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하프를 배운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악기를 배우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 악기로 정한 터였다. 남 부끄럽지 않을 수준의 연주를 갖추었지만 좀처럼 내 보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밤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하프를 연주하고 온전히 느껴지는 기쁨을 느끼는 취미도 없었다. 좋은 실력을 썩히는 줄로만 알았던 그 때,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방안에 전시된 하프가 눈에 띄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은 예삿 물건이 아님을 알렸다. 오래도록 만지지 않아 옅게 먼지가 쌓인 곳을 손 끝으로 쓸어내다가 안나타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었다. 평소와 같이 곱게 눈을 접어보이며 다가와 허리를 껴안는 손짓에 서둘러 감싸안았다. 조곤조곤히 묻는 물음에 그저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의외네요. 악기와는 먼 성격 같았는데."
"그리도 놀라우냐."
"사실 안믿겨집니다.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를 시험하는게냐."
"어려울 것 없지 않습니까? 진정 줄을 타실줄 아신다면 말입니다."

호기롭게 도발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마도 마음 속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목소리일 터였다. 즐거이 웃으며 악기를 꺼내고 먼지를 털며 준비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단단한 손끝으로 튕겨보이며 이리저리 조율해보다 안돼겠는지 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실로 마음에 따스함이 가득 차게 만들었다. 안나타르. 모르도르의 꽃. 한마디 말보다 웃음 하나, 행동 하나로 나를 홀리는구나. 지조적인 속마음이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안나타르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간단히 조율음을 잡고 줄을 튕겼다.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던 음색들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천천히 서글픈듯 하면서도 희망이 깃든 도리아스의 노래였다. 어릴적 부터 듣고자라 익숙한 화음들. 하지만 이제는 감히 부르지 않는 아름다운 곡조.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 끝을 따라 한음 한음이 겹쳐져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섞였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 방에는 둘 밖에 없을 텐데, 의심하면서도 쳐다본 곳에는 안나타르가 있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에 하마터면 손 끝이 떨릴 뻔 했다.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있지..?

 

세상을 밝히던 두개의 나무가 시들고,

사방이 캄캄해 절망에 빠질 무렵,

엘프들조차 보이지 않는 모든것을 두려워하고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네.

하지만 그 속에서 믿음을 주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

그 고귀한 이유 하나만이,

세상을 밝힐 새로운 빛이 되었네.

 

천천히 눈 뜬 채로 내뱉는 가사는 완연한 도리아스의 노래였다. 리듬을 타는 목소리. 안나타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는 부분까지 당도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릴적 아이를 무릎위에 앉힌 채, 웃으며 손동작을 가르쳐주시던 나나의 모습. 그 모습과 비슷한 형태로 움직이며 나풀나풀 제자리를 돌았다. 저도 모르게 악기연주를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색이 끊겨도 당황하는 법 없이 제 스스로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안나타르는 그렇게 한참동안 춤을 추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온전히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고되고 지쳐가는 전장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마도 도리아스의 노래를 기억하는 또 다른 엘프 중 하나겠지. 천천히 밤공기를 타고 퍼져나온 노래는 그떄의 그 노래였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 조차 많지 않은 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노래. 주변에서 하나 둘 흥얼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새카만 밤 하늘에 펼쳐진 광활한 엘베레스의 빛 아래 서글프게 쉬고있는 슬픔의 조각들. 그 속에 자신이 있었다. 빛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희망.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희망을 찾아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늘어지는 화음에 음을 실었다. 이렇게 울려퍼진 노래가 어디에든 닿기를. 평화가 있는곳에 닿아 방황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빛이 되기를. 바라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터였다.

뒤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어린 병사인가. 부르던 노래를 멈춘 채, 돌아본 고개가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어째서. 이곳에. 네가.

"보고싶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다가와 안기는 온기는 그리울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평소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딱딱한 갑옷이 맞닿았지만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느슨하게 땋아진 머릿결이, 긴장할때 예민하게 올라가는 눈꼬리. 언제나 웃고있는 입술. 그리고 항상 당당하게 마주치는 시선. 익숙치 않은것이 없었다. 아니 이질적일 리 없었다. 얼마나 많은 밤을 가슴에 묻어온 안타까움인데.. 그랬는데..

멍하니 쳐다보던 모습에 고개를 갸웃 하던 이는 여전히 웃으며 나를 일으켰다. 아직도 들려오는 도리아스의 노래에 맞추어 빙글빙글 함께 껴안고 막사 안쪽을 돌았다. 예전같이 가벼운 차림이 아니었지만, 홀로 추는 춤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쟁의 두려움도 긴장감도 모두 풀어헤친 채, 몸을 지배했던 건 오직 그 날의 벅차오르던 두근거림 뿐 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그저 부둥켜 안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노래가 끊길 때 까지 그와 나는 계속 춤을 추었다. 사랑과 믿음을 노래하던 먼 과거의 춤을.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근거림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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