입술. 그리고 항상 당당하게 마주치는 시선. 익숙치 않은것이 없었다. 아니 이질적일 리 없었다. 얼마나 많은 밤을 가슴에 묻어온 안타까움인데.. 그랬는데..

멍하니 쳐다보던 모습에 고개를 갸웃 하던 이는 여전히 웃으며 나를 일으켰다. 아직도 들려오는 도리아스의 노래에 맞추어 빙글빙글 함께 껴안고 막사 안쪽을 돌았다. 예전같이 가벼운 차림이 아니었지만, 홀로 추는 춤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쟁의 두려움도 긴장감도 모두 풀어헤친 채, 몸을 지배했던 건 오직 그 날의 벅차오르던 두근거림 뿐 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그저 부둥켜 안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노래가 끊길 때 까지 그와 나는 계속 춤을 추었다. 사랑과 믿음을 노래하던 먼 과거의 춤을.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근거림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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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그날 밤.

2013. 8. 26.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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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겨우 혼자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왕자는 처음에는 기꺼워했으나 곧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호의를 받아들였다. 갓 왕위에 오른 젊은 왕은 자신보다 아주 조금 나이가 많을 뿐이었다. 축하사절로 오긴 했지만 왕자 역시 이런 자리가 불편했다. 애초에 왕자의 나라와 적대적인 곳이다. 새로운 인물을 왕좌에 올린다고 그 핏줄이 어디 가는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이목을 끄는것이 있었다. 새로운 왕이 들어선 나라에 옛 왕가의 핏줄이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사라진 옛 왕가는 왕자의 나라와 연이 닿아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왕자는 아니었지만 핏줄로는 왕가의 혈통이다. 그가 멀쩡히 살아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라, 저도 모르게 왕자는 미소지었다. 어릴 적 수도없이 보았던 위인들의 이야기이자 세상에 떠도는 모든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의 시초였다. 왕실의 서고에서 보았던 초대 왕가의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왕자는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있었다. 평소라면 성질대로 반항하고 오지 않았을 곳이었지만, 옛 왕가의 핏줄에 대한 호기심이 좀 더 컸던 왕자는 애써 표정을 숨긴 채 발걸음을 옮긴 터였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쉬이 얻어지지 않았다. 성대하게 벌어진 연회의 상석에 앉아 다른 이들의 소개를 받고있던 왕자는 은근슬쩍 지나가는 투로 옛 왕가의 후손에 대해 물었으나 왕은 곤란한 얼굴로 몸이 아파 자리를 나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한마디를 경계로 심기가 조금 어지러워졌다.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냐는 왕의 하문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왕자는 여독을 핑계로 자리를 일찍 털고 일어섰다. 흥미가 가는 것이 없는 번잡한 곳에서의 예의는 이만하면 차린 듯 했다.

숙소로 주어진 월화원의 정원을 거닐던 왕자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집권 초기의 왕권은 가냘프기 그지 없었고 세수 또한 든든하게 뒷받침되지 않는 듯 보였다. 각국의 사절들이 머무르는 곳은 화려하기보단 정갈했고 소박한 맛이 있었다. 어느정도 상황을 예상하고 오긴 했지만 막상 당도해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한숨이 나오는 것 만큼은 막을 수 없는 일이라, 왕자는 번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나마 잘 다듬어진 정원과 중간중간 숨통을 틔워주는 연못, 본국보다 울창하지 않아도 꽤나 멋들어지게 솟은 나무들은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저도 모르게 나무들이 모인 쪽으로 다가간 왕자는 제법 튼실하게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에 손을 얹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향기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오동나무 같았다.

"오동나무 입니다."

마음 속의 언사가 밖으로 나온 줄 알았다. 홀린듯 돌아본 뒤쪽엔 묘령의 사내가 서 있었다.

