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201건
- 2013.09.02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2
- 2013.08.31 할린디르. 닿음.
- 2013.08.29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8
- 2013.08.26 스란엘. 그날 밤.
- 2013.08.24 길오로. 첫만남.
- 2013.08.22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 2013.08.19 흐엉
- 2013.08.12 스란엘. 건배.
- 2013.08.07 스란엘. 구두.
- 2013.08.05 멜코르안나. 설정. 2
글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2
한밤중의 산책은 어쩐일인지 계속 이어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되는 그 시간 즈음 엘은 슬그머니 정원에 나타나 미소짓곤 했다. 홀린듯 나서긴 했지만 이토록 매일같이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터라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지루하기만 한 궁에서의 낮생활보다 오히려 밤의 은밀한 산책이 좀 더 기다려졌다. 일국의 왕자가 남들의 이목을 피해 밤이슬을 밟는 것은 어찌보면 구설수에 오를 법한 행동이었지만 어찌됬든 무료하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란두일은 가볍게 웃어넘기며 매일 밤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의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옛 시가에서부터 현재의 정세까지. 아무리봐도 일개 시종으로는 보이지 않는 견문과 지식의 깊이에 스란두일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가벼이 생각하고 내던진 말들이 심도있게 돌아오면 이쪽도 긴장하기 마련이라, 골똘히 생각하며 문답을 나누었다. 막 던져진 질문에 마무리 된 답을 내놓은 스란두일은 혀를 내두르며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네겐 당해낼 수가 없구나. 조금 쉬자꾸나."
"제가 너무 깊이 파고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내 주관과 다르게 생각하는 이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건 귀한 경험이지. 내 많은 것을 배웠다. 네 지식의 깊이가 이토록 깊을 줄 생각하지 못하고 무리수를 던졌던 것이 오히려 나를 수세에 몰리게 했구나."
"그저 송구합니다."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칭찬을 하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단정했다. 과하게 희노애락을 표현치 않는 단아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토록 마음이 맞고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는 좀체 마주치기 어려운 법이라 조금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낮까지. 아니 며칠 밤낮을 공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의 나라가 아니었다. 힘과 권력을 휘두르기보다 조용히 위엄을 지키고 체통을 중시해야하는 일국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늘 상기해야 했다. 굳이 욕심을 낸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란두일은 억지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권력이나 상하관계로 얽매이지 않은 관계. 어찌보면 친우親友 라 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천하를 가진 왕자에게는 함부로 가질 수 없는 것. 막연히 생각하던 그 자리에 어느새 타국의 청년이 스며든 것을 느끼며 스란두일은 작은 한숨을 내 쉬었다. 자꾸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다른 것들로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숲으로 향하는 다리 근처까지 당도했다. 이곳을 지나면 꽤 오랜 시간을 돌아와야 했다. 그제서야 스란두일은 매번 자신의 의지대로 정원을 돌아다녔음을 깨달았다. 타국의 사신이야 늦잠을 자든 말든 상관할 자가 아무도 없었지만 엘은 아닐텐데. 아직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지위에 있는지도 묻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그 문제를 깨달은 자신을 책망하며 스란두일은 급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멈춘 행동에 조금 놀란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우습게도 온갖 상념이 사라지고 엘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말문이 막혀버린 왕자를 대신해 입술을 연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이었다.
"혹 어딘가 미령하십니까?"
"그보다 달이 이미 기울기 시작했는데 괜찮겠느냐?"
그제서야 스란두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엘의 얼굴에 슬그머니 웃음이 돌았다.
"제 사정을 염두에 두고 계신줄은 몰랐습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지금까지의 온 거리와 앞으로 가야할 거리를 가늠하던 입술이 이내 호선을 그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숲으로 가는 대신 연못은 어떻습니까. 달이 밝아 그 곳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역시 곤란한게로구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꾸중을 하실분이 계십니다."
"그것을 곤란하다고 하는것이다."
"그렇습니까."
몰랏다는 듯 웃어보였지만 이내 제가 아는곳으로 안내를 하겠다는 엘의 행동에 덩달아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은 너무 오래 붙잡아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스란두일은 엘에게 먼저 방향을 잡으라 자리를 비켜주었다.
곧게 뻗은 머리칼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달빛을 받아 필시 흑단처럼 빛나는 모양새는 요요하게 빛났다. 검은색은 귀족의 색이라고도 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절제된 미학과 고귀함이 엘의 수려한 얼굴과 합쳐져 도도한 멋을 풍겼다. 본국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새까만 머릿결에 마음을 빼앗긴 스란두일은 어느새 연못에 다다른 줄도 모르고 한참 그의 뒤를 따랐다.
"어떠십니까. 진한 녹음도 좋지만 때론 이리 정취가 있는 곳도 괜찮지 않습니까?"
빙글 돌며 소개하는 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이 향한 곳은 정말이지 그림같은 곳이었다. 정갈하게 파인 작지않은 연못에 고기들이 물살을 만들며 노닐고 있었다. 달빛이 온전히 내려앉은 못 한 가운데에는 아담한 전각이 있었다. 작기만 한 궁인줄 알고 있었는데 조금씩 안을 헤집으면 필시 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나온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는 듯 스란두일이 엘을 바라보자 여느때처럼 그는 해사하게 웃었다.
"왕께서 그 자리에 오르시고 가장 먼저 손보신 곳입니다. 때때로 머리가 어지러우실 때 산책을 나오신다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이곳은 왕의 소유가 아니냐. 이런곳에 마음대로 출입을 해도 되는것이냐."
