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초여름의 하늘은 푸르렀지만 그 밑에 펼쳐진 대지에서는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 미친듯이 오크들을 베어나가는 칼날에 빛이 반사되어 무지개가 보였다.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저 멀리 올리폰트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모르고스의 군사들이 보였다. 그들을 맞서려 선두에 선 군대는 놀랍게도 임라드리스의 군주와 머크우드의 군주였다.

창-챙!

화살이 두 엘프를 갈랐다. 적시에 떨어진 등이 다시 철컥 소리를 내며 맞붙었다. 마치 맞춘 것 처럼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갑옷은 튼튼하고 가벼운 듯 보였다. 미친듯이 베어나가며 경계하는 두 로드의 주변으로 정예병들이 오크들을 몰아세웠다. 피와 오물들이 튀었지만 엘프들의 머리칼에는 한점의 먼지도 묻어나지 않았다. 긴 흑발과 금발의 머리칼이 휘날리고 은색의 칼이 춤을 추며 적들을 베어나가는 그 순간, 머크우드의 군주 스란두일은 그의 하나뿐인 왕자를 소리높여 불렀다.

"레골라스---!"
"아다!"

저 멀리 어린 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잎이라 불린 청년은 막 화살로 오크의 머리통을 쑤셨다가 빼낸 뒤였다. 왕의 부름을 받고 새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달렸다. 전통적인 놀도르와 신다르의 의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경황이 없는 전투중이었지만 두 군주들의 주변에 놀도르와 신다르의 갑옷을 입은 엘프 둘이 각각의 군주들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오크를 처단했는지 그것이 기록의 쟁점이었다. 빠르게 숫자를 적어가며 서로의 군주에게 눈짓을 했다. 신다르의 왕자가 도달해 붉은색의 화살을 높이 올리는 그 순간까지 촉박하게 움직이던 펜은 작은 새소리가 들리자 동시에 멈추어버렸다. 고개를 들고 왕자에게 양피지를 건넨 엘프들은 소임을 마쳤다는 듯, 동시에 칼을 빼어들었고 빈틈을 노리던 오크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들아, 결과는?"

막 오크 두마리를 베어넘긴 스란두일이 고개를 돌려 레골라스를 쳐다보았다. 빠르게 눈으로 숫자를 세는 레골라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찰나의 시간 끝에 왕자의 입이 열렸다.

"신다르의 승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건 음모야!"

활을 쏘다가 가까워진 오크를 넘어뜨리고 칼을 꽂은 엘론드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금세 엘론드의 근처로 손을 내민 스란두일이 그를 일으켜세웠다. 가까워져 온 표정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억울하면 백년 뒤에 다시 와."
"칫."

뒤쪽에서 레골라스가 소리를 질렀다.

"의식 얼른 끝내야 할 것 같은데요! 저쪽에서 트롤이 옵니다!!"
"젠장, 약혼식도 못하게 하다니 매너가 없군."
"그런거 하고 싶지 않거든?"
"억울하면 백년 뒤에 다시보자니까?"

킬킬 웃으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떨어진 등 뒤가 허전했다. 아들을 보며 눈짓을 하자 가까이에 퍼져있던 신다르의 군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신다르의!!!!!!!!!!!!!!!!!!"
"나 스란두일은!!"

그러자 놀도르의 군사들이 화답했다.

"놀도르의!!!!!!!!!!!!!!!!!!"
"나 엘론드와."

볼멘소리로 엘론드가 대답하며 칼을 휘두르자 레골라스가 킥킥대며 웃었다. 빨리 진행하라는 무엇의 압박을 동시에 받고 금세 진지해진 레골라스가 소리를 높였다.

"혼인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붉은색의 화살을 허공으로 쏘아올렸다. 그것은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살. 엘프의 활을 떠나자마자 점점 커지며 용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정확히 삼 초가 지난 뒤 큰 날개를 편 채 적들을 향해 위협적인 날개짓으로 향했다. 우왕좌왕한 적들이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근거리의 적들을 여전히 베어 넘기는 군주 둘을 보며 레골라스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부부의 증표요!!!!!!!!!!"
"젠장. 왜이렇게 근거리에 많아!!"

투덜거리면서도 떨어져 있던 스란두일과 엘론드가 성큼성큼 서로를 향해 다가섰다. 피에 젖을 것 같은 왼손을 허공에 털어낸 스란두일은 다가온 엘론드의 뒷머리를 부여잡은 채 진하게 키스했다. 강하지만 짧게 맞추었던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금세 떨어진 시선에서 많은 것들이 오갔다.

"다음에는 절대로. 내가 이길거야."
"기대하지요. 엘론드 부인."

큭큭대던 둘의 등이 다시 마주닿았다. 전투는 거진 마무리가 되었고 적들은 거의 허물어진 상태였. 하늘이 맑고 피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닿은 온기와 엄숙히 맺어진 혼인의 동맹. 신다르와 놀도르의 존속은 향후 백년간 굳건하게 이어질 터였기에 좋은 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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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그린우드에도 며칠에 한번쯤은 해가 드는 날이 있었다. 그런날은 나무밑으로 숨어들어 몸을 움츠리던 새들도 밖으로 나와 노래를 했고 제법 살랑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초여름의 해는 높게 떠올라 모처럼의 맑은 하늘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쉬이 오지 않는 기회를 빌어 영지에 웅크려있던 엘프들은 삼삼오오 짝을지어 밖으로 향해 고즈넉한 숲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먹고 마시며 빛을 즐겼다. 그들과 쉬이 어울리는 법은 없었지만 아주 가끔씩 남들이 접근할 수 없는 숲속 깊은 곳, 평평한 풀밭에는 그린우드의 왕과 그의 어린 왕자가 손을잡고 산책을 나오기도 했.

 

"이렇게요?"
"아니아니, 이렇게 이렇게 하는거라니까."
"아다, 조금만 천천히.."
"옳지. 그래. 그렇게."