"혹 궁금하실까 싶어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가볍게 예를 갖추는 사내의 머릿결이 곱게 흔들렸다. 이곳의 관습에 따라 풀어헤친 머릿결은 꽤 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가벼운 차림의 의복이었지만 꽤나 정갈했다. 홀연히 나타난 청년에게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쳐다보던 왕자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받았다. 슬쩍 관찰하는 시선에 청년은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린우드의 전하시지요."
"나를 아느냐."
"뵙는것은 처음이지만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소문이라, 필시 좋은 소문은 아니었겠구나. 나에 대한 것이었다면."
"황공한 말씀을.."
"너는 누구냐."

당연한 물음에 청년은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 쳐다보는 시선은 올곧았지만 그 속에 섞인 망설임을 왕자는 눈치챘다. 이 늦은 시간에 관도 쓰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다면 시종일 수도 있었다. 먼저 말을 걸어오긴 했으나 어쩐지 흥미로워진 왕자는 먼저 입을 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다.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송구합니다."
"아니다. 그보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이냐."
"그런것은 아닙니다. 산책을 하시다 나무를 보시기에 혹 이름이 궁금하실까 싶어서.."

쌉싸름하게 웃는 모습이 어쩐지 가슴에 와닿았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졌다.

"나에 대한 소문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예?"
"그린우드는 숲으로 둘러쌓인 나라다. 그런 왕국의 왕자가 설마 나무의 이름을 모를까."

조금 당황한 모습이 또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송구합니다..하며 거듭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재미있는 자로군. 한밤의 적적한 산책에 혹 도움이 될까 싶었던 왕자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 송구하면 오늘 나와 함께 산책을 하는것은 어떠하냐."
"같이 말입니까."
"싫으냐."
"그럴리 있겠습니까. 따르겠습니다."

살짝 고개숙이는 모습에 또다시 흥미가 일었다. 흐르듯 움직이는 머리칼에 어쩐지 시선이 뺏겼다. 요망한 밤이군. 천천히 웃던 왕자는 막 뒤를 따르려던 이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린우드의 왕자 스란두일이다. 다음엔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구나. 온화하게 미소짓는 왕자의 앞에서 몇번 이름을 되뇌이던 청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 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래, 엘. 기억하고 있으마."

휙 돌아 성큼성큼 걷는 왕자의 뒤를 청년이 조심히 따랐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정원에 커다랗고 흰 달이 둥실 올랐다. 맑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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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건배.

톨킨버스 2013. 8. 12. 02:27

"그러고보니 말이지. 좋은 술이 들어왔어."

모처럼 들뜬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란두일의 미간이 되려 찌푸려졌다. 늘어져있던 소파에서 겨우 고개를 들자 바쁘게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꽤나 고심하고 있는 엘론드가 보였다. 한참을 열중하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마치 주문이라도 된 듯, 엘론드는 움직이던 손을 멈춘 채 스란두일을 쳐다보았다. 한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태도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웃으며 말을 건넸다. 분홍색이 예쁠 것 같나, 노란색이 예쁠 것 같나? 답지 않은 그의 질문에 스란두일은 그저 한숨을 쉬어냈을 뿐이었다.

결국 분홍색이 좋겠다며 이제껏 만져대던 비단을 곱게 말아 포장하는 것으로 엘론드의 바보같은 행동이 마무리된 줄 알았건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안쪽으로 향했던 손에 가득 들린 것은 따지않은 포도주 병과 와인잔이었다.

"정말 마시게?"
"자네답지 않은걸? 혹 지금은 내키지 않는건가?"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는것은 신다르의 특성이 아니라네."
"괜한 걱정을 했군."

밀봉된 병 입구를 뜯으며 엘론드가 웃어보였다. 흥분감에 조금 상기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술은 달큰한 포도향을 품었다. 건네진 잔을 받아든 스란두일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도 아니면서 무슨 긴장을 이리 하는지."
"딸이라잖나. 딸은 처음이니 말이야."
"아들은 취급도 안해주는군."
"그 아이들은 둘이 함께 손잡고 나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됐잖나."
"핑계한번 좋은데."

맞닿은 잔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가볍게 한모금 넘긴 스란두일이 입술끝을 살짝 핥았다. 좋은 술이군. 한마디 칭찬을 내뱉은 뒤, 다시 한모금 넘기는 것을 본 엘론드가 완연하게 웃었다.

