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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04 안나오로. 함정.
- 2013.06.01 소린스란. 어두운 숲 2
- 2013.05.29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외전]
- 2013.05.28 소린스란. 어두운 숲 1
- 2013.05.24 켈리안나. 조금 늦은 아침식사
- 2013.05.23 스로르오로페르. 밤.
- 2013.05.18 안나스란. 구속 2 [完]
- 2013.05.15 스란엘. 사흘째의 밤. 2
- 2013.05.14 안나스란. 구속 1
- 2013.05.13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3 2
글
소린스란. 어두운 숲 2
엘프들의 말은 기이하게 빨라 그다지 힘껏 달리지 않았음에도 소린이 알고있는 지역을 쉽게 벗어났다. 막 쉬려고 긴장을 풀었다 출발한 덕분에 온몸에 피로감이 엄습했지만 소린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본 적 없는 거대한 숲이 나타났다. 잠시 멈춰 목을 축이던 소린은 눈앞의 엘프가 그에게 무언가 내미는것을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눈을 잠시 가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길 안내는 제가 하지요."
"거처를 숨기겠단 이야긴가."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주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모습에 소린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기사 피차 껄끄러우니 이렇게 하는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낯선 곳이라는게 조금 염려스러웠지만 여차하면 자력으로라도 탈출하면 그만이고 또 오면서 은밀히 길에 표시를 해 두었으니 괜찮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밀어진 검은 천을 제 손으로 단단히 묶은 소린은 흔들리지 않게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품안의 깊이 넣어둔 단도의 묵직함을 곱씹으며 말의 흔들거림에 몸을 맏겼다.
눈을 감으니 모든 감각이 민감해졌다. 흔들리는 몸은 평지가 아닌 거친 숲길로 향했다. 진창일때도 있었다. 말이 작게 미끄러지면 예지하지 못한 몸은 배로 흔들렸다. 차라리 조금 풀어져 눈을 감고 힘을 빼면 편해질 것 같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엘프의 앞이라 혹 우습게 보여질까 신경쓰여 소린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몸을 곧추세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친 풀과 나무뿌리가 가득했던 길이 서서히 평지로 바뀌어갔다. 흔들리는 부담이 적어져 몸이 한결 편해졌다. 두필의 말은 고향에 온 것이 기쁘다는 듯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돌바닥에 말발굽이 울렸다. 어쩐지 소리와 공기. 온도만으로 익숙한 느낌을 받던 소린은 갑자기 정지한 말에 놀라며 들이마시려던 숨을 내쉬었다. 사레가 들린 소린이 진정하길 기다리던 엘프는 그의 고개가 다시 들리자 안대를 풀어도 좋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잔잔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소린은 눈 가리개를 풀었다. 부옇게 떠오르는 태양을 기대한 드워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하고도 화려한 돌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햇살은 높이 올려진 창 틈으로 군데군데 쏟아지는것이 전부였지만 그 작은 빛줄기들로도 안쪽은 찬란하게 빛났다. 고작 엘프들의 건축과 조각이 드워프의 솜씨를 따라갈 순 없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다른 면모로서 거대하고 웅장한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 소린은 저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겼다. 모리아의 성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웠지. 천천히 돌기둥들과 천장의 조각들을 바라보던 소린은 이윽고 섬세하게 조각된 문양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곧 그 밑에 거대하게 설치된 문과 마주했다. 그 앞에는 키가 큰 엘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넋놓고 두리번거렸다는 것을 깨달은 소린은 황급히 말 위에서 내려왔다. 이미 자신을 데려온 엘프는 그의 곁에서 엘프의 언어로 무언가 이야기하며 소린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몇번 끄덕인 키큰 엘프는 그제서야 소린에게로 다가와 고개숙여 예를 표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이곳의 집사 갈리온이라고 합니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오큰쉴드. 잠시 여독을 푸시지요.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하겠습니다."
"환자는 어디있소. 나는 환자를 보러왔을 뿐이오."
"쉬지 못하시고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신 것으로 압니다. 지친 손님께 용건을 청하는 것은 엘프의 예의가 아니지요. 주군께서도 지금 잠깐 밖을 향하셔서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후쯤에나 돌아오실 예정이시니 부디 방으로 들어주십시오."
"주군?"
"...잘못들으셨나봅니다. 주인님이십니다."
