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린스란. 어두운 숲 1
드워프의 위대한 왕과 그의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린 왕자에게는 기댈곳 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의탁해 떠돌며 잠자리를 구걸하고 나어린 조카들을 돌보며 일을 해야만 했다. 무기를 쥐던 강인한 손은 고작 인간들의 대장간에 빌붙어 망치를 들어야 했고 호사스러운 보석이 장식된 튼튼한 갑옷이 걸쳐져있던 단단한 몸은 더러운 작업복으로 휘감긴 지 오래였다.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가며 과거를 잊지말자 그토록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까지 생각하기에 닥친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하고 서러웠다.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 말고 새로운 돈벌이를 찾은 건 그때 즈음 이었다. 같이 일하던 인간들 중 하나와 친해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다친 이의 어깨뼈를 맞추고 부은 근육을 매만져 준 적이 있었다. 대대로 쇠를 만져온 손아귀의 힘은 단단했고 보석을 세공한 손길은 날카롭도록 매서웠다. 아무것도 아닌 일 이었지만 인간은 너무나도 만족했고 붓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작게 소문이 돌아 이리저리 뼈를 맞춰주고 근육을 풀어주는 일을 종종 하게된 소린에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전문적으로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다행히 인간들 중 의술에 조예가 깊은 이가 있어 눈대중으로나마 혈과 근육의 움직임을 배웠다. 소소하게 일을 하는 중간에 한 두번 씩 연락이 오면 마사지를 해준 뒤, 대가를 받는 일은 사실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았고 뭉툭해져버린 손끝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나자 찾는 이는 늘어만 갔다. 인간의 힘으로는 낼 수 없는 괴력에 몇몇 다른 종족에게서도 연락이 오곤 했다. 대부분의 일들을 소린은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단 한 종족에게서만큼은 어떤 연락이 와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종족은 엘프 종족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아주 어두워진 밤 이었다. 겨우 허기를 채우고 소린은 킬리와 필리 두 형제들과 함께 작게 놓은 모닥불을 앞에둔 채, 밤을 지샐 준비를 했다. 정교하게 세공된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마무리를 하던 소린의 곁에는 남은 쇳조각들을 들고 이리저리 맞추며 장난을 치는 조카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희미하게 웃음띈 얼굴로 바라보며 작업에 박차를 기하던 머리맡에 어느순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해 흠칫 놀란 소린과 킬리, 필리는 방어자세를 취하며 화들짝 제자리에서 튕겨져 올라왔다. 소린은 잽싸게 들고있던 단검을 겨눈 채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누구냐!!!"
"진정하시오. 소린 오큰쉴드. 나는 적이 아닙니다"
양 손을 들어보이며 무기가 없음을 고하는 인영은 흰 로브로 온몸을 감싼 채, 얼굴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린은 그가 입고있는 로브가 젖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 의미를 알아챘다.
"더러운 엘프에게 볼일은 없으니 순순히 보내줄 때 가는게 좋을거다. 계속 있으면 험한꼴을 보게 될것을 보장하지."
그제서야 자신들의 앞에 있는 자가 엘프라는 걸 알게된 킬리와 필리는 재빨리 벽에 걸린 무기들을 꺼내 손에 들었다. 낡고 녹이 슬어 형편없었지만 본디 드워프의 왕실에서 쓰던 것이니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란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물며 여럿도 아닌 하나 아닌가. 간단한 무기조차 들지 않은 엘프.
도저히 경계가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엘프는 깊게 쓰고있던 후드를 벗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굽이치듯 밖으로 흘러나왔다. 준수한 미모의 엘프는 손을 내린 채 공손하게 그에게 다시한번 인사했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오큰쉴드. 제가 이곳까지 온 것은 모시는 분의 전언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엘프가 모시는 분은 고작 엘프일테지. 더이상 듣고싶지 않으니 이곳에서 나가라."
"제가 모시는 분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 일텐데요."
"다시는 그 간교한 말솜씨에 넘어가지 않는다. 조부때의 굴욕을 내가 잊을 것 같으냐!"
"조부의 일은 매우 유감입니다. 하지만.."
"필리! 킬리! 이 자를 당장 바깥으로 내쫒아라!"
