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론드. 폭우.

톨킨버스 2013. 9. 13. 12:10

늘 임라드리스가 따스하고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깊은 슬픔의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토록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비가 내리는 날엔 끊임없이 들려오던 엘프들의 노랫소리마저 불분명하게 사그라드는이었다. 몇 천년을 견뎌온 날 중에 기쁘고 좋은 날만 있을까. 이유없이 우울하고 시름에 잠겨 가라앉은 분위기에 이미 많은 것을 겪어온 이들은 그저 담담히 웃어보였고 나이어린 엘프들은 덩달아 숙연해졌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빗소리. 눈 앞을 가로막은 어두컴컴한 천둥과 번개. 세상의 불행은 모두 임라드리스에 가져올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을 닫아 어둑어둑한 서재에 작은 불들이 드문드문 안을 밝혔다. 오래된 책을 필사하던 엘론드의 앞에 누군가가 주저하듯 다가왔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책을 바라보던 시선에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너울거리자 엘론드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곤란한 모습을 한 글로르핀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글로르핀델."
"......"

유독 요즈음 글로르핀델은 엘론드를 어려워했다. 아니 글로르핀델 뿐만이 아니었다. 임라드리스의 모든 엘프들이 그를 어려워했고 눈치를 보았다.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꺼내어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였고 슬픔이었다. 떠나는 그녀의 손끝에 입 맞추며 그녀를 위해 이겨내리라 맹세했건만 슬픔이란 존재는 쉬이 흐트러지거나 사그라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맞서 싸우고 이겨내려 안간힘을 써 보아도 그 거대한 것을 홀로 상대하기엔 마음속에 뚫려버린 구멍이 너무나도 크고 깊었다. 한번 부숴진 마음이 다시 한번 자극을 받으면 죽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또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초연해진 마음으로 엘론드는 아주 천천히 상처를 추스르고 있었다. 시간은 또 지나겠지. 세월이 가고 망가진 그 마음 한구석에도 얇디 얇은 종잇장이 하나둘 쌓이면 언젠가는 겉모습이라도 원래처럼 돌아오겠지.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이겠지. 그것이 슬픔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이미 알기에. 엘론드는 그저 미동없이 잔잔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걱정해서 오신거라면 괜찮습니다. 아직 정신도 멀쩡하고 식사도 꼬박꼬박 하고 있으니까요."
".... 주군."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평소에도 글로르핀델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함께는 아니었지만 늘 곁에서 지켜보던 이였다. 눈썹의 까딱이는 정도, 시선의 떨림. 그런 것들을 보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을지 지레짐작이 가능했다. 평소처럼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그를 올려다 보았지만 여느때와 달리 그의 시선 속에서는 비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밖으로 향했는지 몰랐다. 미친듯이 내달린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소리가 쟁쟁 울렸다. 저녁을 먹었는데.. 방에도 없고, 아이 셋이 한꺼번에....
억눌러왔던 불길한 공포가 온 몸을 엄습했다. 차갑게 식은 손 끝이 덜덜 떨려왔지만 입에서는 반대로 더운 숨이 터졌다. 흔들리는 시야앞에 놓인 것은 거대하고 강한 비바람이었다.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비가 시야를 가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엘론드는 그저 앞을 향해 달렸다.