날카로운 드워프의 귀가 틀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집사라 칭한자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 이었다. 어찌됐건 이미 도착해버렸고 주군이건 주인이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지금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여도 좋을것 같았다. 고단한 몸과 정신도 슬슬 한계였으니 지금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두명의 엘프가 다가와 안쪽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퍽 고급인 듯한 벽지와 태피스트리를 돌아보며 성의 주인의 부와 지위를 가늠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간단한 식사가 안쪽으로 들여진 후, 주인이 도착하시면 모시러 오겠다며 괴상한 향수를 허공에 두어 번 뿌린 엘프는 방을 나섰다. 비로소 혼자가 된 소린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보드라운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 정신은 몽마에게 잡혀간 것 처럼 모든것이 아스라졌다. 좋은 향내가 어느샌가 사방에 가득 차올랐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소린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석양이 지고 있는 창가였다. 따스한 빛이 창문 너머로 어룽대며 침대 근처에까지 머물러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한 몸은 좀처럼 긴장하려 들지 않았다. 묘하게 풀어지는 몸에 의심한 채,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엘프가 아까 흩뿌리고 간 향내가 신경쓰였다. 소린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창가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향하자 맑아지는 머릿속이 느껴졌다. 몇번 숨을 들이키고나서야 소린은 제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강하게 느껴지는 허기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의 근처에는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식어도 본연의 맛을 상하지 않게 할 정도의 음식이라 보는 것 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무언가 생각하기도 전에 뱃속에서 정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잘 차려진 음식으로 손이 가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안주머니에 챙겨둔 마른 빵 한 조각과 약간의 물로 속을 달랬을 뿐이었다. 겨우 숨을 돌리고 부족한 것들을 채우고 나서야 몸안에 생기가 돌았다. 욕구를 해결하고 나니 그제서야 이곳에 온 이유가 생각났다. 주인은 오후에 돌아온다 했는데.. 새삼 어떤 이일까 궁금했지만 소린은 곧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생각을 비웠다. 엘프일 뿐이었다. 누구이고 어떤 자이고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보수를 받아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저 마음을 비우고 있기로 하지 않았는가.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은 채, 소린은 굳건히 자신을 다독였다. 눈과 귀를 닫는 편이 지금은 이로운 듯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엘프가 방 안으로 들어와 주인의 귀환을 알렸다. 주변의 정리를 하는것을 지켜보던 엘프는 소린이 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아까와 같은 검은 천이었다. 스스로 요구한 것 임에도 불구하고 소린은 내키지 않은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 눈을 가렸다. 머릿속으로 은밀히 숨겨둔 단도가 있는곳을 그리며 내밀어진 엘프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걷는 소리가 예민해진 귓가를 울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꼴같잖게 엘프의 손을 잡고 걸어가다니. 코웃음이 나왔지만 소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일 일 뿐이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스스로 생각을 제어하고 머리를 비우는 그 긴 시간동안 엘프는 그를 어딘가로 인도했다. 한참을 걷다 잠시 손을 놓은 채, 문을 열어제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손을 끌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 왔습니다. 이쪽으로.
문 안쪽의 공간은 꽤나 천장이 높고 거대한 홀과 같다 느끼며 소린은 어릴적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 곳엔 어린아이와 같이 웃는 자가 있었고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감싸는 이가 있었다.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린에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느릿하게 단을 올라 어딘가에 당도하자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엘프는 다시 손을 놓았고 그의 주인인 듯한 자에게 예를 갖췄다.
그 순간 느껴지는 시선.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엘프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소린은 알 수 있었다. 시선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 게다가 어딘가 낯설지 않은 기시감. 혼란스러워하는 소린의 앞에 낮은 저음이 잔잔하게 퍼졌다.
"나의 성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소린 오큰쉴드."
