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란엘. 악몽

톨킨버스 2013. 6. 16. 11:16

숨이 가빠왔다. 헐떡대는 소리보다 심장소리가 더 쿵쿵 울렸다. 칼을 잡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더운 바람과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전장은 그야말로 시체의 산을 이뤘다. 하나하나 맞부딧혀오는 것들을 베어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언덕을 넘어서면 지원군이 우리를 눈치채 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뒤에서 갑자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돌아본 뒤쪽에서 오크정예병들이 달려들었다. 하나하나 무너지는 익숙한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쳤다. 여유는 없었다. 자신에게 막 달려드는 오크를 하나 밀쳐내고 그 뒤에 서 있던 오크를 베어냈다. 푸직-.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소리와 느낌이 칼 끝을 통해 전달됐다. 삶의 고단한 무게. 쉽게 베어지는 목과 흐르는 피의 지옥 한 가운데에 자신이 있었다. 갑자기 모든 소음들이 멀어지며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우성치는 오크들이 돌연 방향을 돌렸다. 자신보다 먼저 언덕 위를 향해 달려갔다. 그 곳에는 나의 주군이 있었다. 은빛의 아에글로스를 당당히 들고 적을 향해 그것을 휘두르는 모습은 흡사 검무인 듯 했다. 그것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주군께서 이곳에 계시다면 나 또한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했다.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파르라니 검기를 내뿜는 아에글로스가 움직이면서 피의 분수가 쏟아졌다. 그 서슬에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오지 못했다. 얼른 그의 곁으로 가야했다. 주군의 곁으로 가서 빈틈이 생긴 곳을 방어해야 했다. 갑옷에 둘러쌓여 둔해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지척이었다.

딛은 땅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지진에 산처럼 쌓였던 시체들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서둘러 중심을 잡으려 해보았지만 몸은 지진으로 벌어진 틈새로 빨려들어갔다. 누군가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막 밟고 올라서려는 찰나, 좌우에서 뻗어진 손들이 한꺼번에 나에게로 향했다. 무기를 빼앗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무력하게 만들었다.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주군!!!! 아무리 소리높여 불러도 대왕은 돌아보지 않으셨다. 입을 막으려는 더러운 손들을 뿌리치고 계속 그에게 소리질렀다. 마악 오크를 베어든 아에글로스를 잠시 땅에 꽂은 뒤,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든 대왕의 뒤에서 칼날이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매우 슬프고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천천히 쓰러지는 주군의 뒤로 흉측한 몰골의 오크가 눈을 번뜩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서 소모전을 하고 있던 오크들이 갑자기 그곳으로 모두 달려들었다. 엘프들의 칼날에 팔이 베어지고, 다리가 베어지고, 심지어 허리 깊숙히 화살을 날려도 그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숨이 붙은 채, 고통을 삼키고 있는 주군이 보이지 않도록 둥글게 둘러싼 오크무리들은 양손에 무기를 들었다. 달려나가려 힘껏 발버둥쳐보았지만 주박이라도 걸린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다리 사이로 대왕은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믿을 수 없단 표정. 두려움이 가득 차 떨리는 동공. 이미 피를 토해 새빨갛게 물든 입술이 움직여 간신히 들리지 않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

그 순간 오크들은 들고있던 무기를 대왕에게 한꺼번에 내리꽂았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주군의 몸과 충격에 감기지 못한 눈동자가 피부로 와 닿았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 공포. 두려움. 그 모든것이 오로지 나를 향했다.

"에레이니온!!!!!!!!!!!!!!!!!!!!!!!!!!!!!!!!"

모든것을 뿌리치고 대왕께 가려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늪에 빠진 것 처럼 발을 뗼 수 없었다. 물에 잠긴 것 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행동이 느려졌다. 칼날이 주군의 몸속에 밖혔다 다시 빼내지고, 그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는 것을 그저 볼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모든것이 사라져갔다. 해변가에 쌓여 파도에 쓸려가버리는 모래들처럼. 모든것이 사라졌다. 오크들도 무너져내렸고 대왕도 투명해졌다. 희미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암흑으로 돌아왔다. 온몸을 구속하고 있던 정체 모를 것 들도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다. 감기지 못한 그의 두 눈만이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가슴속에 슬픔이 눈처럼 쌓여갔다. 조용한 어둠이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주변을 잠식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나는 기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주군께 용서를 빌어야했다. 감기지 못한 그의 눈을 감겨드려야 했다. 제가 못나서. 제가 부족해서. 주군께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는데. 제가 대신 그 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는 무릎이 아파왔다. 하지만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이만큼 움직이면 또 저만큼 두 눈동자는 멀어져만 갔다. 새까만 어둠속에 녹아들 듯, 녹아들지 않는 눈동자를 찾아 한참을 기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랑스러운 엘론드. 넌 나의 희망이란다. 엘론드. 네게 책사를 맡기기로 했다.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엘론드. 상처받지 말거라. 세간에 도는 소문들은 그저 흘려보내거라. 너는 누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린돈의 일원이자 뛰어난 임라드리스의 군주가 될 것이다. 끊이지 않고 들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린돈의 군주여. 놀도르의 대왕이자 나의 하나뿐인 주군. 길 갈라드. 제발. 제발 제 곁으로... 곁으로..

