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고 있나?"

있는대로 소파 뒤로 제껴져 보이질 않는 얼굴을 흘낏 바라보면서 엘론드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다짜고짜 찾아오더니 술을 내놓으라 한마디 던지곤 처음 하는 대화였다.

"모르지."
"그렇게 답할 거라고 생각했어."

손 끝에 걸려 위태롭게 흔들리던 잔이 가까스로 탁자위에 안착하는 소리에 엘론드는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이의 금발이 어깨위에 흐드러졌다. 겨우 마주한 푸른 눈동자를 보며 엘론드는 왼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함을 표현했지만 스란두일은 여전히 묵묵 부답으로 훌쩍 밀어둔 잔 속의 술을 마셔버렸다.

"오늘은 거짓말을 해도 되는 날이야."
"거짓말?"

그래 거짓말. 흡사 혼잣말이나 하는 듯한 목소리로 또 다시 눈길도 주지않고 술을 기울이는 모습에 엘론드는 조용히 자세를 바로한 채 다시 서류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만우절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르웬과 옷을 뒤바꿔 입은 건장한 아들들의 애교 넘치는 문안인사를 받고 에레스토르의 자리에 서서 아침 회의를 주재하던 글로르핀델은 충분히 새롭고도 우스워서 진지하게 보직변경을 이야기할 뻔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서재 의자에 고의성을 보이며 대자로 기절해 누워있던 개구리는 덤이지 않았을까. 그러니 아무리 무덤덤한 나였어도 모를리 없었다고 답하고 싶긴 했지만 정작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이의 앞이니 그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은 흘러 자정에 가까울 때인데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이 만우절이었다는것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는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대의 금발이 오늘따라 눈이 부시군."

이런 말이 나오기 전 까지는 말이다.

"지금 혹시 그걸 거짓말이라고 하고 있는건가?"
"거짓말이라니. 나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

다시 마주한 숲의 왕은 스스로가 내뱉고도 그 말이 우스운지 홀로 웃고 있었다. 대체 뭘 어떻게 반응해주길 바라는거야.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바라보면서도 멈출 생각이 들진 않았는지 스란두일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역시 에아렌딜님을 많이 닮았어. 그 꿀 같은 금발 말이야."
"아들이 그 아비를 닮은 것이 거짓말은 아닐텐데?"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하나? 이왕 하는거 좀 맞춰줘."
"...자네의 그 흑발은 언제보아도 탐스럽군."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도 또 맞추어 주는 엘론드를 보며 스란두일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아예 일어나 흔들거리며 다가온 몸이 가볍게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또렷한 금안도 그대와 참 잘어울려."
"고맙네."
"그대도 한마디 더 해야지."
"내 책상에서 엉덩이 좀 치워주지 않겠나?"
"그럴까?"

훅 끼치는 짙은 포도향에도 엘론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마치 제 자리였다는 듯 자연스럽게 기대어 앉은 무릎 위에서 웃는 이의 모습에 오히려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마주했지만 아직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더불어 저렇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 보이는 눈을 마주하는 것 또한 그랬다.

"스란두일."
"난 그대를 좋아해."

만우절이랬잖아?

"늘 함께 있고 싶어."

마주했던 시선이 자연스레 비껴졌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면 좋을지 몰랐다. 무슨 대답을 해야할까. 만우절이랬잖아. 거짓말.. 거짓.. 무슨 말이 하고싶은거야.

"한번도 말했던 적 없었지만 이제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
"... 안 들을래."
"들어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싫어."

두려움이 깃든 눈을 들킬세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주한 이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진지하고도 올곧은 강한 신념으로 차 있는 그 푸른 눈. 술주정이라고 우길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며 농담이 재미 없는 건 여전하다고 이야기 해야 할까.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지만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엘론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스란두일은 작게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주했다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숨기기 어려워 했을 그 얼굴이겠지. 어쩌지도 못하고 바짝 긴장한 몸뚱이에 그 손이 닿았다. 숨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손 끝에 온기가 배어들 때 즈음, 스란두일은 입을 열었다.

"사랑해. 엘론드."

흠칫, 굳은 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장난일까? 라고 치부하기엔 더없이 진지하고 단호했다. 술기운조차 제대로 배이지 않은 목소리의 의도를 구분해 내는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는데. 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엘론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난.."
"응."
"거짓말은 못해."
"알아."

운을 띄워놓고도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을 벌린 채 엘론드는 결국 스란두일을 마주해야했다. 어느새 잡혀버린 손목에 덜덜 떨면서 앞으로 닥칠 일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앞섰다. 진심인 걸까 거짓말인걸까. 불안정한 시선을 담은 눈 속에 스란두일은 웃으며 들이찼다.

"답은?"
"......"
"아쉬운데. 모처럼의 고백인데."
"....무슨 대답을 원해?"
"날 사랑한다는 대답."

고민도 하지 않고 답을 내놓은 스란두일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마저 걸려있었다. 영겁과 같은 일분, 일초. 얼마나 지났는지 깨닫지 못하고 토하지 못한 숨만이 가슴을 두드려 온몸을 경련하게 만들기 전 까지 엘론드는 멈추어 있었다. 그 어쩔줄 모르는 얼굴을 바라보며 스란두일은 한참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반대쪽 손을 뻗어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톡. 톡. 톡. 까딱이며 꺾어지는 시선. 그 모습을 따라 자연스레 돌아간 시야에는 자정이 한참 지났음을 알리는 시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군."
"...."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날의 다음날은 진실만을 말 해야 하는 날이야."
"....."
"대답 안 해줄거야?"

급하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고 어이쿠, 하는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숨에 일어나 테라스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평소답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거칠게 문을 닫으려 뿌리치는 손길의 끝을 스란두일은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그러나 만만찮은 순발력은 그 손길을 피하고 스란두일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가지고 놀아보니 어떤가. 재밌었나?"
"과대망상이야."
"우습게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귀공의 유희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숨에 딱딱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존대를 하는 얼굴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마주하던 스란두일이 아랑곳 하지 않고 끌어 안으려 하자 엘론드는 그 팔을 붙잡은 손을 비틀어 힘을 실었다. 아야아 소리가 나오고 스란두일이 어줍잖은 동작을 멈추고 나서야 엘론드 또한 힘을 풀었다. 아까보단 조금 덜 가까워진, 그러나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뜨겁게 교차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리븐델의 영주를 우습게 볼까."
"귀공께서 그리하고 계시군요."
"사랑한다는 고백이 그대를 우습게 보는 태도인가?"
"오늘은!"

벌컥 화를 낼까 싶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만우절이랬잖아? 거짓을 말하는 날이라고? 무슨 화를 어떻게 내야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게다가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 매달리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는 쉽게 대답하질 못했을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틈타 스란두일은 다시금 엘론드를 끌어안으려 했다. 반사적인 몸놀림이 더 빨랐지만 저항이 시작되기 전 어렵지 않게 스란두일은 엘론드를 품을 수 있었다.

