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엘. 헤어짐.

썰/뻘설정 2013. 9. 8. 04:21

비님의 길엘그림을 보고 혼자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하구..<

 

사실 길엘 에프터 후에 길갈라드가 눈을 뜨면 엘론드는 없으면 좋겠다. 아침식사자리에서야 보았는데 평소처럼 대하는 엘론드의 모습에 한없이 죄책감을 느끼다가 겨우 입을 열어서 엘론드. 하고 불렀는데 엘론드 눈에 생기가 살짝 죽은게 보이면 좋겠다. 예 주군. 평소와 같이 대하는 엘론드였지만 그 속에서 분명 미약하지만 경직된 모습을 발견한 길갈라드는 그저 아니. 아니다. 라고 얼버무렸지만 그 짧은 대화는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그어버렸겠지.
그것들이 쌓이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터져버리면 좋겠다. 말하지 못하고 다가서지 못하는 길갈라드를 보면서 인내하고 참아왔던것이 기어이 올라 빵 터지면 화라도 내겠지. 자신을 부르며 바라보는 눈빛에 혼돈이 가득한 모습을 보면 길갈라드는 죄책감이들까.
상처를 곪게 만든것은 하룻밤의 정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때문이었는데. 이미 상처받아 삭고 내려앉아버린 마음이 녹아내린것이 눈에 보일지경에서야 깨달은 자신을 향한 힐책을 퍼부어보지만. 엘론드의 눈빛에 이제는 자신이 비치지 않는다는걸 눈치채는거. 한걸음 다가서면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벽에 닿을때까지 주고받은 무언의 공격들이 아프게 가슴을 찔러오는데 더이상 갈곳없어진 몸뚱아리에 엘론드가 고개를 돌려버리고 그것이 또 마음에 들지않아 다가가 끌어안으려하지만 밀쳐내는 엘론드가 보고싶다

상처받은 모습으로 화들짝 떨어지려하지만 그 모습에 더더욱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대왕은 손을 내밀어보지만 그제서야 확 쏘아보며 좋으시냐고 매정한 말을 내뱉는 엘론드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 좋으십니까? 저를 휘저어 놓으시고 혼자 상처받은 모습을 하시면 좋으시냔 말입니까. 몸을 취하셨으니 마음은 굽어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리하여 저를 피하셨습니까? 제 의견을 늘 존중한다 이야기하시곤 정작 중요할 순간엔 돌아보시지 않는것이 대왕의 믿음이고 사랑입니까?

아니라고 부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엘론드가 정말 자조적으로 웃으며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대왕. 죄송합니다. 대왕께서 품으시는 마음보다 제가 더 많은것을 품었나 봅니다. 그리하여 벌을 받는게지요. 연모라는 감정이 함부로 품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인데 저는 너무 쉽게 그것에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이러려고.. 한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대왕. 시리게 웃으며 어느새 고인 눈물이 아릉거리며 떨어질 듯 말듯 속눈썹을 적시우는데 길갈라드는 정말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으면 좋겠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여서 그리 대한것이라 자위했건만 스스로를 만족시키려 하는 변명 뿐이었구나. 조심히 손을 뻗어보지만 엘론드는 그저 슬피 웃으며 좀더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다가오지 말라는 행동을 이제는 표현하고 있었다.