이미 많은 엘프들이 주위를 뒤지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횃불이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보였다 사라졌다. 근처에 있었다면 진즉에 발견이 되었을 터였다. 간단한 보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엘론드는 무작정 깊은 숲 속으로 향했다. 어두운 숲은 마치 괴물과도 같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조금씩 조금씩 엘론드의 곁을 지키던 엘프들이 흩어졌다. 몰려 다니는 것 보다 나뉘어 찾는 것이 더 나았다. 여기 저기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귀를 찢을 듯 들려오는 빗소리에 그 소리들이 섞여 끔찍한 공포심을 일깨웠다. 이것은 고통에 울부짖던 켈레브리안의 목소리였다.
마주칠 자신이 없어 덮어두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 나의 연정. 연인. 그 가녀린 몸이 할 수 있던 일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 밖엔 없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토록 찾아 헤메다 발견한 모습은 끔찍하리만치 처참했다. 두려움. 공포. 울분. 한데 어우러져 가늠조차 하기 힘든 분노로 그는 칼을 들었고 순식간에 악을 징벌했다. 하지만 남은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놀랄만치 초연한 시선. 겨우 웃어보이던 부르튼 입술. 그것 뿐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살려줘요. 엘론드. 제발, 여기에.. 아악!!!!!!!!!!!!!!!!!!!!!!!!!!!!!!!
아득하게 멀어진 정신에 다리의 힘이 풀려갔다. 그 때에 천둥이 큰 소리를 내며 근처의 나무에 내리 꽂혔다. 그 순간 주위가 환하게 타오르다 곧 사그라들었다. 분노. 포효. 아니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 일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환청에 잠식당하지 말라는 상냥한 목소리. 따끔한 충고. 다시 엘론드는 도리질치며 정신을 다잡았다. 꾹 쥐인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그냥 환청이다. 약해진 마음에 스며든 악의 속삭임일 뿐이다. 강해진 정신에 더이상 악의 사념들은 접근하지 않았다. 엘론드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목 끝 까지 차오른 숨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쫄딱 젖어버린 몸에서 더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디 있는걸까. 어디로 간걸까. 아르웬까지 사라졌다면 필시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비오는 밤을 무서워 하는 아이였다. 늘 어미의 품에 꼭 안긴 채,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었다. 나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엘론드를 괴롭혔다. 하필 왜 오늘이었을까. 가장 궂은 날. 가장 좋지 않은 날. 왜 이런 날에 아이들 모두가 사라진걸까.
후들거리는 다리에 더이상 뛸 수 없어져 엘론드는 걸었다. 한참을 걷고 걸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참고 참았던 슬픔이 비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나 다행이었던 건,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가득 채워진 슬픔은 닦아낼 필요도 없었다. 목메어 부르지도 못했던 이름들을 나직이 읊으며 엘론드는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문득 어깨에 옷이 걸쳐졌다. 돌린 시야에는 글로르핀델이 있었다. 다가오는 줄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제 할일을 한다는 듯, 글로르핀델은 쳐다보는 엘론드의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에게 로브를 입혔다. 추위로 덜덜 떨리는 입가를 안쓰러히 쳐다보다 차가워진 손을 깍지껴 잡고 힘을 주어 당겼다. 찡그려진 미간에 겨우 한숨을 내쉬고서야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어째서 그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빠른 걸음으로 향하는 걸음 하나하나에 엘론드는 자책감을 담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다. 엄마의 품이 그리울 것이 당연했다. 안쪽 정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엘론드가 손수 베어 만든 나무 그네가 있고 켈레브리안이 유독 좋아하던 정원 속의 오두막 속에서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생각할 수록 자신이 한심했다. 자신의 깊은 슬픔에 빠져 아이들의 마음 하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자를 세상은 현자라 칭송했다. 이런 어처구니없을데가..

로브도 벗지 못한 채, 아이들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 막 잠이 들었다는 세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옹기종기 누워 눈감은 채, 이불을 덮고 있었다. 무너지듯 곁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고사리같은 작은 손들이 이불 위에서 움찔대고 있었다.
맞대어 온기를 느끼려는 손길을 글로르핀델이 제지했다. 아이들이 놀랄 겁니다. 그 말 한마디에 내밀었던 손이 다시 거둬들여졌다. 따스한 기운이 아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다가설 수도 없을 정도의 따스함. 나는.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떨리는 두 손이 얼굴을 감쌌다. 숨조차 마음껏 내쉬지 못한 울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나갔다. 곁에서 묵묵히 바라보던 글로르핀델이 조심스레 밖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사같이 잠든 아이들의 모습은 큰 위로이자 깊은 슬픔이었다. 여전히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대지를 적셨다. 지독한 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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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ts

