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사방에서 악이 창궐하여 인간과 엘프의 동맹이 실현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깊숙한 곳에서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고, 전쟁의 요지가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르도르 또한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안나타르는 모르도르의 사업채 절반을 감축했고 옮길만한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에 스란두일과 엇갈렸던 적이 꼭 세 번. 오늘이 지나고 나면 네번째가 될 터였다.

막 바깥에서 돌아온 안나타르가 검은 후드를 걷어올리며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하인들을 통해 스란두일이 와 있다는 것을 들은 직였다. 검게 쳐져있는 베일을 들어올리고 안쪽 깊숙한 곳으로 향하면 느릿하게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숫제 제 집이지. 코웃음을 치며 안나타르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어룽대는 빛이 가까워지면서 그가 있는 곳을 짐작케했다. 만면에 웃음을 띈 안나타르의 얼굴이 푸른 눈의 엘프와 조우했다.

"오늘도 일찍 가신 줄 알았습니다."
"헛걸음을 한 것이 벌써 세번째이지 않느냐."
"그렇게까지 되었습니까."

밉상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안나타르는 후드를 바닥에 벗어둔 채 스란두일에게 달려가 안겼다. 가볍게 뒤로 미끌어진 스란두일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좀더 깊숙히 밀어넣으며 안나타르의 무게를 감내했다. '그 날' 이후 안나타르는 알듯 말듯 어리광이 조금 늘었고 스란두일 역시 조금은 편하게 안나타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진실이라 매듭진 관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스란두일과 안나타르는 진실을 거짓으로 연기하며 관계를 지속해왔다. 그것은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주기도 했고 또한 아무런 생각없이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꽤 괜찮은 방법 같았다.
품에안긴 안나타르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스란두일은 가볍게 그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 근처에 와닿았다. 며칠 고생을 했는지 못본새에 조금 까칠해진 것 같은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손끝으로 조물조물 만져대자 안나타르가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그린우드의 군대도 출정을 한다 들었습니다."
"과연 모르도르의 꽃은 모르는 정보가 없군."
"예하도 가십니까?"
"왜, 걱정이 되느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주 조금 시무룩해진 모습에 스란두일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품에 안은 이를 똑바로 곁에 앉혀둔 채 눈을 마주쳤다. 붉은색 동공 안에 들어오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이 흡족해졌다. 다정한 이다. 생각보다. 남들이 뭐라고 여기든 모르도르의 꽃은 가시가 많을 뿐, 다정한 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나도 선봉에 설 것이다."
"그렇습니까.."
"몇 년만 기다리거라.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궐하는 악의 세력은 은밀하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들었습니다. 쉬운 상대는 아닐겁니다."
"그러나 인간과 엘프가 동맹을 맺는 정도의 연합이다. 이쪽도 만만치는 않을테지."
"아무렴요. 예하가 계시는 곳인데 쉬이 패하진 않겠지요."

그제서야 엶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스란두일을 바라보는 안나타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물끄럼히 바라보며 그저 웃던 안나타르는 잠시만 계시라며 홀연히 일어나 좀 더 안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온기에 스란두일은 안나타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도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의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소문은 흉흉해졌고 노랫소리가 들리던 왕궁 안에는 날카로운 쇠붙이들의 맞부딧히는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이곳을 자주 찾게 될는지도 몰랐다. 많은 아픔이 있을거라 했다. 겪어보지 않은 무서운 전쟁의 분위기는 스란두일을 짓눌러왔다. 막연한 공포. 두려움. 짓누르는 슬픔. 모든것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그 기분 더러움에 왕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했다. 겉으로 의연해야 하는 일국의 왕자. 정사에 바빠 눈코뜰 새 없이 일에 매달리는 군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왕성보다는 이곳이 나았다. 거짓. 이라는 진실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이가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이 곳, 모르도르였다.

낑낑대며 안나타르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다소 큰 상자였다. 다시 자세를 바로한 채, 무엇인지 쳐다보던 스란두일의 발 밑에 그것은 놓아졌다. 적지않은 양의 쇠붙이가 걸쳐져 있었다. 웃는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안나타르의 얼굴과 상자를 번갈아 보며 스란두일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예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
"저 멀리 드워프들의 왕국에서만 나오는 귀한 갑옷이라고 하더군요. 그 어떤 날붙이로 뚫리지 않는 미스릴을 사용했다고 하여 받아둔 것입니다. 마침 예하가 생각이 나 따로 빼 두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광물이군. 미스릴이라.."
"나머지 것들은 혹여 필요하실 지 몰라 제작해 놓은 갑주입니다. 물론.. 신다르군의 갑옷이 있으시겠지만. 혹시 몰라서..."

수줍어하는 시선이 이리저리 튀었다. 차마 마주치지 못한 채, 선물이라며 건네는 것들에 스란두일의 기분이 유쾌해졌다. 조심히 일어나 안나타르의 손을 잡고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에 다가가 짧게 입맞췄다. 살포시 감았던 눈이 떠지며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까.. 안나타르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혹 입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한번쯤은...입은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어려울 것은 없지."

흔쾌히 허락하는 스란두일의 로브를 안나타르가 벗겨냈다. 안의 간단한 옷만들 입은 채, 미스릴을 입히고 갑주를 하나하나 채워주었다. 다리와 팔. 어깨와 손목구를 채운 뒤 가장 마지막에 가슴에 대는 갑주를 들어올렸다. 겉에는 신다르의 문양이 새겨져 화려하게 빛났다. 그러나 진실은 속 안에 있었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던 안나타르가 스란두일에게 입히기 직전 그것을 보여주었다. 갑주 안쪽 한 구석에는 직접 새긴 듯한 문양이 보였다. 안나타르의 문양이었다.

"..새길까 말까 망설였는데...안보이는 곳이기에.."
"이왕이면 크게 새기면 좋았을걸."
"..예하."
"이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갑주를 받아들고 아로새긴 문양을 손끝으로 쓸었다. 안나타르의 이름을 딴 문양이 그대로 마음 속에도 새겨지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안나타르에게 시선을 옮기자 슬쩍 붉어진 얼굴이 미세하게 끄덕였다.

"네가 족하면 되었다. 이것까지 입혀주어야지."

살포시 받아든 채 다가오는 안나타르의 손길에 스란두일은 몸을 내맡겼다. 바짝 조여오는 차가운 금속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오싹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완벽하게 무장한 스란두일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조심히 품으로 안겨왔다. 스란두일이 그토록 지겨워하던 차가운 금속과 날붙이들이 덜컹이며 안나타르를 보듬었다. 한참 동안이나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전쟁은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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