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란엘. 사흘째의 밤.
벌써 사흘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설원이 바깥으로 펼쳐졌다. 멍하니 창가에 기대 밖을 내다보았다. 그새 온도는 더욱 내려가 창문에 김이 하얗게 서렸다. 가볍게 양쪽으로 목을 두어번 꺾어 소리를 낸 뒤 엘론드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까 내린 커피가 딱 좋은 향을 내뿜고 있었다. 머그에 가득 따른 후 침실로 돌아가 흐트러진 침대위에 가만히 앉아 홀짝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지도 않은 신혼놀이였다. 학교에서 도망치듯 회피했던 자신을 따라와 가둔격이 아닌가. 어쩌면 납치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 상황은 기묘했다. 그러나 더욱 이해가 안가는 것은 자신이었다. 능히 잡히지 않을수도,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조용히.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탁자에 컵을 올려두고 드러누워버렸다. 눈을 감자 소리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포슬하게 눈이 내리는 소리. 거실의 시계초침이 톡 톡 움직이는 소리. 나뭇결이 추위에 수축하며 다각다각 마르는 소리. 그리고 저 먼 곳 건너편의 욕실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세계가 닫히는 듯한 무겁고도 고요한 적막. 그 모든것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 너무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거 아닌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꺼플이 떠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막 사워하고 나온 지긋지긋한 친우의 얼굴이었다. 젖어 앞으로 내려온 머리칼이 자꾸 흘러내리는지 손으로 연신 넘겨댄다. 살짝 찌푸리며 가볍게 밀어제쳤지만 외려 그는 나를 끌어당겨 품속으로 깊게 묻어버렸다.
- 머리라도 말리고 와. 젖는거 싫어.
- 그 김에 샤워라도 하는게 어때. 씻겨줄 용의도 있어.
- 사양하지. 오전에 했거든.
기어코 밀어낸 뒤 다시 일어났다. 그렇다고 갈곳도 할일도 없었다. 멍하니 그렇게 앉아있자 스란두일이 따라 일어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했다. 움찔 하며 몸을 떨어내자 뒤에서 웃는소리가 귓가로 울린다. 어색하다. 어색하면서 안심이 됐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생경하면서도 싫지않은 감각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사흘을 그와 함께 보내지 않았는가. 이제와서 생각하기는 너무 늦은 주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엘론드는 슬그머니 다시 눈을 감았다. 못된손이 올라와 드문드문 잠긴 셔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따라올라와 손을 제지하려고 잡았지만 어느샌가 양손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잡혀있었다. 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지만 그것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 평소 볼수없는 웃고있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여오는 손목과는 다른 맥이빠지게 선한 얼굴로 미소지으며 이마에 눈에 코에 키스한다. 부자연스럽게 꺽인 목과 잡힌 손목이 슬슬 아파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완연히 기대자 다시금 웃는소리가 들리며 몸이 뒤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옆으로 비껴누워 고개를 돌리면 짙은 호수같은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 도망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가는걸 추천할텐데.
-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 흠. 진심일까 아닐까. 자네는 어떤가. 진심인가 아닌가?
- 진심이라..
잠시 멍하니 시선 옆을 비껴 허공을 응시하자 귀신같이 알아챈 스란두일이 손을 올려 얼굴을 고정 시킨 뒤 입술을 마주댔다. 부드럽게 노크하듯 톡 톡 두들기고 입안쪽을 조심스럽게 침범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진득하고 느릿하게 안을 헤집고 다니다 겨우 떨어져서는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두개의 호수속에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한 듯 고요한 파문이 일고있었다. 파문의 주인공이기라도 한 듯, 그 속에 내가 비춰졌다. 그를 멍하니 응시하자 스란두일은 관자놀이와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어내며 다시한번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 상관없어. 진심이든 아니든 네가 지금 여기에 있는것이 더 중요해. 그걸로 됐어.
- 스란두일, 그러니까...
- 아무말도 하지마. 함께 있을 때는 그걸로 된거야. 엘론드 페레딜.
수학공식이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정의내리는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함께 있을 때는 그걸로 된거야. 마치 마법같다고 생각했다. 고작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놓였다. 평안해졌다. 손을 올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스란두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호수같은 눈이 감기고 입술이 열렸다. 세계는 고요했고 그곳에는 스란두일과 나.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걸로 이유는 충분했다. 나역시 눈을 감았고 그 순간 세계는 움직임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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