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갈오로. 다툼.

톨킨버스 2013. 6. 18. 00:48

임시 막사가 세워진 엘프들의 주둔지는 밤의 날개 아래 몸을 숨겼다. 평소였다면 한밤중에까지 은은하게 울려퍼졌을 엘프들의 노래가 오늘따라 들리지 않았고, 보초병 몇명을 제외하고는 밖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군데군데 횃불이 타올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 외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는 것이 기이했다. 아마도 한낮에 치뤄진 전투가 매우 길고 지루하고 피곤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그 힘든 와중에도 밝게 불이 들어온 막사가 있었다. 꼭 신다르와 놀도르 주둔지의 정 가운데에 세워진 막사는 다른것보다 화려하고 크기가 컸다. 평소라면 그곳 입구에도 보초가 서 있어야 했지만 기밀유지와 원활한 회의를 위해 상관들 모두가 함께 주변을 물렸다. 그러했기에 그 안에서 격렬이 터져나오는 다툼의 소리는 막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대체 왜 안된다는 겁니까?! 이쪽으로 우회하여 진군해야 가장 안전하단 말입니다!!"
"네놈이 그런 소리를 지껄이니 애송이라는거다. 그렇게 가고싶다면 놀도르 군이나 끌고가도록. 나는 그렇게는 못 가."
"오로페르님!!!"

젊은 청년이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며 탁자를 내려쳤다. 다리를 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로페르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더 울컥한 청년은 홱 고개를 돌린 채, 문가까지 성큼성큼 돌아다녔다. 몇 번을 움직이고 나서야 진정된 숨소리로 돌아온 청년이 다시 탁자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몇번이고 입속에서 말을 골랐지만 쉬이 말을 섞고싶지가 않았다. 청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페르는 그저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근처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술이십니까!"
"그럼 말이나 계속 하던가."
"신다르들은 이렇게 늘상 태평합니까?"
"놀도르처럼 떽떽거리지는 않지."
"....지금 그 언사는 제 종족을 모욕하신겝니까."
"그대가 먼저 시작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태연히 잔을 따라 입에 대는 것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타오를 듯 빛났다. 팽팽한 기싸움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오로페르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채워진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끝까지 비워낸 뒤, 그는 잔을 밀어냈다. 청년의 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잔에 오로페르는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의심의 눈초리를 그대로 받아내며 잔을 채운 엘프는 놀도르의 대표로 나온 청년을 가르치는 투로 비꼬기 시작했다.

"그대가 전투를 치뤄보지 않아서 모를 수도 있겠군. 키르단은 대체 자네에게 뭘 가르쳤는지 알수가 없어. 좁은 협곡이란 말이지. 자네말대로 몸을 숨기고 대군이 이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야, 더군다나 이쪽 산맥은 험준하여 발견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 여기 까지는 맞아. 하지만 이곳은 모르도르에 근접한 산맥이다. 저 멍청한 오크떼들이 생각하는 머리는 없어도 제 집 앞마당은 훤히 꿰뚫고 있을텐데 그 좁은 계곡으로 지나갔다가 위쪽에 가파르게 늘어진 절벽을 따라 혹여나 화살이 날아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나? 더군다나 앞에서 기다린다면? 뒤를 밟아 궁지에 몬다면? 이런것 까지 생각 해 본 적이 있나?"
"........"
"그러니 신다르는 이 길로 가지 않는다. 아니 우리 그린 우드의 병사들은 더더욱 보낼 수 없어. 지형적으로 열세인 곳. 게다가 놀도르의 대표라 나온 어린 왕자의 의견에는 더더욱 찬성을 보낼 수 없단다. 알겠느냐?"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청년을 비웃은 오로페르는 큭큭 웃어보이며 청년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제 입으로 다시 가져갔다. 음주는 어른이 된 뒤에 천천히 배우려무나. 어깨를 툭툭 치고 펼쳐진 지도를 휙 접어버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듯, 오로페르는 그렇게 대강의 소지품을 챙겨 천막을 나서려 했다.

".....그럼 협곡으로 가지 않겠단 말씀이십니까."

이를 악물은 청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오로페르는 빙긋 웃으며 뒤돌아 답했다.

"아니, 협곡으로 간다. 단 네놈들과 같이 가지 않는다. 협곡은 위험하긴 하나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다. 일부를 선발로 보내 동향을 파악한 뒤, 한 길로만 가지 않는다. 본군은 그 길로 향하되, 궁수와 말을 탄 기수들을 사방에서 호위하게 할 것이다. 새벽에 미리 절벽으로 정찰병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지금으로선 가장 안전한 길이 될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 이니까."

