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초여름의 하늘은 푸르렀지만 그 밑에 펼쳐진 대지에서는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 미친듯이 오크들을 베어나가는 칼날에 빛이 반사되어 무지개가 보였다.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저 멀리 올리폰트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모르고스의 군사들이 보였다. 그들을 맞서려 선두에 선 군대는 놀랍게도 임라드리스의 군주와 머크우드의 군주였다.

창-챙!

화살이 두 엘프를 갈랐다. 적시에 떨어진 등이 다시 철컥 소리를 내며 맞붙었다. 마치 맞춘 것 처럼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갑옷은 튼튼하고 가벼운 듯 보였다. 미친듯이 베어나가며 경계하는 두 로드의 주변으로 정예병들이 오크들을 몰아세웠다. 피와 오물들이 튀었지만 엘프들의 머리칼에는 한점의 먼지도 묻어나지 않았다. 긴 흑발과 금발의 머리칼이 휘날리고 은색의 칼이 춤을 추며 적들을 베어나가는 그 순간, 머크우드의 군주 스란두일은 그의 하나뿐인 왕자를 소리높여 불렀다.

"레골라스---!"
"아다!"

저 멀리 어린 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잎이라 불린 청년은 막 화살로 오크의 머리통을 쑤셨다가 빼낸 뒤였다. 왕의 부름을 받고 새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달렸다. 전통적인 놀도르와 신다르의 의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경황이 없는 전투중이었지만 두 군주들의 주변에 놀도르와 신다르의 갑옷을 입은 엘프 둘이 각각의 군주들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오크를 처단했는지 그것이 기록의 쟁점이었다. 빠르게 숫자를 적어가며 서로의 군주에게 눈짓을 했다. 신다르의 왕자가 도달해 붉은색의 화살을 높이 올리는 그 순간까지 촉박하게 움직이던 펜은 작은 새소리가 들리자 동시에 멈추어버렸다. 고개를 들고 왕자에게 양피지를 건넨 엘프들은 소임을 마쳤다는 듯, 동시에 칼을 빼어들었고 빈틈을 노리던 오크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들아, 결과는?"

막 오크 두마리를 베어넘긴 스란두일이 고개를 돌려 레골라스를 쳐다보았다. 빠르게 눈으로 숫자를 세는 레골라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찰나의 시간 끝에 왕자의 입이 열렸다.

"신다르의 승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건 음모야!"

활을 쏘다가 가까워진 오크를 넘어뜨리고 칼을 꽂은 엘론드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금세 엘론드의 근처로 손을 내민 스란두일이 그를 일으켜세웠다. 가까워져 온 표정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억울하면 백년 뒤에 다시 와."
"칫."

뒤쪽에서 레골라스가 소리를 질렀다.

"의식 얼른 끝내야 할 것 같은데요! 저쪽에서 트롤이 옵니다!!"
"젠장, 약혼식도 못하게 하다니 매너가 없군."
"그런거 하고 싶지 않거든?"
"억울하면 백년 뒤에 다시보자니까?"

킬킬 웃으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떨어진 등 뒤가 허전했다. 아들을 보며 눈짓을 하자 가까이에 퍼져있던 신다르의 군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신다르의!!!!!!!!!!!!!!!!!!"
"나 스란두일은!!"

그러자 놀도르의 군사들이 화답했다.

"놀도르의!!!!!!!!!!!!!!!!!!"
"나 엘론드와."

볼멘소리로 엘론드가 대답하며 칼을 휘두르자 레골라스가 킥킥대며 웃었다. 빨리 진행하라는 무엇의 압박을 동시에 받고 금세 진지해진 레골라스가 소리를 높였다.

"혼인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붉은색의 화살을 허공으로 쏘아올렸다. 그것은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살. 엘프의 활을 떠나자마자 점점 커지며 용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정확히 삼 초가 지난 뒤 큰 날개를 편 채 적들을 향해 위협적인 날개짓으로 향했다. 우왕좌왕한 적들이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근거리의 적들을 여전히 베어 넘기는 군주 둘을 보며 레골라스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부부의 증표요!!!!!!!!!!"
"젠장. 왜이렇게 근거리에 많아!!"

투덜거리면서도 떨어져 있던 스란두일과 엘론드가 성큼성큼 서로를 향해 다가섰다. 피에 젖을 것 같은 왼손을 허공에 털어낸 스란두일은 다가온 엘론드의 뒷머리를 부여잡은 채 진하게 키스했다. 강하지만 짧게 맞추었던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금세 떨어진 시선에서 많은 것들이 오갔다.

"다음에는 절대로. 내가 이길거야."
"기대하지요. 엘론드 부인."