"자네가 좋아할 줄 알았지."
"임라드리스의 군주께서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술을 내올 줄이야. 정말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나보군."
"그전까지의 예우는 소홀했다고 힐책할 셈인가?"
"그럴리가. 임라드리스에 공급되는 포도주의 품질과 손님접대의 방식은 익히 알고 있다네. 다만 정말 기분이 좋아보여 농담한 것이니 너무 새겨듣지는 말아."
"사실 가슴이 너무 뛰어 견딜수가 없네."

쑥스러운 듯, 잔에 남은 포도주를 단숨에 비운 채 엘론드는 열오른 얼굴로 스란두일을 쳐다보았다. 한심하게 쳐다보는 표정이 콱콱 얼굴에 꽂혀도 별 수 없었다. 바로 엊그제, 켈레브리안을 보살피던 엘프에게 뱃속의 아이가 여자아이 일거란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터였다. 딸이라니. 막연하게 다가온 새 생명의 존재에 설레임과 사랑스러움이 더해졌다. 엘라단과 엘로히르가 있었기에 내심 바래왔던 여자아이였지만 막상 확인받고 난 뒤의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쁜 일과로 불철주야 뛰어다니면서도 아직 배가 불러 거동이 어려운 켈레브리안에게로 종종 달려가 손을 잡아주느라 분에 넘치게 다가온 이 기쁨을 오롯이 느낄 시간도 마련하지 못했던 차에 찾아온 손님이 바로 스란두일 이었다. 꽤나 풀어진 얼굴이었는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엘론드에겐 그마저도 웃음으로 번졌다. 기쁨의 바다에 자신을 던지기에 혼자는 너무 외로운 차였다.

"그리도 좋은가."

툭 던져진 물음에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졌다는 듯, 스란두일은 엘론드에 손에 있던 병을 빼앗아 다시 잔을 채웠다. 미끄러지듯 담긴 술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막 자신의 잔에도 따라내려는 동작을 제재한 엘론드가 또다시 병을 빼앗은 채, 스스로 잔을 채워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딸아이를 위한 건배를 해도 괜찮을까?"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친우의 미소에 스란두일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어쩐지 단단히 굳어진 마음에 당혹감을 느꼈다. 새로 채워넣은 크리스탈의 잔속에서 술이 흔들리자 저도 모르게 흔들리는 감정을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렸다. 씁쓸해지는 기분이 티가나지 않도록 스란두일은 부러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엘론드의 아이를 축복하며 건배했다. 기꺼이 잔을 맞대고 단숨에 술을 들이킨 두 엘프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후끈한 감각이 몸을 달구고 친우의 웃음소리가 행복하게 귓가를 울렸다. 아까의 이질적인 감정은 천천히 가라앉아 스란두일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졌다. 지금은 저 웃음과 행복해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한잔 더 할텐가?"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 좋을텐데."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듣는게 정말 놀랍다는거 알고 있나?"
"그럼 자네가 이리도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군."
"가끔은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다시금 병을 기울이는 엘론드의 행동에 스란두일은 어쩔 수 없단 듯 짧게 혀를 차올렸다. 하지만 순순히 내밀어진 잔에 엘론드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가득 채워진 잔을 부딧히는 소리가 로드의 방안을 몇번이고 채웠다. 모든것이 행복하고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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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곳, 천연의 요새이자 상처받은 이들에게 열려있는 쉼터. 이곳의 이름이 임라드리스라 명명된 이후 가장 아름답게 정비되고 가꿔진 좋은 시기에 군주의 자리에서 모든 것들을 돌보던 엘론드 페레딜은 리븐델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많은 초대장을 작성했다. 귀한 종이에 꼼꼼하게 쓰인 서신을 받은 손님들은 임라드리스라 명명된 안식의 땅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첫 손님들을 맞이하려 열린 화려한 연회에서 이제는 군주라 추앙받아도 좋을 이의 환대를 받으며 도착한 귀한 이들이 양껏 먹고 마시며 서로간의 우애를 나누었다. 곧 자리가 무르익자 하나 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지어 어울리기 시작했다. 은밀한 시간들이 시작될 것임을 눈치챈 시종들은 환히 밝혔던 촛대를 조정하고 몸을 숨겼다. 얼마나 오랜 기간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이 어울리는 자리인 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분 한분 직접 모시고 연회를 주최하던 엘론드도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임라드리스의 엘프들만이 웃음을 띄우고 아직 남아있는 손님들을 서포트하기에 바빴다.