어린 왕자는 갓 20살이 될법한 외모로 아비의 곁에 무릎꿇어 조잘대었다. 왕관도 밀쳐놓은 채, 왕이 만들고 있는 것은 짐승들을 잡기위한 덫이었다. 가볍게 끈을 묶어 신다르 특유의 매듭을 지어놓으면 혹 지나가던 작은 짐승들이 걸릴지도 몰랐다. 아직 활 잡기에 익숙치 않은 어린 왕자를 위해 아비가 만드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몇번의 서투른 손짓으로 만들어진 매듭은 빈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왕은 알고 있었다. 절대 끊어지지 않는 엘프의 기술로 만들어진 줄과 신다르의 매듭방식으로 이어진 덫은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튼튼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듯하고 굳건하게 매듭진 아비의 덫과 자신의 덫을 비교하던 왕자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다시 새 줄을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혼자서 해볼래요."
"가능하겠느냐?"
"...무슨 왕자가 이런것도 혼자 못한답니까."
"그럼 혼자 해보거라."

비죽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채, 왕은 낑낑대며 매듭을 엮는 왕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어릴적의 자신을 보는것만 같았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느낌이셨을까. 잘 되지 않는지 또 작게 성질을 내고 이제는 스스로 줄을 잡아 빼내어 다시금 엮는 왕자를 보며 왕은 어릴적의 기억을 조금씩 상기시켰다. 그때에는 나도 이렇게 혼자 끙끙대며 골몰했었지. 아마도 완성시킨 뒤 아버지에게 들고가서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지 꼭 안아주셨는지...어쩐지 그것만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말이다.

"아다, 잠깐 두손을 빌려주세요."

왕자가 말을 건네고서야 왕은 정신을 차린뒤 왕자를 바라보았다. 제법 모양이 잡힌 매듭을 들고 싱글벙글 거리는 왕자의 말대로 왕은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히죽, 싱그러운 웃음이 양 뺨을 타고 번졌다. 삽시간에 두 손목을 옭아맨 매듭이 바짝 조여졌고 불시의 기습에 놀란 왕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벌렁 넘어가버렸다.

"어이쿠-"
"헤헤, 잡았다."

의기양양하게 왕의 가슴팍에 앉아 손목을 구속한 매듭의 끝을 틀어쥔 채 웃어보이는 왕자를 보며 왕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알싸한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잡히고 말았구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비쭉 내밀어보이자 왕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봐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열었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왕자전하.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
"그렇게 말하셔도 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까딱이며 고개를 모로 두번 흔든 왕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옭아맨 왕의 손목을 머리 위로 낑낑 올렸다. 졸지에 가까워진 얼굴이 마주보았다. 엄한 표정으로 아비를 쳐다보다 빙긋 웃은 왕자는 이내 익숙하다는 듯, 조그마한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 아비의 입술 위에 겹쳤다. 꾸욱 누른 살덩이의 감촉이 촉촉하게 닿았다. 기습을 당한 왕은 멍하니 웃음담긴 얼굴을 쳐다보다 삽시간에 묶인 팔을 벌려 왕자를 껴안고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버렸다. 꺄앗! 아직은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가 웃음으로 변모했다. 높고 낮은 웃음소리가 번갈아 풀밭을 울리며 빛 사이를 오갔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따스하고 선명한 유년시절의 기억이었다.

 

 

 

 

 

"기억 나십니까. 아버지."
"....스란두일."

이미 청년이 되어버린 왕자는 꼭 어릴적과 같은 매듭으로 아비를 옭아매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포근하고 따스한 풀밭이 아닌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란 것이고, 반쯤 찢겨져버린 옷매무새였다. 다정하고 사랑이 담긴 눈빛은 왕자에게만 존재했고 그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서 뿜어져나오는 것은 포식자를 바라보는 두려움 가득한 먹잇감의 눈빛이었다. 훌쩍 커버린 왕자는 손목을 구속한 끈을 틀어쥔 채, 왕의 머리위로 올려 거세게 눌렀다. 느껴지는 고통에 작게 신음소리가 퍼지자 왕자의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스란두일..정신차려라. 나는.."
"당신은 위대한 머크우드의 왕이십니다. 저머크우드의 하나뿐인 왕자이지요. 그리고."

목울대가 넘어갔다. 긴장한 심장이 드러나버린 왼쪽 가슴팍을 거세게 울렸다. 유심히 아비의 모든 것을 살펴보던 스란두일이 마치 어릴적 그 때 처럼 오로페르에게 향했다. 코 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오로페르의 고개가 살짝 모로 틀렸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스란두일은 나머지 손으로 턱을 고정해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지금은 당신을 차지한 포획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입술이 맞닿았다. 어릴적의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오로페르는 거부하지 못했다. 차가운 냉기속에 숨어있는 미세한 떨림은 마치 어릴적 자신에게 부비던 온기와도 같았기에, 왕은 차마 왕자를 밀쳐낼 수 없었다.

 

스란오로. 전리품2 로 이어집니다 => http://secretgarden1.tistory.com/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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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적습니다."

대뜸 와서 한다는 말이 저것이다. 요망한 것이 또 무슨 투정을 속살거릴까 고대하던 스란두일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무릎위에 매달려있는 이를 밀어낼 재간도 없었다. 오늘은 애교를 부리기로 작정을 했나보다며 짧게 혀를 찬 스란두일이 까맣게 흩어진 머리칼을 손 끝으로 훝어내렸다.

"무엇이 말이냐."
"보석 말입니다. 너무 적습니다. 예하."
"충분한 것 같은데."
"제게 주실 것이 그런것 들 뿐이라면 이제부터 예하를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뜯어내기로 작정을 하였구나."
"그런 셈이지요."

돌직구를 날리면 그대로 받아쳐온다. 그런 점이 안나타르를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꾸밈없는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부족하면 부족하다. 마음에들지 않으면 내던져버리는 그 성미가 묘하게 끌리는 게 신기했다. 곱게 웃어보이며 적다 투정하는 보석들은 왕실에 납품되는 것들 중 최상의 것들로 가져온 것이었다. 절대 적을리가 없을 터인데 이리 교태를 부리는 것을 보면 무언가 따로 원하는 바가 있을 법 했다. 짐짓 모른 체, 곁의 상자를 뒤적여 이것 저것을 그의 몸에 대어본다. 붉은색의 루비, 연녹색의 비취. 하나같이 안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입이 비쭉 나와있으면서도 또 스란두일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대어주는 보석이 가장 돋보이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바꾸어주는 것을 보며 또 보람을 느꼈다. 하여간 어찌 할 수 없는 여우였다.