큭큭대던 둘의 등이 다시 마주닿았다. 전투는 거진 마무리가 되었고 적들은 거의 허물어진 상태였. 하늘이 맑고 피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닿은 온기와 엄숙히 맺어진 혼인의 동맹. 신다르와 놀도르의 존속은 향후 백년간 굳건하게 이어질 터였기에 좋은 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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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그린우드에도 며칠에 한번쯤은 해가 드는 날이 있었다. 그런날은 나무밑으로 숨어들어 몸을 움츠리던 새들도 밖으로 나와 노래를 했고 제법 살랑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초여름의 해는 높게 떠올라 모처럼의 맑은 하늘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쉬이 오지 않는 기회를 빌어 영지에 웅크려있던 엘프들은 삼삼오오 짝을지어 밖으로 향해 고즈넉한 숲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먹고 마시며 빛을 즐겼다. 그들과 쉬이 어울리는 법은 없었지만 아주 가끔씩 남들이 접근할 수 없는 숲속 깊은 곳, 평평한 풀밭에는 그린우드의 왕과 그의 어린 왕자가 손을잡고 산책을 나오기도 했.

 

"이렇게요?"
"아니아니, 이렇게 이렇게 하는거라니까."
"아다, 조금만 천천히.."
"옳지. 그래. 그렇게."

어린 왕자는 갓 20살이 될법한 외모로 아비의 곁에 무릎꿇어 조잘대었다. 왕관도 밀쳐놓은 채, 왕이 만들고 있는 것은 짐승들을 잡기위한 덫이었다. 가볍게 끈을 묶어 신다르 특유의 매듭을 지어놓으면 혹 지나가던 작은 짐승들이 걸릴지도 몰랐다. 아직 활 잡기에 익숙치 않은 어린 왕자를 위해 아비가 만드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몇번의 서투른 손짓으로 만들어진 매듭은 빈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왕은 알고 있었다. 절대 끊어지지 않는 엘프의 기술로 만들어진 줄과 신다르의 매듭방식으로 이어진 덫은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튼튼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듯하고 굳건하게 매듭진 아비의 덫과 자신의 덫을 비교하던 왕자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다시 새 줄을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혼자서 해볼래요."
"가능하겠느냐?"
"...무슨 왕자가 이런것도 혼자 못한답니까."
"그럼 혼자 해보거라."

비죽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채, 왕은 낑낑대며 매듭을 엮는 왕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어릴적의 자신을 보는것만 같았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느낌이셨을까. 잘 되지 않는지 또 작게 성질을 내고 이제는 스스로 줄을 잡아 빼내어 다시금 엮는 왕자를 보며 왕은 어릴적의 기억을 조금씩 상기시켰다. 그때에는 나도 이렇게 혼자 끙끙대며 골몰했었지. 아마도 완성시킨 뒤 아버지에게 들고가서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지 꼭 안아주셨는지...어쩐지 그것만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말이다.

"아다, 잠깐 두손을 빌려주세요."

왕자가 말을 건네고서야 왕은 정신을 차린뒤 왕자를 바라보았다. 제법 모양이 잡힌 매듭을 들고 싱글벙글 거리는 왕자의 말대로 왕은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히죽, 싱그러운 웃음이 양 뺨을 타고 번졌다. 삽시간에 두 손목을 옭아맨 매듭이 바짝 조여졌고 불시의 기습에 놀란 왕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벌렁 넘어가버렸다.

"어이쿠-"
"헤헤, 잡았다."

의기양양하게 왕의 가슴팍에 앉아 손목을 구속한 매듭의 끝을 틀어쥔 채 웃어보이는 왕자를 보며 왕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알싸한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잡히고 말았구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비쭉 내밀어보이자 왕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봐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열었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왕자전하.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
"그렇게 말하셔도 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까딱이며 고개를 모로 두번 흔든 왕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옭아맨 왕의 손목을 머리 위로 낑낑 올렸다. 졸지에 가까워진 얼굴이 마주보았다. 엄한 표정으로 아비를 쳐다보다 빙긋 웃은 왕자는 이내 익숙하다는 듯, 조그마한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 아비의 입술 위에 겹쳤다. 꾸욱 누른 살덩이의 감촉이 촉촉하게 닿았다. 기습을 당한 왕은 멍하니 웃음담긴 얼굴을 쳐다보다 삽시간에 묶인 팔을 벌려 왕자를 껴안고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버렸다. 꺄앗! 아직은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가 웃음으로 변모했다. 높고 낮은 웃음소리가 번갈아 풀밭을 울리며 빛 사이를 오갔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따스하고 선명한 유년시절의 기억이었다.

 

 

 

 

 

"기억 나십니까. 아버지."
"....스란두일."