썰/뻘설정 2013. 9. 11. 21:41
페라님때문에 성반전당한 중간계를 생각해봤는데 로스로리엔은 타격없을듯ㅋㅋㅋㅋ큐ㅠㅠ재밌겠다. 남성들의 집합체였던 엘프족의 수장들이 모두 성반전 되는거. 수장들만 ㅇㅇㅇ.  원래 수염도 없으니깤ㅋㅋㅋ 갈라마님만 신나셨네ㅋㅋㅋ

바뀐 상태에서 회의가 열리면 어떨까. 갈라켈레커플은 켈레보른만 나서지 않은 채 함께 오긴 왔을 것 같고. 갈라드리엘은 자연스럽게 유니섹스 스타일의 옷을 입지 않았을까. 스란두일은 대놓고 여자옷발싸ㅏㅏ 할거같고. 엘론드는 태연하게 남자옷 입엇을거같음. 가슴을 붕대로 동여맨 채 일부러 낮은목소리 내려고 노력하겠지.그 상태에서 스란두일이 조롱하는거 보고싶다. 그대는 변했어도 변함이 없군. 그 가슴이라던가 가슴이라던가 가슴이라던가..! 엘론드만 얼굴 빨개지고 갈라드리엘이 그만하라고 말리는게 보고싶다 ㅋㅋ 뒤에서 글로르핀델만 발동동. 마롣 가슴 안작은데!!젠장!!
자기몸 볼때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대놓고 가슴라인 드러내고 잘록하게 몸매선 살린 드레스입은 스란두일을 보고 단번에 얼굴 붉힐것 같다. 엘론드 귀요미. 그래놓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자기로브 벗어서 던지지않았을까. 입으라고ㅋㅋㅋㅋ
밤중에 난입해 술을 찾으면서도 분위기가 묘해지는거 또 좋다. 웃으면서 엘론드 손 끌어다가 자기 가슴에 얹어두고 반응보는 스란두일도 좋고 다 좋네 ㅜ어헝허유ㅠㅠ 엘론드님 숯기없으셔라 ㅜㅜ 여자라곤 켈레브리안밖에몰랐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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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의 밤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궁에 당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왕을 배알하고 나온 그 짧은 시간동안 밖은 온통 캄캄해져 있었다. 숙소를 안내하는 엘프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 할디르는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곳과는 전혀 다른 숲의 모습에 조금은 흥미로워했다.
이방인을 위한 숙소는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머크우드의 특성상 왕실의 중요한 곳들은 깊숙한 지하에 숨겨져 있었고, 혹여나 자리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이렇게 구분해놓았다고는 했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미 숲에 진입하면서부터 모든 무기들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였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암기정도만 몸에 숨기고 들어온 할디르의 눈에도 머크우드의 대우는 유별났다. 그저 지나던 방문자도 아니고 사신의 임무를 띄고 온 자에게까지 엄격하게 적용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였다.

혼자가 된 후에야 겨우 긴장되었던 숨을 고르게 내쉬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수발을 드는 이가 식사를 하시겠느냐 물어왔지만 내키지 않아 물리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고서야 식욕이 돌아왔다. 어자피 넉넉히 챙겨온 램바스가 있으니 괜찮겠지란 안일한 생각으로 그는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확 트여진 창에서는 달빛이 따스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의 생활은 익숙했지만 또한 이토록 높은 곳에 의도적으로 지어진 곳은 처음인지라 풍경은 여전히 색달랐다. 창밖에 보이는 것은 그저 푸른 숲의 거대한 모습일 뿐. 로스로리엔에서처럼 작은 새싹이나 아름다운 꽃들은 찾아볼 수 조차 없는 삭막함이 감돌았다. 그제서야 할디르는 머크우드 라는 지명의 뜻을 가슴속에 아로새겼다. 어둠이 훝고 지나간 공간은 손댈 수 없이 공포와 절망에 짓눌려있는 것 처럼 보였다.
로스로리엔의 왕과 여왕께서는 이런 모습들을 걱정하고 계셨다. 자신들이 수호하고 있는 영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머크우드의 전례를 주시하고 있으셨고 또한 염려하고 계셨다. 언제 어디에서 악의 세력들이 마수를 뻗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두개의 세력이 연합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냐며 화친을 제의하시려 했지만 생각보다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워낙 감정의 골이 깊었던 사이였다. 아직도 불신이 두 세력 사이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것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왕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어자피 쉬이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깃을 적셔가는 것처럼 조금씩 교류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마음을 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웃어보이시던 주군의 말씀을 상기하며 할디르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로 했다. 모처럼의 근무에서 벗어난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은 생각을 편히 고치자마자 긴장을 서서히 풀어냈다. 적어도 사신의 깃발을 가져온 이에게 문전박대를 하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곳 같았다.

