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란엘. 140자 연성+a 화관.
철마다 바뀌는 왕의 관은 늘 주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좋은가지를 골라 크고작은 열매들로 장식한 관이 머리위에 얹어질때면, 똑같은 관 하나는 그의 손에 들려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주인을 기다리며 소중하게 만들어진 왕관은 오늘로 꼭 일천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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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방 안을 채우실 작정이십니까?"
"그대가 쓸데없는 질문을 할 때도 있군."
방금 막 완성한 관을 벽에 고정시킨 걸쇠에 걸어둔 채, 중심을 맞추려 이리저리 기울여보던 스란두일은 이내 손을 털고 물러섰다. 이전의 것과는 다르게 상큼한 붉은 색의 열매가 돋보였다. 따스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왕은 그제서야 곁에 있던 집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모습 사이로 아주 조금의 부드러움이 새어나오는 것을 눈치챈 갈리온이 못볼 것을 보았다는 눈으로 혀를 끌끌 차올렸다.
"그런 바보같은 표정을 하실 거라면 절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래도 명색이 이나라의 왕인데 언사가 너무 심한것 아닌가?"
"이정도면 괜찮지요. 선왕이셨다면 좀더 거칠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늙은 집사를 잡아먹을 것 처럼 바라보시는 분이 하시는 행동 치고는 참으로 소심하지 않습니까?"
"사내의 연정은 집사를 보는 것보다 훨씬 다정한 것이니까 말일세."
"쓸데없는 변명일랑은 집어 치우시고요. 차라리 자빠뜨리지 그러십니까."
"자네의 그 발언은 수많은 놀도르를 순식간에 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 발언이야. 알고있나?"
"그 놀도르의 수장을 신다르로 만들면 해결 될 문제이지요."
늙은이의 말장난엔 못 당한다니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스란두일은 공들여 문양을 넣은 찬장의 문을 닫았다. 진심을 말해버린 입술에 혹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참으로 수많은 난관이 뒤따르는 법이었다. 제멋대로 손목을 잡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반항하는 몸을 묶어 강제로 취하면 이 열기가 사그러들 것이라고 되뇌었던 적이 과연 한번도 없었을까.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과 현실의 간극에서 고민하는것은 고작 몇 년으로 충분했다. 치기어린 감정에 충실한 인생을 보내기에 엘프의 인생은 너무나도 길었으니까.
"영양가 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방에 숨겨놓은 술이나 가져와봐."
"좋은 술은 왕의 창고에 그득이 쌓여있건만 어찌하여 불쌍한 늙은이의 조그마한 기쁨을 탈탈 털어가려 안달이십니까?"
"나의 창고에는 쓰레기만 가득하고 좋은 술은 그대의 방으로 따로 들어간다지. 그걸 모르는 머크우드의 엘프도 있던가?"
"하여간 말도 되지않는 누명을 씌우신다니까 .. 정말 서러워서 못살겠습니다. 늙으면 어서 서역으로 떠나버려야지.."
"떠나게 되면 이별의 선물로 큰 오크통으로 한개 실어주지. 그러니까 어서 가져와봐."
"두 통으로 해주십시오. 가는길이 너무 지루해서 그 전에 술이 떨어지면 곤란하니 말입니다."
"생각해보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보이는 스란두일을 쳐다보던 갈리온은 못마땅한 얼굴로 잔뜩 굽힌 허리를 두드려댔다. 날씨가 궂으려는지 허리가 아프다는 둥, 엊그제 좋은 토끼고기가 들어온 것 같은데 이 놈팽이들이 어디다 밖아두었을지 찾으러 가봐야겠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방을 나서는 집사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왕은 문이 닫히고서야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닫아둔 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위에 얹은 관은 한없이 가벼웠지만 찬장 안에 걸려있는 관은 한없이 무거워보였다. 똑같은 한 쌍의 관이었음에도 그래보였다. 지고있는 의미가 달라서였을까.. 뭐 아무래도 괜찮았다. 당분간 관의 주인은 오지 못할 것 같으니 이곳에 잠시 놓아두면 된다 생각했다. 먼 훗날 주인이 도착해 무겁다 투정하면 새털같이 가벼운 관으로 새로 만들면 되는 터였다.
물끄럼히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채, 스란두일은 방을 나섰다. 불러놓고 저보다 늦게 도착하면 늙은 집사는 또 중얼중얼 잔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 밤은 그 잔소리를 벗삼아 술에 취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답지않게 노랫소리를 흥얼거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끊겼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모든것이 죽어 곱게 말라있는 공간에서 방금 걸어둔 화관만이 싱그럽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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