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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의 밤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궁에 당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왕을 배알하고 나온 그 짧은 시간동안 밖은 온통 캄캄해져 있었다. 숙소를 안내하는 엘프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 할디르는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곳과는 전혀 다른 숲의 모습에 조금은 흥미로워했다.
이방인을 위한 숙소는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머크우드의 특성상 왕실의 중요한 곳들은 깊숙한 지하에 숨겨져 있었고, 혹여나 자리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이렇게 구분해놓았다고는 했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미 숲에 진입하면서부터 모든 무기들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였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암기정도만 몸에 숨기고 들어온 할디르의 눈에도 머크우드의 대우는 유별났다. 그저 지나던 방문자도 아니고 사신의 임무를 띄고 온 자에게까지 엄격하게 적용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였다.
혼자가 된 후에야 겨우 긴장되었던 숨을 고르게 내쉬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수발을 드는 이가 식사를 하시겠느냐 물어왔지만 내키지 않아 물리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고서야 식욕이 돌아왔다. 어자피 넉넉히 챙겨온 램바스가 있으니 괜찮겠지란 안일한 생각으로 그는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확 트여진 창에서는 달빛이 따스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의 생활은 익숙했지만 또한 이토록 높은 곳에 의도적으로 지어진 곳은 처음인지라 풍경은 여전히 색달랐다. 창밖에 보이는 것은 그저 푸른 숲의 거대한 모습일 뿐. 로스로리엔에서처럼 작은 새싹이나 아름다운 꽃들은 찾아볼 수 조차 없는 삭막함이 감돌았다. 그제서야 할디르는 머크우드 라는 지명의 뜻을 가슴속에 아로새겼다. 어둠이 훝고 지나간 공간은 손댈 수 없이 공포와 절망에 짓눌려있는 것 처럼 보였다.
로스로리엔의 왕과 여왕께서는 이런 모습들을 걱정하고 계셨다. 자신들이 수호하고 있는 영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머크우드의 전례를 주시하고 있으셨고 또한 염려하고 계셨다. 언제 어디에서 악의 세력들이 마수를 뻗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두개의 세력이 연합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냐며 화친을 제의하시려 했지만 생각보다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워낙 감정의 골이 깊었던 사이였다. 아직도 불신이 두 세력 사이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것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왕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어자피 쉬이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깃을 적셔가는 것처럼 조금씩 교류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마음을 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웃어보이시던 주군의 말씀을 상기하며 할디르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로 했다. 모처럼의 근무에서 벗어난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은 생각을 편히 고치자마자 긴장을 서서히 풀어냈다. 적어도 사신의 깃발을 가져온 이에게 문전박대를 하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곳 같았다.
잠깐 긴장의 끈을 늦춘 사이 아주 미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감기려던 눈이 번쩍 뜨인 채, 방의 입구로 다가가 천천히 등을 벽으로 붙였다. 이곳에 다른 손님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곳으로 오는것이 분명했다. 식사도 거른다고 했으니 더이상 볼 일이 없을텐데.. 역시 아직까지도 불신이 자리하고 있는것인가 생각하며 할디르는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암기를 꺼내고 준비했다.
발걸음이 점점 이곳으로 다가왔다. 잠시 멈칫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행동에 먼저 달려들어야 할지 아닐지를 고민하던 것도 잠시, 거짓말처럼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실례합니다. 왕께서 내리신 것이 있어 늦은 시간임에도 이리 들렀습니다. 주무시던 중이 아니시라면 잠시 괜찮을까요?"
무엇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따로 없으셨지만 상대의 말투는 꽤나 온화하고 침착했다. 침입자로서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할디르는 겨누었던 암기를 다시 숨기고 조금 시간을 지체했다가 문을 열었다. 바로 코 앞에 서있던 엘프가 빙긋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들의 만남에 별이 빛나는군요. 스란두일의 아들 레골라스라고 합니다. 로스로리엔의 할디르. 이시지요?"
웃어보이는 모습이 햇살처럼 환했다. 자신의 이름까지 말할 줄 몰랐던 할디르가 조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소개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졸지에 빼앗겼군요. 그렇지만 다시한번 스스로 하지요. 로스로리엔의 할디르입니다. 그대가 머크우드의 왕자님이십니까."
"왕자라고 하기엔 조금 쑥스럽네요. 그냥 레골라스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괜찮으시다면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가도 좋을까요?"
선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에 들린 바구니를 슬쩍 들어보였다. 간단한 식사거리와 함께 들어있는 포도주 병을 확인하고 난 후에서야 할디르의 표정에도 미소가 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붙이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직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지만.
손님이 들어올 수 있게 슬쩍 자리를 비키자 당연하다는 듯, 그는 안쪽의 테이블로 향해 이것저것을 꺼내놓았다. 달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서 등을 지고 열중하는 모습에서 언뜻 왕의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서자 막 준비를 마친 손을 뻗어 자리를 권했다. 졸지에 마주보고 앉게 된 자리에서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따갑네요."