저는 어자피 이제 내일 떠날 몸이니.. 대왕께서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들어가 쉬시지요.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데 반짝 하고 떨어진 것은 필시 별빛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맑은 시선을 보내는 모습이 아련하게 빛이 났다. 천천히 몸을 틀어 안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몸이 절로 반응했다. 뒤쪽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꽉 부여잡은 팔이 덜덜 떨려왔다. 더이상 보내선 안됐다. 이건 너무도.. 너무도 잔인한 짓이었다.
놓아주십시오. / 그럴수 없다./ 그러지 마십시오/ 내가 미안하다../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리 말하지 말거라. 엘론드 나는../ 변명하려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자피. 이미 끝난 관계 아닙니까.
끝이 나다니!! 그렇지 않다!! 길갈라드가 퍼특 놀라 팔을 풀고 엘론드의 얼굴을 보려했지만 엘론드는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길갈라드의 팔 위에 살그머니 얹을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대왕. 저는.. 이걸로 괜찮습니다. 혹 아주 조금의 배려를 해주신다면, 잠시만....조금만. 이대로 계셔주세요. 잠시면...됩니다.
등이 떨리기 시작했고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더 안을수도 손을 뗄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였지만 엘론드의 슬픔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언제나 하얗고 곧게 뻗은 귀 끝이 붉어질 정도로. 배와 허리 근처를 감싸안은 팔이 떨릴 정도로. 처연하게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삭여내던 슬픔을 밀어낸 채, 엘론드는 자신의 몸을 안았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대왕을 쳐다보았다. 눈가가 아주 조금 발갛게 물들었지만 여전히 엘론드는 웃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그 모습처럼. 수줍게 웃으며 애정가득한 모습을 담은 엘론드가 먼저 반 걸음 다가섰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거리에서 둘은 느리게 시선을 교환했다. 곱게 휘어진 눈매가 애틋했다. 천천히 다가온 온기가 양 어깨를 감쌌고 살그머니 발꿈치를 들어올려 닿은 이마에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뜨거움이 닿았다.

나마리에. 절대.. 잊지 못할겁니다. 나의 주군이시어. 마지막까지 보여지는 모습조차.. 엘론드는 너무나 엘론드다웠다. 몸을 돌려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엘론드를 차마 따라가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길갈라드는 꼬박 자리에서 밤을 새웠다.



엘론드가 군사들과 주민들을 이끌고 린돈으로 향하는 날. 대왕 길갈라드는 끝내 방 안을 떠나지 못했다. 혹자는 바쁜 정무때문이라고도 했고 혹자는 아끼던 가신을 떠나보내는 슬픔에 잠겼다고도 했다. 하지만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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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더미를 가득 품에 안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발걸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레스토르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오 에루시여. 지금 제 눈에 스친 것이 헛것이길 바랍니다. 제가 요즘 피곤하긴 했죠. 며칠 내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잖아요. 이러실 순 없어요. 남들이 보았으면 살짝 미친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고개를 흔들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에서야 에레스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혼자서 착각을 한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가짐을 가슴과 머리에 몇번이고 새기고서야 슬그머니 불길한 예감이 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이 절망했다. 
아무도 없는, 아니 지금 이시간이라면 당연하리만치 비어있어야 할 안쪽의 뜰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나뭇잎을 뜯어먹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엘크였다. 엘크!!! 엘크!!! 그래 엘크!!! 빌어먹을 어둠숲의 왕인지 뭔지 나부랭이가 타고다니던 그 엘크!!! 사슴같은거!! 뿔만 엄청 큰 그거 말이다!!! 갑자기 차오르는 분노에 손 안의 서류더미들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진정하자. 제발. 응. 에레스토르. 심호흡 하고. 아닐수도 있잖아. 응? 그렇게 한참동안 마인드컨트롤을 걸었지만 안타깝게도 효과는 보이질 않았다. 저 엘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빌어먹을 그 분께서 임라드리스에 발걸음을 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스스로를 속일수는 없었다. 한참이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던 엘프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채, 안쪽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무슨일이 있어도 한마디 해야 할 성 싶었다.

 

평소였다면 일의 경중과 순서를 따라 정리되었을 서류들은 당장 급한 것 몇 개만 추려진 채,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일주일 후에 있을 회의에 맞추자면 밤을 새도 아까울 시간들 이었지만 지금은 로드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매번 같은 시기였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며 손님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임라드리스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그 자는 매번 이렇게 뻔뻔하게 숨어들어왔다. 대체 경비병이 있는데 어떻게 눈에 띄지않은 채 이곳까지 향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조차 없었다. 물론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임라드리스에 입성을 했다면 조금은 대우 할 명분이라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매번 그래왔듯 앞으로의 일정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힘들었다. 분명 로드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을테지.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고 친우로 온 것이라 둘러대며 같은 방을 쓰고 매 시간을 붙어 있으며 로드의 신경을 쓰이게 만들테고. 거절하는 법이 없는 로드는 휴식을 취하셔야 할 시간조차 그 자에게 할애할 것이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화가 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 이었다. 좋은 때 다 놔두고 왜 매번 제일 바쁠 시기에 오는걸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데. 언젠가부터 벼르고 있던 울분이 터질듯 달아올랐다. 로드면 어떻고 엘븐 킹이면 어떨까. 나는 임라드리스의 가신이고 나의 주군을 섬기는 이인데. 가신의 충언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은 누구에게도 없을 터였다.
서가를 나서는 걸음이 침착하리만치 가라앉았다. 어자피 흥분해서 다다다 쏘아대기만 한다면 비웃음을 당하는 쪽은 이쪽일 게 뻔했다. 대체 어떻게 비꼬아야 예를 갖추는 듯 하면서도 기분이 제대로 나쁠까를 생각하며 안가로 향하고 있던 무렵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에레스토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무서운 얼굴로 어딜 가십니까? 에레스토르 경?"