네가 죽였어.

갑자기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없이 움직이던 몸이 우뚝 멈추었다. 아니야.. 무슨..

네가 그를 죽게 만들었어.

아니야.

네가 빨리 갔었더라면 그는 잡히지 않을 수 있었어.

아니야.

소리를 질렀더라면 그가 피할 수 있었어.

아.아니야..

원래는 네가 죽었어야 해. 네가 너 대신 그를 그곳으로 보낸거야.

틀려.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변명따위 둘러대지마라. 너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니야!!!!!!

허공에 거짓말 처럼 주군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피를 토하며 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는 모습에 저절로 손이 뻗어졌다. 하지만 나의 손은 주군께 닿지 않았다. 마치 영혼인 듯, 허무하게 통과되어버린 모습에 좀더 다급하게 그를 향했다. 아무리 해도 닿지 않았다. 주군, 나의 대왕이시어. 제발. 제발..

고통에 물들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입술이 열렸다. 그 속에서 방금 전까지 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엘론드. 나의 보석. 네가 나를 죽게 만들었구나. 네가 나를 이 고통속에 밀어넣었어. 듣기조차 무서운 내용들을 내뱉는 얼굴이 나를 비난했다. 아닙니다. 주군. 에레이니온. 저는 아닙니다. 저는..당신을...당신을..
일그러진 얼굴이 고통을 호소했다. 기침할 때마다 후득 떨어지는 그것은 뜨겁고도 새빨간 피였다. 피는 마치 실제의 것인 양, 나의 손과 얼굴. 모든곳에 튀었다. 끈적하게 젖은 손을 들어올려 주군을 향해 뻗었다. 아닙니다 주군. 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제발. 주군. 제발..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 마냥 주군은 나의 손을 피했다. 놀라 다가가지 못한 손이 움찔거리며 허공에 머물자 누군가가 손을 낚아 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어느순간 나타난 오크들이 아까 주군을 해하려 할 때처럼 나를 둘러쌓고 내려다보았다. 단단했던 바닥이 진흙창으로 변했다. 오크들은 천천히 내 위로 진흙따위를 던졌다. 칼을 쓰는 것 조차 아깝다 했다. 손과 발을 밟아 고정시키고 어떤이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칼날을 눈 앞까지 내밀었다. 물이 점점 차올랐다. 몸이 서서히 잠기고 귀가 멍멍해졌다. 누군가가 몸 여기저기를 세게 강타했다. 쿨럭이면서도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귀에 누군가가 자꾸 속삭였다. 네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어서 내게로 와다오. 엘론드. 나는 네가 필요하단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정신이 계속 몽롱해졌다. 나는 죄를 지었다. 나의 주군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못나서. 제가 잘못 생각해서. 에레이니온. 제가. 제가...

숨이 서서히 쉬기 힘들어졌다. 이것이 끝인가 라는 생각에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주군의 곁으로 가면 나를 꾸짖으실까. 용서해주시지 않을까. 대왕을 따라 온 나를 그저 곁에 두시지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들이 점차 희미해졌다. 생각하는것 조차 이제는 힘겨웠다. 막혀오는 숨에 편해지려고 애썼다. 죽음이란게 이런 것일까. 대왕도 이런 기분을 느끼셨을까...

 

 

 

 

 

 

 

갑자기 뺨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끌어올려진 멱살에 막힌 숨을 몰아쉬고 요란스레 기침을 해댔다. 컥컥거리며 산소를 들이마시려는 폐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에 자연스럽게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누군가 퍽퍽 소리가 나도록 등을 두드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그제서야 뺨이 다시 아파왔다.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촛점을 잡은 시선은 이곳이 침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무슨 꿈을 꾼 것만 같은데.. 무슨 꿈을 꾸었더라. 슬픈...아픈...
가까스로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숨을 내쉬자 자연스럽게 등을 두드리던 손길이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누구인가 확인하려고 하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따스함이 온 몸을 감싸안았다. 끌어안겨 품 속에 갇혀버린 몸이 흠칫 하고 놀랐다.

"자네의 탓이 아니야.'

끌어안은 이의 몸이 잔잔하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선 달콤한 향내가 나는 듯 했다. 품을 벗어나려는 행동이 일순간 멈추었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제어를 잃은 채,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들이 빈틈없이 맞물린 옷깃 사이를 적셨다.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해졌다. 느릿한 박자로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나는 어쩐지 더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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