귀에 스미는 목소리는 마치 짙은 어둠처럼 몸을 감쌌다. 하이엘프들이 쓰는 억양. 시야를 가린 검은 천 속에서 눈꺼플이 바르르 떨리는것을 느끼며 소린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희미한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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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린스란. 어두운 숲 1
드워프의 위대한 왕과 그의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린 왕자에게는 기댈곳 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의탁해 떠돌며 잠자리를 구걸하고 나어린 조카들을 돌보며 일을 해야만 했다. 무기를 쥐던 강인한 손은 고작 인간들의 대장간에 빌붙어 망치를 들어야 했고 호사스러운 보석이 장식된 튼튼한 갑옷이 걸쳐져있던 단단한 몸은 더러운 작업복으로 휘감긴 지 오래였다.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가며 과거를 잊지말자 그토록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까지 생각하기에 닥친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하고 서러웠다.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 말고 새로운 돈벌이를 찾은 건 그때 즈음 이었다. 같이 일하던 인간들 중 하나와 친해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다친 이의 어깨뼈를 맞추고 부은 근육을 매만져 준 적이 있었다. 대대로 쇠를 만져온 손아귀의 힘은 단단했고 보석을 세공한 손길은 날카롭도록 매서웠다. 아무것도 아닌 일 이었지만 인간은 너무나도 만족했고 붓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작게 소문이 돌아 이리저리 뼈를 맞춰주고 근육을 풀어주는 일을 종종 하게된 소린에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전문적으로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다행히 인간들 중 의술에 조예가 깊은 이가 있어 눈대중으로나마 혈과 근육의 움직임을 배웠다. 소소하게 일을 하는 중간에 한 두번 씩 연락이 오면 마사지를 해준 뒤, 대가를 받는 일은 사실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았고 뭉툭해져버린 손끝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나자 찾는 이는 늘어만 갔다. 인간의 힘으로는 낼 수 없는 괴력에 몇몇 다른 종족에게서도 연락이 오곤 했다. 대부분의 일들을 소린은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단 한 종족에게서만큼은 어떤 연락이 와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종족은 엘프 종족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아주 어두워진 밤 이었다. 겨우 허기를 채우고 소린은 킬리와 필리 두 형제들과 함께 작게 놓은 모닥불을 앞에둔 채, 밤을 지샐 준비를 했다. 정교하게 세공된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마무리를 하던 소린의 곁에는 남은 쇳조각들을 들고 이리저리 맞추며 장난을 치는 조카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희미하게 웃음띈 얼굴로 바라보며 작업에 박차를 기하던 머리맡에 어느순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해 흠칫 놀란 소린과 킬리, 필리는 방어자세를 취하며 화들짝 제자리에서 튕겨져 올라왔다. 소린은 잽싸게 들고있던 단검을 겨눈 채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누구냐!!!"
"진정하시오. 소린 오큰쉴드. 나는 적이 아닙니다"
양 손을 들어보이며 무기가 없음을 고하는 인영은 흰 로브로 온몸을 감싼 채, 얼굴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린은 그가 입고있는 로브가 젖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 의미를 알아챘다.
"더러운 엘프에게 볼일은 없으니 순순히 보내줄 때 가는게 좋을거다. 계속 있으면 험한꼴을 보게 될것을 보장하지."
그제서야 자신들의 앞에 있는 자가 엘프라는 걸 알게된 킬리와 필리는 재빨리 벽에 걸린 무기들을 꺼내 손에 들었다. 낡고 녹이 슬어 형편없었지만 본디 드워프의 왕실에서 쓰던 것이니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란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물며 여럿도 아닌 하나 아닌가. 간단한 무기조차 들지 않은 엘프.
도저히 경계가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엘프는 깊게 쓰고있던 후드를 벗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굽이치듯 밖으로 흘러나왔다. 준수한 미모의 엘프는 손을 내린 채 공손하게 그에게 다시한번 인사했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오큰쉴드. 제가 이곳까지 온 것은 모시는 분의 전언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엘프가 모시는 분은 고작 엘프일테지. 더이상 듣고싶지 않으니 이곳에서 나가라."
"제가 모시는 분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 일텐데요."
"다시는 그 간교한 말솜씨에 넘어가지 않는다. 조부때의 굴욕을 내가 잊을 것 같으냐!"
"조부의 일은 매우 유감입니다. 하지만.."
"필리! 킬리! 이 자를 당장 바깥으로 내쫒아라!"
이어지는 말을 듣지않은 채 소린은 필리와 킬리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싸늘해진 얼굴로 우악스럽게 양 팔을 잡아 당긴 채 밖으로 내치려는 필리와 킬리, 그리고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엘프의 힘이 맞닥뜨렸다. 찢어질 듯 찢어지지 않는 로브가 짜증이 난 필리는 괴력을 발휘해 저항하는 엘프의 소맷단을 잡아 던졌고 졸지에 크게 휘청한 엘프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넘어지는 것은 피했지만 어느새 틑어진 소맷부리 사이로 주머니가 빠져나오는 것 까지는 막지 못했다.
