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막 씻고 안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이내 멈추었다. 고요해야 할 방 안에서 숨소리가 들려오자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엘론드는 안쪽으로 향했다. 곱게 개어진 이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누군가가 잠들어 있었다.
"준비해드린 침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응."
"그럼 다른 곳으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감겼다 떠진 눈에 촛점이 들어오자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또 무슨 변덕일까 싶어 한참 쳐다보면 굳게 닫혀있던 입술에 웃음이 서렸다. 고작 방이 춥다고 투정하며 소매를 잡아끄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저녁때 무언갈 잘못 먹었나...
"그러니 이 방을 써야겠어."
"여긴 제 침실입니다만."
"알고 있어. 그러니 쓰겠다는 거야."
"....그럼 제가 다른 방으로 가죠."
"아니, 그대의 방인데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무게에 이끌려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조금씩 찌푸려지는 미간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여전히 얄미웠다. 왠일로 조용히 지나가는가 했더니만. 나오려는 한숨을 누른 엘론드는 조심히 잡힌 손묵을 빼내려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손님을 모시는데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제가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손님이 원하는 것을 고려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원하는게 뭡니까."
개인적인 공간에서까지 입씨름을 하고 있자니 피곤해진 몸은 돌연 딱딱한 말을 내뱉었다. 반쯤은 진심이 섞여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스란두일은 오히려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다 잡은 손목을 휙 당겨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무너진 몸이 그의 위로 기울어졌다.
"이게 무슨.."
"리븐델은 계곡이라 그런지 밤의 추위가 꽤나 견디기 힘들어."
"..어둠 숲의 날씨보다 배는 따듯할 것 같습니다만."
"그 곳의 추위는 이미 익숙해졌어. 춥고 어둡고 냉기가 흐르지. 하지만 이곳의 추위는 여간해선 익숙해지는 법이 없군."
"그냥 본론만 이야기하는게 어떨까요."
"같이 자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스란두일은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엘론드를 쳐다보았다. 어정쩡한 자세에 불편한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이미 품안에 갇힌 몸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럴 거였으면 무슨 추위 핑계는..
"잠만 잘 겁니다."
"그럼 뭘 또 하게?"
".....놔 주십시오."
"정말 추운데 믿질 않으니 놓을수가 있나."
"알겠으니까 좀 놓으십시오. 불편합니다."
"진작 그렇게 말 하지."
웃으며 깍지 낀 손을 풀자 조심히 곁으로 돌아 눕는것을 확인한 스란두일이 이불을 끌어올렸다. 부러 등을 돌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와 허리를 껴안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엘론드는 파득 놀랐다. 목 뒤에 닿을 듯 말듯 퍼지는 숨소리에 긴장하면서도 좀 더 바짝 붙으려는 몸짓에 매섭게 손등을 내리쳤다. 작게 혀차는 소리와 함께 조금 떨어진 온기는 적당한 간격을 만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방으로 돌아가세요. 쓸데없는 오해를 만드는 건 원치 않습니다."
"천하의 스란두일이 임라드리스의 현자와 밤새도록 술 한잔 하는것이 특이한 일은 아닐텐데 뭘 그리 신경을 써."
"제가 술을 먹지 않았으니까요."
"내일 아침 방을 나서기 전에 포도주라도 한잔 해야겠군. 완전범죄를 위해."
"....."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말고 어서 눈을 붙이도록 해. 정말 오늘은 잠만 잘거니까. 아 혹시 좀 아쉽다거나..."
저도 모르게 나가버린 팔꿈치가 정확히 목표물을 가격했는지 스란두일은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한참을 낑낑거리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따스함이 등 뒤로 번졌다.
"하여간 성질은."
"돌아가기로 한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스란두일이 엘론드의 목 뒤에 얼굴을 묻었다.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작은 온기를 남겼지만 무어라 깨닫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지며 서늘한 기운을 남겼다.
"잘자. 엘론드."
"...안녕히 주무시길."
무어라 반응하지 못한 떨떠름한 답을 알아챈 작은 웃음이 닿은 곳을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나눈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지그시 부여잡은 온기가 둘을 감쌌다. 가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