"이리 잘 어울리는데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모르겠구나."
"예하의 연심이 들지 않은 보석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연심이라. 왜 그리 집착하는가?"
"연모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데에 집착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전히 무릎에 매달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연모라. 어려운 것을 말하는 입술을 보며 욕정만을 느끼는 자신이 순간 낯부끄러워졌다. 연모라. 그 어려운 것을 네가 원하면 어찌하느냐. 나는 너를 그리 보고있지 않건만.

"나를 연모하느냐?"
"예하는 어떠십니까. 저를 연모하십니까?"
"나는 너를 연모하지 않는다."
"사실 저도 예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근데 어찌 자꾸 연심을 찾느냐?"
"그러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빙글 웃어보이며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선 안나타르는 손을 뻗어 스란두일의 얼굴을 감싼 채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라 올려보던 눈동자는 시선에 얽혀들었다. 자신을 가둔 붉은빛의 눈동자는 한껏 달콤하고 은밀해보였다. 고운 눈매가 접히면 그 역시 일그러졌다. 점차 다가오는 얼굴에 피하지 않은 채 입술을 벌리면 꼭 그 틈새로 맞는 살덩이가 들어와 안쪽을 휘저어간다. 손을 올려 다가온 머리칼을 부여잡고 세게 누르면 그역시 응수하며 안쪽으로 향해 입안을 내어준다. 한참이고 떨어질 줄 몰랐던 입술이 불현듯 떨어졌다. 촉촉히 젖은 입술이 움직여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밖에서는 모르도르에 예하의 연인을 숨겨두었다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신경쓰이는것이냐."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만?"
"혹 예하께서 불편하시다면 그런 것 처럼 행동해드릴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그러십니까...?"
"..안나타르?"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픽 웃어보이며 가운이 떨어져있는 곳 까지 걸어가 가볍게 걸친 안나타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걸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스란두일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것을 확인 한 뒤 또 한번 웃어보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경쓰이십니까?"
"그러고보면 너는 한번도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보석도, 진귀한 것들도 모두 내가 알아서 준비한 거였지."
"그랬습니까?"
"들은 바로는 그랬다. 모르도르의 꽃은 제 몸을 내어준 대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원한다 했다. 하지만 너는 어찌해서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것이냐?"

싸늘해진 말투. 의심의 눈동자. 안나타르는 미소를 띈 채, 웃었다. 흔한 표정이었다. 상대를 의심할 때의 표정. 어린 왕자여. 아직 본심을 숨기는 방법도 배우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어찌 왕자라 할까. 제왕학을 배운 왕가의 일원이라 할까. 
딱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안나타르는 여몄던 가운을 다시 풀어헤치고 스란두일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피하지는 않지만 경직된 근육이 보여 더더욱 유쾌해졌다. 그래봤자 그대는 나의 맛 좋은 먹잇감 중 하나야. 좀더 몸부림치고 불안해해라.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 이니까.

"저는 처음부터 예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하의 연심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나도 몇번이고 말했다."
"그럼 거짓을 주십시오."
"거짓?"
"예하가 절 연모하고 있다는 거짓 말입니다."
"...그것은 네게 득될것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보석을 주마. 물질이야말로 네게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더냐."
"물질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겐 필요없는 것이지요. 모르도르의 이 거대한 곳. 제가 재물따위를 원했다면 진즉에 그곳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거짓이라도 예하의 연심을 얻고싶습니다. 그것조차 주실수 없다면. 이제 저를 찾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슬핏 웃어보이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허벅지 위로 엎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왕자야 네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뿌리칠 수 있을까. 저 먼곳. 린돈에 위치한 너의 그 마음속 정인에게 달려갈 용기는 없으면서도 나를 외면할 수 있을까. 아니, 넌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그런' 니까.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꽤 무덤덤해진 손이 안나타르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천천히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안나타르의 눈이 감기며 미소가 감돌았다. 몇번이고 말을 골라 낸 스란두일의 입술이 열렸다. 그로서는 꽤나 무거운 말 이었다.

"...나는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을 평생 줄 수 없다."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지고 싶으냐."
"예하. 기억 나십니까? 제 방으로 오셔서 절 처음 안으시던 밤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지."
"처음엔 우스웠습니다. 고작 왕자의 지위를 가지고 저를 취하려 하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예하의 생각보다 저는 이곳에서 오랜 기간을 버텨왔습니다. 어지간한 상대는 돌려보내고 알아서 처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저 가만히 예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안나타르.."
"예하께서 제게 연심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마 저는 이리하고도 예하가 절 다시 찾아주시면 또 바보처럼 웃어보이겠지요. 그런 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욕심이란 걸 좀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란 걸 아는데. 그것이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
"재물. 보석. 필요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가져보고싶은 것이 있는데 장사꾼이라면 욕심내보는 것은 당연한게 아닙니까?"
"안나타르...."
"한번의 욕심입니다. 예하께서 제게 혹여라도 작은 연정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번쯤. 그 마음이 거짓임을 알고있어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장사란 그런것이니까요. 작은 것에 기대를 거는 법이니까요."
"..내가 그래서 그것을 줄 것 같으냐."

진득하게 내뱉어진 말에 안나타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를 환히 지어보였다. 눈빛이 떨렸다. 벗어날 수 없다.

"네, 한번 이라면. 예하께선 주실 것 같았습니다."

머리칼을 쓸던 손이 멈추었다. 녹아내릴듯 예쁘게 웃음짓는 안나타르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몸을 겹치고 살을 섞던 이였다. 닳고 닳은 창녀라고 생각했다. 모르도르의 꽃은 피어난 것이 꽤나 아름답고 유혹적이라 그것을 꺾으려 달려드는 이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밀쳐낼 수 없었다.