서글서글한 눈매가 순하게 휘어지며 아는척을 해댔다. 가던 방향을 틀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등 뒤로 햇살이 반사되어 흩어졌다. 화려한 금색의 머리칼이 너울대는 모습만 보면 늘 에레스토르는 정신이 산란해짐을 느꼈다. 되도록이면 보고싶지 않은 얼굴인데.. 오늘은 필시 재수가 없는 날임에 틀림이 없었다.

"볼일이 있어서요. 그럼."
"그렇다고 인사도 나누지 않으시고 그리 매정하게 가십니까. 저 상처받습니다."

정말이지 상처받은 모습으로 비맞은 강아지마냥 축 쳐진 눈썹에 한숨이 나왔다. 매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은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명확했다. 자신을 막으러 온 것이다. 아마도 그 자의 명을 받았을테지. 안그래도 지끈지끈하던 머리가 더더욱 아파왔다. 지금은 이자에게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매정하게 한 적 없습니다. 글로르핀델 공. 저는 볼일이 있으니 이만 실례하지요."
"지금 그 태도조차 매정하신데요."

우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모습이 거짓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여간해선 길을 비켜주지 않을거라는 것을 깨달은 에레스토르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로드께 가야합니다. 비켜주십시오."
"로드께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잠시 해야할 일이 있으니 에레스토르 경을 보필하라구요."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그 명은 로드께서 내리신 것이 아닐겁니다."
"맞는데.."
"아 쫌!!!!! 비키라구요!!!"

미적대며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있는 글로르핀델을 보며 에레스토르는 결국 폭발했다.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사납게 노려보는 모습은 상급자에게 보일만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 짜증을 받아내는 글로르핀델 또한 이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그저 웃어보일 뿐 이었다.
 
"안 돼. 안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 빌어먹을 왕인지 뭔지 쫒아내고 말거에요."
"말조심해야지. 그래도 엘븐 킹이시다."
"알게 뭐람."
"이건 뭐 나 조차도 믿지 않을 녀석이군."
"사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재육화고 나발이고 살아 돌아왔다는 걸 대체 어떻게 믿느냔 말이야."
"난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처럼 죽었다 돌아온 것도 아니고 몇시대에 걸친 생을 견디며 왕의 자리에 오르신 분을 함부로 칭하는 것은 좀 그런데. 요즘 엘프들은 공사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 편인가? 아니면 그대가 버릇이 없는걸까."
"신경 끄시죠. 어르신. 요즘 유난히 나한테 간섭이 심한 거 알아요?"
"어르신은 아니지. 말은 바로해라 꼬마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재육화 하고부터 몸 나이는 아직 현역이란다."
"꼰대질 하는 그 성격은 어르신 맞는 것 같은데."