이어지는 말을 듣지않은 채 소린은 필리와 킬리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싸늘해진 얼굴로 우악스럽게 양 팔을 잡아 당긴 채 밖으로 내치려는 필리와 킬리, 그리고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엘프의 힘이 맞닥뜨렸다. 찢어질 듯 찢어지지 않는 로브가 짜증이 난 필리는 괴력을 발휘해 저항하는 엘프의 소맷단을 잡아 던졌고 졸지에 크게 휘청한 엘프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넘어지는 것은 피했지만 어느새 틑어진 소맷부리 사이로 주머니가 빠져나오는 것 까지는 막지 못했다.
털썩- 하고 제법 묵직하게 바닥으로 떨어진 주머니의 입구가 열렸고 반짝이는 금화가 새어나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순간, 필리와 킬리의 동작이 멈추며 눈이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금화주머니. 저것들만 있으면 당분간은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당장 배를 곯지 않아도 되었고 지긋지긋하고 좁은 공간이 아닌 제대로 된 터젼을 마련할 수도 있을것만 같았다. 소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자는 빠르게 제정신을 찾았다. 저것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러운 엘프의 돈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린은 겨누었던 단검을 치우고 무릅을 굽혀 금화를 주웠다. 침착하게 주머니에 그러모은 후, 입구를 조이고 매듭을 지어 단단히 묶었다. 킬리와 필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소린은 주머니를 엘프에게 건넸다.
"어서 돌아가라. 쓸데없는 감정의 소모를 하고싶진 않다."
하지만 엘프는 주머니를 받지 않았다. 그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소린을 바라볼 뿐 이었다.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주머니의 무게에 소린이 외려 당황했다. 눈을 부릅뜨며 위협을 해 보았지만 엘프는 그저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 이었다.
"저로 하여금 주군의 전언을 전할수 있도록 윤허해주십시오. 드워프의 왕자여."
".....그 호칭으로 나를 부르지 말라."
"주위를 물려주십시오. 잠깐이면 됩니다."
나긋하게 웃는 얼굴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소린은 금화주머니를 낮은 탁자위에 던져둔 채 한숨을 내쉬었다. 쉬이 포기하지 않을 언사였다. 잠깐 고민을 하던 소린은 멀뚱히 서있던 조카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자리를 비켜다오. 곧 끝난다."
필리와 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했다. 기척이 없어질 즈음 엘프는 다시 고개를 틀어 소린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마주본 시선에 소린은 긴장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고 엘프는 수려한 입술을 열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소린님을 찾으십니다."
"이유는?"
"소문을 듣자하니 뼈를 맞추고 뭉친 근육을 손보는 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신다 하더군요."
"엘프는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였다면 돌아가는 편이 좋겠어."
"돈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엘프의 말에 소린은 하, 짧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어디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 셈인가 이 엘프는. 어이없는 눈으로 쏘아보자 다시 예의 그 웃음을 지어보인 엘프는 바로 입을 열었다.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왕자께서 예상하신대로 제가 모시는 분은 엘프십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요. 이것은 정당한 거래입니다. 왕자께서는 돈이 필요하고 제 주군께선 왕자의 그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물론 저희쪽도 왕자께서 엘프들과 말조차 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소 큰 대가를 준비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엘프가 손을 뻗어 가리킨 것은 테이블 위에 소린이 놓아 둔 주머니였다. 얼핏 보아도 꽤 묵직한 주머니는 아까 확인해보았지만 모두 금화로 채워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소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장 조카들의 의식주가 몇 달은 해결될 큰 돈이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심경의 변화를 눈치 챈 엘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것은 총 치르게 될 대가의 1/5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일이 끝나면 치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도착하는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겁니다. 나흘 정도 저와 함께 가주셔야 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무엇이 문제이십니까. 혹 주군을 마주하는것이 불편하시다면 안대를 착용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자피 손으로 하시는 일일 뿐더러 굳이 얼굴을 마주하시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엘프를 비껴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더러운 엘프의 돈 이었다. 하지만 이리 빼앗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아까 마주했던 필리와 킬리의 눈동자에 서린 기운이 잊혀지지 않았다. 부족한 것 모르고 자라온 어린 아이들에게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혹독한 것일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다 자란 성인이지만 저 아이들은 다르지 않은가. 아직 제대로 전쟁조차 치뤄보지 못한 아이들인데 이렇게 고생을 하고..
