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겨우 혼자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왕자는 처음에는 기꺼워했으나 곧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호의를 받아들였다. 갓 왕위에 오른 젊은 왕은 자신보다 아주 조금 나이가 많을 뿐이었다. 축하사절로 오긴 했지만 왕자 역시 이런 자리가 불편했다. 애초에 왕자의 나라와 적대적인 곳이다. 새로운 인물을 왕좌에 올린다고 그 핏줄이 어디 가는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이목을 끄는것이 있었다. 새로운 왕이 들어선 나라에 옛 왕가의 핏줄이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사라진 옛 왕가는 왕자의 나라와 연이 닿아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왕자는 아니었지만 핏줄로는 왕가의 혈통이다. 그가 멀쩡히 살아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라, 저도 모르게 왕자는 미소지었다. 어릴 적 수도없이 보았던 위인들의 이야기이자 세상에 떠도는 모든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의 시초였다. 왕실의 서고에서 보았던 초대 왕가의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왕자는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있었다. 평소라면 성질대로 반항하고 오지 않았을 곳이었지만, 옛 왕가의 핏줄에 대한 호기심이 좀 더 컸던 왕자는 애써 표정을 숨긴 채 발걸음을 옮긴 터였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쉬이 얻어지지 않았다. 성대하게 벌어진 연회의 상석에 앉아 다른 이들의 소개를 받고있던 왕자는 은근슬쩍 지나가는 투로 옛 왕가의 후손에 대해 물었으나 왕은 곤란한 얼굴로 몸이 아파 자리를 나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한마디를 경계로 심기가 조금 어지러워졌다.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냐는 왕의 하문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왕자는 여독을 핑계로 자리를 일찍 털고 일어섰다. 흥미가 가는 것이 없는 번잡한 곳에서의 예의는 이만하면 차린 듯 했다.

숙소로 주어진 월화원의 정원을 거닐던 왕자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집권 초기의 왕권은 가냘프기 그지 없었고 세수 또한 든든하게 뒷받침되지 않는 듯 보였다. 각국의 사절들이 머무르는 곳은 화려하기보단 정갈했고 소박한 맛이 있었다. 어느정도 상황을 예상하고 오긴 했지만 막상 당도해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한숨이 나오는 것 만큼은 막을 수 없는 일이라, 왕자는 번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나마 잘 다듬어진 정원과 중간중간 숨통을 틔워주는 연못, 본국보다 울창하지 않아도 꽤나 멋들어지게 솟은 나무들은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저도 모르게 나무들이 모인 쪽으로 다가간 왕자는 제법 튼실하게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에 손을 얹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향기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오동나무 같았다.

"오동나무 입니다."

마음 속의 언사가 밖으로 나온 줄 알았다. 홀린듯 돌아본 뒤쪽엔 묘령의 사내가 서 있었다.

"혹 궁금하실까 싶어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가볍게 예를 갖추는 사내의 머릿결이 곱게 흔들렸다. 이곳의 관습에 따라 풀어헤친 머릿결은 꽤 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가벼운 차림의 의복이었지만 꽤나 정갈했다. 홀연히 나타난 청년에게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쳐다보던 왕자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받았다. 슬쩍 관찰하는 시선에 청년은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린우드의 전하시지요."
"나를 아느냐."
"뵙는것은 처음이지만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소문이라, 필시 좋은 소문은 아니었겠구나. 나에 대한 것이었다면."
"황공한 말씀을.."
"너는 누구냐."

당연한 물음에 청년은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 쳐다보는 시선은 올곧았지만 그 속에 섞인 망설임을 왕자는 눈치챘다. 이 늦은 시간에 관도 쓰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다면 시종일 수도 있었다. 먼저 말을 걸어오긴 했으나 어쩐지 흥미로워진 왕자는 먼저 입을 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다.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송구합니다."
"아니다. 그보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이냐."
"그런것은 아닙니다. 산책을 하시다 나무를 보시기에 혹 이름이 궁금하실까 싶어서.."

쌉싸름하게 웃는 모습이 어쩐지 가슴에 와닿았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졌다.

"나에 대한 소문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예?"
"그린우드는 숲으로 둘러쌓인 나라다. 그런 왕국의 왕자가 설마 나무의 이름을 모를까."

조금 당황한 모습이 또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송구합니다..하며 거듭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재미있는 자로군. 한밤의 적적한 산책에 혹 도움이 될까 싶었던 왕자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 송구하면 오늘 나와 함께 산책을 하는것은 어떠하냐."
"같이 말입니까."
"싫으냐."
"그럴리 있겠습니까. 따르겠습니다."

살짝 고개숙이는 모습에 또다시 흥미가 일었다. 흐르듯 움직이는 머리칼에 어쩐지 시선이 뺏겼다. 요망한 밤이군. 천천히 웃던 왕자는 막 뒤를 따르려던 이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린우드의 왕자 스란두일이다. 다음엔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구나. 온화하게 미소짓는 왕자의 앞에서 몇번 이름을 되뇌이던 청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 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래, 엘. 기억하고 있으마."

휙 돌아 성큼성큼 걷는 왕자의 뒤를 청년이 조심히 따랐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정원에 커다랗고 흰 달이 둥실 올랐다. 맑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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