"....거짓이다. 내가 말하는 모든것들은."

안나타르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꿈꾸는 듯한 모습으로 눈빛이 바뀌었다. 다시금 손을 올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주 잔잔하게 몸이 떨려오는것이 느껴졌다.

"...사랑한다. 안나타르."

 

차오르는 눈물이 금세 무릎위로 뚝뚝 떨어져내렸다. 채 감지 못한 시선이 스란두일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 이것은 거짓인데...

머리보다 손이 빨랐다. 고개가 숙여졌다. 울고있는 이의 눈가에 입술이 닿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또다른 손이 다가와 그를 옥죄었다. 뜨거운 키스를 받아내고 있는 눈가에선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스란두일은 알 수 없었다. 중요한것은 안나타르가 "자신" 때문에 눈물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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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에루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자손을 번식시키신 이래 가장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만 한정된 권한은 아니었다. 자신의 쌍둥이 동생 엘로스. 용감한 선원 에아렌딜괴 아름다운 별 엘윙의 자손인 우리 둘 모두에게 다른이가 할 수 없었던 선택을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기회는 공평했지만 선택은 공평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공평한 것일지도 몰랐다. 엘로스는 인간이 되길 희망했고, 나는 엘프가 되길 원했다. 자라면서 한번도 떨어져 본 적 없었던 쌍둥이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눠지게 되었다. 유한한 생명이라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삶이었다. 몇번이고 엘로스를 설득하려 해보았다. 네가 원하는 그 길은 엘프여도 갈 수 있는 길이다. 무언가 더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무섭게도 생명의 책이 마침표를 찍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슬픈일이 아니겠느냐. 사랑하는 동생아. 나의 아우. 나와 함께 에루의 품 안에서 뜻을 펼치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희미하게 웃음진 입술로. 눈끝에는 어쩐지 눈물이 살짝 고인 상태로 나의 손을 꼭 쥐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님. 빛나는 별 엘윙과 위대한 선원 에아렌딜의 아들 엘론드 페레딜. 나는 가야합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 그곳에 있습니다. 엘프여도 할 수 있겠지요. 무서운 것이 어딨습니까. 죽지않는 유한한 생명. 튼튼한 체력. 모든것이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 그래서 지금껏 시대를 지배해왔고 이렇게 영생을 누리며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형님.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엘프이기에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약합니다. 아직 제대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느리기만 합니다. 쉽게 늙고 쉽게 죽고 쉽게 아픕니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바쳐 무언가에 매진할 수 있는 끈기가 있습니다. 올곧음. 정의. 그리고 결단력. 저는 그런 것이 좋습니다. 아주 오래 전 어머니가 나와 형님의 손을 잡고 들려주셨던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그런 짧으면서도 강렬한 인생. 무언가를 해냈다는 거대한 성취감. 생명의 한계를 느낄 수 있는 자들의 맹렬함. 그런것들은 일루바타르의 영광을 안고 사는 엘프에게는 없는 것들 입니다. 저는 그런 생을 살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반쪽. 그러니 슬픔을 거두세요. 나는 망자의 길을 걷는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로 향하고 있으니까요.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 때 처럼,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뒤돌아 걷는 엘로스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에루의 축복이 너의 길 앞에 언제나 함께하시길. 상투적인 축복의 인삿말 한 번 뿐 이었다. 씩 웃어보인 채,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사랑하는 반쪽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스스로 인간의 길을 선택한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먼 곳에서 엘로스의 소식이 들려올 때 마다 주군은 나의 눈치를 보았다. 오래 전 일인데도 방금 일어난 일인듯 느껴지는 깊은 슬픔이 늘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이야기가 쓰여있는지 궁금하다며 모른 척 주군에게 채근을 했다. 그러면 주군께서는 약하게 한숨을 내쉬곤 서찰에 쓰인 내용들을 조곤조곤 읽어주셨다. 주군의 입술이 벌어질 때 마다 속으로 한없이 에루께 빌었다. 그의 건강에 이상이 없기를,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혹여나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면...그것을 읽는 주군의 마음에 슬픔이 깃들지 않기를.. 그저.. 덤덤하게 읽어 주시기를..
다행히 한장의 편지가 읽혀질 때 까지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미까지 다 읽으신 주군이 고개를 들고 내게 편지를 건내시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가슴에 품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내내 건강하기를. 먼 곳에서나마 함께 이어져 있는 이 대지 위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랑하는 나의 반쪽. 네가 원하고 갈구하는 치열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원히 살아가기를.

차마 전할 수 없는 강렬한 바람이 허공에 흩어졌다. 당장이라도 손을 잡고 도망칠 수 없도록 힘주어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길은 엘로스가 선택한 엘로스의 길이었기에..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었기에.. 차마 다가설수도, 나타날 수도 없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각기 다른곳을 향하고 있었다.

너는 나의 하나뿐인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니까. 엘로스 페레딜.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부디 행복하길. 너의 길 위에서 행복하길.

그저 작게 속삭이듯 입 밖으로 내뱉어 보는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엘프의 숙명을 지닌 자의 아픔은 그저 그렇게 낙엽이 지듯 켜켜히 쌓여 크기를 늘렸다.
그것이 하프엘프의 숙명을 지닌 나의 슬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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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오로. 함정.