혀를 차며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보며 글로르핀델은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다리를 비딱하게 짚은 채, 자신을 노려보던 에레스토르는 한참을 그리도 쳐다보다가 비켜주지 않을 요량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가로 통하는 길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덕에 겨우 안도한 얼굴에는 평소처럼 미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주 잠깐 글로르핀델을 방심시킨 에레스토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길이 나지 않은 숲 근처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은색의 머리칼을 보며 글로르핀델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서렸다. 설마 길도 아닌 곳으로 향할 줄은...
머릿속으로 로드의 서재까지 가는 모든 루트를 떠올린 글로르핀델은 방향을 틀어 급히 달렸다. 에레스토르가 도착하기 전에 막아서야만 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로드의 서재 근처의 정원으로 통하는 숲이었다. 모처럼 숨가쁘게 뛰었더니 차림이 엉망이었다. 조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턱 끝까지 차고 올라오는 숨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회의를 끝마치고 바쁜것이 좀 해결되고나면 다시 몸의 단련을 시작해야겠다고 에레스토르는 마음 먹었지만 그것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한가로이 운동이나 할 시간이 있을 턱이 없지. 그럼.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에레스토르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흐트러진 의복을 정리했다. 이윽고 흰색의 돌들로 꾸며진 서재가 눈앞에 보였다. 높은 천장을 가진 서재는 해가 잘 들수 있도록 크고 넓은 창을 넣어 설계한 곳이었다. 평소같았음 활짝 열려 빛을 들일 창들이 오늘따라 드문드문 닫혀있었다.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금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니까. 로드는 지금 그렇게 놀고 계실 시간이 없다고.. 그럴 시간이 있으셨으면 잠이라도 좀 주무셨으면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어젯밤까지 자신과 함께 밤을 꼬박 새다시피 자료정리에 몰두하신 터였다. 꾸벅꾸벅 졸고있는 자신을 따스하게 쳐다보시며 어깨를 두드려 이만 눈 좀 붙이라고 억지로 떠밀어 쫒아내신 분이셨다.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며칠을 일하고 계신 로드의 사정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쳐들어온 쪽이 나쁜 거였다. 주군의 가신이기 이전에 정말이지 염치없는 자를 몰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화가난 덕에 걸음걸이가 다시금 거칠어졌다. 이쯤되면 굳이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체면이 있고 염치가 있으면 접근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 쯤은 알아채겠지. 막 입구에 당도해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려던 찰나, 누군가 뒷쪽에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앗차, 너무 여유를 부렸군. 뒤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에레스토르는 다시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기 좀 서지?"
"댁 같으면 서겠어요?"
"응."
"전 아니거든요?"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달리는 에레스토르는 빠르지는 않았지만 워낙 작은 체구덕에 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하지만 잡아야 했다. 하여튼 남의 속을 알지도 못하면서. 혀를 차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재로 향하는 문으로 도착하기 바로 직전의 거리에서 글로르핀델은 에레스토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강하게 끌어당기며 발버둥치는 몸을 제압했다. 차라리 적이였다면 기절이라도 시켰을 텐데, 품안에 들어온 이는 아쉽게도 곱게 다루어야 할 린돈의 엘프였다. 흔들리는 주먹에 강타당한 옆구리의 고통을 지그시 참으며 글로르핀델은 에레스토르가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입을 막고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에레스토르의 몸은 허공을 날듯 앞으로 향했다. 설마 물어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던 글로르핀델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꽤 당황한 모습으로 달려가는 에레스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뒤따르려 했지만 저 제멋대로인 엘프는 과감하게도 추진력을 얻는 용도로 글로르핀델의 정강이를 사용해 버린 터였다.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버린 몸에 알싸한 고통이 뒤따랐다. 어이없이 당한 모습에 스스로도 우스운 듯, 혀를 차내며 글로르핀델은 다시 몸을 일으켜 뒤를 따랐다.

 

짜증을 내며 서재에 발을 들인 에레스토르는 기어이 자신의 로드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모습을 보자마자 무심코 부르려던 목소리가 어느순간 턱하니 막혀버렸다. 갑자기 멈춰버린 발걸음에 뒤따라오던 글로르핀델 마저 아슬아슬하게 제 자리에 멈춰버렸다. 멍하니 굳어버린 에레스토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아쥐던 글로르핀델은 시선을 돌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스란두일과 눈을 맞췄다. 무릎을 베고 누워 뒤척이는 엘론드를 감싸안으며 단호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젓는 오만함은 정말이지 화가 날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승리감을 충족시켜버린 찝찝함에 글로르핀델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억지로 당겨안으며 두 엘프는 서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경 답지 않게 조용하십니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말투로 말을 걸어보지만 굳어진 표정은 풀릴줄을 몰랐다. 나참, 정말 애라니까. 들리지 않는 작은 한숨을 쉬며 글로르핀델은 성큼성큼 앞지른 채 멈춰서 시선을 맞췄다.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섥힌 짙은 회색의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렀다.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자 겨우 열린 입에서는 여전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묻었어요? 엘프 처음봐요?"
"멀쩡하네."
"그럼 충격먹어서 울고불고라도 할 줄 알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날 뭘로 보고.."