잠깐 긴장의 끈을 늦춘 사이 아주 미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감기려던 눈이 번쩍 뜨인 채, 방의 입구로 다가가 천천히 등을 벽으로 붙였다. 이곳에 다른 손님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곳으로 오는것이 분명했다. 식사도 거른다고 했으니 더이상 볼 일이 없을텐데.. 역시 아직까지도 불신이 자리하고 있는것인가 생각하며 할디르는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암기를 꺼내고 준비했다.
발걸음이 점점 이곳으로 다가왔다. 잠시 멈칫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행동에 먼저 달려들어야 할지 아닐지를 고민하던 것도 잠시, 거짓말처럼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실례합니다. 왕께서 내리신 것이 있어 늦은 시간임에도 이리 들렀습니다. 주무시던 중이 아니시라면 잠시 괜찮을까요?"

무엇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따로 없으셨지만 상대의 말투는 꽤나 온화하고 침착했다. 침입자로서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할디르는 겨누었던 암기를 다시 숨기고 조금 시간을 지체했다가 문을 열었다. 바로 코 앞에 서있던 엘프가 빙긋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들의 만남에 별이 빛나는군요. 스란두일의 아들 레골라스라고 합니다. 로스로리엔의 할디르. 이시지요?"

웃어보이는 모습이 햇살처럼 환했다. 자신의 이름까지 말할 줄 몰랐던 할디르가 조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소개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졸지에 빼앗겼군요. 그렇지만 다시한번 스스로 하지요. 로스로리엔의 할디르입니다. 그대가 머크우드의 왕자님이십니까."
"왕자라고 하기엔 조금 쑥스럽네요. 그냥 레골라스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괜찮으시다면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가도 좋을까요?"

선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에 들린 바구니를 슬쩍 들어보였다. 간단한 식사거리와 함께 들어있는 포도주 병을 확인하고 난 후에서야 할디르의 표정에도 미소가 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붙이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직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지만.
손님이 들어올 수 있게 슬쩍 자리를 비키자 당연하다는 듯, 그는 안쪽의 테이블로 향해 이것저것을 꺼내놓았다. 달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서 등을 지고 열중하는 모습에서 언뜻 왕의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서자 막 준비를 마친 손을 뻗어 자리를 권했다. 졸지에 마주보고 앉게 된 자리에서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따갑네요."
"실례했습니다. 남을 관찰하는것은 제 일중 하나라서.."
"아니에요. 기분이 상했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일 줄 알았다. 천천히 웃으며 왕께서 그리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계시진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는 포도주의 병을 뜯고 가져온 잔을 채웠다. 막 반쯤 차오른 잔을 건네받고 조금 고민하던 새에 조금 도톰한 입술이 다시 열렸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머크우드에서도 중히 여기는 사항입니다. 왕께서는 정무에 바쁘시어 쉬이 이런 자리를 마련하실 수 없는 터라 이곳에서는 제가 맡고 있습니다."

물론 선뜻 믿기는 어려우실테지만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보인 그가 먼저 잔을 들어 술을 넘겼다. 한 잔을 완벽하게 비우고 난 뒤에서야 다시금 잔을 채우며 건배를 청했다.

