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마에. 온기.

톨킨버스 2013. 11. 21. 00:53

사촌의 몸은 언제나 서늘했지만 나는 그 서늘함에도 어쩐지 온기를 느꼈다. 무심코 감겨오는 팔과 다리에 가만히 몸을 맡긴 채,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밀어내도 밀릴 힘이 아니었고 지금은 몸을 비틀 힘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새까맣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숨이 막혔다. 평온했다. 조용했다. 여느때처럼 조용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랐다. 나는 매달려있지 않았고,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는 없어져 버린 오른손이 있던 자리가 아파왔다. 흠칫, 놀라며 무심코 맞잡은 곳에 비어버린 공간이 어색했다. 하나 둘 무뎌지면서 감정이 메마르고 신경마저 감각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것은 또 아닌 듯 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적응하려 애썼다. 미미하게 이어지는 신경의 저림은 지금껏 겪어왔던 아픔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살아남은 자신은 결국 패배자에 불과했다.

꿈속의 나는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한쪽 팔이 끊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추위와 더위를 견뎠다. 타는듯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구차한 목숨이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끊없이 이어지는 산능선. 가파르게 깎아지른 절벽들. 에루께서 창조한 광활한 자연만이 주위에 있었다. 간혹 지나는 것은 어둠의 기운을 담고 주변을 정찰하던 새들. 매달려있던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한번씩 휘감고 지나가던 바람. 그 뿐이었다. 오로지 인내와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곳. 눈을 감아도 그려질 정도로 지긋지긋한 풍경. 철의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맞는 무섭고도 두려운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비워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커다란 손이 내게 다가왔다. 손목을 부러트릴 정도로 힘주어 잡아당기던 손이 사라지고 꽉 죄인 아픔에 헐떡이고 있으면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통증에 온몸이 잠식당했다. 잠긴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오고 부르튼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이를 악물면 후둑 떨어지는 핏방울은 사촌의 얼굴에 비처럼 흩뿌려졌다. 오랜 시간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몸이 무섭게 삐그덕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더듬거리며 맞잡은 곳에서 샘솟는 피는 나의 머리색보다 짙었다. 흔들리는 시야에는 늘 보던 풍경이 서서히 이그러졌다. 귓가에선 여전히 나를 비웃는 모르고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스며든 어둠의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정신을 다잡고 나서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겨우 귀에 들렸다. 마이티모 괜찮아. 울지마. 울지마.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주문이라도 되는 듯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억눌린 슬픔을 전하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

갑자기 커다란 손이 꿈에서처럼 비어버린 팔목을 매만졌다. 천천히 둥글리듯 상처부위를 다독이던 손은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 품 안으로 가뒀다.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잡힌곳을 비틀며 떨어지려고 했지만 몸은 주인의 의지를 거부했다. 파묻힌 꼴이 되어서야 끌어당기는 것을 멈춘 커다란 손이 다시금 팔목으로 향했고 나는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아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힘주어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노곤함이 묻은 목소리. 잠결이라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를 듣고나선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눈뜨지 않은 채로 상처부위를 매만지던 손은 눈물이 날 정도로 다정했다.

"금방 나을거야. 얼른 기운을 차려야지. 이제 정말 자자."

들릴 듯 말 듯 스며든 목소리.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는 손길. 맞닿은 이마의 열기까지. 마치 어릴적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할 때 처럼 따스한 온기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이젠 진정으로 혼자가 아니란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꿈보다는 잠이, 과거보다는 미래가 필요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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