털썩- 하고 제법 묵직하게 바닥으로 떨어진 주머니의 입구가 열렸고 반짝이는 금화가 새어나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순간, 필리와 킬리의 동작이 멈추며 눈이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금화주머니. 저것들만 있으면 당분간은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당장 배를 곯지 않아도 되었고 지긋지긋하고 좁은 공간이 아닌 제대로 된 터젼을 마련할 수도 있을것만 같았다. 소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자는 빠르게 제정신을 찾았다. 저것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러운 엘프의 돈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린은 겨누었던 단검을 치우고 무릅을 굽혀 금화를 주웠다. 침착하게 주머니에 그러모은 후, 입구를 조이고 매듭을 지어 단단히 묶었다. 킬리와 필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소린은 주머니를 엘프에게 건넸다.
"어서 돌아가라. 쓸데없는 감정의 소모를 하고싶진 않다."
하지만 엘프는 주머니를 받지 않았다. 그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소린을 바라볼 뿐 이었다.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주머니의 무게에 소린이 외려 당황했다. 눈을 부릅뜨며 위협을 해 보았지만 엘프는 그저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 이었다.
"저로 하여금 주군의 전언을 전할수 있도록 윤허해주십시오. 드워프의 왕자여."
".....그 호칭으로 나를 부르지 말라."
"주위를 물려주십시오. 잠깐이면 됩니다."
나긋하게 웃는 얼굴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소린은 금화주머니를 낮은 탁자위에 던져둔 채 한숨을 내쉬었다. 쉬이 포기하지 않을 언사였다. 잠깐 고민을 하던 소린은 멀뚱히 서있던 조카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자리를 비켜다오. 곧 끝난다."
필리와 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했다. 기척이 없어질 즈음 엘프는 다시 고개를 틀어 소린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마주본 시선에 소린은 긴장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고 엘프는 수려한 입술을 열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소린님을 찾으십니다."
"이유는?"
"소문을 듣자하니 뼈를 맞추고 뭉친 근육을 손보는 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신다 하더군요."
"엘프는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였다면 돌아가는 편이 좋겠어."
"돈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엘프의 말에 소린은 하, 짧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어디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 셈인가 이 엘프는. 어이없는 눈으로 쏘아보자 다시 예의 그 웃음을 지어보인 엘프는 바로 입을 열었다.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왕자께서 예상하신대로 제가 모시는 분은 엘프십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요. 이것은 정당한 거래입니다. 왕자께서는 돈이 필요하고 제 주군께선 왕자의 그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물론 저희쪽도 왕자께서 엘프들과 말조차 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소 큰 대가를 준비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엘프가 손을 뻗어 가리킨 것은 테이블 위에 소린이 놓아 둔 주머니였다. 얼핏 보아도 꽤 묵직한 주머니는 아까 확인해보았지만 모두 금화로 채워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소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장 조카들의 의식주가 몇 달은 해결될 큰 돈이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심경의 변화를 눈치 챈 엘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것은 총 치르게 될 대가의 1/5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일이 끝나면 치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도착하는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겁니다. 나흘 정도 저와 함께 가주셔야 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무엇이 문제이십니까. 혹 주군을 마주하는것이 불편하시다면 안대를 착용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자피 손으로 하시는 일일 뿐더러 굳이 얼굴을 마주하시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엘프를 비껴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더러운 엘프의 돈 이었다. 하지만 이리 빼앗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아까 마주했던 필리와 킬리의 눈동자에 서린 기운이 잊혀지지 않았다. 부족한 것 모르고 자라온 어린 아이들에게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혹독한 것일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다 자란 성인이지만 저 아이들은 다르지 않은가. 아직 제대로 전쟁조차 치뤄보지 못한 아이들인데 이렇게 고생을 하고..
한참을 망설이던 소린은 다시 시선을 들어 엘프와 마주했다. 굳건한 의지를 가진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나흘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배상액을 두배로 걸어야 할 것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이상은 걸리지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안대를 착용하지. 당신의 주군이 누구든 엘프를 마주하는것은 역시 유쾌하진 않으니 까."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간단한 짐을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밖에 왕자님을 모셔갈 말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말을 타지 않는다."
"타실 수 있는 말입니다. 특별히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엘프는 웃으며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언가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곧이어 물에 쫄딱 젖은 필리와 킬리가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소린, 가려는겁니까?"