네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란다. 애송아. 라는 명백한 도전을 알아들었는지 다시 차갑게 식었던 청년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네까짓 어린놈이 대왕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오로페르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인간과 엘프의 동맹. 절대악을 뿌리치기 위해 나온 전쟁. 명예와 동맹을 지키러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놀도르에게 적대적이었다. 하물며 이런 애송이와 동등한 위치를 겨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치욕이었다. 나이보다 조금 똑똑하긴 하지만 연륜이 달랐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정통성조차 의심받고 있는 핏줄이 아닌가. 제깟놈이 어디서 이런곳에 끼어들어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이정도로 따끔하게 혼을 내주었으면 어느정도 알아들었겠지. 아니라면 곤란해지는데. 머리를 긁적인 오로페르는 기지개를 켜며 막사문을 걷어올리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모든 행동이 멈춰버렸다.

"몰락한 머크우드의 군주라 여기저기 빌붙기가 대단하십니다."
".....애송이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머크우드의 군주 오로페르."
"네놈이 지금 신다르와 그린우드를 모욕한것이냐."
"군주께서 먼저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전 말입니다."
"이놈이..!"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청년 또한 잔뼈로 다져진 몸이었지만 그런 것 쯤은 아무런 문제되지 않았다. 세게 내리치고 맞닿은 뺨이 돌아가고 나서야 오로페르는 청년의 멱살을 틀어 쥔 채,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다시한번 그 잘난 혓바닥으로 말해보거라. 에레이니온. 네놈이 뭐라고 했는지 말이다."
"말조심하십시오. 당신이 신다르의 수장이듯 저 또한 놀도르의 수장입니다. 큭-."
"수장? 수장 좋아하시네. 그것이 개나소나 되는 것인 줄 아느냐?"
"....분명 경고를 드렸습니다."

차가운 은발과 흑발의 머릿결이 지척으로 가까워져 엉킬듯 나부꼈다. 코끝까지 멱살을 잡아 당긴 오로페르가 비틀린 입술을 열었다.

"경고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싶군요. 놀.도.르.의.수.장. 길. 갈라드. 님.?"
"그대가 원하시는대로 해드리죠."
"원하는 것? 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 주겠다고? 오 그야말로 고마운 일이로군 그래?"
"그것 말고 말입니다."

싸늘하게 웃은 검은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멱살을 잡고있는 것은 이쪽인데 어쩐지 오로페르는 등쪽에 서늘하게 맞닿은 날붙이의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내리십시오. 오로페르 전하. 지금 이순간부터 모든 무장은 해제당할 것이며 신다르는 저희 군에 재 편성될 것입니다. 혹 불만이 있으시다면 당장 이 몸뚱이에 쇠붙이를 쑤셔넣어드리지요."
".....누구냐."
"저희 부대에 빛나는 사자 한마리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군주여."

빠르게 멱살을 풀어낸 길갈라드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동안 엘론드는 밧줄로 오로페르를 제압시켰다. 기습으로 순식간에 무장해제된 오로페르가 호통을 치며 저항해왔지만 신다르의 군대는 아무도 그의 호령을 듣지 못했다. 결국 탁자에 볼썽사낲게 엎어져 결박당한 오로페르를 물끄럼히 주시하던 길 갈라드는 그의 어린 책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엘론드. 이만 물러가거라. 나는 이 자와 좀더 할 이야기가 있다."
"주군.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는 신다르의 수장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도 방법이 있으니 나를 믿어봐주지 않겠느냐."
"...."
"오늘은 푹 쉬거라. 곧 나도 들어가마."
"...존명."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진 어린 책사가 향했던 방향을 잠시 쳐다보며 미소짓던 길갈라드는 바로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엎드려 결박당한 오로페르의 뒤쪽으로 돌아와 탁자에 기대두었던 작은 검 한자루를 들어 검집에서 빼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와서 무서워지신겁니까. 전하."
".....닥쳐라."
"입은 살아계시니 좋습니다. 앞으로도 주욱 살아계시면 좋겠습니다만.."
"네놈이 신다르의 정예병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뇨. 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싸우지도 않을 겁니다. 왜 싸워야합니까? 그저 모두 거둬들이면 되는것을 말입니다."
"...이놈이.."
"시끄럽습니다. 전하. 아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전하의 말투. 꽤나 거슬립니다. 알고 계십니까?"
"네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오로페르는 묶인 줄을 끊어낼 듯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어찌나 꼼꼼하게 묶어놨는지 전혀 미동도 없는 몸을 느끼며 아주 조금 절망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길갈라드의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졌다.