2013. 6. 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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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말은 기이하게 빨라 그다지 힘껏 달리지 않았음에도 소린이 알고있는 지역을 쉽게 벗어났다. 막 쉬려고 긴장을 풀었다 출발한 덕분에 온몸에 피로감이 엄습했지만 소린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본 적 없는 거대한 숲이 나타났다. 잠시 멈춰 목을 축이던 소린은 눈앞의 엘프가 그에게 무언가 내미는것을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눈을 잠시 가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길 안내는 제가 하지요."
"거처를 숨기겠단 이야긴가."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주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모습에 소린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기사 피차 껄끄러우니 이렇게 하는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낯선 곳이라는게 조금 염려스러웠지만 여차하면 자력으로라도 탈출하면 그만이고 또 오면서 은밀히 길에 표시를 해 두었으니 괜찮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밀어진 검은 천을 제 손으로 단단히 묶은 소린은 흔들리지 않게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품안의 깊이 넣어둔 단도의 묵직함을 곱씹으며 말의 흔들거림에 몸을 맏겼다.
눈을 감으니 모든 감각이 민감해졌다. 흔들리는 몸은 평지가 아닌 거친 숲길로 향했다. 진창일때도 있었다. 말이 작게 미끄러지면 예지하지 못한 몸은 배로 흔들렸다. 차라리 조금 풀어져 눈을 감고 힘을 빼면 편해질 것 같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엘프의 앞이라 혹 우습게 보여질까 신경쓰여 소린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몸을 곧추세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친 풀과 나무뿌리가 가득했던 길이 서서히 평지로 바뀌어갔다. 흔들리는 부담이 적어져 몸이 한결 편해졌다. 두필의 말은 고향에 온 것이 기쁘다는 듯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돌바닥에 말발굽이 울렸다. 어쩐지 소리와 공기. 온도만으로 익숙한 느낌을 받던 소린은 갑자기 정지한 말에 놀라며 들이마시려던 숨을 내쉬었다. 사레가 들린 소린이 진정하길 기다리던 엘프는 그의 고개가 다시 들리자 안대를 풀어도 좋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잔잔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소린은 눈 가리개를 풀었다. 부옇게 떠오르는 태양을 기대한 드워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하고도 화려한 돌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햇살은 높이 올려진 창 틈으로 군데군데 쏟아지는것이 전부였지만 그 작은 빛줄기들로도 안쪽은 찬란하게 빛났다. 고작 엘프들의 건축과 조각이 드워프의 솜씨를 따라갈 순 없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다른 면모로서 거대하고 웅장한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 소린은 저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겼다. 모리아의 성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웠지. 천천히 돌기둥들과 천장의 조각들을 바라보던 소린은 이윽고 섬세하게 조각된 문양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곧 그 밑에 거대하게 설치된 문과 마주했다. 그 앞에는 키가 큰 엘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넋놓고 두리번거렸다는 것을 깨달은 소린은 황급히 말 위에서 내려왔다. 이미 자신을 데려온 엘프는 그의 곁에서 엘프의 언어로 무언가 이야기하며 소린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몇번 끄덕인 키큰 엘프는 그제서야 소린에게로 다가와 고개숙여 예를 표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이곳의 집사 갈리온이라고 합니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오큰쉴드. 잠시 여독을 푸시지요.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하겠습니다."
"환자는 어디있소. 나는 환자를 보러왔을 뿐이오."
"쉬지 못하시고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신 것으로 압니다. 지친 손님께 용건을 청하는 것은 엘프의 예의가 아니지요. 주군께서도 지금 잠깐 밖을 향하셔서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후쯤에나 돌아오실 예정이시니 부디 방으로 들어주십시오."
"주군?"
"...잘못들으셨나봅니다. 주인님이십니다."

날카로운 드워프의 귀가 틀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집사라 칭한자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 이었다. 어찌됐건 이미 도착해버렸고 주군이건 주인이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지금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여도 좋을것 같았다. 고단한 몸과 정신도 슬슬 한계였으니 지금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두명의 엘프가 다가와 안쪽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퍽 고급인 듯한 벽지와 태피스트리를 돌아보며 성의 주인의 부와 지위를 가늠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간단한 식사가 안쪽으로 들여진 후, 주인이 도착하시면 모시러 오겠다며 괴상한 향수를 허공에 두어 번 뿌린 엘프는 방을 나섰다. 비로소 혼자가 된 소린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보드라운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 정신은 몽마에게 잡혀간 것 처럼 모든것이 아스라졌다. 좋은 향내가 어느샌가 사방에 가득 차올랐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소린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석양이 지고 있는 창가였다. 따스한 빛이 창문 너머로 어룽대며 침대 근처에까지 머물러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한 몸은 좀처럼 긴장하려 들지 않았다. 묘하게 풀어지는 몸에 의심한 채,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엘프가 아까 흩뿌리고 간 향내가 신경쓰였다. 소린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창가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향하자 맑아지는 머릿속이 느껴졌다. 몇번 숨을 들이키고나서야 소린은 제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강하게 느껴지는 허기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의 근처에는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식어도 본연의 맛을 상하지 않게 할 정도의 음식이라 보는 것 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무언가 생각하기도 전에 뱃속에서 정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잘 차려진 음식으로 손이 가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안주머니에 챙겨둔 마른 빵 한 조각과 약간의 물로 속을 달랬을 뿐이었다. 겨우 숨을 돌리고 부족한 것들을 채우고 나서야 몸안에 생기가 돌았다. 욕구를 해결하고 나니 그제서야 이곳에 온 이유가 생각났다. 주인은 오후에 돌아온다 했는데.. 새삼 어떤 이일까 궁금했지만 소린은 곧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생각을 비웠다. 엘프일 뿐이었다. 누구이고 어떤 자이고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보수를 받아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저 마음을 비우고 있기로 하지 않았는가.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은 채, 소린은 굳건히 자신을 다독였다. 눈과 귀를 닫는 편이 지금은 이로운 듯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엘프가 방 안으로 들어와 주인의 귀환을 알렸다. 주변의 정리를 하는것을 지켜보던 엘프는 소린이 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아까와 같은 검은 천이었다. 스스로 요구한 것 임에도 불구하고 소린은 내키지 않은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 눈을 가렸다. 머릿속으로 은밀히 숨겨둔 단도가 있는곳을 그리며 내밀어진 엘프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걷는 소리가 예민해진 귓가를 울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꼴같잖게 엘프의 손을 잡고 걸어가다니. 코웃음이 나왔지만 소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일 일 뿐이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스스로 생각을 제어하고 머리를 비우는 그 긴 시간동안 엘프는 그를 어딘가로 인도했다. 한참을 걷다 잠시 손을 놓은 채, 문을 열어제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손을 끌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 왔습니다. 이쪽으로.
문 안쪽의 공간은 꽤나 천장이 높고 거대한 홀과 같다 느끼며 소린은 어릴적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 곳엔 어린아이와 같이 웃는 자가 있었고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감싸는 이가 있었다.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린에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느릿하게 단을 올라 어딘가에 당도하자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엘프는 다시 손을 놓았고 그의 주인인 듯한 자에게 예를 갖췄다.
그 순간 느껴지는 시선.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엘프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소린은 알 수 있었다. 시선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 게다가 어딘가 낯설지 않은 기시감. 혼란스러워하는 소린의 앞에 낮은 저음이 잔잔하게 퍼졌다.

