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에루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자손을 번식시키신 이래 가장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만 한정된 권한은 아니었다. 자신의 쌍둥이 동생 엘로스. 용감한 선원 에아렌딜괴 아름다운 별 엘윙의 자손인 우리 둘 모두에게 다른이가 할 수 없었던 선택을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기회는 공평했지만 선택은 공평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공평한 것일지도 몰랐다. 엘로스는 인간이 되길 희망했고, 나는 엘프가 되길 원했다. 자라면서 한번도 떨어져 본 적 없었던 쌍둥이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눠지게 되었다. 유한한 생명이라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삶이었다. 몇번이고 엘로스를 설득하려 해보았다. 네가 원하는 그 길은 엘프여도 갈 수 있는 길이다. 무언가 더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무섭게도 생명의 책이 마침표를 찍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슬픈일이 아니겠느냐. 사랑하는 동생아. 나의 아우. 나와 함께 에루의 품 안에서 뜻을 펼치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희미하게 웃음진 입술로. 눈끝에는 어쩐지 눈물이 살짝 고인 상태로 나의 손을 꼭 쥐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님. 빛나는 별 엘윙과 위대한 선원 에아렌딜의 아들 엘론드 페레딜. 나는 가야합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 그곳에 있습니다. 엘프여도 할 수 있겠지요. 무서운 것이 어딨습니까. 죽지않는 유한한 생명. 튼튼한 체력. 모든것이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 그래서 지금껏 시대를 지배해왔고 이렇게 영생을 누리며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형님.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엘프이기에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약합니다. 아직 제대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느리기만 합니다. 쉽게 늙고 쉽게 죽고 쉽게 아픕니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바쳐 무언가에 매진할 수 있는 끈기가 있습니다. 올곧음. 정의. 그리고 결단력. 저는 그런 것이 좋습니다. 아주 오래 전 어머니가 나와 형님의 손을 잡고 들려주셨던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그런 짧으면서도 강렬한 인생. 무언가를 해냈다는 거대한 성취감. 생명의 한계를 느낄 수 있는 자들의 맹렬함. 그런것들은 일루바타르의 영광을 안고 사는 엘프에게는 없는 것들 입니다. 저는 그런 생을 살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반쪽. 그러니 슬픔을 거두세요. 나는 망자의 길을 걷는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로 향하고 있으니까요.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 때 처럼,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뒤돌아 걷는 엘로스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에루의 축복이 너의 길 앞에 언제나 함께하시길. 상투적인 축복의 인삿말 한 번 뿐 이었다. 씩 웃어보인 채,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사랑하는 반쪽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스스로 인간의 길을 선택한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먼 곳에서 엘로스의 소식이 들려올 때 마다 주군은 나의 눈치를 보았다. 오래 전 일인데도 방금 일어난 일인듯 느껴지는 깊은 슬픔이 늘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이야기가 쓰여있는지 궁금하다며 모른 척 주군에게 채근을 했다. 그러면 주군께서는 약하게 한숨을 내쉬곤 서찰에 쓰인 내용들을 조곤조곤 읽어주셨다. 주군의 입술이 벌어질 때 마다 속으로 한없이 에루께 빌었다. 그의 건강에 이상이 없기를,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혹여나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면...그것을 읽는 주군의 마음에 슬픔이 깃들지 않기를.. 그저.. 덤덤하게 읽어 주시기를..
다행히 한장의 편지가 읽혀질 때 까지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미까지 다 읽으신 주군이 고개를 들고 내게 편지를 건내시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가슴에 품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내내 건강하기를. 먼 곳에서나마 함께 이어져 있는 이 대지 위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랑하는 나의 반쪽. 네가 원하고 갈구하는 치열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원히 살아가기를.

차마 전할 수 없는 강렬한 바람이 허공에 흩어졌다. 당장이라도 손을 잡고 도망칠 수 없도록 힘주어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길은 엘로스가 선택한 엘로스의 길이었기에..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었기에.. 차마 다가설수도, 나타날 수도 없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각기 다른곳을 향하고 있었다.