"...나흘이다. 대장간에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고 전해라."
"소린.."
"어자피 일일 뿐이다. 더러운 엘프들의 돈을 뜯어내는 것도 복수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필리. 킬리를 잘 돌보도록. 내가 올떄까지 별다른 말썽이나 부리지 않게 잘 감시해."
"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거든요?"
"그래 알았다. 여기 금화를 두고갈테니 당분간 요기를 하도록 해라. 아랫 마을에가면 식당이 있을테니 말이다."
"... 빨리오셔야 합니다."
진지한 얼굴로 필리가 소린을 쳐다보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린은 필리와 킬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 힘차게 두드려주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옷가지와 간단한 것들을 챙긴 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맨 소린은 필리와 킬리를 한번씩 꽉 껴안은 후 밖으로 향했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맣고 어두운 밤. 그렇게 소린은 엘프와 함께 말을 타고 보이지 않는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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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켈리안나. 조금 늦은 아침식사
창가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안나타르는 겨우 눈을 떴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후 흩어졌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한 안나타르는 그제서야 긴장을 늦춘 채 포근하게 감겨오는 흰 이불자락에 몸을 둘둘 감고 아직 떨쳐지지 않은 잠기운을 즐겼다. 먼 곳에서 봄을 환영하는 엘프들의 노랫소리가 창문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를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침대에서 좀체 나오지 못하는 안나를 깨운 것은 어느새 익숙해진 발자국 소리였다.
혼자 있는것을 알면서도 문을 노크한 뒤에서야 방안으로 들어온 켈레브림보르는 행여라도 잠든 이가 눈뜰까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침대 곁으로 다가와선 손에 양껏 든 것을 근처에 놓아두고 발치에 앉아 가만히 잠든 이를 지켜보았다. 시원한 이마. 느슨하게 땋아 반쯤은 흐트러진 검은 머릿결. 반쯤 가리워진 얼굴에 곱게 감겨있는 눈과 오똑한 코가 보였다. 새빨간 입술끝에 시선이 머무를 무렵, 잠투정을 하듯 안나타르의 몸이 뒤척거리며 움직였다. 마법에라도 걸린 양, 무심코 뻗어진 손 끝이 따스한 볼에 닿았다.
투박한 손끝에 보드라운 살결이 닿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너무도 부드러워 혹 상처가 날까 두려웠다. 어젯밤의 뜨거운 숨결을 나누었던 일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쉬이 더듬지 못하고 그저 아주 작은 부분만 닿은 채로 켈레브림보르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없어질까 두려웠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볼에서 느껴지는 따스함과 작은 경직에 안나타르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의 볼에 손을 댄 채 바라만 보는 켈레브림보르가 눈 앞에 보이자 안나타르는 저도모르게 웃어보였다. 돌돌 말아둔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어 볼에 닿아있는 켈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안나타르의 얼굴을 졸지에 감싸게 된 켈레브림보르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큼큼거렸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안나타르를 바라보았다.
"해가 높다랗게 떠올랐으면 깨우시면 될 일 아닙니까. 어찌하여 쳐다만 보고 계십니까."
"...너무 곤히 잠이 들어 혹 방해할까봐.."
"그럼 재워주시려고 이리 손을 대셨습니까."
"그건..!"
"농담입니다. 켈리. 좋은 아침이에요."
움찔거리는 그의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이며 작게 웃어보이는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와 같아 켈레브림보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한참을 미약한 힘으로 오며가며 장난을 친 안나와 켈리는 곧 동시에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실은 아까 잠깐 잠에서 깼습니다만, 켈리가 보이지않아 꿈인 줄 알고 다시 눈을 감았지요."
"미안하다.. 단지.."
"단지...?"
"어젯밤에..혹 나 때문에 식사를 못한게 아닐까 싶어..서."
"...아.."
"아침이면 배가고플게 아니냐. 그래서 간단하게 좀 요깃거리를 준비하느라 일찍 곁을 비웠다. 미안하구나."
"직접..말입니까?"
"...부족한 솜씨지만 말이다."