"지금은 괜찮습니다. 밤에는 그 한 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 한 분도 지금은 오지 못하시지요."
"너의 안위를 묻는 것이다."
"저는 괜찮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예상외로 딱 잘라 끊는 화법에 스란두일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일까. 이 야심한 시각에 왕의 정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자란 말인가. 그리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더냐. 너는 대체..
잠깐 스치운 생각은 엘이 발걸음을 옮기자 다시 사르르 흩어졌다. 천천히 뒤를 좆으며 지나는 풍경에 시선을 주며 마음을 가다듬자 이내 한가로움과 평안이 밀려왔다. 높은 자면 어떻고 낮은 자면 어떠할까. 네가 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진데. 혼자 상념하고 혼자 깨닫고 혼자 부끄러워 하는것이 어느새 버릇이 된 것 같다고 느끼며 스란두일은 다시 시선을 바로했다. 여전히 곧게 뻗은 머리칼이 눈 앞에서 흔들렸다.
연못의 둘레를 따라 정자로 향하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끊임없이 움직인 터라 조금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계단을 밟았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쓸 수 있도록 정갈하게 펴놓은 자리는 아마도 왕의 자리이겠지. 새삼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스란두일은 내색하지 않고 엘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올랐다. 맞은 편이 아닌 자신의 곁에 자리한 이는 적어도 자리에 없는 왕을 배려하는 듯 보였다. 상석이 비어진 기묘한 위치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피곤하십니까."
"괜찮다. 너는 어떠하냐."
"오랫만에 밖에 나와 맑은 공기를 접하니 기분이 상쾌하여 좋습니다."
"원래 밖에 나오질 못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일이 있어 나오지 못했을 뿐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슬쩍 내리깔았다 뜨인 눈에 맑은 생기가 돌았다. 쳐다보던 모습 하나하나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마치 잘 그려진 초상화 속 미인이 아닌가. 하나하나 생김새를 관찰하던 스란두일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이곳의 관습은 우리와 달라 눈이 즐겁구나. 단정하게 내려빗은 머리가 네게는 꽤 잘 어울린다."
"전하께서도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머리를 함부로 풀지 않는다. 머리를 풀 때가 정해져 있는데 아비의 죽음. 어미의 죽음. 그리고 정혼하는 밤. 이 세 번 뿐이란다."
조곤조곤 설명을 하는 스란두일의 모습을 엘은 그제서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시선을 맞추었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관찰을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스란두일은 조금 긴장했다. 자연스럽게 경직된 입가의 근육을 눈치챘는지 이내 시선을 돌린 엘은 답지않게 조금 손장난을 치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비가 되실분이 조금은 부럽습니다. 귀한 모습을 보시게 되는 것 아닙니까."
"보고싶으냐?"
"농입니다. 그저 이곳에서는 혼인을 하고도 머리를 완전히 틀어올리지는 않는 터라 흥미가 일었습니다.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어릴때부터 하고 다녀서 그런지 그다지 부담이 되진 않는구나. 궁금하냐?"
"조금은요."
작게 웃어보이고 시선을 돌린 옆모습에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렸다. 꽤나 괜찮은 그림일 듯 싶었다. 새까만 머리칼을 곱게 틀어올린 채, 은색의 관으로 고정시키고 술을 늘어뜨린다면 필시 이국의 왕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조금 흥미가 일어 골똘히 생각하던 왕자는 빙긋 웃으며 엘을 쳐다보았다.
"어떠하냐. 한번 해보겠느냐? 내게 여분의 장신구가 있을 터인데."
"예?"
"나는 어자피 머리를 풀지 못하니 대신 네가 머리를 틀어보면 어떻겠느냐."
즉답 대신 웃기만 하는 엘을 앞에둔 채, 스란두일은 홀로 즐거워졌다. 가져온 것들 중에 공들여 세공한 은관이 있을 터였다. 흥미는 욕구로 이어졌고 기대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마음은 그득히 채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며 엘은 제멋대로의 결정에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도 보고싶으십니까."
"기대가 되서 그런다."
"...그저 틀어올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럼 내일 밤은 어떠하냐."
"내일 말입니까."
"내가 머무르는 전각으로 오너라. 혹여 남의 눈에 띄면 네가 곤란하지 않겠느냐."
혹 안달내는 것 처럼 보일까 진중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충분히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가늠해보던 입술에서 겨우 승낙의 말이 나왔다. 조금 늦게 찾아뵈도 괜찮겠느냔 말에 성급히 고개를 끄덕이던 스란두일은 자신의 행동에 우스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필시 소꿉놀이 하는 계집아이같은 모양새가 아니던가. 괜시리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것을 지켜보던 엘이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무얼 그리 안달하시냐며 늦지 않게 가겠다고 답하는 모습에 멋적은 미소를 짓던 스란두일은 어쩐지 민망한 마음에 멀찍이 밖으로 시선을 던져 놓았다.
참으로 편안한 시간들이 흘렀다. 일찍 들여보내겠다는 아까의 다짐은 눈 녹듯 사라졌고 둘은 또 오래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로 나흘 째의 밤이 깊었다.
'톨킨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로에레. 어느 평온한 하루. (0) | 2013.09.07 |
---|---|
길엘. 비오는 날의 따스함. (0) | 2013.09.03 |
할린디르. 닿음. (0) | 2013.08.31 |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8 (0) | 2013.08.29 |
스란엘. 그날 밤. (0) | 2013.08.26 |
글
어쩌면 이리도 소질이 없을 수 있을까.