"앞으로 못하는 말을 하게 되실분은 전하십니다."

손이 허리께로 다가섰다. 흠칫, 굳는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길갈라드의 입에 걸린 미소가 좀더 크게 벌어지고 환해졌다. 그대로 몸을 굽혀 상체를 밀착한 뒤 탁자에 바짝 붙은 오로페르의 귓가에 조심히 입술을 가져다 댄 뒤, 그가 속삭였다.

"말로해서는 못알아먹으시는 분이니 몸으로 친히 가르쳐드려야지요. 안그렇습니까? 아, 저는 비명대신 교성이면 좋겠습니다만, 부디 편하신 대로 내뱉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전하."

칼날이 천천히 옷 사이를 파고 들었다. 하반신을 그대로 그어내리는 느낌에 오로페르의 심장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설마. 설마..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로브의 절반이 찢겨져 나갔다. 갑작스레 찬 공기에 노출된 살갗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오로페르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벗겨진 둔부에 닿은 손길은 저도 모르게 몸을 경련시켰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 거라는 것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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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악몽

톨킨버스 2013. 6. 16. 11:16

숨이 가빠왔다. 헐떡대는 소리보다 심장소리가 더 쿵쿵 울렸다. 칼을 잡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더운 바람과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전장은 그야말로 시체의 산을 이뤘다. 하나하나 맞부딧혀오는 것들을 베어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언덕을 넘어서면 지원군이 우리를 눈치채 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뒤에서 갑자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돌아본 뒤쪽에서 오크정예병들이 달려들었다. 하나하나 무너지는 익숙한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쳤다. 여유는 없었다. 자신에게 막 달려드는 오크를 하나 밀쳐내고 그 뒤에 서 있던 오크를 베어냈다. 푸직-.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소리와 느낌이 칼 끝을 통해 전달됐다. 삶의 고단한 무게. 쉽게 베어지는 목과 흐르는 피의 지옥 한 가운데에 자신이 있었다. 갑자기 모든 소음들이 멀어지며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우성치는 오크들이 돌연 방향을 돌렸다. 자신보다 먼저 언덕 위를 향해 달려갔다. 그 곳에는 나의 주군이 있었다. 은빛의 아에글로스를 당당히 들고 적을 향해 그것을 휘두르는 모습은 흡사 검무인 듯 했다. 그것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주군께서 이곳에 계시다면 나 또한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했다.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파르라니 검기를 내뿜는 아에글로스가 움직이면서 피의 분수가 쏟아졌다. 그 서슬에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오지 못했다. 얼른 그의 곁으로 가야했다. 주군의 곁으로 가서 빈틈이 생긴 곳을 방어해야 했다. 갑옷에 둘러쌓여 둔해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지척이었다.

딛은 땅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지진에 산처럼 쌓였던 시체들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서둘러 중심을 잡으려 해보았지만 몸은 지진으로 벌어진 틈새로 빨려들어갔다. 누군가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막 밟고 올라서려는 찰나, 좌우에서 뻗어진 손들이 한꺼번에 나에게로 향했다. 무기를 빼앗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무력하게 만들었다.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주군!!!! 아무리 소리높여 불러도 대왕은 돌아보지 않으셨다. 입을 막으려는 더러운 손들을 뿌리치고 계속 그에게 소리질렀다. 마악 오크를 베어든 아에글로스를 잠시 땅에 꽂은 뒤,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든 대왕의 뒤에서 칼날이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매우 슬프고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천천히 쓰러지는 주군의 뒤로 흉측한 몰골의 오크가 눈을 번뜩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서 소모전을 하고 있던 오크들이 갑자기 그곳으로 모두 달려들었다. 엘프들의 칼날에 팔이 베어지고, 다리가 베어지고, 심지어 허리 깊숙히 화살을 날려도 그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숨이 붙은 채, 고통을 삼키고 있는 주군이 보이지 않도록 둥글게 둘러싼 오크무리들은 양손에 무기를 들었다. 달려나가려 힘껏 발버둥쳐보았지만 주박이라도 걸린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다리 사이로 대왕은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믿을 수 없단 표정. 두려움이 가득 차 떨리는 동공. 이미 피를 토해 새빨갛게 물든 입술이 움직여 간신히 들리지 않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

그 순간 오크들은 들고있던 무기를 대왕에게 한꺼번에 내리꽂았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주군의 몸과 충격에 감기지 못한 눈동자가 피부로 와 닿았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 공포. 두려움. 그 모든것이 오로지 나를 향했다.