쑥스럼하게 웃어보이며 시선을 모로 돌리는 켈레브림보르를 쳐다보며 안나타르는 지난밤을 회상했다. 분명 저녁을 먹기도 전인 애매한 시간에 그의 대장간에 조언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방문해 그를 유혹했었다. 어쩐지 불붙어 달려드는 그를 막기도 애매해져 밤새 품에 안겨 울다지쳐 잠든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는걸까. 이상한 남자다. 이 자는 어째서 이렇게 내게 맹목적일 수 있는걸까..
하지만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만이 떠올랐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거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슬쩍 몸을 일으켜 손을 뻗으면 켈레브림보르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역시 손을 뻗어 부축해주었다. 똑바로 앉아 떨어지려는 손을 마주잡아 꽉 쥐어주면 또 진중한 눈빛이 안나타르를 향해 쏟아졌다. 달콤한 입술이 열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아니다...내가 어제 부주의.."
"쉿."
황급히 다가서 켈레브림보르의 입술을 손끝으로 막았다. 움찔거리며 아주 조금 뒤쪽으로 물러난 그의 눈빛에 동요를 읽었다. 금새 떨어진 손끝은 다시 켈리의 손을 잡았다.
"어젠..저도 조르지 않았습니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안나타르."
"네?"
".....아니다. 고맙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든게 고맙다. 네 존재가..이렇게 내 앞에 있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그리 말씀해주시면..제가 더 감사하지요."
따스한 눈빛이 오갔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끼며 안나타르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켈레브림보르의 품으로 조금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시장합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아, 미안하다. 한눈을 또 팔았구나. 잠시만.."
잡았던 손을 황급히 놓아두곤 켈레브림보르는 근처에 놔두었던 것을 째로 들고왔다. 작은 테이블같이 생긴것 위에 가벼운 음식들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안나타르의 앞에 그것들을 통채로 놓고 병을 기울여 우유를 따라냈다. 컵이 찰랑찰랑 차오르자 그제서야 미소를 지어보이며 침대위에 함께 앉아 식기를 건넸다.
"가볍게 먹기엔 괜찮을게다."
"...이것도 직접 만드신 겁니까?"
"아, 응.."
음식보단 제 무릎위에 놓인 트레이에 관심을 가지는 안나타르에게 반응해 또 귀끝이 새빨개져버렸다. 좌 우로 기웃거리며 모양을 살펴본 안나타르가 방긋 웃으며 예쁘다고 칭찬하자 볼까지 물들어버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켈레브림보르는 음식이 더 식을까 걱정돼 나이프와 포크를 붙잡고 먹기좋은 크기로 음식을 조각냈다. 접시째 건네주려 고개를 들자 안나타르는 빙글빙글 웃으며 살짝 입을 벌린 채, 켈레브림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어제 무리를 해서 팔과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몸이 불편하면 진작에 말을 해야 할 것이아니냐.. 어디 자세히 보자."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엇이냐. 내 뭐든 들어주마."
"켈리가 만든 음식. 직접 먹여주시면..안되겠습니까?"
"아..."
"부탁입니다. 켈리."
진득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피할수가 없었다. 흠. 흠흠.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켈레브림보르는 포크로 음식을 찍어올리고 잠시 멈칫 하다가 안나타르의 입 근처로 가져갔다. 활짝 웃는 입술이 좋은 호선을 그리다가 덥썩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움직이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켈리의 시선을 느끼며 안나타르는 충분히 음식의 맛을 음미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꿀꺽 넘긴 채 입술을 혀로 슬쩍 쓸어내린 안나타르는 눈웃음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켈리."
"..다..행이구나."
"하나 더 주시겠습니까."
"아, 응. 그래. 이번엔 이거. 이게 괜찮을 것 같다."
"아-"
신이난 켈리의 손짓과 오물오물 받아먹는 안나타르의 사이엔 달큰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이들 사이로 높게 솟아오른 햇빛이 내비쳤다. 밖에선 여전히 에레기온의 엘프들이 부르는 즐거운 환희의 노래가 넘실대며 사방으로 퍼졌다.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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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사흘째의 밤.