검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은 임라드리스의 지형적 특성상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활을 좀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건네봤지만 시위조차 제대로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반쯤 장난으로 가르쳐주마 라고 선생질을 해보았는데 그마저도 소용없을 정도로 이렇게..! 이렇게! 소질이 없었을 줄이야..
시무룩해진 얼굴 표정에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못가르쳐 그런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겨우 머리를 굴려 찾아낸 것이 말이었다. 어자피 드넓은 초원이 근처에 있는 임라드리스에서 말은 필수요소이지 않은가.
해서 이렇게 마굿간에서 순해보이는 말을 꺼내온 것 까진 좋았는데..
"....할디르...님.. 이거 ...으아아.."
...못 탄다. 이것마저.
말고삐를 쥔 채 어쩔줄을 몰라하는 표정으로 울먹이며 쳐다보는 눈동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약하게 움직이는 말의 움직임에 그대로 휘둘려서는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어느 엘프에게서 볼 수 있을까. 이럴때면 옛 선인들의 격언이 머리를 스쳤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에루시여.. 린디르의 약점은 체력입니까?
한참을 비딱하게 서서 린디르를 바라보던 할디르는 결국 한숨을 쉬고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이제서야 땅으로 내려오는 줄 알고 눈에 띄게 안도하던 이는 곧이어 받침대에 올려진 할디르의 발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렇게 에스코트 해주지 않으셔도.. 린디르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날린 할디르가 린디르의 뒤쪽 안장에 그대로 올라타버렸으니까.
당황한 모습으로 굳어버린 어깨 위로 고삐를 잡아당기느라 가까워진 할디르의 숨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고삐를 잡으세요. 낮게 드리워진 목소리에 절로 손이 움직였다. 덜덜 떨며 잡은 고삐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그대로 할디르는 천천히 조여진 말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다각다각. 움직이는 말의 걸음걸이에 몸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할디르가 좀더 바짝 앞으로 앉아 린디르의 허리를 받치고 자세를 잡아주었다. 천천히 길을 따라 작은 동산으로 향한 말의 걸음은 느리기 그지없었지만 이미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 손바닥 덕택에 린디르는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되십니까."
"..ㄴ..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리 잡고 있으니 떨어지지 않습니다."
할디르는 천천히 웃으며 말을 걸어왔지만 린디르는 점점 난감해졌다. 부러 꼿꼿이 세운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고 잔뜩 긴장한 어깨가 결려왔다. 여전히 허공에서 움직이는 느낌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악물어 보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긴장을 풀고 리듬을 타라며 툭툭 건드린 어깨. 귓가에서 바짝 울리는 낮은 목소리. 목덜미에 닿을 듯 말듯하게 스쳐가는 숨.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기묘할 정도로 예민하게 다가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참 말없이 발길 가는대로 걷던 말은 이내 심드렁해졌는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할디르는 할디르대로 난감해졌다. 좀 더 갔으면 했는데.. 바짝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뒤에서도 눈에 선했다. 돌아가야하나 어째야 하나를 고민하던 것도 잠시, 이내 마음을 굳히고 말의 옆구리를 차냈다.
"으아아아아!!!!!!!!!!!!!!!!!!"
갑작스럽게 빨라진 움직임에 린디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비싯비싯 흘러나온 웃음이 귓가를 스쳤다. 꼭 잡고 내려치는 고삐는 할디르가 잡고 있었으니 넘어질 일은 없었다. 로스로리엔에서 어린 엘프들에게 기마를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호되게 말을 한번 겪고 나면 그뒤로 어린 아이들조차 말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린디르의 잘 땋인 머릿결이 시야를 가리는 법이 없도록 할디르는 상체를 낮추고 린디르에게 밀착한 채, 속도를 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을 타다 언덕 어귀로 돌아오자 할디르는 천천히 고삐를 죄었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꽉 잡힌 손에서 뛰었다. 한껏 상쾌한 기분으로 그제서야 린디르의 반응을 살피던 할디르는 발갛게 달아오른 귀끝과 목덜미를 확인하곤 슬쩍 몸을 기울였다. 설마 무서워서 울어버린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으..."
차마 말 할 수 없을정도로 새빨갛게 되어버린 얼굴에 고민했다. 말을 타면 흥분하는 체질이어서 얼굴에 열이..오른다던..가...음....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던 린디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그..몸 좀..떼...어주세요.."
"몸이요?"
그제서야 모습을 보아하니 착 달라붙어있는 모습이 묘했다. 황급히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건만 움찔거리는 등이 어쩔줄을 몰라했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하는 시선 끝에는 완벽하게 밀착되어있는 은밀한..뭐 잠깐만..?
순식간에 안장 끝으로 밀려올라간 몸에 정말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으로 파르르 떨리던 등이 잠잠해졌다.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린디르가 아주 천천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치를 보는데 내 얼굴마저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당연히 로스로리엔에선 이런일이 없었다. 건장한 성인 두명이 아닌 어린아이와 타니까.. 그러니까..
"저.!"
"도..! 돌아가죠!"
"아, 네네네!!"
동시에 내놓은 목소리가 엇갈리자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최대한 떨어진 채, 다시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움찔 움찔 닿는 곳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아. 말도 안돼. 그러니까..
올때는 잠시였는데 돌아오는 길은 한참이었다. 마굿간의 앞에 도달하자마자 재빠른 몸짓으로 내려온 할디르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린디르에게 손을 뻗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린디르가 손을 붙잡고 받침대로 내려왔다.
"가..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아닙니다."