"나의 성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소린 오큰쉴드."

귀에 스미는 목소리는 마치 짙은 어둠처럼 몸을 감쌌다. 하이엘프들이 쓰는 억양. 시야를 가린 검은 천 속에서 눈꺼플이 바르르 떨리는것을 느끼며 소린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희미한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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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워프의 위대한 왕과 그의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린 왕자에게는 기댈곳 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의탁해 떠돌며 잠자리를 구걸하고 나어린 조카들을 돌보며 일을 해야만 했다. 무기를 쥐던 강인한 손은 고작 인간들의 대장간에 빌붙어 망치를 들어야 했고 호사스러운 보석이 장식된 튼튼한 갑옷이 걸쳐져있던 단단한 몸은 더러운 작업복으로 휘감긴 지 오래였다.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가며 과거를 잊지말자 그토록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까지 생각하기에 닥친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하고 서러웠다.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 말고 새로운 돈벌이를 찾은 건 그때 즈음 이었다. 같이 일하던 인간들 중 하나와 친해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다친 이의 어깨뼈를 맞추고 부은 근육을 매만져 준 적이 있었다. 대대로 쇠를 만져온 손아귀의 힘은 단단했고 보석을 세공한 손길은 날카롭도록 매서웠다. 아무것도 아닌 일 이었지만 인간은 너무나도 만족했고 붓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작게 소문이 돌아 이리저리 뼈를 맞춰주고 근육을 풀어주는 일을 종종 하게된 소린에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전문적으로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다행히 인간들 중 의술에 조예가 깊은 이가 있어 눈대중으로나마 혈과 근육의 움직임을 배웠다. 소소하게 일을 하는 중간에 한 두번 씩 연락이 오면 마사지를 해준 뒤, 대가를 받는 일은 사실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았고 뭉툭해져버린 손끝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나자 찾는 이는 늘어만 갔다. 인간의 힘으로는 낼 수 없는 괴력에 몇몇 다른 종족에게서도 연락이 오곤 했다. 대부분의 일들을 소린은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단 한 종족에게서만큼은 어떤 연락이 와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종족은 엘프 종족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아주 어두워진 밤 이었다. 겨우 허기를 채우고 소린은 킬리와 필리 두 형제들과 함께 작게 놓은 모닥불을 앞에둔 채, 밤을 지샐 준비를 했다. 정교하게 세공된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마무리를 하던 소린의 곁에는 남은 쇳조각들을 들고 이리저리 맞추며 장난을 치는 조카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희미하게 웃음띈 얼굴로 바라보며 작업에 박차를 기하던 머리맡에 어느순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해 흠칫 놀란 소린과 킬리, 필리는 방어자세를 취하며 화들짝 제자리에서 튕겨져 올라왔다. 소린은 잽싸게 들고있던 단검을 겨눈 채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누구냐!!!"
"진정하시오. 소린 오큰쉴드. 나는 적이 아닙니다"

양 손을 들어보이며 무기가 없음을 고하는 인영은 흰 로브로 온몸을 감싼 채, 얼굴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린은 그가 입고있는 로브가 젖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 의미를 알아챘다.

"더러운 엘프에게 볼일은 없으니 순순히 보내줄 때 가는게 좋을거다. 계속 있으면 험한꼴을 보게 될것을 보장하지."

그제서야 자신들의 앞에 있는 자가 엘프라는 걸 알게된 킬리와 필리는 재빨리 벽에 걸린 무기들을 꺼내 손에 들었다. 낡고 녹이 슬어 형편없었지만 본디 드워프의 왕실에서 쓰던 것이니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란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물며 여럿도 아닌 하나 아닌가. 간단한 무기조차 들지 않은 엘프.
도저히 경계가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엘프는 깊게 쓰고있던 후드를 벗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굽이치듯 밖으로 흘러나왔다. 준수한 미모의 엘프는 손을 내린 채 공손하게 그에게 다시한번 인사했다.

"스라인의 아들 소린 오큰쉴드. 제가 이곳까지 온 것은 모시는 분의 전언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엘프가 모시는 분은 고작 엘프일테지. 더이상 듣고싶지 않으니 이곳에서 나가라."
"제가 모시는 분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 텐데요."
"다시는 그 간교한 말솜씨에 넘어가지 않는다. 조부때의 굴욕을 내가 잊을 것 같으냐!"
"조부의 일은 매우 유감입니다. 하지만.."
"필리! 킬리! 이 자를 당장 바깥으로 내쫒아라!"

이어지는 말을 듣지않은 채 소린은 필리와 킬리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싸늘해진 얼굴로 우악스럽게 양 팔을 잡아 당긴 채 밖으로 내치려는 필리와 킬리, 그리고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엘프의 힘이 맞닥뜨렸다. 찢어질 듯 찢어지지 않는 로브가 짜증이 난 필리는 괴력을 발휘해 저항하는 엘프의 소맷단을 잡아 던졌고 졸지에 크게 휘청한 엘프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넘어지는 것은 피했지만 어느새 틑어진 소맷부리 사이로 주머니가 빠져나오는 것 까지는 막지 못했다.
털썩- 하고 제법 묵직하게 바닥으로 떨어진 주머니의 입구가 열렸고 반짝이는 금화가 새어나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순간, 필리와 킬리의 동작이 멈추며 눈이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금화주머니. 저것들만 있으면 당분간은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당장 배를 곯지 않아도 되었고 지긋지긋하고 좁은 공간이 아닌 제대로 된 터젼을 마련할 수도 있을것만 같았다. 소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자는 빠르게 제정신을 찾았다. 저것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러운 엘프의 돈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린은 겨누었던 단검을 치우고 무릅을 굽혀 금화를 주웠다. 침착하게 주머니에 그러모은 후, 입구를 조이고 매듭을 지어 단단히 묶었다. 킬리와 필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소린은 주머니를 엘프에게 건넸다.