이미 청년이 되어버린 왕자는 꼭 어릴적과 같은 매듭으로 아비를 옭아매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포근하고 따스한 풀밭이 아닌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란 것이고, 반쯤 찢겨져버린 옷매무새였다. 다정하고 사랑이 담긴 눈빛은 왕자에게만 존재했고 그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서 뿜어져나오는 것은 포식자를 바라보는 두려움 가득한 먹잇감의 눈빛이었다. 훌쩍 커버린 왕자는 손목을 구속한 끈을 틀어쥔 채, 왕의 머리위로 올려 거세게 눌렀다. 느껴지는 고통에 작게 신음소리가 퍼지자 왕자의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스란두일..정신차려라. 나는.."
"당신은 위대한 머크우드의 왕이십니다. 저머크우드의 하나뿐인 왕자이지요. 그리고."

목울대가 넘어갔다. 긴장한 심장이 드러나버린 왼쪽 가슴팍을 거세게 울렸다. 유심히 아비의 모든 것을 살펴보던 스란두일이 마치 어릴적 그 때 처럼 오로페르에게 향했다. 코 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오로페르의 고개가 살짝 모로 틀렸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스란두일은 나머지 손으로 턱을 고정해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지금은 당신을 차지한 포획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입술이 맞닿았다. 어릴적의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오로페르는 거부하지 못했다. 차가운 냉기속에 숨어있는 미세한 떨림은 마치 어릴적 자신에게 부비던 온기와도 같았기에, 왕은 차마 왕자를 밀쳐낼 수 없었다.

 

스란오로. 전리품2 로 이어집니다 => http://secretgarden1.tistory.com/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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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적습니다."

대뜸 와서 한다는 말이 저것이다. 요망한 것이 또 무슨 투정을 속살거릴까 고대하던 스란두일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무릎위에 매달려있는 이를 밀어낼 재간도 없었다. 오늘은 애교를 부리기로 작정을 했나보다며 짧게 혀를 찬 스란두일이 까맣게 흩어진 머리칼을 손 끝으로 훝어내렸다.

"무엇이 말이냐."
"보석 말입니다. 너무 적습니다. 예하."
"충분한 것 같은데."
"제게 주실 것이 그런것 들 뿐이라면 이제부터 예하를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뜯어내기로 작정을 하였구나."
"그런 셈이지요."

돌직구를 날리면 그대로 받아쳐온다. 그런 점이 안나타르를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꾸밈없는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부족하면 부족하다. 마음에들지 않으면 내던져버리는 그 성미가 묘하게 끌리는 게 신기했다. 곱게 웃어보이며 적다 투정하는 보석들은 왕실에 납품되는 것들 중 최상의 것들로 가져온 것이었다. 절대 적을리가 없을 터인데 이리 교태를 부리는 것을 보면 무언가 따로 원하는 바가 있을 법 했다. 짐짓 모른 체, 곁의 상자를 뒤적여 이것 저것을 그의 몸에 대어본다. 붉은색의 루비, 연녹색의 비취. 하나같이 안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입이 비쭉 나와있으면서도 또 스란두일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대어주는 보석이 가장 돋보이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바꾸어주는 것을 보며 또 보람을 느꼈다. 하여간 어찌 할 수 없는 여우였다.

"이리 잘 어울리는데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모르겠구나."
"예하의 연심이 들지 않은 보석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연심이라. 왜 그리 집착하는가?"
"연모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데에 집착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전히 무릎에 매달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연모라. 어려운 것을 말하는 입술을 보며 욕정만을 느끼는 자신이 순간 낯부끄러워졌다. 연모라. 그 어려운 것을 네가 원하면 어찌하느냐. 나는 너를 그리 보고있지 않건만.

"나를 연모하느냐?"
"예하는 어떠십니까. 저를 연모하십니까?"
"나는 너를 연모하지 않는다."
"사실 저도 예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근데 어찌 자꾸 연심을 찾느냐?"
"그러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빙글 웃어보이며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선 안나타르는 손을 뻗어 스란두일의 얼굴을 감싼 채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라 올려보던 눈동자는 시선에 얽혀들었다. 자신을 가둔 붉은빛의 눈동자는 한껏 달콤하고 은밀해보였다. 고운 눈매가 접히면 그 역시 일그러졌다. 점차 다가오는 얼굴에 피하지 않은 채 입술을 벌리면 꼭 그 틈새로 맞는 살덩이가 들어와 안쪽을 휘저어간다. 손을 올려 다가온 머리칼을 부여잡고 세게 누르면 그역시 응수하며 안쪽으로 향해 입안을 내어준다. 한참이고 떨어질 줄 몰랐던 입술이 불현듯 떨어졌다. 촉촉히 젖은 입술이 움직여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밖에서는 모르도르에 예하의 연인을 숨겨두었다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신경쓰이는것이냐."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만?"
"혹 예하께서 불편하시다면 그런 것 처럼 행동해드릴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그러십니까...?"
"..안나타르?"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픽 웃어보이며 가운이 떨어져있는 곳 까지 걸어가 가볍게 걸친 안나타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걸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스란두일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것을 확인 한 뒤 또 한번 웃어보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경쓰이십니까?"
"그러고보면 너는 한번도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보석도, 진귀한 것들도 모두 내가 알아서 준비한 거였지."
"그랬습니까?"
"들은 바로는 그랬다. 모르도르의 꽃은 제 몸을 내어준 대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원한다 했다. 하지만 너는 어찌해서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것이냐?"