벌써 사흘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설원이 바깥으로 펼쳐졌다. 멍하니 창가에 기대 밖을 내다보았다. 그새 온도는 더욱 내려가 창문에 김이 하얗게 서렸다. 가볍게 양쪽으로 목을 두어번 꺾어 소리를 낸 뒤 엘론드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까 내린 커피가 딱 좋은 향을 내뿜고 있었다. 머그에 가득 따른 후 침실로 돌아가 흐트러진 침대위에 가만히 앉아 홀짝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지도 않은 신혼놀이였다. 학교에서 도망치듯 회피했던 자신을 따라와 가둔격이 아닌가. 어쩌면 납치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 상황은 기묘했다. 그러나 더욱 이해가 안가는 것은 자신이었다. 능히 잡히지 않을수도,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조용히.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탁자에 컵을 올려두고 드러누워버렸다. 눈을 감자 소리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포슬하게 눈이 내리는 소리. 거실의 시계초침이 톡 톡 움직이는 소리. 나뭇결이 추위에 수축하며 다각다각 마르는 소리. 그리고 저 먼 곳 건너편의 욕실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세계가 닫히는 듯한 무겁고도 고요한 적막. 그 모든것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 너무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거 아닌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꺼플이 떠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막 사워하고 나온 지긋지긋한 친우의 얼굴이었다. 젖어 앞으로 내려온 머리칼이 자꾸 흘러내리는지 손으로 연신 넘겨댄다. 살짝 찌푸리며 가볍게 밀어제쳤지만 외려 그는 나를 끌어당겨 품속으로 깊게 묻어버렸다.
- 머리라도 말리고 와. 젖는거 싫어.
- 그 김에 샤워라도 하는게 어때. 씻겨줄 용의도 있어.
- 사양하지. 오전에 했거든.
기어코 밀어낸 뒤 다시 일어났다. 그렇다고 갈곳도 할일도 없었다. 멍하니 그렇게 앉아있자 스란두일이 따라 일어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했다. 움찔 하며 몸을 떨어내자 뒤에서 웃는소리가 귓가로 울린다. 어색하다. 어색하면서 안심이 됐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생경하면서도 싫지않은 감각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사흘을 그와 함께 보내지 않았는가. 이제와서 생각하기는 너무 늦은 주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엘론드는 슬그머니 다시 눈을 감았다. 못된손이 올라와 드문드문 잠긴 셔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따라올라와 손을 제지하려고 잡았지만 어느샌가 양손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잡혀있었다. 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지만 그것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 평소 볼수없는 웃고있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여오는 손목과는 다른 맥이빠지게 선한 얼굴로 미소지으며 이마에 눈에 코에 키스한다. 부자연스럽게 꺽인 목과 잡힌 손목이 슬슬 아파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완연히 기대자 다시금 웃는소리가 들리며 몸이 뒤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옆으로 비껴누워 고개를 돌리면 짙은 호수같은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 도망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가는걸 추천할텐데.
-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 흠. 진심일까 아닐까. 자네는 어떤가. 진심인가 아닌가?
- 진심이라..
잠시 멍하니 시선 옆을 비껴 허공을 응시하자 귀신같이 알아챈 스란두일이 손을 올려 얼굴을 고정 시킨 뒤 입술을 마주댔다. 부드럽게 노크하듯 톡 톡 두들기고 입안쪽을 조심스럽게 침범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진득하고 느릿하게 안을 헤집고 다니다 겨우 떨어져서는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두개의 호수속에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한 듯 고요한 파문이 일고있었다. 파문의 주인공이기라도 한 듯, 그 속에 내가 비춰졌다. 그를 멍하니 응시하자 스란두일은 관자놀이와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어내며 다시한번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 상관없어. 진심이든 아니든 네가 지금 여기에 있는것이 더 중요해. 그걸로 됐어.
- 스란두일, 그러니까...
- 아무말도 하지마. 함께 있을 때는 그걸로 된거야. 엘론드 페레딜.
수학공식이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정의내리는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함께 있을 때는 그걸로 된거야. 마치 마법같다고 생각했다. 고작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놓였다. 평안해졌다. 손을 올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스란두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호수같은 눈이 감기고 입술이 열렸다. 세계는 고요했고 그곳에는 스란두일과 나.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걸로 이유는 충분했다. 나역시 눈을 감았고 그 순간 세계는 움직임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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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3
밤의 시작과 함께 안채에 발을 들인것만 같았는데 벌써 엘베레스의 별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나타르는 놓아버리고 싶은 정신을 그러모아 힘겹게 눈꺼플을 들어올렸다. 불확실한 촛점이 겨우 맞춰져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제 곁에 누워 잠든 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뻔뻔스럽게도 제 곁을 차지하고 자신을 쿠션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둠 숲의 왕자는 세상 모를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온 몸이 꽉 묶인 듯 껴안긴 탓에 벗어날 방도가 보이질 않았다. 작게 혀를 차내며 팔을 밀어 움직여 보려했지만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고통에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하여튼 어린게 무식하게 힘만 세서.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내 뱉으며 안나타르는 잠시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간만의 노동을 끝낸 몸은 피로를 견디지 못했다. 하필 며칠 일이 몰려 무리를 했던 차에 쌓인 피로라 쉬고싶은 욕망이 살금살금 올라왔다. 하지만 씻고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몸은 열기가 식어갈수록 불쾌한 기운을 더해가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안나타르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안쪽의 어딘가를 조용히 응시했다. 고급스럽게 걸쳐진 휘장이 미세하게 움직이는가 했더니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방 안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씻을 물을 준비해라. 그리고 시트를 좀 갈아야겠다."