"에레이니온!!!!!!!!!!!!!!!!!!!!!!!!!!!!!!!!"

모든것을 뿌리치고 대왕께 가려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늪에 빠진 것 처럼 발을 뗼 수 없었다. 물에 잠긴 것 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행동이 느려졌다. 칼날이 주군의 몸속에 밖혔다 다시 빼내지고, 그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는 것을 그저 볼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모든것이 사라져갔다. 해변가에 쌓여 파도에 쓸려가버리는 모래들처럼. 모든것이 사라졌다. 오크들도 무너져내렸고 대왕도 투명해졌다. 희미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암흑으로 돌아왔다. 온몸을 구속하고 있던 정체 모를 것 들도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다. 감기지 못한 그의 두 눈만이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가슴속에 슬픔이 눈처럼 쌓여갔다. 조용한 어둠이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주변을 잠식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나는 기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주군께 용서를 빌어야했다. 감기지 못한 그의 눈을 감겨드려야 했다. 제가 못나서. 제가 부족해서. 주군께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는데. 제가 대신 그 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는 무릎이 아파왔다. 하지만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이만큼 움직이면 또 저만큼 두 눈동자는 멀어져만 갔다. 새까만 어둠속에 녹아들 듯, 녹아들지 않는 눈동자를 찾아 한참을 기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랑스러운 엘론드. 넌 나의 희망이란다. 엘론드. 네게 책사를 맡기기로 했다.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엘론드. 상처받지 말거라. 세간에 도는 소문들은 그저 흘려보내거라. 너는 누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린돈의 일원이자 뛰어난 임라드리스의 군주가 될 것이다. 끊이지 않고 들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린돈의 군주여. 놀도르의 대왕이자 나의 하나뿐인 주군. 길 갈라드. 제발. 제발 제 곁으로... 곁으로..

네가 죽였어.

갑자기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없이 움직이던 몸이 우뚝 멈추었다. 아니야.. 무슨..

네가 그를 죽게 만들었어.

아니야.

네가 빨리 갔었더라면 그는 잡히지 않을 수 있었어.

아니야.

소리를 질렀더라면 그가 피할 수 있었어.

아.아니야..

원래는 네가 죽었어야 해. 네가 너 대신 그를 그곳으로 보낸거야.

틀려.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변명따위 둘러대지마라. 너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니야!!!!!!

허공에 거짓말 처럼 주군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피를 토하며 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는 모습에 저절로 손이 뻗어졌다. 하지만 나의 손은 주군께 닿지 않았다. 마치 영혼인 듯, 허무하게 통과되어버린 모습에 좀더 다급하게 그를 향했다. 아무리 해도 닿지 않았다. 주군, 나의 대왕이시어. 제발. 제발..

고통에 물들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입술이 열렸다. 그 속에서 방금 전까지 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엘론드. 나의 보석. 네가 나를 죽게 만들었구나. 네가 나를 이 고통속에 밀어넣었어. 듣기조차 무서운 내용들을 내뱉는 얼굴이 나를 비난했다. 아닙니다. 주군. 에레이니온. 저는 아닙니다. 저는..당신을...당신을..
일그러진 얼굴이 고통을 호소했다. 기침할 때마다 후득 떨어지는 그것은 뜨겁고도 새빨간 피였다. 피는 마치 실제의 것인 양, 나의 손과 얼굴. 모든곳에 튀었다. 끈적하게 젖은 손을 들어올려 주군을 향해 뻗었다. 아닙니다 주군. 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제발. 주군. 제발..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 마냥 주군은 나의 손을 피했다. 놀라 다가가지 못한 손이 움찔거리며 허공에 머물자 누군가가 손을 낚아 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어느순간 나타난 오크들이 아까 주군을 해하려 할 때처럼 나를 둘러쌓고 내려다보았다. 단단했던 바닥이 진흙창으로 변했다. 오크들은 천천히 내 위로 진흙따위를 던졌다. 칼을 쓰는 것 조차 아깝다 했다. 손과 발을 밟아 고정시키고 어떤이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칼날을 눈 앞까지 내밀었다. 물이 점점 차올랐다. 몸이 서서히 잠기고 귀가 멍멍해졌다. 누군가가 몸 여기저기를 세게 강타했다. 쿨럭이면서도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귀에 누군가가 자꾸 속삭였다. 네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어서 내게로 와다오. 엘론드. 나는 네가 필요하단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정신이 계속 몽롱해졌다. 나는 죄를 지었다. 나의 주군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못나서. 제가 잘못 생각해서. 에레이니온. 제가. 제가...