"저..저 그만 해야할 일이 있어서..!"
"아, 네!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한 린디르는 겨우 눈을 한번 마주치고나서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멍하니 린디르가 향한곳을 바라보던 할디르는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밖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결국 성질이 난 말이 낮게 울며 할디르를 툭툭 치자, 그제서야 할디르는 안장을 내려준 후 말을 몰아 마굿간으로 향했다.
정리를 끝마치고 나서야 웃음이 났다. 에루시여. 운동을 전혀 못해도 할 수 있는게 최소 한가지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귀엽네요. 거기까지 생각하던 할디르는 저도 모르게 열오른 느낌에 괜히 부채질을 하며 린디르가 사라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자피 저렇게 도망쳐도 저녁 식사때에는 볼 수 있겠지. 하루종일 헛고생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예감에 기분이 좋아진 할디르의 마음을 마치 말이 안다는 듯 높게 울었다. 숲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따스한 주홍빛 석양이 지고 있었다.
'톨킨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엘. 비오는 날의 따스함. (0) | 2013.09.03 |
---|---|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2 (0) | 2013.09.02 |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8 (0) | 2013.08.29 |
스란엘. 그날 밤. (0) | 2013.08.26 |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0) | 2013.08.22 |
글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8
언젠가 하프를 배운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악기를 배우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 악기로 정한 터였다. 남 부끄럽지 않을 수준의 연주를 갖추었지만 좀처럼 내 보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밤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하프를 연주하고 온전히 느껴지는 기쁨을 느끼는 취미도 없었다. 좋은 실력을 썩히는 줄로만 알았던 그 때,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방안에 전시된 하프가 눈에 띄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은 예삿 물건이 아님을 알렸다. 오래도록 만지지 않아 옅게 먼지가 쌓인 곳을 손 끝으로 쓸어내다가 안나타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었다. 평소와 같이 곱게 눈을 접어보이며 다가와 허리를 껴안는 손짓에 서둘러 감싸안았다. 조곤조곤히 묻는 물음에 그저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의외네요. 악기와는 먼 성격 같았는데."
"그리도 놀라우냐."
"사실 안믿겨집니다.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를 시험하는게냐."
"어려울 것 없지 않습니까? 진정 줄을 타실줄 아신다면 말입니다."
호기롭게 도발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마도 마음 속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목소리일 터였다. 즐거이 웃으며 악기를 꺼내고 먼지를 털며 준비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단단한 손끝으로 튕겨보이며 이리저리 조율해보다 안돼겠는지 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실로 마음에 따스함이 가득 차게 만들었다. 안나타르. 모르도르의 꽃. 한마디 말보다 웃음 하나, 행동 하나로 나를 홀리는구나. 지조적인 속마음이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안나타르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간단히 조율음을 잡고 줄을 튕겼다.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던 음색들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천천히 서글픈듯 하면서도 희망이 깃든 도리아스의 노래였다. 어릴적 부터 듣고자라 익숙한 화음들. 하지만 이제는 감히 부르지 않는 아름다운 곡조.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 끝을 따라 한음 한음이 겹쳐져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섞였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 방에는 둘 밖에 없을 텐데, 의심하면서도 쳐다본 곳에는 안나타르가 있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에 하마터면 손 끝이 떨릴 뻔 했다.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있지..?
세상을 밝히던 두개의 나무가 시들고,
사방이 캄캄해 절망에 빠질 무렵,
엘프들조차 보이지 않는 모든것을 두려워하고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네.
하지만 그 속에서 믿음을 주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
그 고귀한 이유 하나만이,
세상을 밝힐 새로운 빛이 되었네.
천천히 눈 뜬 채로 내뱉는 가사는 완연한 도리아스의 노래였다. 리듬을 타는 목소리. 안나타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는 부분까지 당도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릴적 아이를 무릎위에 앉힌 채, 웃으며 손동작을 가르쳐주시던 나나의 모습. 그 모습과 비슷한 형태로 움직이며 나풀나풀 제자리를 돌았다. 저도 모르게 악기연주를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색이 끊겨도 당황하는 법 없이 제 스스로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안나타르는 그렇게 한참동안 춤을 추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온전히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고되고 지쳐가는 전장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마도 도리아스의 노래를 기억하는 또 다른 엘프 중 하나겠지. 천천히 밤공기를 타고 퍼져나온 노래는 그떄의 그 노래였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 조차 많지 않은 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노래. 주변에서 하나 둘 흥얼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새카만 밤 하늘에 펼쳐진 광활한 엘베레스의 빛 아래 서글프게 쉬고있는 슬픔의 조각들. 그 속에 자신이 있었다. 빛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희망.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희망을 찾아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늘어지는 화음에 음을 실었다. 이렇게 울려퍼진 노래가 어디에든 닿기를. 평화가 있는곳에 닿아 방황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빛이 되기를. 바라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터였다.
뒤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어린 병사인가. 부르던 노래를 멈춘 채, 돌아본 고개가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어째서. 이곳에. 네가.
"보고싶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다가와 안기는 온기는 그리울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평소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딱딱한 갑옷이 맞닿았지만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느슨하게 땋아진 머릿결이, 긴장할때 예민하게 올라가는 눈꼬리. 언제나 웃고있는 입술. 그리고 항상 당당하게 마주치는 시선. 익숙치 않은것이 없었다. 아니 이질적일 리 없었다. 얼마나 많은 밤을 가슴에 묻어온 안타까움인데.. 그랬는데..