"만우절의 다음 날이지."
"......"
"아닌가?"
".....놓아주십시오."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가 방안을 맴돌았다. 어쨌거나 불쾌하고도 부끄러워졌다. 장난을 거는 자와 받는 자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야 했다. 쉽게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이 관계는 포기하고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라고 쉬울리 없잖아."

다시 흠칫, 하고 몸이 떨렸다. 조금 전 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끌어안은 팔 안쪽이 좀더 옥죄어 가슴이 맞닿았다. 머리칼 사이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문질러 오는 그 온기가 어쩐지 불같이 뜨거워 데일 것만 같아서 엘론드는 뒤로 물러서며 더듬더듬 책상을 짚었다. 그러나 스란두일 또한 한걸음 더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방. 빛조차 들지 않은 새카만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스란두일은 엘론드를 끌어안고 그 품에 자신을 숨겼다.

"가끔은 유치하고 재미없는 장난에 빗대서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거짓말을 하는 날이라며."
"그대와 이야기를 시작한 때에 이미 밤은 지나고 있었어."

저 멀리 새의 날개짓이 들려왔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가벼운 소리까지 모조리 들릴 것 같은 침묵이 방 안을 감돌았다. 그러나 엘론드는 뛰는 심장소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 달아오른 귀 끝을 어쩌지도 못한 채, 또다시 한참을 망설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란두일은 닿은 입술을 움직여 천천히 속삭였다.

"사랑해."

마치 주문이라도 외운 것 처럼 엘론드의 다리힘이 풀렸다. 얼마 만에 들어본 말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느릿하게 미끄러진 몸이 스란두일의 손이 이끄는대로 무너져내렸다. 방금 전 까지 업무를 보던 책상의 서류들은 거칠게 밀쳐졌고 검은색과 금색의 머리칼이 겹쳐 나풀거리며 그 위로 내려앉았다. 그 틈에 엘론드의 품을 벗어난 스란두일의 얼굴은 달빛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다. 천천히 입술을 쓸어낸 손가락이 틈새를 파고들 듯 하다 곁으로 물러섰다.

"대답해줘."

나라고 쉬울리 없잖아. 방금 전 말했던 문장이 귓가에 몇 번이고 울렸다. 나라고 쉬울리가 없는데. 너라고 쉬울리가 없을텐데..

뻗어진 손이 스란두일을 붙잡았다. 끌어당겨진 몸이 순순히 엘론드의 위로 겹쳐졌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귓가에 엘론드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고여있던 말을 내 뱉었다.

"... .... ....."

두 번째 주문이었다는 듯, 열린 입술 틈새로 순식간에 뜨거움이 밀려들어왔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엘론드는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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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바다.

2015. 2. 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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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레골


정신없이 안을 헤집는 입술을 받아내던 아라곤이 손을 들어 레골라스의 망토를 벗겨냈다. 소슬한 바깥바람이 피부를 타고 전해지자 요정의 몸에도 조금 싸늘했는지 움찔거리며 멈춰섰다. 그러나 레골라스는 쉬이 멈추지 않았다. 거추장스럽게 걸리는 옷을 스스로 벗어 던져버린 뒤 다시 아라곤의 목덜미에 팔을 감아올리고선 입술을 약하게 물었다. 계속 채근하며 파고드는 레골라스를 진정시키려고 몇번이나 그를 가로막았지만 열오른 요정의 행동은 쉬이 막을수는 없었다. 조급하게 달려드는 요정에게 고삐를 씌우기 위해 아라곤은 한참 고민하다가 반쯤 드러난 레골라스의 엉덩이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때렸다.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몰랐는데?"

반사적으로 떨어지고서야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레골라스가 요사스러운 눈빛으로 슬쩍 붉어진 입술을 핥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당장이라도 쓰러뜨려 끌어안고 싶었지만 아라곤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밀쳐진 몸을 일으켜 스스로 벗어내린 망토와 레골라스의 망토를 정리해 돌이 없는 풀밭을 찾아 그 위에 겹쳐 깔았다. 이슬이 촉촉하게 젖은 새벽의 숲이었기 때문이었다.

"뭐해. 안 올거야?"

망토위에 올라 주저앉은 채 목덜미의 매듭을 풀며 고개를 까딱이는 아라곤의 모습을 보던 레골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의 왕은 배려심이 깊기도 하지. 밀어 넘어뜨린 아라곤 위에 올라타 바라보던 요정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부터 쓸어내렸다. 몇 번을 보아도 사랑스러웠고 생경했다. 털끝만큼도 따라오지 못 할 정도로 어린 주제에. 불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주제에 이렇게 매번 혼을 쏙 빼어 놓는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마주한 입술을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다시 혀를 얽어 귀한 과실을 맛본다. 허리를 감고 바지 사이로 침입하는 따스한 손이 기분 좋았다. 추위는 이미 느껴지지 않았다. 더운 공기가 이곳을 금세 데워버릴 터였다.



할디레골

처음엔 반쯤 장난이었다. 그저 숲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은발의 가디언. 로리엔의 가신. 그 무너지지않는 오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왕자인 나를 보며 변하지 않는 표정이 흥미로웠다. 그대는 어떤 식으로 놀라지? 어떤 모습으로 무너질까? 한번 가진 흥미는 꼬리를 물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저 그를 관찰하고 뒤를 좇는것 자체가 즐거워졌다. 사소한 시비로 번거롭게 만드는 것 부터 공들인 장난까지 보여온 지 이제 한 달. 여전히 무표정인 그가 조금은 못마땅했다. 


이 방법은 좀 많이 유치한가?
 
참으로 간만에 정면으로 마주한 할디르는 여느때처럼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 인사를 태연히 받고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코앞까지 다가가 눈을 마주하는데도 짙은 회색의 눈동자는 피하는 법이라곤 없었다. 정말이지 끈질긴데.

"이건 그대가 자초한 일이야."

조금 더 다가선 발자국과 동시에 입술이 그 얼굴에 닿았다. 열린 틈새로 자연스레 살덩이가 감질나게 얽혔다. 여전히 당혹감이라곤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고요하기 짝이없었다. 손가락에 감긴 부드러운 머릿결을 움켜쥐면서 벽으로 밀어붙인 나는 아예 대놓고 그 입술을 탐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숲의 이방인이여. 

허리 부근으로 감긴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것을 느끼며 나는 웃었다. 그리고 마음껏 그를 농락했다. 겹쳐진 입술에선 알싸한 박하향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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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글로르. 무제.

톨킨버스 2015. 1. 12. 22:43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마글로르.'