 

가슴이 뛰었다. 본래대로라면 연회의 정리를 도우려 넓은 홀로 향했어야 했을 걸음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은밀하게 움직인 린디르는 숨을 죽인 채, 나무뒤로 몸을 숨겼다. 슬쩍 열린 창문 틈으로 언제나처럼 익숙한 주군의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평소의 과묵한 모습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같이 천진해보여 린디르를 당황스럽게 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눈 앞이 캄캄해졌다.

젊다기에는 애매한 나이의 주군은 아직도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뜬구름처럼 소문이 떠돌았다. 은밀한 연인이 있다던지 혹은 이미 미래를 약속해 곧 혼인을 할 때를 노리고 있다는 그런 류의 소문이었다. 하지만 개중 현실적인 소문은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리븐델로 건너오고 나서의 주군은 정말 엘프의 하루 삶을 인간처럼 써도 모자를 정도로 바쁘고 고된시간을 보냈던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열린 이 연회에서 만큼은 무언가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새로운 소문에 임라드리스는 조용히 들떠있었다.
그리고 어린 엘프는 소문이 사실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주군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조금의 배신감과 체념이 온 몸을 잠식했다. 그랬다. 어린 엘프는 남 모르게 맘속 한 구석에 주군을 담아두고 있었다.

곧 성인식을 맞는 어린 엘프는 부끄러움을 뒤로한 채, 주군의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희망조차 남질 않았다. 충격에 놀란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그럼에도 고정된 시선은 흩어질 줄 몰랐다. 저렇게 환한 웃음을 얼굴에 띄운 주군의 모습은 처음 보는 터였다.

누구십니까. 나의 주군의 마음을 차지하신 분은..

혹여 비명을 지를까 싶어 틀어막은 손가락 위로 눈물이 넘쳐 흘렀다. 훌쩍이지 않으려 애써봤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그 모습을 뵙고싶었다. 흐려지는 시야를 흔들어 눈물을 닦고 주군의 모습을 주시했다.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온화한 모습이 아니었다. 수줍어하고, 살갑게 웃으며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슬픔에 젖어버린 몸은 둔해졌다. 그저 올곧게 시선만 그의 주군께로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리지 않길 바라며 모든 신경을 주군에게만 쓰고 있었다. 덕분에 어린 엘프는 뒤쪽에서 은밀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군. 그대는 혹 초대받지 못한 손님일까?"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당황한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차마 움직여 확인하지 못한 어깨에 따스함이 감겼다. 충분히 반항할 수 있었음에도 린디르는 자신의 어깨에 얹혀진 손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 얼굴을 보이고 말았다. 꾹 감은 눈에 당황한 듯, 눈물이 맺혔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보였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점이 자신을 더욱 당황케했다. 당연하게도 이곳에 온 손님들은 모두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분들이었다. 
악햔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손가락이 얼굴로 향하자 움찔거리며 눈을 떠 버렸다. 검은 동공에 맺힌 것은 어둠을 살라먹을 듯 빛이나는 황금의 머리칼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화려한 나무관이었다. 그린우드에서만 자란다는 귀한 꽃. 황금색으로 빛나는 열매. 손님이 누구인지 알게된 린디르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몸보다 허리를 잡아챈 손이 빨랐다. 갑자기 타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된 어린 엘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곧 놀란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작게 딸꾹질을 시작한 린디르가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모든것을 그저 지켜보던 스란두일은 잠시 고개를 들어 린디르의 시선이 향했던 곳으로 눈길을 보냈다. 평생의 친우가 그곳에서 웃고 있었다. 맞은 편의 상대는 린돈의 왕이로군. 혀를 차올리며 품속에 들어앉은 작은 새를 스란두일은 포근히 감싸안았다. 크지 않은 키와 땋지 않은 머리로 보아하니 성인식조차 치루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어린 엘프의 마음속에 그늘을 만드는 이는 어느쪽일까."

