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론드. 폭우.

톨킨버스 2013. 9. 13. 12:10

늘 임라드리스가 따스하고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깊은 슬픔의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토록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비가 내리는 날엔 끊임없이 들려오던 엘프들의 노랫소리마저 불분명하게 사그라드는이었다. 몇 천년을 견뎌온 날 중에 기쁘고 좋은 날만 있을까. 이유없이 우울하고 시름에 잠겨 가라앉은 분위기에 이미 많은 것을 겪어온 이들은 그저 담담히 웃어보였고 나이어린 엘프들은 덩달아 숙연해졌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빗소리. 눈 앞을 가로막은 어두컴컴한 천둥과 번개. 세상의 불행은 모두 임라드리스에 가져올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을 닫아 어둑어둑한 서재에 작은 불들이 드문드문 안을 밝혔다. 오래된 책을 필사하던 엘론드의 앞에 누군가가 주저하듯 다가왔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책을 바라보던 시선에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너울거리자 엘론드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곤란한 모습을 한 글로르핀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글로르핀델."
"......"

유독 요즈음 글로르핀델은 엘론드를 어려워했다. 아니 글로르핀델 뿐만이 아니었다. 임라드리스의 모든 엘프들이 그를 어려워했고 눈치를 보았다.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꺼내어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였고 슬픔이었다. 떠나는 그녀의 손끝에 입 맞추며 그녀를 위해 이겨내리라 맹세했건만 슬픔이란 존재는 쉬이 흐트러지거나 사그라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맞서 싸우고 이겨내려 안간힘을 써 보아도 그 거대한 것을 홀로 상대하기엔 마음속에 뚫려버린 구멍이 너무나도 크고 깊었다. 한번 부숴진 마음이 다시 한번 자극을 받으면 죽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또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초연해진 마음으로 엘론드는 아주 천천히 상처를 추스르고 있었다. 시간은 또 지나겠지. 세월이 가고 망가진 그 마음 한구석에도 얇디 얇은 종잇장이 하나둘 쌓이면 언젠가는 겉모습이라도 원래처럼 돌아오겠지.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이겠지. 그것이 슬픔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이미 알기에. 엘론드는 그저 미동없이 잔잔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걱정해서 오신거라면 괜찮습니다. 아직 정신도 멀쩡하고 식사도 꼬박꼬박 하고 있으니까요."
".... 주군."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평소에도 글로르핀델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함께는 아니었지만 늘 곁에서 지켜보던 이였다. 눈썹의 까딱이는 정도, 시선의 떨림. 그런 것들을 보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을지 지레짐작이 가능했다. 평소처럼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그를 올려다 보았지만 여느때와 달리 그의 시선 속에서는 비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밖으로 향했는지 몰랐다. 미친듯이 내달린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소리가 쟁쟁 울렸다. 저녁을 먹었는데.. 방에도 없고, 아이 셋이 한꺼번에....
억눌러왔던 불길한 공포가 온 몸을 엄습했다. 차갑게 식은 손 끝이 덜덜 떨려왔지만 입에서는 반대로 더운 숨이 터졌다. 흔들리는 시야앞에 놓인 것은 거대하고 강한 비바람이었다.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비가 시야를 가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엘론드는 그저 앞을 향해 달렸다.