"어서 돌아가라. 쓸데없는 감정의 소모를 하고싶진 않다."

하지만 엘프는 주머니를 받지 않았다. 그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소린을 바라볼 뿐 이었다.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주머니의 무게에 소린이 외려 당황했다. 눈을 부릅뜨며 위협을 해 보았지만 엘프는 그저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 이었다.

"저로 하여금 주군의 전언을 전할수 있도록 윤허해주십시오. 드워프의 왕자여."
".....그 호칭으로 나를 부르지 말라."
"주위를 물려주십시오. 잠깐이면 됩니다."

나긋하게 웃는 얼굴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소린은 금화주머니를 낮은 탁자위에 던져둔 채 한숨을 내쉬었다. 쉬이 포기하지 않을 언사였다. 잠깐 고민을 하던 소린은 멀뚱히 서있던 조카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자리를 비켜다오. 곧 끝난다."

필리와 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했다. 기척이 없어질 즈음 엘프는 다시 고개를 틀어 소린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마주본 시선에 소린은 긴장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고 엘프는 수려한 입술을 열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소린님을 찾으십니다."
"이유는?"
"소문을 듣자하니 뼈를 맞추고 뭉친 근육을 손보는 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신다 하더군요."
"엘프는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였다면 돌아가는 편이 좋겠어."
"돈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엘프의 말에 소린은 하, 짧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어디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 셈인가 이 엘프는. 어이없는 눈으로 쏘아보자 다시 예의 그 웃음을 지어보인 엘프는 바로 입을 열었다.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왕자께서 예상하신대로 제가 모시는 분은 엘프십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요. 이것은 정당한 거래입니다. 왕자께서는 돈이 필요하고 제 주군께선 왕자의 그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물론 저희쪽도 왕자께서 엘프들과 말조차 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소 큰 대가를 준비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엘프가 손을 뻗어 가리킨 것은 테이블 위에 소린이 놓아 둔 주머니였다. 얼핏 보아도 꽤 묵직한 주머니는 아까 확인해보았지만 모두 금화로 채워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소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장 조카들의 의식주가 몇 달은 해결될 큰 돈이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심경의 변화를 눈치 챈 엘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것은 총 치르게 될 대가의 1/5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일이 끝나면 치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도착하는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겁니다. 나흘 정도 저와 함께 가주셔야 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무엇이 문제이십니까. 혹 주군을 마주하는것이 불편하시다면 안대를 착용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자피 손으로 하시는 일일 뿐더러 굳이 얼굴을 마주하시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엘프를 비껴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더러운 엘프의 돈 이었다. 하지만 이리 빼앗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아까 마주했던 필리와 킬리의 눈동자에 서린 기운이 잊혀지지 않았다. 부족한 것 모르고 자라온 어린 아이들에게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혹독한 것일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다 자란 성인이지만 저 아이들은 다르지 않은가. 아직 제대로 전쟁조차 치뤄보지 못한 아이들인데 이렇게 고생을 하고..
한참을 망설이던 소린은 다시 시선을 들어 엘프와 마주했다. 굳건한 의지를 가진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나흘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배상액을 두배로 걸어야 할 것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이상은 걸리지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안대를 착용하지. 당신의 주군이 누구든 엘프를 마주하는것은 역시 유쾌하진 않으니."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간단한 짐을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밖에 왕자님을 모셔갈 말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말을 타지 않는다."
"타실 수 있는 말입니다. 특별히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엘프는 웃으며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언가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곧이어 물에 쫄딱 젖은 필리와 킬리가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소린, 가려는겁니까?"
"...나흘이다. 대장간에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고 전해라."
"소린.."
"어자피 일일 뿐이다. 더러운 엘프들의 돈을 뜯어내는 것도 복수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필리. 킬리를 잘 돌보도록. 내가 올떄까지 별다른 말썽이나 부리지 않게 잘 감시해."
"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거든요?"
"그래 알았다. 여기 금화를 두고갈테니 당분간 요기를 하도록 해라. 아랫 마을에가면 식당이 있을테니 말이다."
"... 빨리오셔야 합니다."

진지한 얼굴로 필리가 소린을 쳐다보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린은 필리와 킬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 힘차게 두드려주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옷가지와 간단한 것들을 챙긴 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맨 소린은 필리와 킬리를 한번씩 꽉 껴안은 후 밖으로 향했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맣고 어두운 밤. 그렇게 소린은 엘프와 함께 말을 타고 보이지 않는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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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안나타르는 겨우 눈을 떴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후 흩어졌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한 안나타르는 그제서야 긴장을 늦춘 채 포근하게 감겨오는 흰 이불자락에 몸을 둘둘 감고 아직 떨쳐지지 않은 잠기운을 즐겼다. 먼 곳에서 봄을 환영하는 엘프들의 노랫소리가 창문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를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침대에서 좀체 나오지 못하는 안나를 깨운 것은 어느새 익숙해진 발자국 소리였다.


혼자 있는것을 알면서도 문을 노크한 뒤에서야 방안으로 들어온 켈레브림보르는 행여라도 잠든 이가 눈뜰까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침대 곁으로 다가와선 손에 양껏 든 것을 근처에 놓아두고 발치에 앉아 가만히 잠든 이를 지켜보았다. 시원한 이마. 느슨하게 땋아 반쯤은 흐트러진 검은 머릿결. 반쯤 가리워진 얼굴에 곱게 감겨있는 눈과 오똑한 코가 보였다. 새빨간 입술끝에 시선이 머무를 무렵, 잠투정을 하듯 안나타르의 몸이 뒤척거리며 움직였다. 마법에라도 걸린 양, 무심코 뻗어진 손 끝이 따스한 볼에 닿았다.