멍하니 쳐다보던 모습에 고개를 갸웃 하던 이는 여전히 웃으며 나를 일으켰다. 아직도 들려오는 도리아스의 노래에 맞추어 빙글빙글 함께 껴안고 막사 안쪽을 돌았다. 예전같이 가벼운 차림이 아니었지만, 홀로 추는 춤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쟁의 두려움도 긴장감도 모두 풀어헤친 채, 몸을 지배했던 건 오직 그 날의 벅차오르던 두근거림 뿐 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그저 부둥켜 안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노래가 끊길 때 까지 그와 나는 계속 춤을 추었다. 사랑과 믿음을 노래하던 먼 과거의 춤을.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근거림의 춤을.
'톨킨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2 (0) | 2013.09.02 |
---|---|
할린디르. 닿음. (0) | 2013.08.31 |
스란엘. 그날 밤. (0) | 2013.08.26 |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0) | 2013.08.22 |
스란엘. 건배. (0) | 2013.08.12 |
글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이제서야 겨우 혼자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왕자는 처음에는 기꺼워했으나 곧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호의를 받아들였다. 갓 왕위에 오른 젊은 왕은 자신보다 아주 조금 나이가 많을 뿐이었다. 축하사절로 오긴 했지만 왕자 역시 이런 자리가 불편했다. 애초에 왕자의 나라와 적대적인 곳이다. 새로운 인물을 왕좌에 올린다고 그 핏줄이 어디 가는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이목을 끄는것이 있었다. 새로운 왕이 들어선 나라에 옛 왕가의 핏줄이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사라진 옛 왕가는 왕자의 나라와 연이 닿아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왕자는 아니었지만 핏줄로는 왕가의 혈통이다. 그가 멀쩡히 살아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라, 저도 모르게 왕자는 미소지었다. 어릴 적 수도없이 보았던 위인들의 이야기이자 세상에 떠도는 모든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의 시초였다. 왕실의 서고에서 보았던 초대 왕가의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왕자는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있었다. 평소라면 성질대로 반항하고 오지 않았을 곳이었지만, 옛 왕가의 핏줄에 대한 호기심이 좀 더 컸던 왕자는 애써 표정을 숨긴 채 발걸음을 옮긴 터였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쉬이 얻어지지 않았다. 성대하게 벌어진 연회의 상석에 앉아 다른 이들의 소개를 받고있던 왕자는 은근슬쩍 지나가는 투로 옛 왕가의 후손에 대해 물었으나 왕은 곤란한 얼굴로 몸이 아파 자리를 나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한마디를 경계로 심기가 조금 어지러워졌다.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냐는 왕의 하문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왕자는 여독을 핑계로 자리를 일찍 털고 일어섰다. 흥미가 가는 것이 없는 번잡한 곳에서의 예의는 이만하면 차린 듯 했다.
숙소로 주어진 월화원의 정원을 거닐던 왕자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집권 초기의 왕권은 가냘프기 그지 없었고 세수 또한 든든하게 뒷받침되지 않는 듯 보였다. 각국의 사절들이 머무르는 곳은 화려하기보단 정갈했고 소박한 맛이 있었다. 어느정도 상황을 예상하고 오긴 했지만 막상 당도해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한숨이 나오는 것 만큼은 막을 수 없는 일이라, 왕자는 번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나마 잘 다듬어진 정원과 중간중간 숨통을 틔워주는 연못, 본국보다 울창하지 않아도 꽤나 멋들어지게 솟은 나무들은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저도 모르게 나무들이 모인 쪽으로 다가간 왕자는 제법 튼실하게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에 손을 얹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향기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오동나무 같았다.
"오동나무 입니다."
마음 속의 언사가 밖으로 나온 줄 알았다. 홀린듯 돌아본 뒤쪽엔 묘령의 사내가 서 있었다.
"혹 궁금하실까 싶어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가볍게 예를 갖추는 사내의 머릿결이 곱게 흔들렸다. 이곳의 관습에 따라 풀어헤친 머릿결은 꽤 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가벼운 차림의 의복이었지만 꽤나 정갈했다. 홀연히 나타난 청년에게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쳐다보던 왕자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받았다. 슬쩍 관찰하는 시선에 청년은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린우드의 전하시지요."
"나를 아느냐."
"뵙는것은 처음이지만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소문이라, 필시 좋은 소문은 아니었겠구나. 나에 대한 것이었다면."
"황공한 말씀을.."
"너는 누구냐."
당연한 물음에 청년은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 쳐다보는 시선은 올곧았지만 그 속에 섞인 망설임을 왕자는 눈치챘다. 이 늦은 시간에 관도 쓰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다면 시종일 수도 있었다. 먼저 말을 걸어오긴 했으나 어쩐지 흥미로워진 왕자는 먼저 입을 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다.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송구합니다."
"아니다. 그보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이냐."
"그런것은 아닙니다. 산책을 하시다 나무를 보시기에 혹 이름이 궁금하실까 싶어서.."
쌉싸름하게 웃는 모습이 어쩐지 가슴에 와닿았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졌다.
"나에 대한 소문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예?"
"그린우드는 숲으로 둘러쌓인 나라다. 그런 왕국의 왕자가 설마 나무의 이름을 모를까."
조금 당황한 모습이 또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송구합니다..하며 거듭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재미있는 자로군. 한밤의 적적한 산책에 혹 도움이 될까 싶었던 왕자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 송구하면 오늘 나와 함께 산책을 하는것은 어떠하냐."
"같이 말입니까."
"싫으냐."
"그럴리 있겠습니까. 따르겠습니다."