싸늘해진 말투. 의심의 눈동자. 안나타르는 미소를 띈 채, 웃었다. 흔한 표정이었다. 상대를 의심할 때의 표정. 어린 왕자여. 아직 본심을 숨기는 방법도 배우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어찌 왕자라 할까. 제왕학을 배운 왕가의 일원이라 할까. 
딱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안나타르는 여몄던 가운을 다시 풀어헤치고 스란두일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피하지는 않지만 경직된 근육이 보여 더더욱 유쾌해졌다. 그래봤자 그대는 나의 맛 좋은 먹잇감 중 하나야. 좀더 몸부림치고 불안해해라.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 이니까.

"저는 처음부터 예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하의 연심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나도 몇번이고 말했다."
"그럼 거짓을 주십시오."
"거짓?"
"예하가 절 연모하고 있다는 거짓 말입니다."
"...그것은 네게 득될것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보석을 주마. 물질이야말로 네게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더냐."
"물질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겐 필요없는 것이지요. 모르도르의 이 거대한 곳. 제가 재물따위를 원했다면 진즉에 그곳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거짓이라도 예하의 연심을 얻고싶습니다. 그것조차 주실수 없다면. 이제 저를 찾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슬핏 웃어보이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허벅지 위로 엎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왕자야 네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뿌리칠 수 있을까. 저 먼곳. 린돈에 위치한 너의 그 마음속 정인에게 달려갈 용기는 없으면서도 나를 외면할 수 있을까. 아니, 넌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그런' 니까.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꽤 무덤덤해진 손이 안나타르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천천히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안나타르의 눈이 감기며 미소가 감돌았다. 몇번이고 말을 골라 낸 스란두일의 입술이 열렸다. 그로서는 꽤나 무거운 말 이었다.

"...나는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을 평생 줄 수 없다."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지고 싶으냐."
"예하. 기억 나십니까? 제 방으로 오셔서 절 처음 안으시던 밤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지."
"처음엔 우스웠습니다. 고작 왕자의 지위를 가지고 저를 취하려 하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예하의 생각보다 저는 이곳에서 오랜 기간을 버텨왔습니다. 어지간한 상대는 돌려보내고 알아서 처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저 가만히 예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안나타르.."
"예하께서 제게 연심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마 저는 이리하고도 예하가 절 다시 찾아주시면 또 바보처럼 웃어보이겠지요. 그런 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욕심이란 걸 좀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란 걸 아는데. 그것이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
"재물. 보석. 필요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가져보고싶은 것이 있는데 장사꾼이라면 욕심내보는 것은 당연한게 아닙니까?"
"안나타르...."
"한번의 욕심입니다. 예하께서 제게 혹여라도 작은 연정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번쯤. 그 마음이 거짓임을 알고있어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장사란 그런것이니까요. 작은 것에 기대를 거는 법이니까요."
"..내가 그래서 그것을 줄 것 같으냐."

진득하게 내뱉어진 말에 안나타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를 환히 지어보였다. 눈빛이 떨렸다. 벗어날 수 없다.

"네, 한번 이라면. 예하께선 주실 것 같았습니다."

머리칼을 쓸던 손이 멈추었다. 녹아내릴듯 예쁘게 웃음짓는 안나타르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몸을 겹치고 살을 섞던 이였다. 닳고 닳은 창녀라고 생각했다. 모르도르의 꽃은 피어난 것이 꽤나 아름답고 유혹적이라 그것을 꺾으려 달려드는 이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밀쳐낼 수 없었다.

"....거짓이다. 내가 말하는 모든것들은."

안나타르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꿈꾸는 듯한 모습으로 눈빛이 바뀌었다. 다시금 손을 올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주 잔잔하게 몸이 떨려오는것이 느껴졌다.

"...사랑한다. 안나타르."

 

차오르는 눈물이 금세 무릎위로 뚝뚝 떨어져내렸다. 채 감지 못한 시선이 스란두일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 이것은 거짓인데...

머리보다 손이 빨랐다. 고개가 숙여졌다. 울고있는 이의 눈가에 입술이 닿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또다른 손이 다가와 그를 옥죄었다. 뜨거운 키스를 받아내고 있는 눈가에선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스란두일은 알 수 없었다. 중요한것은 안나타르가 "자신" 때문에 눈물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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