안긴 이가 또다시 몸을 떨어냈다. 마치 아이를 돌보는 보모가 된 것 같은 모양새군. 한숨을 쉬어내며 품안을 헤쳐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만이 반짝였다. 묘하게 구미가 당기는 분위기네. 잠깐의 호기심이 왕자를 사로잡았다. 버림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작은 동물들은 조그마한 온기에 쉽게 마음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 스란두일이 녹아들 듯 웃어보였다.

"나라면 매일 웃게 만들텐데."

커진 동공에 다시 혼란이 느껴졌다. 살그머니 올린 손이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리하고 볼을 감싸쥐었다. 단번에 빨개진 얼굴에 신선함이 느껴졌다. 어려. 작아. 여려. 조금은 순종적인데. 상냥한 모습으로 이마에 입맞췄다. 움찔,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손을 올려잡아 눈을 맞췄다.

"어떠하냐, 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지 않겠느냐. 어쩐지 오늘은 혼자있고 싶지 않은데."

아주 작은 유혹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어두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고민을 하는 것 같아 슬쩍 산책을 멀리나와 방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곤란하다는 말을 덧붙였더니 결정은 오히려 쉬워진 모양이었다. 눈물을 털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을 가늘게 눈뜨고 바라본 스란두일의 시선이 아주 잠시 친우의 방으로 향했다. 어느새 불꺼진 창문 틈새로 아주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픽 웃으며 아이가 듣지 못하게 다가가 얼굴을 감싸안았다. 뾰족 솟아오른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몇번이고 쓸었더니 그대로 화끈 달아올랐다. 당황하며 버둥대는 아이를 즐거이 바라보며 한쪽 품에 껴안은 채, 자리를 옮겼다. 그대의 덕에 모처럼 좋은 밤을 보낼지도 모르겠군. 들리지않는 감사의 인사를 친우에게 남기며 스란두일은 어린 엘프에게 이름을 물었다.

"린디르..입니다."
"예쁜 이름이구나."

칭찬을 받는 것이 서툴은 아이같이 시선이 발끝으로 향했다. 무심코 결좋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스란두일은 다시 미소지었다. 달이 유난히도 밝은 임라드리스에서의 첫날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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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짜증나는 밤 이었다. 비는 흔들리는 마차의 유리창을 무수히 때리고 그 자국을 남겼다. 애꿎은 시가의 끄트머리만 손 끝으로 눌러대다 짜증섞인 목소리를 내 뱉으니 앞의 시종이 움찔하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녹색의 프록코트는 습기에 형편없이 흐물거렸고 어제 새로 산 실크햇에 달린 비로드 장식은 축 쳐져있어 현재의 기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사려고 했던 경매품을 놓친 것에 대한 부아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더럽고 치졸한 글로르핀델. 관심도 없던 조각상에 10만 파운드까지 부른 이유가 고작 내게 우월감을 표시하기 위함임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어쨌거나 스란두일은 하인도 통하지 않은 채, 스스로 일어나 경매가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상을 낙찰받지 못했다. 미청년의 나신을 조각한 대리석이었다. 제작자도 알 수 없는 작자 미상의 것이라 처음에는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잡담을 하던 그였다. 그러나 그 조각상을 가렸던 휘장이 벗겨지는 순간 스란두일은 첫 눈에 반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단아한 이마. 마치 색이 있었다면 불그스름했을 통통한 뺨. 날카로운 턱선. 목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잔근육들은 너무나 아름다고 황홀했다. 넋을 놓은 자신을 두고 주변이들이 남색가라며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저것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달게 인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꿈 이었다. 결국 글로르핀델의 손에 넘어간 조각상은 단숨에 휘장에 감긴 채, 상자로 포장되어버렸다. 집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낮추어 한 번만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요청하는 언질을 시종을 통해 보냈지만 돌아온것은 유감이라는 말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렇게 그린우드의 스란두일은 말그대로 체면을 구겨버린 참이었다.