한참을 망설이던 소린은 다시 시선을 들어 엘프와 마주했다. 굳건한 의지를 가진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나흘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배상액을 두배로 걸어야 할 것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이상은 걸리지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안대를 착용하지. 당신의 주군이 누구든 엘프를 마주하는것은 역시 유쾌하진 않으니 까."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간단한 짐을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밖에 왕자님을 모셔갈 말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말을 타지 않는다."
"타실 수 있는 말입니다. 특별히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엘프는 웃으며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언가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곧이어 물에 쫄딱 젖은 필리와 킬리가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소린, 가려는겁니까?"
"...나흘이다. 대장간에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고 전해라."
"소린.."
"어자피 일일 뿐이다. 더러운 엘프들의 돈을 뜯어내는 것도 복수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필리. 킬리를 잘 돌보도록. 내가 올떄까지 별다른 말썽이나 부리지 않게 잘 감시해."
"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거든요?"
"그래 알았다. 여기 금화를 두고갈테니 당분간 요기를 하도록 해라. 아랫 마을에가면 식당이 있을테니 말이다."
"... 빨리오셔야 합니다."
진지한 얼굴로 필리가 소린을 쳐다보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린은 필리와 킬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 힘차게 두드려주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옷가지와 간단한 것들을 챙긴 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맨 소린은 필리와 킬리를 한번씩 꽉 껴안은 후 밖으로 향했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맣고 어두운 밤. 그렇게 소린은 엘프와 함께 말을 타고 보이지 않는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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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안나. 조금 늦은 아침식사
창가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안나타르는 겨우 눈을 떴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후 흩어졌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한 안나타르는 그제서야 긴장을 늦춘 채 포근하게 감겨오는 흰 이불자락에 몸을 둘둘 감고 아직 떨쳐지지 않은 잠기운을 즐겼다. 먼 곳에서 봄을 환영하는 엘프들의 노랫소리가 창문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를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침대에서 좀체 나오지 못하는 안나를 깨운 것은 어느새 익숙해진 발자국 소리였다.
혼자 있는것을 알면서도 문을 노크한 뒤에서야 방안으로 들어온 켈레브림보르는 행여라도 잠든 이가 눈뜰까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침대 곁으로 다가와선 손에 양껏 든 것을 근처에 놓아두고 발치에 앉아 가만히 잠든 이를 지켜보았다. 시원한 이마. 느슨하게 땋아 반쯤은 흐트러진 검은 머릿결. 반쯤 가리워진 얼굴에 곱게 감겨있는 눈과 오똑한 코가 보였다. 새빨간 입술끝에 시선이 머무를 무렵, 잠투정을 하듯 안나타르의 몸이 뒤척거리며 움직였다. 마법에라도 걸린 양, 무심코 뻗어진 손 끝이 따스한 볼에 닿았다.
투박한 손끝에 보드라운 살결이 닿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너무도 부드러워 혹 상처가 날까 두려웠다. 어젯밤의 뜨거운 숨결을 나누었던 일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쉬이 더듬지 못하고 그저 아주 작은 부분만 닿은 채로 켈레브림보르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없어질까 두려웠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볼에서 느껴지는 따스함과 작은 경직에 안나타르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의 볼에 손을 댄 채 바라만 보는 켈레브림보르가 눈 앞에 보이자 안나타르는 저도모르게 웃어보였다. 돌돌 말아둔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어 볼에 닿아있는 켈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안나타르의 얼굴을 졸지에 감싸게 된 켈레브림보르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큼큼거렸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안나타르를 바라보았다.
"해가 높다랗게 떠올랐으면 깨우시면 될 일 아닙니까. 어찌하여 쳐다만 보고 계십니까."
"...너무 곤히 잠이 들어 혹 방해할까봐.."
"그럼 재워주시려고 이리 손을 대셨습니까."
"그건..!"
"농담입니다. 켈리. 좋은 아침이에요."
움찔거리는 그의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이며 작게 웃어보이는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와 같아 켈레브림보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한참을 미약한 힘으로 오며가며 장난을 친 안나와 켈리는 곧 동시에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실은 아까 잠깐 잠에서 깼습니다만, 켈리가 보이지않아 꿈인 줄 알고 다시 눈을 감았지요."
"미안하다.. 단지.."
"단지...?"
"어젯밤에..혹 나 때문에 식사를 못한게 아닐까 싶어..서."
"...아.."