"실례했습니다. 남을 관찰하는것은 제 일중 하나라서.."
"아니에요. 기분이 상했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일 줄 알았다. 천천히 웃으며 왕께서 그리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계시진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는 포도주의 병을 뜯고 가져온 잔을 채웠다. 막 반쯤 차오른 잔을 건네받고 조금 고민하던 새에 조금 도톰한 입술이 다시 열렸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머크우드에서도 중히 여기는 사항입니다. 왕께서는 정무에 바쁘시어 쉬이 이런 자리를 마련하실 수 없는 터라 이곳에서는 제가 맡고 있습니다."
물론 선뜻 믿기는 어려우실테지만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보인 그가 먼저 잔을 들어 술을 넘겼다. 한 잔을 완벽하게 비우고 난 뒤에서야 다시금 잔을 채우며 건배를 청했다.
"조촐해서 마음에 안드실 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비로소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졌다. 꼿꼿하게 앉았던 할디르는 그제서야 자세가 조금 풀어짐을 느꼈다. 그가 하는대로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딧혔다. 맑은 크리스탈의 파열음이 공간을 채워나갔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골라스.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받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목을타고 넘어간 술의 온도가 비어있는 안쪽을 생각보다 후끈하게 데우고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할디르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레골라스가 웃어버렸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조금 덜 독한 술을 가져오는건데.."
"아니, 못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
"실은 어둠이 내린 숲에서는 악몽을 꾸지 않으려 독한 술을 마시지요."
"그대도 악몽을 꿉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를 지녔다고 생각하며 할디르는 그가 권해준 음식들을 천천히 들었다. 두런두런 꺼내는 이야기들은 끊길 새가 없이 시간을 가득 채웠고 어느새 자신조차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지않은 체류기간동안이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 같아 마음 한곳이 편안해졌다. 혹 그를 통해서라면 주군의 뜻을 전하기에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라는 계산 또한 숨어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머크우드의 왕자이자 왕에게 가장 근접한 이였으니까.
천천히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엘베레스의 별이 하늘 저 건너편으로 넘어갈 시간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좀처럼 지치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을 상대하는 레골라스를 보며 할디르는 조금 놀라움을 느꼈다. 아까 보였던 모습이 거짓이 아니었던 걸까. 상대의 기척을 예민하게 느끼며 레골라스는 다시 잔을 채우며 할디르를 바라보았다.
"왜 취하지 않나 궁금하십니까?"
".. 생각보다 예민한 편이네요."
"이곳에 있다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이지요. 어느 누구도 사실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어둠은 생각보다 많은것을 변화시키나 봅니다."
"변화. 변화라. 변화라기보단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해두죠. 동물이든 엘프든 인간이든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하는 신의 피조물이 아닙니까."
"심각한 곳으로 끌고 갈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심각한 곳으로 이끌었군요. 사실 전 술이 꽤 세서요."
유쾌한 모습으로 웃어보이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 할디르의 잔에 손을 뻗어 홀로 건배를 하고 잔을비운 레골라스는 장난끼 가득한 눈빛으로 할디르를 쳐다보았다.
"안 믿겨지십니까?"
"...조금은 놀랍네요."
"혹 그대가 독한술도 괜찮다 하시면 나중에 내기를 하는것도 좋겠네요. 머크우드의 좋은 술은 왕의 창고에 다 모여있으니까요."
"그 정도입니까?"
"그래봤자 아버지는 한번도, 아니 왕께는 한번도 이겨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수정해야겠군요."
"혹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줄 알고계셨습니까?"
"아니, 말술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툭 내던져진 말끝에 레골라스의 웃음이 걸렸다. 무엇이 이상한 지 알지 못한 할디르는 그저 레골라스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을 웃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골라스는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아. 사실 이제껏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처음이라서요."
"...제가 혹 말실수를 한거라면 죄송합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혀요."
도리어 웃어보이며 눈을 맞춰오는 모습엔 자격이나 지위의 면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토록 친근하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실로 오랫만이라며 신경쓰지 말라는 모습은 소탈하기까지 했다. 겨우 긴장이 풀어진 모습을 눈치챘는지 레골라스는 몇번 더 소리내어 웃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면 우리 친구하는게 어때요?"
"친구요..?"
"네. 친구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데 할디르는 어때요? 저 괜찮지 않나요?"
잠시 내밀어진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지만 특유의 자신만만함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머크우드의 엘프들은 다 이렇게 호전적인건가. 조금 고민하던 머릿속은 깔끔히 지워버린 채, 할디르는 이내 내밀어진 손을 움켜잡았다.
"다시한번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레골라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동시에 웃어버렸다. 꾹 잡혔다가 금방 비어버린 손에는 다시 잔이 들렸고 그것들은 인사하듯 부딧혔다. 맑은 소리가 들려오는 밤공기 속에서 조금의 따스함이 배어나왔다. 며칠의 여정이 심심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할디르는 입술을 축였다. 독한 술들이 조금은 달콤하게 감겨들었다. 머크우드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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