점점 차게 굳어지는 주인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 본 시종은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천성이 난폭하지는 않았지만 다혈질에 혈기왕성한 주인은 가끔 끓어넘치는 화기를 달래기 위해 밤새도록 말을 달리거나 희안한 트집을 잡아 시종들을 밤새 못살게 굴었다. 잠들지 못하는 것보다 걱정스러운것은 까탈스러운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어서 시종은 자신에게 애꿎은 화가 미치기 전에 저택에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저택의 근처로 온 마부가 잠시 대문이 열리는 속도에 맞추기 위해 마차를 멈추었다. 환하게 주인을 맞이하려 불켜진 저택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빗줄기 속에서도 그 위용을 자랑했다. 이윽고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다시 속력을 내는 채찍소리에 맞추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부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무..무무무슨일입니까!!!!!"
"그..그..저기..그..."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단번에 들어도 불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들려오자 마부는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이 있는 창 쪽으로 다가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창문을 두드리자 소리를 내며 열린 창문 틈으로 시종과 주인의 얼굴이 내비쳤다.

"그..주인님. 바닥에..왠 놈이 쓰러져있는데요..!?"
"뭐?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영지 안쪽이다.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시종이 더욱 당황해 마부를 쳐다보았지만 마부는 몇 번이고 앞쪽의 바닥과 시종을 번갈아 보았을 뿐, 아무런 말도 더 잇질 못했다. 잠깐이나마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시간에 짜증이 난 스란두일은 시종을 툭툭 치며 밖으로 나가보라 턱짓했다.

제에길, 그냥 지나가면 되는것이지. 이 밤중에 여기 무슨 사람이 있다고.  졸지에 안맞아도 될 비를 맞게된 시종은 중얼중얼거리며 겉옷으로 대충 빗물을 가리고 마부와 함께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과연 무언가 거뭇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덥지 않은 쓰레기일 것이라고 주억거리던 시종은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로 사람 모양을 하고 있자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주저앉고 말았다. 반대쪽 창문을 열고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스란두일은 고개를 갸웃하며 큰 소리로 마부에게 살아있나 확인해 보라 명했다.

"살..살아있습니다요!! 맥이 뛰는것 같은데요!! 주인님!!"

살아있는 사람이 이 시간에 나의 저택안에 쓰러져있다..라. 스란두일은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민가에서는 꽤나 떨어져있는 곳인데 구태여 이쪽까지 와 쓰러질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쨌든 살아있는 자를 빗속에 내버려두는 것은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다시한번 크게 소리쳐 그를 마차로 데려오라 명한 뒤, 스란두일은 지팡이를 치우고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조각상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어떤 자일까. 남자? 여자? 노인? 그도 아니면 아가씨? 즐거운 상상속에 풀어진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시종과 마부가 비에 쫄딱 젖은 채, 끌고온 자는 남자였다.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젖을까 싶어 망설이던 시종은 바닥으로 그를 밀쳐 올렸다. 졸지에 스란두일의 발치에 엎드린 그에게서는 비맞은 짐승에게 나던 퀘퀘한 냄새가 났다. 단번에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쥔 주인의 눈치를 보던 마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주인님. 저택으로 향할깝쇼. 그래. 아, 넌 자리가 없으니 마부와 함께 앉거라. 조금 투덜투덜대던 시종은 어자피 홀딱 젖어 마차에 오를 수도 없다며 굽신댔고 천천히 마차의 문이 닫혔다.

출발한 마차의 덜컹거림에 엎드려 있던 자의 얼굴이 슬쩍 드러났다. 차마 손 댈 수 없어 발 끝으로 건드려 보던 스란두일의 행동이 멈춘 것은 그 때였다.

'이 아이...아까 조각상의 그 아이잖아...?'