너는 나의 하나뿐인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니까. 엘로스 페레딜.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부디 행복하길. 너의 길 위에서 행복하길.

그저 작게 속삭이듯 입 밖으로 내뱉어 보는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엘프의 숙명을 지닌 자의 아픔은 그저 그렇게 낙엽이 지듯 켜켜히 쌓여 크기를 늘렸다.
그것이 하프엘프의 숙명을 지닌 나의 슬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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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오로. 함정.

2013. 6. 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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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말은 기이하게 빨라 그다지 힘껏 달리지 않았음에도 소린이 알고있는 지역을 쉽게 벗어났다. 막 쉬려고 긴장을 풀었다 출발한 덕분에 온몸에 피로감이 엄습했지만 소린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본 적 없는 거대한 숲이 나타났다. 잠시 멈춰 목을 축이던 소린은 눈앞의 엘프가 그에게 무언가 내미는것을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눈을 잠시 가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길 안내는 제가 하지요."
"거처를 숨기겠단 이야긴가."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주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모습에 소린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기사 피차 껄끄러우니 이렇게 하는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낯선 곳이라는게 조금 염려스러웠지만 여차하면 자력으로라도 탈출하면 그만이고 또 오면서 은밀히 길에 표시를 해 두었으니 괜찮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밀어진 검은 천을 제 손으로 단단히 묶은 소린은 흔들리지 않게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품안의 깊이 넣어둔 단도의 묵직함을 곱씹으며 말의 흔들거림에 몸을 맏겼다.
눈을 감으니 모든 감각이 민감해졌다. 흔들리는 몸은 평지가 아닌 거친 숲길로 향했다. 진창일때도 있었다. 말이 작게 미끄러지면 예지하지 못한 몸은 배로 흔들렸다. 차라리 조금 풀어져 눈을 감고 힘을 빼면 편해질 것 같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엘프의 앞이라 혹 우습게 보여질까 신경쓰여 소린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몸을 곧추세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친 풀과 나무뿌리가 가득했던 길이 서서히 평지로 바뀌어갔다. 흔들리는 부담이 적어져 몸이 한결 편해졌다. 두필의 말은 고향에 온 것이 기쁘다는 듯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돌바닥에 말발굽이 울렸다. 어쩐지 소리와 공기. 온도만으로 익숙한 느낌을 받던 소린은 갑자기 정지한 말에 놀라며 들이마시려던 숨을 내쉬었다. 사레가 들린 소린이 진정하길 기다리던 엘프는 그의 고개가 다시 들리자 안대를 풀어도 좋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잔잔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소린은 눈 가리개를 풀었다. 부옇게 떠오르는 태양을 기대한 드워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하고도 화려한 돌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햇살은 높이 올려진 창 틈으로 군데군데 쏟아지는것이 전부였지만 그 작은 빛줄기들로도 안쪽은 찬란하게 빛났다. 고작 엘프들의 건축과 조각이 드워프의 솜씨를 따라갈 순 없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다른 면모로서 거대하고 웅장한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 소린은 저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겼다. 모리아의 성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웠지. 천천히 돌기둥들과 천장의 조각들을 바라보던 소린은 이윽고 섬세하게 조각된 문양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곧 그 밑에 거대하게 설치된 문과 마주했다. 그 앞에는 키가 큰 엘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넋놓고 두리번거렸다는 것을 깨달은 소린은 황급히 말 위에서 내려왔다. 이미 자신을 데려온 엘프는 그의 곁에서 엘프의 언어로 무언가 이야기하며 소린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몇번 끄덕인 키큰 엘프는 그제서야 소린에게로 다가와 고개숙여 예를 표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이곳의 집사 갈리온이라고 합니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오큰쉴드. 잠시 여독을 푸시지요.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하겠습니다."
"환자는 어디있소. 나는 환자를 보러왔을 뿐이오."
"쉬지 못하시고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신 것으로 압니다. 지친 손님께 용건을 청하는 것은 엘프의 예의가 아니지요. 주군께서도 지금 잠깐 밖을 향하셔서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후쯤에나 돌아오실 예정이시니 부디 방으로 들어주십시오."
"주군?"
"...잘못들으셨나봅니다. 주인님이십니다."