마에드로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내내 울렸다. 곤히 자고 있는 쌍둥이를 바라보며 마글로르는 착잡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들을 버려야 한다고 나직이 내뱉는 형님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항의해 보았지만 사실은 그 역시 그래야하지 않을까 예감하고 있었다. 물자는 점점 부족해졌고 부상자는 늘어갔다. 상황은 긍정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단지 알면서도 순진하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헤어져야 한단다. 에아렌딜과 엘윙의 아이들아.

하염없이 아이들의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길에 조금씩 상냥하게 반응해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슬프고도 우스웠다. 언제 이렇게 마음속에 들어와 버린걸까. 이렇게 가까워서는 안 될 사이었는데. 멍하니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흐트러진 이불을 추켜 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 손길에 닿았는지 엘로스의 눈이 반짝 하고 떠졌다.

"왜 주무시지 않으세요."
"이제 자야지."

깜빡이며 바라보는 눈동자엔 의문이 가득 담겼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행동들과 표정을 보이는 마글로르가 이질적이어서였을까. 늘 하던대로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마글로르는 부러 아이의 코끝까지 이불을 추켜올렸고 성마른 손으로 가슴께를 두어번 두드려 주었다.

"밤이 깊었다. 어서 눈을 붙이렴."
"아저씨도요."
"그래."

대답을 하고나서도 떠진 눈을 보는것이 어쩐지 괴로웠다. 보호해달라고 버리지 말아달라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는 듯 했다. 가만히 인내하며 기다리던 마글로르는 참다못해 아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 눈을 가려버리며 자라고 이야기를 할 생각으로. 그러나 닿은것은 가냘프게 떨리는 눈꺼플이 아닌 조막만한 손이었다.
아이는 마글로르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마글로르는 당연히 끌려가지 않았고 반대로 엘로스의 몸이 일어나 앉았다. 어자피 그걸 노렸다는 듯 아이는 일으켜진 몸을 바로하고 마글로르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마에 조금은 까칠한 입술이 꾸욱 눌렸다 떨어졌다. 눈 앞의 아이는 수줍은 듯 쑥쓰러이 웃었다.

"어릴때 아버지가 이렇게 해주시면 좋은 꿈을 꿨어요."
"..그랬구나."
"악몽을 꿀 것 같은 표정이라서.."
"..그래."
"죄송해요.. 멋대로."

혼자 시무룩해진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글로르는 실없이 웃었다.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린 머리카락이 손 끝에서 흩어졌다. 금새 또 밝아진 아이를 다시 한번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진짜로 자렴."

샐쭉해진 눈매가 사랑스러웠다. 금새 꾸욱 감긴 눈에 내려앉은 새카만 속눈썹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마글로르는 곤히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듣고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상냥한 아이. 자신을 걱정하며 도닥여주는 착한 마음씨. 감상에 젖어있던 머리가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착하고 귀여워도 우리는 헤어져야 해. 나는 또다시 아이들을 버려야 해.

"...악몽을 꾸는게 아니야. 현실이 악몽보다 더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지."

쓰게 웃어보인 시선이 이제는 불이 꺼진 천막 안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숨소리는 희미하고 고르게 퍼져 잔잔한 파도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이제 저걸 듣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군.

마글로르는 아예 천막 입구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스산한 바람이 다시 소리를 내며 흩어졌고 그 틈새로 여전히 들려오는 숨소리에 어쩐지 울컥했다. 아이들은 이곳에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 사이 우리에게는 놀랍게도 우정이 생겼다. 하지만 또다시 헤어진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일테지.
아이들이나 타인이 보기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글로르는 혼자서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너희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어.

뒤늦게 내뱉는 졸렬한 변명이었다.






+ 엘로스마글로르였는데....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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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레골. 다시.

톨킨버스 2015. 1. 10. 00:51

"그렇게 생쥐처럼 도망다니는 건 당신 답지 않은데요."

모퉁이를 막 꺾으려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들켰군. 짧은 한숨과 함께 강제로 돌려진 상체는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다소 화가 난 듯한 표정. 아무렇지 않게 손을 어깨에서 떼어내려고 해 보았지만 무지막한 악력은 인간의 힘으로 이기기엔 다소 힘겨울 때도 있었기에 에스텔은 뿌리치는 것을 재빠르게 단념하고 똑바로 레골라스를 향해 섰다.

"도망친 적 없어요."
"거짓말."

이야기를 할때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늘 경계하며 살아왔던 그에겐 그다지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래에서야 에스텔은 그것이 새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가 시키기라도 했다는 듯, 레골라스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비껴나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돌려진 시선조차 맞춰 오는게 이 요정의 특기이자 장기였지만.

"눈까지 맞추지 않는걸 보면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은건가요?"

화가나면 날카롭게 모든걸 걸고 넘어가는 성격 또한 장기란 걸 잊어먹은 내가 바보지. 에스텔은 겨우 아무렇지 않게 내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계속 날 피하는거죠?"
"피한 적 없다니까요."
"변명해봐요 그럼. 그 날 이후 어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그 매정한 입으로 직접 들어나보죠."

거세게 잡았던 어깨를 놓은 채 넉살좋게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레골라스는 그 잘난 입을 열어보라고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따갑게 내려오는 시선을 또 자연스럽게 회피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에스텔은 이래서야 레골라스를 더 화나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를 겨우 끌어올렸다. 하지만 얼굴까지 미치지 못한 그 불편한 시선은 겨우 요정의 목덜미에 닿았고 슬쩍 열린 튜닉의 깃 사이에 머물렀다. 본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숲의 요정은 쉬이 무방비한 상태를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열어둔 깃 사이에는 시원하게 뻗은 목선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고 그 피부가 평소처럼 빛.....이 나야하는데..눈 앞에 보이는 목덜미는 붉게 일어나 있었다. 오 마이 갓.

"저..레골라스?"
"말해요. 에스텔."
"혹시 그 단추는 일부러 풀어두고 있는.."
"네. 온 동네에 소문이나 내려구요."

당당하게 손가락을 넣어 단추 한 개를 더 풀어버리는 레골라스의 얼굴에 호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대놓고 벌어진 옷깃 사이로 수줍게 자리한 화인은 나흘 전 자신이 충동적으로 새긴 잇자국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는 눈동자가 기어이 올라와 시선을 마주하자 레골라스는 드디어 미소지었다.

"얼굴 참 오랫만에 보네요?"
"...."
"아까는 시선이 움직이질 않더니 이제는 입이 붙어버렸고."
"레골라스."
"이름은 지겹도록 들었어요. 그날 밤에도."
"..."
"이름을 부르면서 밤새 온몸을 저릿하게 만든 상대는 눈 떠보니까 사라져있고. 바쁜일이 있나 싶어 걱정하며 달려나갔더니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심지어 이렇게 숨어있다가 걸리기나 하고."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게 아니에요."