살짝 고개숙이는 모습에 또다시 흥미가 일었다. 흐르듯 움직이는 머리칼에 어쩐지 시선이 뺏겼다. 요망한 밤이군. 천천히 웃던 왕자는 막 뒤를 따르려던 이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린우드의 왕자 스란두일이다. 다음엔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구나. 온화하게 미소짓는 왕자의 앞에서 몇번 이름을 되뇌이던 청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 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래, 엘. 기억하고 있으마."
휙 돌아 성큼성큼 걷는 왕자의 뒤를 청년이 조심히 따랐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정원에 커다랗고 흰 달이 둥실 올랐다. 맑은 밤이었다.
'톨킨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8 (0) | 2013.08.29 |
---|---|
스란엘. 그날 밤. (0) | 2013.08.26 |
스란엘. 건배. (0) | 2013.08.12 |
스란디르. 첫날밤. (0) | 2013.08.01 |
스란엘. 뱀파AU. 비 오는 밤. (0) | 2013.07.26 |
글
달달해 죽겠는 스란엘이 보고싶은 오후 7시 23분 ㅜㅜ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짹짹 (2) | 2013.09.27 |
---|---|
다시 재개합니다. (2) | 2013.09.16 |
블로그 잠시 닫습니다. (2) | 2013.09.15 |
반호온 후기. (2) | 2013.07.22 |
[반호온 빗7] 중간계프리덤 부스에 나오는 스란엘 떡제본(19금) 수요조사합니다. (13) | 2013.07.11 |
글
"그러고보니 말이지. 좋은 술이 들어왔어."
모처럼 들뜬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란두일의 미간이 되려 찌푸려졌다. 늘어져있던 소파에서 겨우 고개를 들자 바쁘게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꽤나 고심하고 있는 엘론드가 보였다. 한참을 열중하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마치 주문이라도 된 듯, 엘론드는 움직이던 손을 멈춘 채 스란두일을 쳐다보았다. 한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태도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웃으며 말을 건넸다. 분홍색이 예쁠 것 같나, 노란색이 예쁠 것 같나? 답지 않은 그의 질문에 스란두일은 그저 한숨을 쉬어냈을 뿐이었다.
결국 분홍색이 좋겠다며 이제껏 만져대던 비단을 곱게 말아 포장하는 것으로 엘론드의 바보같은 행동이 마무리된 줄 알았건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안쪽으로 향했던 손에 가득 들린 것은 따지않은 포도주 병과 와인잔이었다.
"정말 마시게?"
"자네답지 않은걸? 혹 지금은 내키지 않는건가?"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는것은 신다르의 특성이 아니라네."
"괜한 걱정을 했군."
밀봉된 병 입구를 뜯으며 엘론드가 웃어보였다. 흥분감에 조금 상기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술은 달큰한 포도향을 품었다. 건네진 잔을 받아든 스란두일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도 아니면서 무슨 긴장을 이리 하는지."
"딸이라잖나. 딸은 처음이니 말이야."
"아들은 취급도 안해주는군."
"그 아이들은 둘이 함께 손잡고 나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됐잖나."
"핑계한번 좋은데."
맞닿은 잔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가볍게 한모금 넘긴 스란두일이 입술끝을 살짝 핥았다. 좋은 술이군. 한마디 칭찬을 내뱉은 뒤, 다시 한모금 넘기는 것을 본 엘론드가 완연하게 웃었다.
"자네가 좋아할 줄 알았지."
"임라드리스의 군주께서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술을 내올 줄이야. 정말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나보군."
"그전까지의 예우는 소홀했다고 힐책할 셈인가?"
"그럴리가. 임라드리스에 공급되는 포도주의 품질과 손님접대의 방식은 익히 알고 있다네. 다만 정말 기분이 좋아보여 농담한 것이니 너무 새겨듣지는 말아."
"사실 가슴이 너무 뛰어 견딜수가 없네."
쑥스러운 듯, 잔에 남은 포도주를 단숨에 비운 채 엘론드는 열오른 얼굴로 스란두일을 쳐다보았다. 한심하게 쳐다보는 표정이 콱콱 얼굴에 꽂혀도 별 수 없었다. 바로 엊그제, 켈레브리안을 보살피던 엘프에게 뱃속의 아이가 여자아이 일거란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터였다. 딸이라니. 막연하게 다가온 새 생명의 존재에 설레임과 사랑스러움이 더해졌다. 엘라단과 엘로히르가 있었기에 내심 바래왔던 여자아이였지만 막상 확인받고 난 뒤의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쁜 일과로 불철주야 뛰어다니면서도 아직 배가 불러 거동이 어려운 켈레브리안에게로 종종 달려가 손을 잡아주느라 분에 넘치게 다가온 이 기쁨을 오롯이 느낄 시간도 마련하지 못했던 차에 찾아온 손님이 바로 스란두일 이었다. 꽤나 풀어진 얼굴이었는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엘론드에겐 그마저도 웃음으로 번졌다. 기쁨의 바다에 자신을 던지기에 혼자는 너무 외로운 차였다.
"그리도 좋은가."