숨이 서서히 쉬기 힘들어졌다. 이것이 끝인가 라는 생각에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주군의 곁으로 가면 나를 꾸짖으실까. 용서해주시지 않을까. 대왕을 따라 온 나를 그저 곁에 두시지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들이 점차 희미해졌다. 생각하는것 조차 이제는 힘겨웠다. 막혀오는 숨에 편해지려고 애썼다. 죽음이란게 이런 것일까. 대왕도 이런 기분을 느끼셨을까...

 

 

 

 

 

 

 

갑자기 뺨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끌어올려진 멱살에 막힌 숨을 몰아쉬고 요란스레 기침을 해댔다. 컥컥거리며 산소를 들이마시려는 폐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에 자연스럽게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누군가 퍽퍽 소리가 나도록 등을 두드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그제서야 뺨이 다시 아파왔다.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촛점을 잡은 시선은 이곳이 침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무슨 꿈을 꾼 것만 같은데.. 무슨 꿈을 꾸었더라. 슬픈...아픈...
가까스로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숨을 내쉬자 자연스럽게 등을 두드리던 손길이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누구인가 확인하려고 하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따스함이 온 몸을 감싸안았다. 끌어안겨 품 속에 갇혀버린 몸이 흠칫 하고 놀랐다.

"자네의 탓이 아니야.'

끌어안은 이의 몸이 잔잔하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선 달콤한 향내가 나는 듯 했다. 품을 벗어나려는 행동이 일순간 멈추었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제어를 잃은 채,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들이 빈틈없이 맞물린 옷깃 사이를 적셨다.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해졌다. 느릿한 박자로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나는 어쩐지 더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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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사방에서 악이 창궐하여 인간과 엘프의 동맹이 실현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깊숙한 곳에서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고, 전쟁의 요지가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르도르 또한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안나타르는 모르도르의 사업채 절반을 감축했고 옮길만한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에 스란두일과 엇갈렸던 적이 꼭 세 번. 오늘이 지나고 나면 네번째가 될 터였다.

막 바깥에서 돌아온 안나타르가 검은 후드를 걷어올리며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하인들을 통해 스란두일이 와 있다는 것을 들은 직였다. 검게 쳐져있는 베일을 들어올리고 안쪽 깊숙한 곳으로 향하면 느릿하게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숫제 제 집이지. 코웃음을 치며 안나타르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어룽대는 빛이 가까워지면서 그가 있는 곳을 짐작케했다. 만면에 웃음을 띈 안나타르의 얼굴이 푸른 눈의 엘프와 조우했다.

"오늘도 일찍 가신 줄 알았습니다."
"헛걸음을 한 것이 벌써 세번째이지 않느냐."
"그렇게까지 되었습니까."

밉상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안나타르는 후드를 바닥에 벗어둔 채 스란두일에게 달려가 안겼다. 가볍게 뒤로 미끌어진 스란두일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좀더 깊숙히 밀어넣으며 안나타르의 무게를 감내했다. '그 날' 이후 안나타르는 알듯 말듯 어리광이 조금 늘었고 스란두일 역시 조금은 편하게 안나타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진실이라 매듭진 관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스란두일과 안나타르는 진실을 거짓으로 연기하며 관계를 지속해왔다. 그것은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주기도 했고 또한 아무런 생각없이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꽤 괜찮은 방법 같았다.
품에안긴 안나타르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스란두일은 가볍게 그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 근처에 와닿았다. 며칠 고생을 했는지 못본새에 조금 까칠해진 것 같은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손끝으로 조물조물 만져대자 안나타르가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그린우드의 군대도 출정을 한다 들었습니다."
"과연 모르도르의 꽃은 모르는 정보가 없군."
"예하도 가십니까?"
"왜, 걱정이 되느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주 조금 시무룩해진 모습에 스란두일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품에 안은 이를 똑바로 곁에 앉혀둔 채 눈을 마주쳤다. 붉은색 동공 안에 들어오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이 흡족해졌다. 다정한 이다. 생각보다. 남들이 뭐라고 여기든 모르도르의 꽃은 가시가 많을 뿐, 다정한 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나도 선봉에 설 것이다."
"그렇습니까.."
"몇 년만 기다리거라.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궐하는 악의 세력은 은밀하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들었습니다. 쉬운 상대는 아닐겁니다."
"그러나 인간과 엘프가 동맹을 맺는 정도의 연합이다. 이쪽도 만만치는 않을테지."
"아무렴요. 예하가 계시는 곳인데 쉬이 패하진 않겠지요."