험악해진 요정의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에스텔은 -가능하지 않겠지만-그에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양부께서는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고 린돈 요정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기만 한 리븐델이 일반적인건가 아니면 이렇게 날카롭게 파고드는 본성을 누구나 감출 줄 아는걸까. 아직 다양한 분파의 요정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에스텔은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레골라스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꺼내질 못하고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이는 에스텔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요정은 험악하던 표정을 조금 풀고는 모퉁이 벽에 슬쩍 고개를 틀어 기댔다.

"싫거나 불편한게 있었다면 차라리 대놓고 이야기를 해요. 합의하지 않은 관계도 아닌데 정작 자고나선 무서워졌다고 도망이나 치는 상대도 짜증나지만 질질 끌면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상대는 더 짜증나니까."

그 순간 확 달아오른 열기가 얼굴을 뒤덮었다. 상대.. 도 있고 상대..는 더 짜증... 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여러 명이...

"레골라스, 혹시.. 나 말고도 다른 상대도 있..어요?"
"네?"

비스듬한 자세 그대로 레골라스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다른... 상대... 중얼거리며 문맥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에 에스텔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 맞아. 인간이 아니었지. 그런데 요정은.. 요정은 한번에 여러..상대랑.. 하나..? 내가 부끄러워서 피해다니는게 엄청 이상한 거였나? 좀 쿨하게 행동했어야 했나? 점점 어지러워지는 머릿속에 본능은 생각하길 멈추고 그저 혼란스러움의 근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생각을 읽을 수 없던 은은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있었고 오직 강하게 흔들리는 눈빛만이 에스텔을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는데요?"
"..아.."

안심해도 되는건가? 지금은 없다잖아. 그러니까...애인을 사귈수도 있고. 그렇지. 성인인데 결혼과 다르게 성관계는.. 할 수도 있으니까. 에스텔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마음을 주었던 상대는 레골라스가 처음이었고 타인과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모를 수도 있는거라고. 게다가 [인간]과 [요정]이 어떻게 사랑을 하고 내밀한 관계를 맺는지 알 수 없었으니 방식의 차이일거라고 조심스레 되뇌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은 레골라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해야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는건데.'

가볍게 접근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호감이었고 마음이 잘 맞기에 몸도 맞춘 것 뿐이었다. 그가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함께 했던 시간들 또한 즐겁고 특별했기에 늘 그래왔듯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골라스 또한 요정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만약 인간들의 사랑이 요정의 연애와 방식이 다른거라면? 에스텔이 보여줬던 모든 행동이 인간들이 보이는 행동 그 자체라면? 혹 몸부터 시작한 사랑이 가벼워 보여 내가 싫어지고 거부감이 든거라면 어쩌지? 두근두근 거리며 열리려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것 처럼 에스텔에게 그렇고 그런 요정으로 보였을까 불안해졌다. 빠르게 깜빡인 시선이 이번엔 반대로 흔들렸고 이걸 어떻게 이야기 해야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에스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 잘못했어요."
"...아니, 뭐."
"레골라스가 내게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 그래서 좀 무서워졌어요. 그런데 처음..이라서 진짜 이 감정이 레골라스와 동등한 감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다 내 잘못이에요."
"처음이었습니까?!"

되묻듯 던져진 말의 뜻을 이해하느라 멍하니 떠진 눈동자가 두어번 더 깜빡였다. 곧이어 열오른 얼굴은 눈 앞의 인간을 순식간에 어린 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대답.. 대답을.. 그러니까. 이게.. 내가 생각한 의미가 맞는거지?

"...응."

한참동안이나 아무말도 없이 서로만 바라보는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먼 곳에서 요정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노랫소리 또한 흘러들었지만 둘이 서 있는 이 곳에는 공기마저 움츠러들고 아무것도 움직이질 않았다. 처음이면 안되는 건가? 무슨 의미라도.. 한참을 또 고민하던 에스텔의 고개가 슬금슬금 돌려졌고 또다시 시선은 주위를 맴돌았다. 그 순간 맑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나참,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잖아요."

쑥 뻗어진 손끝에 잡힌것은 자신의 팔이었다. 우왁스러울 정도로 강한 힘이 단숨에 몸뚱이를 휘감아 끌어당겨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삼키며 질질 끌려갔다. 품 안에 가득 안은채로 레골라스는 의미모를 웃음을 짓고선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 볼 때까지 휘감긴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사실은 나 혼자서만 섣부르게 진도 나간게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구요. 말하지 그랬어요. 하도 자신감있고 능숙하게 리드하길래 경험이 있는 줄 알았네."
"능....숙...하게.."
"어라 또 얼굴 빨개졌다. 부끄러움 엄청 타나봐요?"

이제는 아예 대놓고 놀리는 목소리는 이전에 에스텔의 가슴을 뛰게 했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부끄럽기도 하고 멋적기도 해 잠자코 아무말 없이 크흠큼 거리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아라곤을 지켜보며 다시 끌어안는 레골라스의 품이 놀랄만큼 따듯해서 도통 붉어진 얼굴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제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해 줘요."
"..네."
"나도 불안해 한단 말이에요."
"다 이야기 할게요."
"그날 기분 좋았어요?"
"...네."
"나 좋아해요?"
"레골라스는요?"

용기내어 되묻는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소리내지 않고 웃어보인 레골라스가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다시한번 확인 해 볼래요?"

푸드득 날아간 새의 날개짓이 유독 크게 들려왔다. 얼굴은 이미 터질듯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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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소린. 덫 1

톨킨버스 2014. 12. 30. 17:19



처음에는 누구나 에레보르의 백성들을 동정했다. 당장 이쪽 땅으로 넘어오라 채근하는 이들도 있었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손길이 넘쳐났다. 그러나 그것이 불쌍한 에레보르의 백성들과 아비와 나라를 동시에 잃은 어린 왕자에 대한 동정때문이 아니라 에레보르에 남은 수많은 보물때문이라는 것을 어린 소린은 아직 몰랐다. 그 용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변덕을 내고 날아가 버린다면 소린과 백성들은 다시 삶의 터전을 찾을 수 있을것이고 그때가 되면 도움을 주었던 손길들을 잊지 않을거라고 예견한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각외로 금방 해결될 양상을 보이지 않았던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금방 무찌르거나 내쫒을 수 있을거라 여겼던 고대의 용 스마우그는 너무도 강력했고 삶의 터전을 되찾으려던 전투는 허망하리만치 무력하게 끝났다.

