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4
"너무 적습니다."
대뜸 와서 한다는 말이 저것이다. 요망한 것이 또 무슨 투정을 속살거릴까 고대하던 스란두일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무릎위에 매달려있는 이를 밀어낼 재간도 없었다. 오늘은 애교를 부리기로 작정을 했나보다며 짧게 혀를 찬 스란두일이 까맣게 흩어진 머리칼을 손 끝으로 훝어내렸다.
"무엇이 말이냐."
"보석 말입니다. 너무 적습니다. 예하."
"충분한 것 같은데."
"제게 주실 것이 그런것 들 뿐이라면 이제부터 예하를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뜯어내기로 작정을 하였구나."
"그런 셈이지요."
돌직구를 날리면 그대로 받아쳐온다. 그런 점이 안나타르를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꾸밈없는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부족하면 부족하다. 마음에들지 않으면 내던져버리는 그 성미가 묘하게 끌리는 게 신기했다. 곱게 웃어보이며 적다 투정하는 보석들은 왕실에 납품되는 것들 중 최상의 것들로 가져온 것이었다. 절대 적을리가 없을 터인데 이리 교태를 부리는 것을 보면 무언가 따로 원하는 바가 있을 법 했다. 짐짓 모른 체, 곁의 상자를 뒤적여 이것 저것을 그의 몸에 대어본다. 붉은색의 루비, 연녹색의 비취. 하나같이 안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입이 비쭉 나와있으면서도 또 스란두일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대어주는 보석이 가장 돋보이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바꾸어주는 것을 보며 또 보람을 느꼈다. 하여간 어찌 할 수 없는 여우였다.
"이리 잘 어울리는데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모르겠구나."
"예하의 연심이 들지 않은 보석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연심이라. 왜 그리 집착하는가?"
"연모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데에 집착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전히 무릎에 매달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연모라. 어려운 것을 말하는 입술을 보며 욕정만을 느끼는 자신이 순간 낯부끄러워졌다. 연모라. 그 어려운 것을 네가 원하면 어찌하느냐. 나는 너를 그리 보고있지 않건만.
"나를 연모하느냐?"
"예하는 어떠십니까. 저를 연모하십니까?"
"나는 너를 연모하지 않는다."
"사실 저도 예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근데 어찌 자꾸 연심을 찾느냐?"
"그러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빙글 웃어보이며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선 안나타르는 손을 뻗어 스란두일의 얼굴을 감싼 채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라 올려보던 눈동자는 시선에 얽혀들었다. 자신을 가둔 붉은빛의 눈동자는 한껏 달콤하고 은밀해보였다. 고운 눈매가 접히면 그 역시 일그러졌다. 점차 다가오는 얼굴에 피하지 않은 채 입술을 벌리면 꼭 그 틈새로 맞는 살덩이가 들어와 안쪽을 휘저어간다. 손을 올려 다가온 머리칼을 부여잡고 세게 누르면 그역시 응수하며 안쪽으로 향해 입안을 내어준다. 한참이고 떨어질 줄 몰랐던 입술이 불현듯 떨어졌다. 촉촉히 젖은 입술이 움직여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밖에서는 모르도르에 예하의 연인을 숨겨두었다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신경쓰이는것이냐."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만?"
"혹 예하께서 불편하시다면 그런 것 처럼 행동해드릴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그러십니까...?"
"..안나타르?"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픽 웃어보이며 가운이 떨어져있는 곳 까지 걸어가 가볍게 걸친 안나타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걸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스란두일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것을 확인 한 뒤 또 한번 웃어보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경쓰이십니까?"
"그러고보면 너는 한번도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보석도, 진귀한 것들도 모두 내가 알아서 준비한 거였지."
"그랬습니까?"
"들은 바로는 그랬다. 모르도르의 꽃은 제 몸을 내어준 대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원한다 했다. 하지만 너는 어찌해서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것이냐?"
싸늘해진 말투. 의심의 눈동자. 안나타르는 미소를 띈 채, 웃었다. 흔한 표정이었다. 상대를 의심할 때의 표정. 어린 왕자여. 아직 본심을 숨기는 방법도 배우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어찌 왕자라 할까. 제왕학을 배운 왕가의 일원이라 할까.
