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거에요?"
막 솜씨좋게 꽃관을 엮어내던 손가락이 멈췄다. 청회색의 눈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면 어린 왕자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버린것을 애써 수습한 할디르는 그대로 관을 내려놓은 채 왕자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제가 떠나길 원하십니까?"
"아니요."
도리질치며 더욱 더 내밀어진 입술이 붉게 빛났다. 분명 자신의 동생 뻘인 나이의 엘프는 어둠숲에서조차 귀히 보살펴진 연유에서였는지 순진함이 빛을 발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을 되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이번 한번 뿐이랴. 정해진 답을 내어놓을때 까지 왕자는 같은 질문을 계속 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갑자기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왕께서요?"
"귀한 인연은 눈 깜짝 할 새에 사라진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요. 그렇기에 기회가 오면 꼭 잡아두어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어요. 할디르를 잡고 싶은데 할디르는 내가 한눈 판 사이에 가버릴 것 같은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할디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시무룩 해진 얼굴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비쭉비쭉 눈치를 보면서도 풀죽은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지만 오해한 채로 놔두는 것은 곤란했다. 할디르는 관을 마저 엮은 후, 왕자의 머리 위에 얹고는 화들짝 떠오른 시선을 향해 웃어주었다.
"저는 싫어하는 이에게 꽃을 선물할 만큼 착하지 않은데."
"이거.. 내거에요?"
"싫으시면 가져가구요."
"아니. 아니에요!"
더듬더듬 꽃잎 하나라도 상할까 조심스레 움직이던 손이 불현듯 멈추었고 새파란 시선이 할디르를 향했다. 일렁이는 눈빛 속에서는 조금전까지 보지 못했던 기쁨이 춤추고 있었다.
"정말 날 주는 거에요..?"
"네. 왕자전하거에요."
"...좋아하는 분에게 선물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저번에.. 그.. 이야기했잖아요. 되게.. 좋아하는 분이..계시다고."
아이 앞에서는 행동 하나도 허투루 하지 말라 내려오던 도리아스의 격언이 눈앞을 스치는것을 느끼며 할디르는 한숨을 쉬어냈다. 하도 귀엽고 깜찍하게 굴길래 에둘러 조금 장난을 친 것 뿐인데 진심으로 가슴 속에 새기고 있었을 줄이야. 이래서야 이제껏 노력한 것이 다 허사가 되어버린 격이었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쉰 할디르는 불쑥 레골라스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조금 비뚤어진 모양새를 바로잡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분은 아직 어리세요. 제대로 말도 못꺼냈는걸요."
"어려...요?"
"아직 성년조차 되지 않았어요."
"....제 또래네요."
"그렇죠?"
"예뻐요?"
"예뻐요. 엄청."
"...좋겠네요."
금새 시무룩해진 얼굴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왕자의 자존심은 생각보다 높아서 지금 쓰다듬으면 성질을 낼지도 몰랐다. 안타까움에 입술을 축이며 할디르는 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왕자전하는 약혼자가 있나요?"
"없어요. 그런거."
"그래요? 의외네요."
"뭐가요?"
"그냥요."
그저 웃으며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다가도 금새 다시 시무룩해진 모습은 쉬이 풀리질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디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성인이 되는 날에 정식으로 청혼하려고 생각중이에요."
"얼마 안 남았네요."
"받아줄까요?"
"...할디르는 멋있으니까 받아줄거에요."
"저는 가디언 일 뿐인데요."
"아니에요! 멋있으니까! 음.....좋아할거에요."
"정말요?"
"네! 정말로 멋있어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끄덕이는 모습에 반짝임이 가득했다. 아이의 맹목적인 믿음인가. 아니라면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어 한 대답일까.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어린 왕자님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 하나가 중요했다.
"고마워요. 레골라스. 나를 좋아해줘서."
"할디르도 나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당연해요. 우린 친구잖아요?"
"맞아요. 친구."
혀끝에 번지는 친구 라는 발음이 간지러운 듯, 왕자는 쑥쓰러이 웃어보였다. 조금 눈치를 보다가 일어서 옷에 붙은 풀들을 떼기 시작한 레골라스는 숲으로 들어가 엊그제 발견한 아기새를 보러 가자며 할디르를 졸랐다.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확인한 레골라스는 앞서 달려나가 재촉했다. 쏟아지는 햇살이 왕자의 머리칼 위에서 꽃과 함께 춤추며 날아올랐다. 홀린 것 같은 시선으로 할디르는 나풀거리는 몸짓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겼다. 몇 십년의 짧은 순간이 지났을 때, 왕자의 머리 위에 얹은 것과 같은 꽃들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니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지만 혹여나 꿈꾸던 소원이 이루어져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이제껏 보았던 모습들 중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이의 모습일거라고 할디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간절히 꿈꾸는 자에게 소망하던 미래가 온다고 했던가. 머릿속으로 계속 원하는 것을 되뇌이는 할디르의 얼굴에도 왕자와 똑같은 금빛의 미소가 어렸다. 아직은 쉬이 내뱉지 못한 수줍고도 상냥한 소망의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