젖었다는 것도 잊은 채, 손을 뻗어 눈감은 그 얼굴을 좌 우로 돌렸다. 비를 맞아 열이 올랐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싱그러웠다. 조각상은 소년의 어릴때의 모습이었는지 지금은 완연히 자라 청년, 아니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나이로 보였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고작 조각상 따위에 연연해 할 것이 아니었어. 게다가 스스로 내 저택을 향했으니 이 자가 나의 소유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무심코 닿은 온기에 투정을 부리듯 기울어지는 고개에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얼마나 쳐다보고 있었을 까. 마부의 거친 목소리로 저택에 당도하였다 고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한 스란두일은 축 쳐진 실크햇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지팡이를 짚고 반대쪽 문으로 내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우산을 가져와 수발을 들었다. 관심없는 척, 도도한 표정으로 스란두일은 집사에게 명을 내렸다. 안에 있는 자를 깨끗이 씻겨 내 방에 데려다 놓도록. 오랜 시간 주인을 모셔왔던 집사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보였을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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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 있던 온기가 달아나버리는 통에 왕자는 슬쩍 무거운 눈꺼플을 들어올렸다. 급하게 매무새를 정리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리는 흑색의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어깨위로 내려앉는 모양새를 주시하던 왕자는 더듬더듬 근처에 놓인 나비장 안쪽을 더듬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리고선 마악 옷가지를 챙겨입고 머리쪽으로 손을 올리는 이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깨셨습니까."

폭삭, 제 위로 나동그라진 이는 미간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그저 순하게 잡아당긴 이를 올려다보았다. 채 묶지 못한 머리칼이 그대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윤기가 번지는 머리칼은 흡사 밤의 하늘 같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의 지존이면서도 태양과 같이 빛나는 자신의 머리색과는 정 반대였다.

"일어나게, 불편하지 않은가."

손수 몸을 일으켜 누운 이의 어깨를 들어올렸다. 이제는 완연히 자신의 모습을 보게된 이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훝어내려 고르게 만들었다.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 숨을 들이마시며 조절하는 엘론드의 낯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왕자는 개의치 않았고 이제는 숫제 접문이라도 하려는 듯, 밀착해 양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어느새 감겨 잘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상하며 미소지었다. 솜씨좋게 슥슥 올려진 머리칼을 이리저리 틀고 아까전에 꺼내둔 금색의 비녀를 가로질러 꽂았다.

묵직하게 올라가는 느낌에 감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반 장난으로 해보았을 뿐인데 의외로 어울리는 모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이래서야..무어라고 놀릴 수도 없었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가 놀란 얼굴을 관찰하다 더듬더듬 손을 올려 머리를 매만졌다. 곱게 틀어올려진 모양새를 훑고 비녀에까지 손이 올라섰을 때, 그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전하. 저는 여인이 아닙니다."

매정한 손은 무어라 말 할 틈도 없이 비녀를 빼냈다. 순식간에 풀린 흑색의 머리칼이 요동을 치며 흐트러져 아까처럼 어깨에 닿아버렸다. 멍하니 모습을 보고있다가 그가 비녀를 앞에 슬쩍 던져두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가난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났다. 혼자 웃음을 삼키며 비싯비싯 웃다가 그의 손목을 잡은 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평소와 같이 반항하다 못 이긴 척, 품으로 들어온 이를 껴안고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

"화가났느냐."
"...아닙니다."
"그 비녀는 여인의 것이 아니니라."
"....전하."
"내 것이다. 그러니 화내지 않아도 된다. 엘론드."

작게 한숨쉬는 소리가 품 안에서 들렸다. 하지만 이내 따스한 온기가 흐릿하게 등을 타고 올라왔다. 왕자는 작게 웃으며 그대로 몸을 기울였다. 두터운 원앙금침 위에 금과 흑. 두 가지의 색이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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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어둠이 찾아오고 고요가 사방을 뒤덮은 야심한 밤. 들릴듯, 들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이 풀벌레가 우는 소리에 묻혔다. 몇 번이고 넘어질 듯 급하게 찾은 장소는 달조차 보이지 않는 무성한 수풀과 높은 나무들로 가리워져 있었다. 가파르게 넘어가는 숨을 애써 고른 채, 어린 엘프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약속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남았으니 숨을 고르고 어여삐 보일 정도로 자신을 돌아볼 여유는 조금 남아보였다. 두근두근 진정하지 못하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검은 머리의 엘프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눈을 감았다. 곧 있으면 보게 될 이를 생각하면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어떤 인사를 꺼내야 하지. 소소한 것 하나하나가 고민이 되었고 두근거림으로 이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달려온 열기를 식히다 바로 곁에서 난 인기척에 흠칫 놀란 그 순간.