시무룩해진 표정은 그대로인데 내뱉는 말에는 가시가 콕콕 들어박혔다. 하여튼 저놈의 자존심은. 글로르핀델은 다시금 웃어보였다. 눈 앞에 있는 어린 엘프는 기분이 나쁠런지는 몰라도 자신은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엘프를 본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서인지 너무나 신선했다. 매번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라니까.
허공을 바라보던 눈동자에 점점 생기가 돌아왔다. 촛점이 잡히며 자신의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글로르핀델이 못마땅한 듯 다시 인상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무어라 내뱉고 싶어하는 입술이 오물거렸지만 이내 꾹 다물리는 것을 확인한 글로르핀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 에레스토르는 그를 무심하게 지나쳐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왜 따라와요?"
"걱정이 되서."
"진짜 오지랖 넓은거 알아요?"
"어른으로서 당연한 거야."
"내가 앤줄아나. 내 나이가 몇인지 알기나 해요?"
"나보다 적겠지 뭐."
"저 바빠요. 가서 할일이나 하시죠. 글로르핀델 공."
"오늘 그대를 도와 자료정리를 하는것이 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젠장."
"지금 욕한거야?"
"제가요? 언제요? 기억이 잘 안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에 할말을 잃은 글로르핀델이 제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찔리긴 했지만 복잡한 머릿속에 짐을 더하고 싶지 않던 에레스토르는 이제 그만 좀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글로르핀델은 정말로 서가까지 쫒아올 작정인지 다시 에레스토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진짜 괜찮아?"

한참을 걷다 들린 목소리는 조금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퉁명스럽게 뭐가요. 받아친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들리길 바랬다. 곁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머릿속의 정리는 아까 서재를 나오면서부터 끝나 있었다.

"전하가 매번 짖궂으신 것만은 아니야. 물론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알아요."
"그래?"
"걱정이 된 것 뿐이에요. 며칠 밤을 꼬박 새우신 분이세요. 자기 안위는 생각도 안하시고 가신들만 챙기시는 분인데 평소처럼 생각없이 귀찮아 보이는 행동을 했더라면 정말로 가만 있지 않았을거에요."
"그래서 조금은 안심했어?"
"네."

불쾌하지만, 조금은 짜증이 났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모습에 수긍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신들의 걱정을 만류하시며 서류를 넘기시던 손이 힘없이 소파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무릎 위로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눈을 감으신 모습이 그토록 편안해 보인 적도 처음이었다. 며칠을 볼멘 소리로 청을 올려도 그저 웃으며 자신을 혹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편안히 감은 두 눈 위로 빛이 들까 손으로 덮어주는 배려에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은 질투가 났지만 어자피 자신은 그렇게 로드를 편안하게 만들어드리지 못 할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로드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실 수 있다면 자신은 그저 수긍하는 것 밖에 방법은 없었다.

"생각보다 회복하는 게 빠른걸."
"결과에 빠르게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린애나 보이는거에요. 이유야 어찌됐든 로드께서 주무실 수 있으니 그걸로 됐어요."
"다시봤어. 에레스토르."
"제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글로르핀델 공? 저는 허락해 드린 적이 없는데요?"
"아, 미안."
"됐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어자피 서가에 와도 도움이 안될 게 뻔하니까. 로드의 명이라 하셨으니 서재에는 당분간 가지 않을테니 안심하시구요. 그럼 이만."


제멋대로 툭툭 뱉어놓은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에레스토르의 뒷모습을 보며 글로르핀델은 웃어버렸다. 뭐야 저 꼬맹이. 진짜.
겪으면 겪을수록 재미난 아이였다. 순전히 버릇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또 속깊은 면모도 보이는 것이 제법이었다. 한없이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점점 더 호기심이 생겨갔다. 잠깐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머릿속이 간단하게 정리됐다. 도움이 안되도 어쩔 수 없지. 로드의 명을 따라야하는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천천히 에레스토르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새 곁에서 일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펴는 글로르핀델의 뒤쪽으로 엘크가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지나갔다. 오늘도 평온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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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아아--

며칠사이에 구물구물거리던 날씨는 결국 시원스레 빗줄기를 쏟아 내고야 말았다.
꽤나 거세게 내리는 것을 보니 검은구름을 잔뜩 몰고온 듯 보였다.