투박한 손끝에 보드라운 살결이 닿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너무도 부드러워 혹 상처가 날까 두려웠다. 어젯밤의 뜨거운 숨결을 나누었던 일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쉬이 더듬지 못하고 그저 아주 작은 부분만 닿은 채로 켈레브림보르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없어질까 두려웠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볼에서 느껴지는 따스함과 작은 경직에 안나타르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의 볼에 손을 댄 채 바라만 보는 켈레브림보르가 눈 앞에 보이자 안나타르는 저도모르게 웃어보였다. 돌돌 말아둔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어 볼에 닿아있는 켈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안나타르의 얼굴을 졸지에 감싸게 된 켈레브림보르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큼큼거렸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안나타르를 바라보았다.

 

"해가 높다랗게 떠올랐으면 깨우시면 될 일 아닙니까. 어찌하여 쳐다만 보고 계십니까."
"...너무 곤히 잠이 들어 혹 방해할까봐.."
"그럼 재워주시려고 이리 손을 대셨습니까."
"그건..!"
"농담입니다. 켈리. 좋은 아침이에요."


움찔거리는 그의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이며 작게 웃어보이는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와 같아 켈레브림보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한참을 미약한 힘으로 오며가며 장난을 친 안나와 켈리는 곧 동시에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실은 아까 잠깐 잠에서 깼습니다만, 켈리가 보이지않아 꿈인 줄 알고 다시 눈을 감았지요."
"미안하다.. 단지.."
"단지...?"
"어젯밤에..혹 나 때문에 식사를 못한게 아닐까 싶어..서."
"...아.."
"아침이면 배가고플게 아니냐. 그래서 간단하게 좀 요깃거리를 준비하느라 일찍 곁을 비웠다. 미안하구나."
"직접..말입니까?"
"...부족한 솜씨지만 말이다."


 

쑥스럼하게 웃어보이며 시선을 모로 돌리는 켈레브림보르를 쳐다보며 안나타르는 지난밤을 회상했다. 분명 저녁을 먹기도 전인 애매한 시간에 그의 대장간에 조언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방문해 그를 유혹했었다. 어쩐지 불붙어 달려드는 그를 막기도 애매해져 밤새 품에 안겨 울다지쳐 잠든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는걸까. 이상한 남자다. 이 자는 어째서 이렇게 내게 맹목적일 수 있는걸까..
하지만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만이 떠올랐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거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슬쩍 몸을 일으켜 손을 뻗으면 켈레브림보르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역시 손을 뻗어 부축해주었다. 똑바로 앉아 떨어지려는 손을 마주잡아 꽉 쥐어주면 또 진중한 눈빛이 안나타르를 향해 쏟아졌다. 달콤한 입술이 열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아니다...내가 어제 부주의.."

"쉿."

 

황급히 다가서 켈레브림보르의 입술을 손끝으로 막았다. 움찔거리며 아주 조금 뒤쪽으로 물러난 그의 눈빛에 동요를 읽었다. 금새 떨어진 손끝은 다시 켈리의 손을 잡았다.

"어젠..저도 조르지 않았습니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안나타르."
"네?"
".....아니다. 고맙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든게 고맙다. 네 존재가..이렇게 내 앞에 있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그리 말씀해주시면..제가 더 감사하지요."


따스한 눈빛이 오갔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끼며 안나타르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켈레브림보르의 품으로 조금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시장합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아, 미안하다. 한눈을 또 팔았구나. 잠시만.."

 

잡았던 손을 황급히 놓아두곤 켈레브림보르는 근처에 놔두었던 것을 째로 들고왔다. 작은 테이블같이 생긴것 위에 가벼운 음식들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안나타르의 앞에 그것들을 통채로 놓고 병을 기울여 우유를 따라냈다. 컵이 찰랑찰랑 차오르자 그제서야 미소를 지어보이며 침대위에 함께 앉아 식기를 건넸다.

 

"가볍게 먹기엔 괜찮을게다."
"...이것도 직접 만드신 겁니까?"
"아, 응.."

음식보단 제 무릎위에 놓인 트레이에 관심을 가지는 안나타르에게 반응해 또 귀끝이 새빨개져버렸다. 좌 우로 기웃거리며 모양을 살펴본 안나타르가 방긋 웃으며 예쁘다고 칭찬하자 볼까지 물들어버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켈레브림보르는 음식이 더 식을까 걱정돼 나이프와 포크를 붙잡고 먹기좋은 크기로 음식을 조각냈다. 접시째 건네주려 고개를 들자 안나타르는 빙글빙글 웃으며 살짝 입을 벌린 채, 켈레브림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어제 무리를 해서 팔과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몸이 불편하면 진작에 말을 해야 할 것이아니냐.. 어디 자세히 보자."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엇이냐. 내 뭐든 들어주마."

"켈리가 만든 음식. 직접 먹여주시면..안되겠습니까?"

"아..."

"부탁입니다. 켈리."

 

진득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피할수가 없었다. 흠. 흠흠.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켈레브림보르는 포크로 음식을 찍어올리고 잠시 멈칫 하다가 안나타르의 입 근처로 가져갔다. 활짝 웃는 입술이 좋은 호선을 그리다가 덥썩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움직이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켈리의 시선을 느끼며 안나타르는 충분히 음식의 맛을 음미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꿀꺽 넘긴 채 입술을 혀로 슬쩍 쓸어내린 안나타르는 눈웃음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켈리."

"..다..행이구나."
"하나 더 주시겠습니까."

"아, 응. 그래. 이번엔 이거. 이게 괜찮을 것 같다."

"아-"

 

 

 

신이난 켈리의 손짓과 오물오물 받아먹는 안나타르의 사이엔 달큰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이들 사이로 높게 솟아오른 햇빛이 내비쳤다. 밖에선 여전히 에레기온의 엘프들이 부르는 즐거운 환희의 노래가 넘실대며 사방으로 퍼졌다.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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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르오로페르. 밤.

2013. 5. 23.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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