"아침이면 배가고플게 아니냐. 그래서 간단하게 좀 요깃거리를 준비하느라 일찍 곁을 비웠다. 미안하구나."
"직접..말입니까?"
"...부족한 솜씨지만 말이다."
쑥스럼하게 웃어보이며 시선을 모로 돌리는 켈레브림보르를 쳐다보며 안나타르는 지난밤을 회상했다. 분명 저녁을 먹기도 전인 애매한 시간에 그의 대장간에 조언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방문해 그를 유혹했었다. 어쩐지 불붙어 달려드는 그를 막기도 애매해져 밤새 품에 안겨 울다지쳐 잠든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는걸까. 이상한 남자다. 이 자는 어째서 이렇게 내게 맹목적일 수 있는걸까..
하지만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만이 떠올랐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거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슬쩍 몸을 일으켜 손을 뻗으면 켈레브림보르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역시 손을 뻗어 부축해주었다. 똑바로 앉아 떨어지려는 손을 마주잡아 꽉 쥐어주면 또 진중한 눈빛이 안나타르를 향해 쏟아졌다. 달콤한 입술이 열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아니다...내가 어제 부주의.."
"쉿."
황급히 다가서 켈레브림보르의 입술을 손끝으로 막았다. 움찔거리며 아주 조금 뒤쪽으로 물러난 그의 눈빛에 동요를 읽었다. 금새 떨어진 손끝은 다시 켈리의 손을 잡았다.
"어젠..저도 조르지 않았습니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안나타르."
"네?"
".....아니다. 고맙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든게 고맙다. 네 존재가..이렇게 내 앞에 있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그리 말씀해주시면..제가 더 감사하지요."
따스한 눈빛이 오갔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끼며 안나타르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켈레브림보르의 품으로 조금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시장합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아, 미안하다. 한눈을 또 팔았구나. 잠시만.."
잡았던 손을 황급히 놓아두곤 켈레브림보르는 근처에 놔두었던 것을 째로 들고왔다. 작은 테이블같이 생긴것 위에 가벼운 음식들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안나타르의 앞에 그것들을 통채로 놓고 병을 기울여 우유를 따라냈다. 컵이 찰랑찰랑 차오르자 그제서야 미소를 지어보이며 침대위에 함께 앉아 식기를 건넸다.
"가볍게 먹기엔 괜찮을게다."
"...이것도 직접 만드신 겁니까?"
"아, 응.."
음식보단 제 무릎위에 놓인 트레이에 관심을 가지는 안나타르에게 반응해 또 귀끝이 새빨개져버렸다. 좌 우로 기웃거리며 모양을 살펴본 안나타르가 방긋 웃으며 예쁘다고 칭찬하자 볼까지 물들어버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켈레브림보르는 음식이 더 식을까 걱정돼 나이프와 포크를 붙잡고 먹기좋은 크기로 음식을 조각냈다. 접시째 건네주려 고개를 들자 안나타르는 빙글빙글 웃으며 살짝 입을 벌린 채, 켈레브림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어제 무리를 해서 팔과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몸이 불편하면 진작에 말을 해야 할 것이아니냐.. 어디 자세히 보자."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엇이냐. 내 뭐든 들어주마."
"켈리가 만든 음식. 직접 먹여주시면..안되겠습니까?"
"아..."
"부탁입니다. 켈리."
진득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피할수가 없었다. 흠. 흠흠.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켈레브림보르는 포크로 음식을 찍어올리고 잠시 멈칫 하다가 안나타르의 입 근처로 가져갔다. 활짝 웃는 입술이 좋은 호선을 그리다가 덥썩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움직이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켈리의 시선을 느끼며 안나타르는 충분히 음식의 맛을 음미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꿀꺽 넘긴 채 입술을 혀로 슬쩍 쓸어내린 안나타르는 눈웃음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켈리."
"..다..행이구나."
"하나 더 주시겠습니까."
"아, 응. 그래. 이번엔 이거. 이게 괜찮을 것 같다."
"아-"
신이난 켈리의 손짓과 오물오물 받아먹는 안나타르의 사이엔 달큰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이들 사이로 높게 솟아오른 햇빛이 내비쳤다. 밖에선 여전히 에레기온의 엘프들이 부르는 즐거운 환희의 노래가 넘실대며 사방으로 퍼졌다.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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