그제서야 엶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스란두일을 바라보는 안나타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물끄럼히 바라보며 그저 웃던 안나타르는 잠시만 계시라며 홀연히 일어나 좀 더 안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온기에 스란두일은 안나타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도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의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소문은 흉흉해졌고 노랫소리가 들리던 왕궁 안에는 날카로운 쇠붙이들의 맞부딧히는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이곳을 자주 찾게 될는지도 몰랐다. 많은 아픔이 있을거라 했다. 겪어보지 않은 무서운 전쟁의 분위기는 스란두일을 짓눌러왔다. 막연한 공포. 두려움. 짓누르는 슬픔. 모든것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그 기분 더러움에 왕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했다. 겉으로 의연해야 하는 일국의 왕자. 정사에 바빠 눈코뜰 새 없이 일에 매달리는 군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왕성보다는 이곳이 나았다. 거짓. 이라는 진실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이가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이 곳, 모르도르였다.

낑낑대며 안나타르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다소 큰 상자였다. 다시 자세를 바로한 채, 무엇인지 쳐다보던 스란두일의 발 밑에 그것은 놓아졌다. 적지않은 양의 쇠붙이가 걸쳐져 있었다. 웃는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안나타르의 얼굴과 상자를 번갈아 보며 스란두일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예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
"저 멀리 드워프들의 왕국에서만 나오는 귀한 갑옷이라고 하더군요. 그 어떤 날붙이로 뚫리지 않는 미스릴을 사용했다고 하여 받아둔 것입니다. 마침 예하가 생각이 나 따로 빼 두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광물이군. 미스릴이라.."
"나머지 것들은 혹여 필요하실 지 몰라 제작해 놓은 갑주입니다. 물론.. 신다르군의 갑옷이 있으시겠지만. 혹시 몰라서..."

수줍어하는 시선이 이리저리 튀었다. 차마 마주치지 못한 채, 선물이라며 건네는 것들에 스란두일의 기분이 유쾌해졌다. 조심히 일어나 안나타르의 손을 잡고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에 다가가 짧게 입맞췄다. 살포시 감았던 눈이 떠지며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까.. 안나타르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혹 입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한번쯤은...입은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어려울 것은 없지."

흔쾌히 허락하는 스란두일의 로브를 안나타르가 벗겨냈다. 안의 간단한 옷만들 입은 채, 미스릴을 입히고 갑주를 하나하나 채워주었다. 다리와 팔. 어깨와 손목구를 채운 뒤 가장 마지막에 가슴에 대는 갑주를 들어올렸다. 겉에는 신다르의 문양이 새겨져 화려하게 빛났다. 그러나 진실은 속 안에 있었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던 안나타르가 스란두일에게 입히기 직전 그것을 보여주었다. 갑주 안쪽 한 구석에는 직접 새긴 듯한 문양이 보였다. 안나타르의 문양이었다.

"..새길까 말까 망설였는데...안보이는 곳이기에.."
"이왕이면 크게 새기면 좋았을걸."
"..예하."
"이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갑주를 받아들고 아로새긴 문양을 손끝으로 쓸었다. 안나타르의 이름을 딴 문양이 그대로 마음 속에도 새겨지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안나타르에게 시선을 옮기자 슬쩍 붉어진 얼굴이 미세하게 끄덕였다.

"네가 족하면 되었다. 이것까지 입혀주어야지."

살포시 받아든 채 다가오는 안나타르의 손길에 스란두일은 몸을 내맡겼다. 바짝 조여오는 차가운 금속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오싹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완벽하게 무장한 스란두일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조심히 품으로 안겨왔다. 스란두일이 그토록 지겨워하던 차가운 금속과 날붙이들이 덜컹이며 안나타르를 보듬었다. 한참 동안이나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전쟁은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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