이미 많은 엘프들이 주위를 뒤지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횃불이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보였다 사라졌다. 근처에 있었다면 진즉에 발견이 되었을 터였다. 간단한 보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엘론드는 무작정 깊은 숲 속으로 향했다. 어두운 숲은 마치 괴물과도 같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조금씩 조금씩 엘론드의 곁을 지키던 엘프들이 흩어졌다. 몰려 다니는 것 보다 나뉘어 찾는 것이 더 나았다. 여기 저기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귀를 찢을 듯 들려오는 빗소리에 그 소리들이 섞여 끔찍한 공포심을 일깨웠다. 이것은 고통에 울부짖던 켈레브리안의 목소리였다.
마주칠 자신이 없어 덮어두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 나의 연정. 연인. 그 가녀린 몸이 할 수 있던 일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 밖엔 없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토록 찾아 헤메다 발견한 모습은 끔찍하리만치 처참했다. 두려움. 공포. 울분. 한데 어우러져 가늠조차 하기 힘든 분노로 그는 칼을 들었고 순식간에 악을 징벌했다. 하지만 남은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놀랄만치 초연한 시선. 겨우 웃어보이던 부르튼 입술. 그것 뿐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살려줘요. 엘론드. 제발, 여기에.. 아악!!!!!!!!!!!!!!!!!!!!!!!!!!!!!!!
아득하게 멀어진 정신에 다리의 힘이 풀려갔다. 그 때에 천둥이 큰 소리를 내며 근처의 나무에 내리 꽂혔다. 그 순간 주위가 환하게 타오르다 곧 사그라들었다. 분노. 포효. 아니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 일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환청에 잠식당하지 말라는 상냥한 목소리. 따끔한 충고. 다시 엘론드는 도리질치며 정신을 다잡았다. 꾹 쥐인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그냥 환청이다. 약해진 마음에 스며든 악의 속삭임일 뿐이다. 강해진 정신에 더이상 악의 사념들은 접근하지 않았다. 엘론드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목 끝 까지 차오른 숨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쫄딱 젖어버린 몸에서 더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디 있는걸까. 어디로 간걸까. 아르웬까지 사라졌다면 필시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비오는 밤을 무서워 하는 아이였다. 늘 어미의 품에 꼭 안긴 채,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었다. 나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엘론드를 괴롭혔다. 하필 왜 오늘이었을까. 가장 궂은 날. 가장 좋지 않은 날. 왜 이런 날에 아이들 모두가 사라진걸까.
후들거리는 다리에 더이상 뛸 수 없어져 엘론드는 걸었다. 한참을 걷고 걸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참고 참았던 슬픔이 비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나 다행이었던 건,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가득 채워진 슬픔은 닦아낼 필요도 없었다. 목메어 부르지도 못했던 이름들을 나직이 읊으며 엘론드는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문득 어깨에 옷이 걸쳐졌다. 돌린 시야에는 글로르핀델이 있었다. 다가오는 줄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제 할일을 한다는 듯, 글로르핀델은 쳐다보는 엘론드의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에게 로브를 입혔다. 추위로 덜덜 떨리는 입가를 안쓰러히 쳐다보다 차가워진 손을 깍지껴 잡고 힘을 주어 당겼다. 찡그려진 미간에 겨우 한숨을 내쉬고서야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어째서 그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빠른 걸음으로 향하는 걸음 하나하나에 엘론드는 자책감을 담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다. 엄마의 품이 그리울 것이 당연했다. 안쪽 정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엘론드가 손수 베어 만든 나무 그네가 있고 켈레브리안이 유독 좋아하던 정원 속의 오두막 속에서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생각할 수록 자신이 한심했다. 자신의 깊은 슬픔에 빠져 아이들의 마음 하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자를 세상은 현자라 칭송했다. 이런 어처구니없을데가..

로브도 벗지 못한 채, 아이들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 막 잠이 들었다는 세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옹기종기 누워 눈감은 채, 이불을 덮고 있었다. 무너지듯 곁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고사리같은 작은 손들이 이불 위에서 움찔대고 있었다.
맞대어 온기를 느끼려는 손길을 글로르핀델이 제지했다. 아이들이 놀랄 겁니다. 그 말 한마디에 내밀었던 손이 다시 거둬들여졌다. 따스한 기운이 아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다가설 수도 없을 정도의 따스함. 나는.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떨리는 두 손이 얼굴을 감쌌다. 숨조차 마음껏 내쉬지 못한 울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나갔다. 곁에서 묵묵히 바라보던 글로르핀델이 조심스레 밖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사같이 잠든 아이들의 모습은 큰 위로이자 깊은 슬픔이었다. 여전히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대지를 적셨다. 지독한 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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