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란엘. 뱀파AU. 비 오는 밤.
지독히도 짜증나는 밤 이었다. 비는 흔들리는 마차의 유리창을 무수히 때리고 그 자국을 남겼다. 애꿎은 시가의 끄트머리만 손 끝으로 눌러대다 짜증섞인 목소리를 내 뱉으니 앞의 시종이 움찔하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녹색의 프록코트는 습기에 형편없이 흐물거렸고 어제 새로 산 실크햇에 달린 비로드 장식은 축 쳐져있어 현재의 기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사려고 했던 경매품을 놓친 것에 대한 부아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더럽고 치졸한 글로르핀델. 관심도 없던 조각상에 10만 파운드까지 부른 이유가 고작 내게 우월감을 표시하기 위함임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어쨌거나 스란두일은 하인도 통하지 않은 채, 스스로 일어나 경매가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상을 낙찰받지 못했다. 미청년의 나신을 조각한 대리석이었다. 제작자도 알 수 없는 작자 미상의 것이라 처음에는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잡담을 하던 그였다. 그러나 그 조각상을 가렸던 휘장이 벗겨지는 순간 스란두일은 첫 눈에 반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단아한 이마. 마치 색이 있었다면 불그스름했을 통통한 뺨. 날카로운 턱선. 목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잔근육들은 너무나 아름다고 황홀했다. 넋을 놓은 자신을 두고 주변이들이 남색가라며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저것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달게 인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꿈 이었다. 결국 글로르핀델의 손에 넘어간 조각상은 단숨에 휘장에 감긴 채, 상자로 포장되어버렸다. 집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낮추어 한 번만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요청하는 언질을 시종을 통해 보냈지만 돌아온것은 유감이라는 말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렇게 그린우드의 스란두일은 말그대로 체면을 구겨버린 참이었다.
점점 차게 굳어지는 주인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 본 시종은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천성이 난폭하지는 않았지만 다혈질에 혈기왕성한 주인은 가끔 끓어넘치는 화기를 달래기 위해 밤새도록 말을 달리거나 희안한 트집을 잡아 시종들을 밤새 못살게 굴었다. 잠들지 못하는 것보다 걱정스러운것은 까탈스러운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어서 시종은 자신에게 애꿎은 화가 미치기 전에 저택에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저택의 근처로 온 마부가 잠시 대문이 열리는 속도에 맞추기 위해 마차를 멈추었다. 환하게 주인을 맞이하려 불켜진 저택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빗줄기 속에서도 그 위용을 자랑했다. 이윽고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다시 속력을 내는 채찍소리에 맞추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부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무..무무무슨일입니까!!!!!"
"그..그..저기..그..."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단번에 들어도 불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들려오자 마부는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이 있는 창 쪽으로 다가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창문을 두드리자 소리를 내며 열린 창문 틈으로 시종과 주인의 얼굴이 내비쳤다.
"그..주인님. 바닥에..왠 놈이 쓰러져있는데요..!?"
"뭐?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영지 안쪽이다.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시종이 더욱 당황해 마부를 쳐다보았지만 마부는 몇 번이고 앞쪽의 바닥과 시종을 번갈아 보았을 뿐, 아무런 말도 더 잇질 못했다. 잠깐이나마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시간에 짜증이 난 스란두일은 시종을 툭툭 치며 밖으로 나가보라 턱짓했다.
제에길, 그냥 지나가면 되는것이지. 이 밤중에 여기 무슨 사람이 있다고. 졸지에 안맞아도 될 비를 맞게된 시종은 중얼중얼거리며 겉옷으로 대충 빗물을 가리고 마부와 함께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과연 무언가 거뭇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덥지 않은 쓰레기일 것이라고 주억거리던 시종은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로 사람 모양을 하고 있자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주저앉고 말았다. 반대쪽 창문을 열고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스란두일은 고개를 갸웃하며 큰 소리로 마부에게 살아있나 확인해 보라 명했다.
"살..살아있습니다요!! 맥이 뛰는것 같은데요!! 주인님!!"
살아있는 사람이 이 시간에 나의 저택안에 쓰러져있다..라. 스란두일은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민가에서는 꽤나 떨어져있는 곳인데 구태여 이쪽까지 와 쓰러질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쨌든 살아있는 자를 빗속에 내버려두는 것은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다시한번 크게 소리쳐 그를 마차로 데려오라 명한 뒤, 스란두일은 지팡이를 치우고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조각상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어떤 자일까. 남자? 여자? 노인? 그도 아니면 아가씨? 즐거운 상상속에 풀어진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시종과 마부가 비에 쫄딱 젖은 채, 끌고온 자는 남자였다.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젖을까 싶어 망설이던 시종은 바닥으로 그를 밀쳐 올렸다. 졸지에 스란두일의 발치에 엎드린 그에게서는 비맞은 짐승에게 나던 퀘퀘한 냄새가 났다. 단번에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쥔 주인의 눈치를 보던 마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주인님. 저택으로 향할깝쇼. 그래. 아, 넌 자리가 없으니 마부와 함께 앉거라. 조금 투덜투덜대던 시종은 어자피 홀딱 젖어 마차에 오를 수도 없다며 굽신댔고 천천히 마차의 문이 닫혔다.
출발한 마차의 덜컹거림에 엎드려 있던 자의 얼굴이 슬쩍 드러났다. 차마 손 댈 수 없어 발 끝으로 건드려 보던 스란두일의 행동이 멈춘 것은 그 때였다.
'이 아이...아까 조각상의 그 아이잖아...?'
젖었다는 것도 잊은 채, 손을 뻗어 눈감은 그 얼굴을 좌 우로 돌렸다. 비를 맞아 열이 올랐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싱그러웠다. 조각상은 소년의 어릴때의 모습이었는지 지금은 완연히 자라 청년, 아니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나이로 보였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고작 조각상 따위에 연연해 할 것이 아니었어. 게다가 스스로 내 저택을 향했으니 이 자가 나의 소유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무심코 닿은 온기에 투정을 부리듯 기울어지는 고개에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얼마나 쳐다보고 있었을 까. 마부의 거친 목소리로 저택에 당도하였다 고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한 스란두일은 축 쳐진 실크햇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지팡이를 짚고 반대쪽 문으로 내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우산을 가져와 수발을 들었다. 관심없는 척, 도도한 표정으로 스란두일은 집사에게 명을 내렸다. 안에 있는 자를 깨끗이 씻겨 내 방에 데려다 놓도록. 오랜 시간 주인을 모셔왔던 집사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보였을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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