"이번 비는 좀 오래가겠는데요?"

막 결재를 끝마친 서류들을 모아 정리하며 엘론드가 말을 건넸다.

"아아. 그렇군.."

다소 피곤한 눈으로 막 펜을 내려놓은 길 갈라드는 앞에 놓인 찻잔을 쳐다보다가 단번에 마셔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론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제 그만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도 일찍 회의가 있으시잖아요."

그 말에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뜨곤 살짝 웃어보였다.

"그러도록 할까.."

하품을 하면서도 길갈라드는 침실로 향하는 법 없이 비척비척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서 한 곳을 멍하니 응시했다.

"대왕?"

"......."

"에레이니온. 뭐하세요?"

"응?.. 아...아니야..아무것도."

"뭐에요.."

다소 당황한 듯 하던 얼굴은 다시 예의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와 조용조용히 말을 꺼낸다.

"엘론드. 오늘은 내 방으로 와서 자거라."

"네?

"비가 오잖아."

".....네."

"옷갈아입고 와. 난 먼저 들어가마."

"알겠어요."


빙글 웃어보이곤 기지개를 켜며 침실로 들어가는 길갈라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론드는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단 한줌의 햇볕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한 면을 차지한 넓은 유리창은 두꺼운 린넨 커텐으로 덮여져 있었고, 그때문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 위에는 그의 왕이 널부러져서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매번 같은 자세로 쓰러질 수가 있을까. 조금 큭큭 거리며 웃던 엘론드는 얼른 미소를 지우고 제대로 이불을 덮어올렸다.

"뭐..같이 자자고 해놓으시고.."

그의 옆으로 들어가 눕고 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갑자기 밀려오는 따스한 온기에 길갈라드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떠졌다.

"벌써왔어?"

"그럼요."

"그래그래.. 그럼 자자."

그리고는 자신의 팔속으로 엘론드를 가두어 버렸다.

"...숨막혀요."

"어쩔 수 없어. 그냥 자."

"...비올때마다 외로움 탄다는건 핑계죠?"

"그럴리가. 정말로 외로운걸..."

"아무래도 핑계같아요."

"이런이런, 핑계라니 말도 안된단다. 더 놀아주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이걸로 참아줘?"

살짝 이마에 키스하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웠는지 엘론드는 머리를 폭 숙여서 제 얼굴을 숨겼다.

곧 익숙하다는 듯 길갈라드의 허리에 작은 손이 감겨왔다.
길갈라드 역시 엘론드의 어깨를 안고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외로 강했던 천둥소리에 길갈라드의 눈이 절로 떠졌다.
아니, 강한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옷깃을 잡고 바르르 떨고있는 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더 심해지고 있는 듯 했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눈을 꼭 감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있는 엘론드를 보면서 안쓰러운 듯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던 길갈라드는 엘론드의 귀를 잡고 꼭 막아주었다.

얼마나 오래된 잠버릇일까..
사실,엘론드는 천둥치는 소리만 들으면 발작했다.
자신은 모르고 있는 일이다. 아마 엘로스는 알고 있었겠지만..
깨있을 때 듣는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이 자고있을 때 천둥소리가 들리면 이렇게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저 과거의 어느날을 혹 떠올리는 걸까...

어떻게 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을 덜어주기위해 길갈라드가 할 수 있는건 단지 귀를 막아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

아아, 아가야. 비올때 외로움을 타는건 너이지 않니..

또 한번, 작은 천둥이 울고갔다.
그에 따라 움찔거리는 작은 몸이 너무 안쓰러워서 이불에 파묻고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겼다.


소리가 잘 안들리는 모양인지, 떨림이 점차 잦아져간다.
이제는 숨소리마저 고르게 돌아왔다.

깨어나기 전까지는 조금 심했던 모양이지만, 서서히 멀어져가는 천둥소리를 미세하게 들으면서 다시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적어도 나와 있을 때는 괴로워하지 말아줘.
언제나 웃는 모습만 보여줫으면 좋겠다.
나의 아가야.


너는 자는 모습이 정말로 예쁘니까 말이야.

 

* 06년도 글 패러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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