날카로운 드워프의 귀가 틀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집사라 칭한자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 이었다. 어찌됐건 이미 도착해버렸고 주군이건 주인이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지금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여도 좋을것 같았다. 고단한 몸과 정신도 슬슬 한계였으니 지금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두명의 엘프가 다가와 안쪽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퍽 고급인 듯한 벽지와 태피스트리를 돌아보며 성의 주인의 부와 지위를 가늠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간단한 식사가 안쪽으로 들여진 후, 주인이 도착하시면 모시러 오겠다며 괴상한 향수를 허공에 두어 번 뿌린 엘프는 방을 나섰다. 비로소 혼자가 된 소린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보드라운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 정신은 몽마에게 잡혀간 것 처럼 모든것이 아스라졌다. 좋은 향내가 어느샌가 사방에 가득 차올랐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소린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석양이 지고 있는 창가였다. 따스한 빛이 창문 너머로 어룽대며 침대 근처에까지 머물러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한 몸은 좀처럼 긴장하려 들지 않았다. 묘하게 풀어지는 몸에 의심한 채,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엘프가 아까 흩뿌리고 간 향내가 신경쓰였다. 소린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창가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향하자 맑아지는 머릿속이 느껴졌다. 몇번 숨을 들이키고나서야 소린은 제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강하게 느껴지는 허기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의 근처에는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식어도 본연의 맛을 상하지 않게 할 정도의 음식이라 보는 것 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무언가 생각하기도 전에 뱃속에서 정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잘 차려진 음식으로 손이 가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안주머니에 챙겨둔 마른 빵 한 조각과 약간의 물로 속을 달랬을 뿐이었다. 겨우 숨을 돌리고 부족한 것들을 채우고 나서야 몸안에 생기가 돌았다. 욕구를 해결하고 나니 그제서야 이곳에 온 이유가 생각났다. 주인은 오후에 돌아온다 했는데.. 새삼 어떤 이일까 궁금했지만 소린은 곧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생각을 비웠다. 엘프일 뿐이었다. 누구이고 어떤 자이고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보수를 받아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저 마음을 비우고 있기로 하지 않았는가.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은 채, 소린은 굳건히 자신을 다독였다. 눈과 귀를 닫는 편이 지금은 이로운 듯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엘프가 방 안으로 들어와 주인의 귀환을 알렸다. 주변의 정리를 하는것을 지켜보던 엘프는 소린이 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아까와 같은 검은 천이었다. 스스로 요구한 것 임에도 불구하고 소린은 내키지 않은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 눈을 가렸다. 머릿속으로 은밀히 숨겨둔 단도가 있는곳을 그리며 내밀어진 엘프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걷는 소리가 예민해진 귓가를 울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꼴같잖게 엘프의 손을 잡고 걸어가다니. 코웃음이 나왔지만 소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일 일 뿐이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스스로 생각을 제어하고 머리를 비우는 그 긴 시간동안 엘프는 그를 어딘가로 인도했다. 한참을 걷다 잠시 손을 놓은 채, 문을 열어제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손을 끌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 왔습니다. 이쪽으로.
문 안쪽의 공간은 꽤나 천장이 높고 거대한 홀과 같다 느끼며 소린은 어릴적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 곳엔 어린아이와 같이 웃는 자가 있었고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감싸는 이가 있었다.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린에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느릿하게 단을 올라 어딘가에 당도하자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엘프는 다시 손을 놓았고 그의 주인인 듯한 자에게 예를 갖췄다.
그 순간 느껴지는 시선.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엘프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소린은 알 수 있었다. 시선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 게다가 어딘가 낯설지 않은 기시감. 혼란스러워하는 소린의 앞에 낮은 저음이 잔잔하게 퍼졌다.

"나의 성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소린 오큰쉴드."

귀에 스미는 목소리는 마치 짙은 어둠처럼 몸을 감쌌다. 하이엘프들이 쓰는 억양. 시야를 가린 검은 천 속에서 눈꺼플이 바르르 떨리는것을 느끼며 소린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희미한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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