드워프들은 점점 희망을 잃기 시작했다. 재빠른 이들은 먹고살 만한 방법을 찾으려 빠르게 모든것을 단념한 뒤 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몇몇은 인간들의 틈으로 흡수되었다. 지치고 배고픈 백성들은 너무도 손쉽게 수를 줄여갔고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다. 하루 하루 눈을 뜨는것이 고역이라고 할 정도로 소린은 지쳐갔다. 아버지는 사라졌고 자신은 더 이상 에레보르의 왕자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흩어지는 백성들을 막을 방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할 두 조카가 함께 있었다. 난생 처음 소린은 비단신이 아닌 투박한 가죽으로 얼기설기 엮은 신을 신었고. 섬세하게 보석을 세공하던 손 끝은 뭉툭한 망치를 잡은 채 열기에 데여가며 대장간에서 밤새도록 일을 해야했다. 미학과는 상관도 없는 멋들어지지 못한 농기구를 만들고, 제대로 다듬어지지 못한 허술한 갑옷을 새 제품이라며 내보내야 했다. 남들보다 배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만들려 고집을 부리면 대장간의 주인은 말없이 문을 열고 그를 쫒아내기 일쑤였고 대가도 떼어먹히기를 여러번 반복하며 소린은 결국 생존의 문제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14시간이 넘는 고된 일을 하고도 대가로 받는 돈은 은화 두닢. 겨우 오늘 먹을 식량을 사고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허름한 쪽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루종일 좁은 곳에 갇혀있다가 뛰쳐나오는 말썽쟁이 조카들이 있었다. 허겁지겁 마른 빵을 입에 쑤셔넣은 채, 종알종알 떠드는 필리와 킬리를 바라보면서 소린은 몸에 남은 피로를 억지로나마 떨쳐내려 애썼다. 복수를 하려면 일단 힘을 키워야 했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두 조카가 커서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힘을 키울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이 버텨야 한다는 걸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 하며 버텨온 세월이었지만 곧 한계는 찾아오고 있었다.
의욕만으로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호의를 가지고 내어주던 돈과 재물의 양은 점점 불어났고 나중에는 소린의 이름 앞으로 달아진 빚 이라는 명목이 되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틈틈히 여러가지 일을 하며 늘어나는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천천히 시작된 압박은 종종 소린을 위협했고 두 조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 불안함 속에 살아가며 아득바득 벼텨내고 있던 소린에게 어느날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무슨.."
"빚을 탕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소."
"스라인의 아들 소린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고?"

숨겨두었던 칼을 겨누며 순식간에 달려들었지만 소린은 그 자리에서 억지로 주저앉혔다. 책상에서 놀라지도 않은 힐데가 끌끌 혀를 차올렸다.

"그런 단도를 만들 돈이라도 있었으면 얼른 갚는 편이 좋았잖아."
"닥쳐라. 애초에 네놈이 고리대금으로 설정해 두었기에 금액이 말도 안되는 정도로 불어난 거잖아!"
"그걸 알고도 내게 돈을 빌렸던 건 당신이었지. 참나무 방패의 소린."

멈칫, 몸뚱이가 분노로 덜덜 떨렸다. 한숨을 쉬면서 외알안경을 벗은 힐데가 콧잔등을 꾹꾹 누르곤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애초에 강제로 밀어붙이고 탈탈 털어내보았자 돈이 나올 구멍은 보이질 않으니 해본 말이야. 솔직히 가장 효율적이고 손쉽게 빚을 탕감할 수 있는 방법 아닌가?"

잘 보이지 않아 가늘게 떠진 눈으로 소린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드워프는 거세게 반항했다. 지금 저 자는 에레보르의 적법한 후계에게 고작 돈에 몸을 팔라 요구하고 있었다. 한번에 20굴덴. 특별히 책정한 가격이라며 흥정을 붙이는 모습은 정말 악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꽤나 빨리크지. 아낀다고 해도 비용이 더 들어갈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그 아이들이 제대로 된 식사라도 하던가? 또래보다 비쩍 마르고 배우지도 못해 덜떨어진 드워프로 자라난다면 결국 그 공은 모두 자네에게 돌아갈테고. 산밑의 왕의 유일한 후계자 소린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조카들을 매정하게 외면한 채 살고있다. 라는 이야기라도 돌면 흠.. 후원하고 있는 나로서도 기분이 유쾌하진 않거든."
"남의 앞날을 신경쓸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네 걱정이나 하는 편이 효율적이겠군. 이런 모욕을 받고도 참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내 앞날은 말이지 소린. 네게 돈을 받는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니까 나로서도 여러가지 방법을 찾는 것 뿐이야. 그러나 그 방법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제의를 할 뿐이니까. 강요하진 않아. 하지만.."

똑바로 고쳐쓴 안경의 유리 사이로 크게 떠진 눈이 소린과 마주했다. 뱀같이 교활한 입술이 열렸다.

"상환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나는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어. 스스로 가느냐, 혹은 끌려가느냐. 그 차이 이지 않을까?"

높게 비웃는 목소리는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어라 욕지거리라도 한번 제대로 날려보지 못한 채 소린은 힐데의 사병들에 의해 질질 밖으로 끌려나갔다. 애써 만든 작은 단도조차 빼앗긴 채, 말그대로 소린을 바닥에 내던져 버린채, 문은 냉정하게 닫혔다.

"언제든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다음 상환일 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처음은 특별히 50굴덴이라고 했다.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흥정을 한 결과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누군가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소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등을 꼿꼿이 편 채 협상에 임했다. 킬킬거리며 손을 비비는 힐데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후에 다시 일어선다면 제일 먼저 돌로 쳐죽이리라 생각했다. 이를 악물며 노예문서보다 더한 내용에 인장을 찍었고 그 후에 바로 이 방으로 끌려왔다. 처음이냐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힐데는 충분히 알겠다며 음흉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에레보르에 스마우그가 침범했을 시기에 소린은 미성년이었고 방랑하며 성인의 시기를 지나쳤으니 상황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쉽게 얻을 정보였을 터였다.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해달라는 힘겨운 부탁을 들어준 것이 그나마 소린의 마음을 위안되게 했다. 사전 정보도 없이 불안해진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 소린은 좁은 방 안을 몇 번이고 오갔다.
방 한구석의 침대와 간단한 탁자. 그리고 싸구려 술. 마시는 편이 좋을거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한잔 따라내어 입에 대어 보았지만 차라리 이 치욕을 몸에 새기는 편이 더 좋을거라는 말도 안되는 자존심에 소린은 도로 손을 거뒀다. 누가 이런곳을 올런지는 몰랐지만 제발 아는 이가 아니기를. 한참을 그렇게 홀로 상념하며 있던 방의 문이 열린 것은 조금 전 이었다.

다짜고짜 달려든 인간들의 손에 간단히 제압당한 소린은 손을 구속당한 채 안대가 씌워졌다. 버둥거리는 몸을 엎드리게 만든 뒤 움직일 수 없게 구석구석 짓누른 손에 극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빠르게 벗겨진 하체에 차가운 바람이 들었고 그만 하라고 소리지르는 입에는 재갈까지 물렸다. 킬킬거리며 몸을 쓰다듬는 손길은 뱀과 같은 느낌이어서 버둥거리며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벌써부터 발정나 몸을 헤프게 조롱까지 받았다.