툭 던져진 물음에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졌다는 듯, 스란두일은 엘론드에 손에 있던 병을 빼앗아 다시 잔을 채웠다. 미끄러지듯 담긴 술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막 자신의 잔에도 따라내려는 동작을 제재한 엘론드가 또다시 병을 빼앗은 채, 스스로 잔을 채워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딸아이를 위한 건배를 해도 괜찮을까?"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친우의 미소에 스란두일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어쩐지 단단히 굳어진 마음에 당혹감을 느꼈다. 새로 채워넣은 크리스탈의 잔속에서 술이 흔들리자 저도 모르게 흔들리는 감정을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렸다. 씁쓸해지는 기분이 티가나지 않도록 스란두일은 부러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엘론드의 아이를 축복하며 건배했다. 기꺼이 잔을 맞대고 단숨에 술을 들이킨 두 엘프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후끈한 감각이 몸을 달구고 친우의 웃음소리가 행복하게 귓가를 울렸다. 아까의 이질적인 감정은 천천히 가라앉아 스란두일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졌다. 지금은 저 웃음과 행복해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한잔 더 할텐가?"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 좋을텐데."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듣는게 정말 놀랍다는거 알고 있나?"
"그럼 자네가 이리도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군."
"가끔은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다시금 병을 기울이는 엘론드의 행동에 스란두일은 어쩔 수 없단 듯 짧게 혀를 차올렸다. 하지만 순순히 내밀어진 잔에 엘론드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가득 채워진 잔을 부딧히는 소리가 로드의 방안을 몇번이고 채웠다. 모든것이 행복하고 좋은 밤이었다.
'톨킨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란엘. 그날 밤. (0) | 2013.08.26 |
---|---|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0) | 2013.08.22 |
스란디르. 첫날밤. (0) | 2013.08.01 |
스란엘. 뱀파AU. 비 오는 밤. (0) | 2013.07.26 |
스란엘. 동양풍AU. 비녀. (0) | 2013.07.25 |
글
구두이야기하니까 예식때문에 구두신어야하는 마롣보고싶다. 어자피 예전의 구두는 스틸레토에 남자들이 많이 신었으니까. 평소에는 안신더라도 예식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선 신었으면 좋겠다. 길갈라드는 의외로 균형점이 높아서 잘 신고 버티는데 엘론드는 못버티면 좋겠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애를써도 엄청 긴장해서 자꾸 삐끗삐끗 거리는거. 린돈에 있을 적이니 길갈라드 얼굴에 먹칠안하려고 애쓰는데(심지어 걷는 연습도함) 잘안됨 ㅜㅜ
근데 또각이면서 걸어오는 스란전하 좋다. 뭐야 그것도 못걸어? 이러면서 휘청이는거 부축해서 근처 벤치에 앉혀준 스란전하가 문득 엘론드 신발을 벗기더니 뭐가 비뚤어졌네 'ㅅ' 이러고 툭툭툭툭 고쳐버림. 그러다 영안되겠는지 한참을 자기꺼랑 바라보다가벗어줌. 자네가 이걸 신게. 사이즈도 비슷한거같고 굽이 휘어져서 익숙하지 않는 이가 신었다간 금세 자네처럼 넘어지고 말거야. 이러면서 자기 구두 벗어서 신겨주고 자기는 그 휘청이는걸 도로 신고감. 스란두일은 아주 어릴때부터 즐겨신어서 쉽게 안넘어짐. 그러다가 정작 예식 시작해서 거하게 넘어지면 좋겠다. 진짜 콰당하고 넘어진담에 헤헷 거리고 일어나서 다시 자세잡는데 뭘 모르는 놀도르들은 풉 웃고있고 오로페르도 어이구 바보멍충이 이러고있는데 엘론드만 조마조마...나때문에 넘어졌어..
확실히 스란두일이 신던 구두는 밑창대어져있고 쿠션도 붙어있고 발이 엄청 편함. 처음으로 구두신었는데 긴장되지 않는 편안함을 맛봄. 린돈에 당분간 손님이 머무니까 엘론드는 바빠지는데 한번 찾아가야하는데하는데..하면서 날짜가 미뤄져버림.
일틈새에 낑낑대다가 결국 마지막 떠나는날에서야 엘론드는 겨우 짬을 내. 잘 닦아서 손질해놓은 구두를 포장한 뒤 부리나케 뛰어서 떠나려는 신다르 일족에게 왕자를 뵙고십다 청하지. 이미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편한신을 신은 스란두일은 화색을 하면서 반겨.안그래도 만나고싶었는데. 네게 줄게있다. 하면서 잘 손질된 구두를 건넴. 굽도 고쳤고 자기것처럼 이것저것 손본 탓에 훨씬 상태가 좋아져있어.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 원래 스란전하 구두도 건넸어. 하지만 스란두일은 받지않았음. 나는 왕궁에 내것으로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네게 선물로 주마. 이러고 쿨하게 떠나가버림. 졸지에 구두를 두개나 선물받은 엘론드는 불현듯 돌아선 등 뒤로 고마웠다고 소리지름. 힐끗 바라보며 손을 흔든 스란전하와 그렇게 헤어짐...
글
멜코르안나. 설정.
내안의 안나가 악역이 아닌 이유는 모든 커플링의 베이스에는 멜코르안나가 있기 떄문이 아닐까 ㅇㅇ. 안나가 아무리 지랄맞은짓을하고 여기저기 망충함과 독기를 흘리고 다녀도 그 자신감의 원류는 멜코르에게 사랑받고싶은 어린애에 불과할테니까.
