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란디르. 첫날밤.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곳, 천연의 요새이자 상처받은 이들에게 열려있는 쉼터. 이곳의 이름이 임라드리스라 명명된 이후 가장 아름답게 정비되고 가꿔진 좋은 시기에 군주의 자리에서 모든 것들을 돌보던 엘론드 페레딜은 리븐델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많은 초대장을 작성했다. 귀한 종이에 꼼꼼하게 쓰인 서신을 받은 손님들은 임라드리스라 명명된 안식의 땅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첫 손님들을 맞이하려 열린 화려한 연회에서 이제는 군주라 추앙받아도 좋을 이의 환대를 받으며 도착한 귀한 이들이 양껏 먹고 마시며 서로간의 우애를 나누었다. 곧 자리가 무르익자 하나 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지어 어울리기 시작했다. 은밀한 시간들이 시작될 것임을 눈치챈 시종들은 환히 밝혔던 촛대를 조정하고 몸을 숨겼다. 얼마나 오랜 기간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이 어울리는 자리인 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분 한분 직접 모시고 연회를 주최하던 엘론드도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임라드리스의 엘프들만이 웃음을 띄우고 아직 남아있는 손님들을 서포트하기에 바빴다.
가슴이 뛰었다. 본래대로라면 연회의 정리를 도우려 넓은 홀로 향했어야 했을 걸음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은밀하게 움직인 린디르는 숨을 죽인 채, 나무뒤로 몸을 숨겼다. 슬쩍 열린 창문 틈으로 언제나처럼 익숙한 주군의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평소의 과묵한 모습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같이 천진해보여 린디르를 당황스럽게 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눈 앞이 캄캄해졌다.
젊다기에는 애매한 나이의 주군은 아직도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뜬구름처럼 소문이 떠돌았다. 은밀한 연인이 있다던지 혹은 이미 미래를 약속해 곧 혼인을 할 때를 노리고 있다는 그런 류의 소문이었다. 하지만 개중 현실적인 소문은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리븐델로 건너오고 나서의 주군은 정말 엘프의 하루 삶을 인간처럼 써도 모자를 정도로 바쁘고 고된시간을 보냈던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열린 이 연회에서 만큼은 무언가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새로운 소문에 임라드리스는 조용히 들떠있었다.
그리고 어린 엘프는 소문이 사실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주군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조금의 배신감과 체념이 온 몸을 잠식했다. 그랬다. 어린 엘프는 남 모르게 맘속 한 구석에 주군을 담아두고 있었다.
곧 성인식을 맞는 어린 엘프는 부끄러움을 뒤로한 채, 주군의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희망조차 남질 않았다. 충격에 놀란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그럼에도 고정된 시선은 흩어질 줄 몰랐다. 저렇게 환한 웃음을 얼굴에 띄운 주군의 모습은 처음 보는 터였다.
누구십니까. 나의 주군의 마음을 차지하신 분은..
혹여 비명을 지를까 싶어 틀어막은 손가락 위로 눈물이 넘쳐 흘렀다. 훌쩍이지 않으려 애써봤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그 모습을 뵙고싶었다. 흐려지는 시야를 흔들어 눈물을 닦고 주군의 모습을 주시했다.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온화한 모습이 아니었다. 수줍어하고, 살갑게 웃으며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슬픔에 젖어버린 몸은 둔해졌다. 그저 올곧게 시선만 그의 주군께로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리지 않길 바라며 모든 신경을 주군에게만 쓰고 있었다. 덕분에 어린 엘프는 뒤쪽에서 은밀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군. 그대는 혹 초대받지 못한 손님일까?"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당황한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차마 움직여 확인하지 못한 어깨에 따스함이 감겼다. 충분히 반항할 수 있었음에도 린디르는 자신의 어깨에 얹혀진 손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 얼굴을 보이고 말았다. 꾹 감은 눈에 당황한 듯, 눈물이 맺혔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보였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점이 자신을 더욱 당황케했다. 당연하게도 이곳에 온 손님들은 모두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분들이었다.
악햔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손가락이 얼굴로 향하자 움찔거리며 눈을 떠 버렸다. 검은 동공에 맺힌 것은 어둠을 살라먹을 듯 빛이나는 황금의 머리칼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화려한 나무관이었다. 그린우드에서만 자란다는 귀한 꽃. 황금색으로 빛나는 열매. 손님이 누구인지 알게된 린디르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몸보다 허리를 잡아챈 손이 빨랐다. 갑자기 타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된 어린 엘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곧 놀란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작게 딸꾹질을 시작한 린디르가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모든것을 그저 지켜보던 스란두일은 잠시 고개를 들어 린디르의 시선이 향했던 곳으로 눈길을 보냈다. 평생의 친우가 그곳에서 웃고 있었다. 맞은 편의 상대는 린돈의 왕이로군. 혀를 차올리며 품속에 들어앉은 작은 새를 스란두일은 포근히 감싸안았다. 크지 않은 키와 땋지 않은 머리로 보아하니 성인식조차 치루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어린 엘프의 마음속에 그늘을 만드는 이는 어느쪽일까."
안긴 이가 또다시 몸을 떨어냈다. 마치 아이를 돌보는 보모가 된 것 같은 모양새군. 한숨을 쉬어내며 품안을 헤쳐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만이 반짝였다. 묘하게 구미가 당기는 분위기네. 잠깐의 호기심이 왕자를 사로잡았다. 버림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작은 동물들은 조그마한 온기에 쉽게 마음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 스란두일이 녹아들 듯 웃어보였다.
"나라면 매일 웃게 만들텐데."
커진 동공에 다시 혼란이 느껴졌다. 살그머니 올린 손이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리하고 볼을 감싸쥐었다. 단번에 빨개진 얼굴에 신선함이 느껴졌다. 어려. 작아. 여려. 조금은 순종적인데. 상냥한 모습으로 이마에 입맞췄다. 움찔,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손을 올려잡아 눈을 맞췄다.
"어떠하냐, 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지 않겠느냐. 어쩐지 오늘은 혼자있고 싶지 않은데."
아주 작은 유혹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어두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고민을 하는 것 같아 슬쩍 산책을 멀리나와 방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곤란하다는 말을 덧붙였더니 결정은 오히려 쉬워진 모양이었다. 눈물을 털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을 가늘게 눈뜨고 바라본 스란두일의 시선이 아주 잠시 친우의 방으로 향했다. 어느새 불꺼진 창문 틈새로 아주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픽 웃으며 아이가 듣지 못하게 다가가 얼굴을 감싸안았다. 뾰족 솟아오른 귀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몇번이고 쓸었더니 그대로 화끈 달아올랐다. 당황하며 버둥대는 아이를 즐거이 바라보며 한쪽 품에 껴안은 채, 자리를 옮겼다. 그대의 덕에 모처럼 좋은 밤을 보낼지도 모르겠군. 들리지않는 감사의 인사를 친우에게 남기며 스란두일은 어린 엘프에게 이름을 물었다.
"린디르..입니다."
"예쁜 이름이구나."
칭찬을 받는 것이 서툴은 아이같이 시선이 발끝으로 향했다. 무심코 결좋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스란두일은 다시 미소지었다. 달이 유난히도 밝은 임라드리스에서의 첫날밤 이었다.
'톨킨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양판타지AU. 스란엘. 무제. (0) | 2013.08.22 |
---|---|
스란엘. 건배. (0) | 2013.08.12 |
스란엘. 뱀파AU. 비 오는 밤. (0) | 2013.07.26 |
스란엘. 동양풍AU. 비녀. (0) | 2013.07.25 |
할린디르. 성인식. (0) | 2013.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