"너무 겁 먹지 마쇼. 하다가 좋아서 더 해달라고 엉덩이를 흔들게 될 지 누가 알아 응?"

반쯤 벗겨진 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내린 사내는 드러난 속살에 쩍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 자국을 새겨두었다. 작은 신음소리가 앞에서 들려왔지만 그 소리를 내는 행위마저도 치욕스럽다는 듯, 몸을 웅크린 드워프는 눈을 꾹 감은 채 바들바들 떨어대고 있었다. 이런 거였다면.. 하지 않는거였어. 이럴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런 소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특별히 첫 손님이라 귀하신 분으로 모셨다고. 잠자코 그분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잘 모시라는 이야기를 내뱉곤 힐데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린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싫다고. 없는것으로 하자고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를 해도 소리는 재갈에 막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불안함에 공포는 배가되면서 이런 선택을 내린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필리와 킬리의 얼굴이 교차되고 아버지 또한 뇌리에 스쳤지만 진정보다 원망이 앞섰고 깎여나간 자존심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당장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거리며 제대로 아귀가 맞지 않는 문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질겁하며 뒤로 물러서려는 본능적인 모습에도 방 안으로 한걸음 들어온 이는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도 커서 그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건지도 몰랐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의자를 가볍게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렸고 고급재질의 원단이 겹쳐져 걸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절경이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들어본게 다가 아니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 저주스러운 목소리를. 가장 보고싶지 않은 상대를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에 소린은 마주하고 말았다. 이 목소리는 분명 스란두일의 목소리였다.







"귀한 것을 구했다고 하도 하도 호들갑을 떨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수다스러운 입을 도려내버릴까 했는데."
"그래도 이만하면 귀한 것이 아닙니까요."

뒤따라 들어온 힐데는 흘끗흘끗 숲의 군주를 올려다보며 손바닥을 비벼댔다. 인간이긴 했지만 힐데는 숲의 가능성을 보고 대담하게 사업에 뛰어든 참이었다. 다른 이었다면 감히 시도도 하지 못했을 일을 그는 저질렀다. 폐쇄적이기로 소문난 어둠숲의 군주를 과감히 끌어내 테이블에 앉히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요정들이 구하고 있는 잘 말린 과일들과 질좋은 포도주의 판로를 제시하며 파격적인 조건으로 딜을 건 것과 동시에 왕께 진상할 귀한 선물이 있으니 친히 발걸음을 해주신다면 더 없이 기쁠 것이라고 하루가 멀다하게 연통을 보내 애쓴 보람이 있었다. 숲의 군주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았을 때 힐데는 당장이라도 거래가 이루어 진 것 같은 기쁨이 도취되어 있었다. 스란두일의 흰 보석을 가로채간 것이 에레보르의 드워프들이라는 것은 알음알음 퍼져있는 사실이었고 결국 스란두일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드워프와 요정의 사이가 나빠진 계기라는걸 어렵사리 캐낸 힐데는 숲의 군주에게 그 왕자를 직접 취하게 하는 것 자체가 나쁘지 않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어린 왕자를 짓밟는 것 자체가 훌륭한 화풀이가 될 수 있었고 마음에 들어 취한다면 그것대로 좋았다. 손 안에 이미 들어온 순진한 드워프 하나를 휘말리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성인도 아닌 어린 드워프 둘은 노예로 팔아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계획된 일이었다.

"듣자하니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몸이라 합니다."

아직 피우지도 못한 몸입지요. 힐데는 성큼성큼 걸어가 소린이 발버둥쳐 엉망이 되어버린 이불을 거칠게 걷어냈다. 순식간에 헐벗은 하반신이 그대로 노출되어버렸다. 움찔거리는 움직임 모두를 눈에 담은 스란두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감돌자. 힐데는 더욱 흥분해 소린의 엉덩이를 억지로 벌려 스란두일에게 보였다.

"기념할만한 성인식이 아니겠습니까."
"내게 바쳐진 것에 쓸데없는 손을 보태는구나."

순식간에 떨어진 힐데의 손이 다시금 비벼졌다. 눈치를 살살 보면서 스란두일의 앞에 무릎을 꿇은 힐데는 금새 나긋한 목소리로 설탕발린 말들을 꺼내놓았다.

"미천한 인간이 많은 것을 갖고계신 전하께 드릴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유익한 것을 드리는 것 뿐입니다. 어여삐 봐 주십시요."
"그 성의는 고맙게 받지."
"그럼..."
"일단은 물건의 확인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네만."
"물론입죠,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확인이 불편하시다면 지금 아예 데리고 돌아가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린이 별안간 몸부림을 쳤다. 이곳에서만 하기로 했던 계약과는 이야기가 다르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 자는 지금 자신을 스란두일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치욕을 당하는것과 팔려가는 것은 달랐다. 소린은 안간힘을 내어 자신의 몸을 묶은 줄을 풀어내려 애쓰며 소리질렀다.

"저자도 기대가 되는지 기쁨의 몸부림을 치는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손을 비벼오는 힐데를 스란두일은 느긋하게 내려다보았다. 악취미로군. 어쨌거나 선물은 선물이니 선물의 의지같은 건 살필 필요 없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스란두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포장해서 마차에 싣거라. 돌아가서 느긋하게 확인해보지."

발소리가 나지 않는 가벼운 몸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다시 끼익 소리를 내며 닫힌 문 틈에서 울부짖는 비명소리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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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잠식된 몸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몇번이고 내리 찍은 단검에 솟구친 핏줄기는 핀데카노의 얼굴, 몸 할것 없이 모두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미끄러진 검을 고쳐잡는 손에 흔들림은 없었다. 퍽, 제대로 박혀들어간 칼날의 반동에 새된 신음을 흘리며 마에드로스가 축 늘어지자 핀곤은 치켜들던 검을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꽂아 둔 채, 너덜거리는 마에드로스의 손목을 눌러 잡았다. 사냥 중이다. 핀데카노. 튼실한 숫사슴이 이미 화살에 맞은 터라 고통스럽지 않게 목숨을 미리 끊어 주려는 것 뿐이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이고서야 움켜쥔 손에 힘을 실었다. 아슬아슬하게 소론도르의 등에서 흔들리면서도 한쪽 팔로 늘어진 마에드로스를 끌어안아 고정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전사의 손에서 무력하게 부러져 덜렁거리며 절벽 밑으로 떨어진 것은 숫사슴의 목뼈가 아닌 마에드로스의 손목뼈였다.