사랑받고 싶은 어린애. 사랑받고 있다는 근자감. 모든 애정을 담아 줄 수 있는 이를 위한 일이란 것을 늘 상기하고있을 것 같다. 그 방법이 선이든 악이든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이든 안는것이든 조롱하고 유혹하는 일이든 뭐든 안나는 멜코르를 위해서 할거같아
멜코르가 아직 중간계에 있을 무렵 새벽이 되면 자고 있는 멜코르의 침전에 들어와 머리도 풀고 옷도 가벼이 입은 채 잠든 멜코르의 발치에 엎드려 있을 것 같다. 멜코르가 깨어나 따스히 손을 잡아줄 때 까지. 정말 시달리듯 힘든 날이면 슬쩍 이불 안으로 침입해도 좋다. 어리광부리듯. 물론 안나는 사랑 이전에 존경하고 경애하는 멜코르라 절대 함부로 하지 않을테고 그것을 멜코르도 안나도 알고 있는데 가끔 이렇게 애교부리듯 안겨오면 아무말없이 안아주는거 좋다.
멜코르가 사우론을 유혹했을 당시부터 안나타르는 사우론의 속에서 조용히 숨쉬었을 것 같다. 정말 모든 사랑을 다 받아 태어난게 안나타르. 선물이라는 뜻조차 멜코르가 지어주었을 것 같아. 심장소리를 부여받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따스함도. 입맞춤도. 눈웃음부터 정말 모든것들을 멜코르에게 배우고 받았을 것 같다. 안나가 모든 방면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건 사실 멜코르때문이라는 동인설정<< 근본적으로 삐뚤어졌지만 애정 하나만큼은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는 안나가 보고싶다. ㅠㅠ
와 진짜 슬프다. 이곳 저곳을 돌며 정보를 얻으려 유혹하고 변태적인 행위를 견뎌내며 수치에 울며 얻은 정보를 멜코르에게 가져가면 그제서야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 모습 하나로 모든 노고가 사라지고 행복해하는 안나가 상상된다. 나중 가서는 더더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인내하겠지. 멜코르님이 날 봐주시고 계셔. 그분의 기대를 거스를 수 없어. 웃는 모습하나로 만족할 수 있는걸..
멜코르는 조련 갑이어서 안나가 유독 기운없어하고 정말 힘들어하는게 눈에 보일때만 상냥해지면 좋겠다. 평소처럼 목욕수발을 들고 향유까지 바른 뒤 발끝에 키스하고 물러서려는 안나의 손을 잡는거지. 아이야 오늘 네 품이 필요하구나. 단숨에 발갛게 열이오른 얼굴로 안절부절하는 안나가 몇번이고 입술을 축인뒤 씻고오겠다며 조심스럽게 자리를 비워. 안나가 문을 닫고나서야 천천히 감았다 뜬 눈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어둠이 보일 뿐. 금세 돌아왔지만 서둘러씻은 후에 향수까지 뿌렸어. 안나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짓고 이불을 들어 그의 몸을 반겼어. 차가운 몸이 얇은 잠옷에 담겼어. 슬쩍 밀어 헤치며 아직 젖은 머리끝에 입술을 묻지. 온전한 네가 좋단다 아이야.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는 것은 없었으면 해. 그 말을 들은 안나가 스스로 옷을 벗어. 어린아이와도 같은 맨몸으로 다시 멜코르의 품에 안겨. 사실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왔지만 멜코르는 쉬이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아. 그저 정말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입술을 물고 뺨을 쓸고 품에 꼬옥 안을 뿐이지. 천천히 얼굴선을 쓸어담고 시선을 맞추면 어린아이같은 순진한 동공에 자신이 오롯이 들어와. 살그머니 멜코르의 가운을 부여잡으면 그제서야 웃으며 멜코르는 키스해줘. 천천히. 코끝부터.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도.
아주 달콤한 키스로 시작했지만 점차 물어뜯으며 탐욕스러움으로 변모해. 모든것을 멜코르에게 맞춘 안나가 가빠진 호흡으로 버티려해보지만 멜코르는 그정도로 만족하지 못하지. 키스하면서 무방비로 드러난 목을 서서히 졸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유지한 채 눈물이 꼬리를 타고 내려오면 그제서야 멜코르는 진정하고 목을 졸랐던 손에서 힘을 빼. 가파르게 넘어가는 가슴팍이 도드라져. 그 속에 뛰고 있는 심장이 아우성쳐. 천천히 입술을 떼고나서야 멜코르는 다시 슬픈 미소를지어.
또 나의 욕심이 너를 상처입혔구나. 그렇지만.. 사랑하고 있단다. 나의 아이야. 그말 한마디로 넘어갈듯 한 숨이 멈췄어. 억지로 고르게 만든 숨이 불안정하게 흐트러졌어. 하지만 안나타르는 웃어보였어. 나의 주군이시여 주군께서 하시는것이면 저는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살갑고도 예쁘게 웃어보이는 안나타르의 이마에 멜코르가 가볍게 입맞췄어. 나의 부족함까지 사랑해주는것은 너 하나 뿐이란다. 안나타르. 그 말에 기쁜듯 다시 품으로 안겼어. 아무말 없이 꼭 껴안은 팔에 온기가 돌았지. 피곤과 모자란 숨에 안나타르는 금세 잠이들었어. 가장 사랑하고 은애하는 이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듯 몇번 움찔대던 몸이, 가슴이 고르게 울렁거렸어. 그 모습을 보던 멜코르가 아주 작게 웃었어. 가끔은 이렇게 버림받지 않았다는 증거도 필요한 법이지. 곁에 누가 있으면 잠이들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오늘은 그 짐을 감내해야 할 차례였어. 더듬어진 손끝에 감기는 맨살의 감촉을 오래도록 느끼며 멜코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어. 다음날 수줍게 일어난 안나타르가 후다닥 제 몸을 숨기고 세숫물을 떠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