"네 주인님."
"조금 있다가 물이 데워지면 날 부축해라. 소리가 나지 않는 녀석으로 데려와."
고개를 짧게 숙여보인 사내가 다시 방 밖으로 사라졌다. 돌아올 시간을 가늠해보며 다시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정말 오랫만이었다. 모르도르의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손님을 체계적으로 관리한 후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화하고 발라들 또한 바쁜것이 사실이었다. 크고작은 세력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분화하고 합쳐지는 역사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머리 쓰기에 골몰했고 모르도르는 자연스럽게 핀트를 벗어나 한가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스란두일은 말하자면 평온한 호수에 갑자기 던져진 작은 조약돌 이었다. 아무도 날아오는걸 신경쓰지 않았고 맞을수도, 맞지 않을수도 있는 그런 작은 돌이었지만 맞으면 제대로 아플것 같은 마치 극약과도 같은 조약돌이었다. 결국 맞아버렸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변변치 않은 이라면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처리해 버리려고 했는데.. 신다르의 개망나니라는 별명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몸을 합치며 슬쩍 힘을 빼어 안달내는 찰나는 있었지만 스란두일은 본래 부드러운 스타일은 아닌터라 밤새 힘으로 강하게 몰아붙여왔다. 교태를 부리면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답했고 그 이상이면 또 그 이상을 안겨줬다. 기이하게도 그 합이 맞아떨어져 보기드물게 진심으로 흥분해버렸다.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연기와 조련에 능숙한 터라 본심을 굳이 보이지 않아도 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어쨌거나 결론은 간단했다. 속궁합은 최고였다. 멜코르님 이후로 쉽게 만족해보지 못했던 몸의 기쁨이 느껴졌다. 오르가즘에서 느낄 수 있는 한계치가 어디인지 시험해 본 기분이었다. 검은숲의 왕자가 아닌 그저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면 눈을 뽑고 팔다리를 부러트린 채 자신의 전용 노예로 사용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더이상의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었다. 남은 문제는 하나. 어떤것을 대가로 받고 옭아매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새벽의 한기가 이불틈에 스몄는지 왕자가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감촉에 다시 반짝, 눈이 떠졌다.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어떤것을 주고 내 발밑에 엎드릴테냐. 무엇이 가장 너에게 있어 값지고 사랑스러우냐. 사랑과 애욕이 담긴 시선으로 곱게 감긴 눈가를 한참 쳐다보았다. 무엇이라도 대답해주길 원했다. 들을 수 없는 머릿속 상념이었지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자라면.
그때 거짓말처럼 스란두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엘론드.."
온몸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동그랗게 뜨인 눈매가 가늘해지고 입술 끝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자였느냐. 너를 옭아맬 수 있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밖으로 터졌다. 계속되는 웃음에 몸이 떨려오자 스란두일이 다시 몸을 뒤척이며 꼭 안았던 몸을 그제서야 놓아주었다. 구속된 것이 모두 풀렸음에도 안나타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종이 와 그를 안아올릴 때까지 그저 미친놈처럼 계속 웃었다.
더러움을 남김없이 씻어낸 뒤 다시 방안으로 돌아온 안나타르는 아직 덜 마른 제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내린 뒤 이불을 열어 스란두일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선선한 느낌에 다시 스란두일의 팔이 허리에 감겨왔다. 온기를 그대로 느끼며 밀착해 코끝이 닿을 거리가 되어서야 안나타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니 꽃은 아름답게 피어야겠지요. 예하."
창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찬란한 빛 속에 붉은 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라졌다. 조용한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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