기절한 상태에서조차 쇼크가 몰려왔는지 이미 혼절한 마에드로스의 몸이 크게 튕겨졌다. 덕분에 중심을 잃고 무너진 핀곤이 주저앉으며 소론도르의 어깨죽지를 움켜쥐었다. 몇 번 크게 날개짓을 해 보았지만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론도르가 빠른 속도로 급하강 했고 핀곤은 그저 품에 가득 찬 마에드로스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모두가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마에드로스가 눈을 뜬 것은 한 달도 더 지난 시기였다.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 훈훈한 온기가 도는 공기.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절로 떠진 눈보다 입술이 먼저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매캐한 냄새가 아닌 고소한 장작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굳어있던 머릿속이 삐걱거리며 상황을 판단하려 애썼다. 꿈은 아니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온기까지 와닿을 순 없었다. 상고로드림의 혹독한 추위를 버텨왔던 그 아득한 시간동안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매번 누군가에게 구해지는 환상. 따듯한 곳에 들어와 있는 환상. 착각. 그리고 나타나는 환영.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듯 나타난 것들에 처음에는 분노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했지만 나중에 가선 그저 부질없는 시간 속에서 버팀목이 되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면 정신을 놓아버려야 했을테니까. 상고로드림은 그런 곳이었기에 마에드로스는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꿈이 아니야. 어쩔 줄 모르는 불안한 얼굴이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질 없었다. 너무도 오랫만에 온 몸으로 동일하게 퍼진 고통의 크기는 이전보다 줄어들었지만 마에드로스를 눈물나게 만들었다. 똑같이 느껴지는 고통. 한쪽 어깨로 쏠리지 않은 감각.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잊고 지낸 균형감각이 몸 전체에 아픔과 함께 퍼져나갔다. 이곳은 상고로드림이 아니었다. 어디인지, 무슨 연유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 곳에서 벗어났다는 건 확실했다.
저도 모르게 흐른 눈물에 시야가 일그러졌다. 무심코 올라간 손이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이상하게 닿질 않았다. 붕대로 감겨버린 손목이 유달리 이질적으로 보였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손가락이 눈에 보이질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놀라기도 전에 벌컥 열린 문으로 그리운 얼굴이 들이닥쳤다.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르는 핀곤의 얼굴. 급히 소리를 질러 치료사를 부르고 어쩔줄을 몰라하며 강하게 어깨를 부여잡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리면 황급히 떨어져나갔다. 그제서야 그 깎아지른듯한 절벽의 끝에서 핀곤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네가 나를 구했구나. 수많은 궁금증보다 살아있는 존재 자체가 유독 반가웠던 '핀데카노'이기에 마에드로스는 서글픔과 안도, 그리고 기쁨을 담아 웃으며 그를 맞았다.

"핀데카노."
"마이티모.."

어쩔줄을 모르며 숫제 울먹이기까지 하는 핀곤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마에드로스는 손을 뻗어 사촌의 눈물을 훔치려 얼굴을 어루만졌다. 상처투성이의 손. 그리고 여전히 반대쪽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시야. 한참을 주저하던 마에드로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핀데카노. 이상해. 나 눈을 다쳤나봐."

한쪽 손이 보이질 않아. 이렇게 움직여지는데. 하도 매달려 혹사당하다보니 아예 눈앞에서 사라진걸까?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이야기하는 마에드로스의 물음에 차마 답하지 못한 핀곤이 기어이 참아내던 눈물을 떨구고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어쩔줄을 몰라하던 마에드로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핀곤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여전히 닿질 않았다. 몇 번을 허우적거린 손목을 핀곤이 잡아채고 나서야 잊혀진 기억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핀곤의 울것같은 얼굴. 끊어져버리기라도 한 듯 아파오는 손목. 쿵쿵소리를 내며 온 몸을 고통으로 몰아가던 쇠붙이의 날카로움. 머릿속이 순식간에 뒤엉켜 혼미해졌다. 깨질듯 아파오는 머리를 움켜쥔 채 신음을 내지르던 마에드로스의 몸이 어느순간 픽 쓰러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핀곤의 고함소리에도 몸은 일어날 수 없었다.






겨우 추스리고서야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마에드로스는 핀곤의 수발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목숨을 부지한 것 조차 기적이었기에 정신이 또렷해지는 순간 이후 더더욱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원죄. 그렇게 이름붙여도 과하지 않는 페아노리안의 죗값.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지금 그 죄는 모두 장자인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로 돌아왔다는것을 마에드로스는 잘 알고 있었다. 치료를 받으러 숙소 밖으로 한 걸음만 떼어도 날카롭게 쏟아지는 살기는 그로서도 견디기 힘든 것들이었다. 상고로드림의 그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온갖 모욕과 절망을 느꼈지만 가장 크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세상에게서 소외된 것 같은 고독함이었다. 그 절망적인 고독함에서 해방된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이제는 너무 많은 시선들이 마에드로스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무는 법을 택했다.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인 척 살았다. 이미 죽은 목숨.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은 잊혀진 몸뚱아리를 억지로 끌어내 살려놓은 건 직계혈육도 아닌 핀데카노였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많은 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제멋대로 떠들어 댈 것이라는 건 보지않아도 알수있었다. 둔해진 머리였지만 그 정도도 추론해내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도 서슬퍼런 욕과 폭력이 난무하던 상고로드림의 절벽에서 눈을 뜨는 꿈에 시달리는 자신이 욕 한마디 더 듣는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그의 사촌에게까지 욕 보여서는 안됐다. 그건 마에드로스가 핀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몇번이고 말을 붙이려 노력해보았지만 좀체 입을 열지 않는 마에드로스덕분에 핀곤은 역시 침묵으로 그를 대했다. 때론 급변하는 상황에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한 법이라는 치료사의 조언 덕이기도 했지만 도통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촌 형님의 모습은 그로서도 충격적인 모습이었기에 그 생활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십여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겪고 기어이 살아남은 몸은 한없이 약해져있었고 그의 이름대신 불리던 붉은머리의 전사의 뜻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전에없이 비쩍마른 몸뚱이에는 온기라곤 들지 않았고 그보다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건 온 몸에 가득한 상처들이었다. 핀곤은 이런 류의 상처들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정식으로 대련을 하거나 전투를 벌였다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그저 일방적인 구타와 심심풀이로 이루어지는 폭력의 증거. 빼곡히 앞뒤로 채우고 있는 자상, 화상. 아물지 못해 곪아 썩고 부러졌던 뼈 마저도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채 아물어버렸다. 오히려 그가 손목을 잘린 쇼크에 기절했을 때에 서둘러 돌아와 수술을 진행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깨어나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하는 몸뚱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흘렸던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했다.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며 어쩔 줄을 모르던 시기를 지나 입을 다물고 있으니 차라리 조용하고 편하다면 편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에드로스는 그를 챙겨주던 손길 전부를 거절했다. 무언가를 물어도 답하지 않았고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알고있는 소수의 얼굴이 아닌 '타인'의 존재에 흠칫흠칫 놀라며 겁에 질린 아이처럼 당황했다. 말도 없이 그저 홀로 두려움에 떠는 사촌을 위해 핀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의 곁에서 놀라지 않게 진정시켜주는 것 뿐이었다.