딱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안나타르는 여몄던 가운을 다시 풀어헤치고 스란두일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피하지는 않지만 경직된 근육이 보여 더더욱 유쾌해졌다. 그래봤자 그대는 나의 맛 좋은 먹잇감 중 하나야. 좀더 몸부림치고 불안해해라.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 이니까.
"저는 처음부터 예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하의 연심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나도 몇번이고 말했다."
"그럼 거짓을 주십시오."
"거짓?"
"예하가 절 연모하고 있다는 거짓 말입니다."
"...그것은 네게 득될것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보석을 주마. 물질이야말로 네게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더냐."
"물질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겐 필요없는 것이지요. 모르도르의 이 거대한 곳. 제가 재물따위를 원했다면 진즉에 그곳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거짓이라도 예하의 연심을 얻고싶습니다. 그것조차 주실수 없다면. 이제 저를 찾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슬핏 웃어보이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허벅지 위로 엎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왕자야 네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뿌리칠 수 있을까. 저 먼곳. 린돈에 위치한 너의 그 마음속 정인에게 달려갈 용기는 없으면서도 나를 외면할 수 있을까. 아니, 넌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그런' 자니까.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꽤 무덤덤해진 손이 안나타르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천천히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안나타르의 눈이 감기며 미소가 감돌았다. 몇번이고 말을 골라 낸 스란두일의 입술이 열렸다. 그로서는 꽤나 무거운 말 이었다.
"...나는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을 평생 줄 수 없다."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지고 싶으냐."
"예하. 기억 나십니까? 제 방으로 오셔서 절 처음 안으시던 밤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지."
"처음엔 우스웠습니다. 고작 왕자의 지위를 가지고 저를 취하려 하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예하의 생각보다 저는 이곳에서 오랜 기간을 버텨왔습니다. 어지간한 상대는 돌려보내고 알아서 처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저 가만히 예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안나타르.."
"예하께서 제게 연심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마 저는 이리하고도 예하가 절 다시 찾아주시면 또 바보처럼 웃어보이겠지요. 그런 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욕심이란 걸 좀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란 걸 아는데. 그것이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
"재물. 보석. 필요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가져보고싶은 것이 있는데 장사꾼이라면 욕심내보는 것은 당연한게 아닙니까?"
"안나타르...."
"한번의 욕심입니다. 예하께서 제게 혹여라도 작은 연정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번쯤. 그 마음이 거짓임을 알고있어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장사란 그런것이니까요. 작은 것에 기대를 거는 법이니까요."
"..내가 그래서 그것을 줄 것 같으냐."
진득하게 내뱉어진 말에 안나타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를 환히 지어보였다. 눈빛이 떨렸다. 벗어날 수 없다.
"네, 한번 이라면. 예하께선 주실 것 같았습니다."
머리칼을 쓸던 손이 멈추었다. 녹아내릴듯 예쁘게 웃음짓는 안나타르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몸을 겹치고 살을 섞던 이였다. 닳고 닳은 창녀라고 생각했다. 모르도르의 꽃은 피어난 것이 꽤나 아름답고 유혹적이라 그것을 꺾으려 달려드는 이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밀쳐낼 수 없었다.
"....거짓이다. 내가 말하는 모든것들은."
안나타르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꿈꾸는 듯한 모습으로 눈빛이 바뀌었다. 다시금 손을 올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주 잔잔하게 몸이 떨려오는것이 느껴졌다.
"...사랑한다. 안나타르."
차오르는 눈물이 금세 무릎위로 뚝뚝 떨어져내렸다. 채 감지 못한 시선이 스란두일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 이것은 거짓인데...
머리보다 손이 빨랐다. 고개가 숙여졌다. 울고있는 이의 눈가에 입술이 닿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또다른 손이 다가와 그를 옥죄었다. 뜨거운 키스를 받아내고 있는 눈가에선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스란두일은 알 수 없었다. 중요한것은 안나타르가 "자신" 때문에 눈물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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