"조촐해서 마음에 안드실 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비로소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졌다. 꼿꼿하게 앉았던 할디르는 그제서야 자세가 조금 풀어짐을 느꼈다. 그가 하는대로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딧혔다. 맑은 크리스탈의 파열음이 공간을 채워나갔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골라스.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받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목을타고 넘어간 술의 온도가 비어있는 안쪽을 생각보다 후끈하게 데우고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할디르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레골라스가 웃어버렸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조금 덜 독한 술을 가져오는건데.."
"아니, 못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
"실은 어둠이 내린 숲에서는 악몽을 꾸지 않으려 독한 술을 마시지요."
"그대도 악몽을 꿉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를 지녔다고 생각하며 할디르는 그가 권해준 음식들을 천천히 들었다. 두런두런 꺼내는 이야기들은 끊길 새가 없이 시간을 가득 채웠고 어느새 자신조차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지않은 체류기간동안이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 같아 마음 한곳이 편안해졌다. 혹 그를 통해서라면 주군의 뜻을 전하기에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라는 계산 또한 숨어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머크우드의 왕자이자 왕에게 가장 근접한 이였으니까.
천천히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엘베레스의 별이 하늘 저 건너편으로 넘어갈 시간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좀처럼 지치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을 상대하는 레골라스를 보며 할디르는 조금 놀라움을 느꼈다. 아까 보였던 모습이 거짓이 아니었던 걸까. 상대의 기척을 예민하게 느끼며 레골라스는 다시 잔을 채우며 할디르를 바라보았다.

"왜 취하지 않나 궁금하십니까?"
".. 생각보다 예민한 편이네요."
"이곳에 있다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이지요. 어느 누구도 사실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어둠은 생각보다 많은것을 변화시키나 봅니다."
"변화. 변화라. 변화라기보단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해두죠. 동물이든 엘프든 인간이든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하는 신의 피조물이 아닙니까."
"심각한 곳으로 끌고 갈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심각한 곳으로 이끌었군요. 사실 전 술이 꽤 세서요."

유쾌한 모습으로 웃어보이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 할디르의 잔에 손을 뻗어 홀로 건배를 하고 잔을비운 레골라스는 장난끼 가득한 눈빛으로 할디르를 쳐다보았다.

"안 믿겨지십니까?"
"...조금은 놀랍네요."
"혹 그대가 독한술도 괜찮다 하시면 나중에 내기를 하는것도 좋겠네요. 머크우드의 좋은 술은 왕의 창고에 다 모여있으니까요."
"그 정도입니까?"
"그래봤자 아버지는 한번도, 아니 왕께는 한번도 이겨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수정해야겠군요."
"혹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줄 알고계셨습니까?"
"아니, 말술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툭 내던져진 말끝에 레골라스의 웃음이 걸렸다. 무엇이 이상한 지 알지 못한 할디르는 그저 레골라스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을 웃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골라스는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아. 사실 이제껏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처음이라서요."
"...제가 혹 말실수를 한거라면 죄송합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혀요."

도리어 웃어보이며 눈을 맞춰오는 모습엔 자격이나 지위의 면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토록 친근하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실로 오랫만이라며 신경쓰지 말라는 모습은 소탈하기까지 했다. 겨우 긴장이 풀어진 모습을 눈치챘는지 레골라스는 몇번 더 소리내어 웃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면 우리 친구하는게 어때요?"
"친구요..?"
"네. 친구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데 할디르는 어때요? 저 괜찮지 않나요?"

잠시 내밀어진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지만 특유의 자신만만함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머크우드의 엘프들은 다 이렇게 호전적인건가. 조금 고민하던 머릿속은 깔끔히 지워버린 채, 할디르는 이내 내밀어진 손을 움켜잡았다.

"다시한번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레골라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동시에 웃어버렸다. 꾹 잡혔다가 금방 비어버린 손에는 다시 잔이 들렸고 그것들은 인사하듯 부딧혔다. 맑은 소리가 들려오는 밤공기 속에서 조금의 따스함이 배어나왔다. 며칠의 여정이 심심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할디르는 입술을 축였다. 독한 술들이 조금은 달콤하게 감겨들었다. 머크우드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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