"일찍이네."

귓가에 속삭여진 목소리는 꿈에도 그리던 이의 목소리였다. 파들, 떨린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차마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수줍음에 속삭이던 이는 가벼이 웃으며 뒤에서부터 그를 껴안았다. 자신을 감싼 온기에 답하듯 천천히 올려진 손끝이 잘게 떨리며 꾹 부여잡은 단단한 팔을 더듬었다. 고개를 조금 돌려 시선을 올리면 곱게 접힌 눈웃음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발의 엘프가 보였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잡은 팔을 몇번이고 고쳐잡던 린디르는 황급히 돌려진 동작에 잡았던 손을 놓쳤다. 목 근처에 닿은 코 끝에선 알싸한 숲의 향기가 감돌았다.

"보고싶었어."

낮은 저음이 온통 머릿속을 울렸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 발끝을 들어 시선을 맞추고 그에게 매달렸다. 천천히 뒤로 밀쳐져 크고 거대한 나무에 등을 바짝 대고나서야 그는 꽉 안았던 팔로 내 얼굴을 감쌌다.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춰오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보고싶었어요. 한마디 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쉬이 닿을 수 없는 온기이기에. 모든것이 톡톡 뛰는 심장박동처럼 조급했다.

아래서부터 올라온 손이 옷을 걷어냈다. 어딘가로 향하는지 깨달은 린디르의 얼굴이 불과같이 뜨거워졌다. 막 그의 턱끝에 입을 맞춘 후, 목선으로 입술을 가져가던 할디르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쇄골과 어깨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튜닉 안쪽을 향하던 손을 그대로 허리께까지 밀어올렸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노출된 곳은 여보란 듯, 파르라니 빛낳다. 맨살을 거리낌없이 쓸어올리며 튜닉을 모두 들어올린 할디르가 몇번 더 입을 맞추다 기어이 큭큭 거리며 어깨에 기댔다. 발갛게 올라온 열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혹 싫어하면 어쩌지. 어쩌지.
한참을 낮게 웃던 할디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올려 어린 엘프를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모르는 눈빛에 긴장이 감돌면서도 천천히 허리께와 툭 튀어나온 골반을 쓰다듬으면 움찔움찔 떨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며 그의 위에서 맴돌던 손끝은 다시 얼굴로 향했다.

"이렇게 귀여운 유혹을 할 줄은 몰랐는걸?"
"......당신에게만 하는거에요."
"알아, 알고있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유혹은 참을수 없을지도 몰라."
"참지 말아요. 난 이제 성인이에요. 당신을 받아들여도 된다구요."

어둠속에 파르라니 빛나는 맑은 눈동자에 할디르의 얼굴이 맺혔다. 진심을 담은 고백에 그는 그저 웃어보이며 사랑스럽게 그의 뺨을 감싸안았다. 올곧은 마음. 성년이 되길 기다려온것은 그대 뿐이 아닌데.. 천천히 시간을 가늠해보며 할디르는 조금은 떨리고 있는 린디르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말랑한 감촉이 입안에 퍼졌다. 몇번이고 핥고 물어 맛을 음미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말간 눈매가 어느덧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플지도 몰라."
"괜찮아요."
"행복하지 않을지도.."
"할디르 그만..오늘은.."

슬픈 얼굴로 자신을 막아내는 단호함에 은발의 엘프는 다시 미소지었다. 그래.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오늘은 행복에 취하고 사랑의 온기에 몸을 묻어도 되는 그런 날 이니까.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쉬이 사과하고 만 입술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조용조용히 애정을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어린 엘프의 뺨은 다시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아주 약한 끄덕거림을 시작으로 두 엘프의 입술이 다시 겹쳤다. 끝나지 않을 성인식의 밤이 이제서야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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