날짜를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수많은 시간들이 그대로 흘렀다. 겨우 요정꼴로 만들어 놓은 몸이 이제는 스스로 일어서고 조금씩 움직여댔다. 여전히 방문 밖을 나서는 것을 꺼려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른 이들과 섞여있어도 크게 이질적이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됐다. 이제는 핀곤이 잠깐씩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도 크게 놀라지 않는 마에드로스의 모습에 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금 있으면 제 자리로 돌아오겠지. 원래의 마에드로스로 돌아올거야. 가벼웠던 마음에 방심의 틈이 생긴거였을까. 바빴던 오전의 일 처리를 끝내고선 손목의 붕대와 화상자국을 보살피러 들어온 핀곤이 마에드로스가 있는 방문을 열자마자 무언가가 얼굴로 날아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감쌌다. 침입자..?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마에드로스부터 찾는데 이상하게 방 안은 깔끔했다. 자신의 얼굴로 날아온 것은 얇은 웃옷. 고개를 들자마자 벗은 마에드로스의 나신이 보였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에드로스의 모습은 과거 핀곤의 기억속에 자리한 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이티모?"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핀데카노."

사나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마이티모야. 내가 알고 있는 마에드로스. 나의 사촌 형님. 핀곤은 평정을 가장하고는 허리를 굽혀 떨어뜨린 붕대와 약을 주웠다. 두근대는 가슴 속의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너무도 오랫만에 듣는 목소리. 나의 마에드로스. 얼굴근육을 간신히 긴장시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사촌 동생으로서, 유순하고 착한 핀데카노의 얼굴로.

"무슨 일이야. 옷은 왜.."
"너, 일부러 그랬지."
"응?"

주어가 없는 물음에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도 핀곤은 다가오는걸 멈추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빠른 눈으로 벗은 마에드로스의 몸을 훑었다. 씻을때조차 부득부득 우겨서 몇 번 같이 들어가긴 했지만 움직이기 시작하고 난 뒤의 마에드로스는 늘 스스로 씻겠다며 문을 닫아걸었기에 다 나은 뒤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순 없었다. 거진 아물어 흉터만 남은 상처들을 꼼꼼히 눈으로 확인한 뒤 핀곤은 침대 위에 던져진 로브를 들어올려 넓게 펼쳤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어봐야겠지만 우선 몸에 간신히 자리잡은 체온 유지가 더 급했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끝이 핀곤이 펼쳐쥔 로브를 후려쳤고 그 반동에 우습게도 마에드로스 자신이 휘청거리며 무너졌다. 몸뚱이가 주저 앉기 전 낚아챈 핀곤덕에 엉거주춤 매달리게된 마에드로스가 몇 번 반항하다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결국 바닥에 그대로 웅크린 마에드로스 덕에 핀곤도 함께 그 곁에 무릎을 꿇었다. 가늘게 경련하는 몸뚱이가 품 안에 바싹 들어왔다. 벗은 등을 쓰다듬고 고개를 숙여 보여주지 않으려는 마에드로스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넘겨주며 다독거렸다. 무슨일인데. 말을 해야 알지. 응? 형님. 왜그러는데.

"스스로를 괴롭히던 기억은 지워지기도 한다더군."

흠칫, 등을 쓰다듬던 핀곤의 손끝이 떨려왔다. 그 반응이 우습다는 듯, 작게 웃어보인 마에드로스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한층 가까워진 얼굴에 시선이 바로 겹쳤다. 서슬퍼렇게 쳐다보는 그 위압에 저도 모르게 물러선 핀곤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 입술이 열렸다.

"내 등에 낙인이 찍혀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지?"

크게 떠진 눈동자는 이제 자신을 힐난하고 있었다. 손목에 칼을 댈 때도 구하러 온 자신을 향해 다가오지 말라고 잔인한 말들을 내뱉을 때도 마에드로스는 이런 눈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핀곤의 기억 속에 자리한 마에드로스는 타인에게 결코 이런 눈을 한 적이 없었다. 쏟아지는 무언의 비난. 슬픔. 바닥까지 내쳐진 절망. 모든 감정들이 화살로 변해 오롯이 자신에게 꽂혔다. 그의 등에 올린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낙인은 바로 그 손바닥 밑에 펼쳐져 있었다.

모를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펄떡이며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손목을 꺾고 핀곤의 품으로 떨어진 마에드로스의 몸을 끌어안고 추락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마주한 현실에 그는 눈을 몇번이고 감았다 뜨며 현실을 부정했다. 다 삭아 없어지다시피 한 옷감들 사이로 매끈한 등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상처는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그가 상상했던 정도가 아니었다. 꽃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지고 비틀린 문양들. 어둠의 힘을 양분삼아 피어난 수 많은 악마의 열매. 보기만 해도 소름돋을 정도로 징그러운 낙인들이 하나하나 밖으로 드러났다. 빼곡하게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새겨진 등을 수놓은 꽃들은 그동안 마에드로스가 견뎌온 일들을 자연스레 깨닫게 했다. 울컥울컥 나오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어 핀곤은 몇 번이고 토악질을 해댔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언젠간 말하겠지 싶다가도 침묵하는 마에드로스의 모습에 안일하게 마음을 놓은 채 대비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설마 기억하지 못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만 묻자. 날 동정했니?"

벼락같이 떨어진 물음에 핀곤의 얼굴이 번개같이 들렸다. 아니라고 거세게 도리질치며 변명했지만 싸늘한 눈동자는 자신을 오래도록 주시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시선을 마주한 채 핀곤이 끊임없이 속삭여 주었지만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마에드로스 쪽이었다. 가만히 허공을 향하는 텅 빈 눈동자를 걱정하면서도 핀곤은 그를 부여잡은 손을 떼지 않았다.




"부탁 하나만 하자."

적막한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 숙여진 핀곤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면 마에드로스는 평소같이 텅 비어버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면서도 스스로 일어선 후에 그는 천천히 벽난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편의 숙소는 조용했지만 외풍이 심해 겨울에는 빛이 드는 낮에도 벽난로에 불을 지펴야했기에 일찌감치 넣어두었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타닥타닥 빨갛게 익어가는 난로 앞에 멈춘 마에드로스를 따라 핀곤 역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다가서자마자 마에드로스는 몸을 돌려 핀곤을 쳐다보았다. 결연한 의지. 살짝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더이상 떨리고 있지 않았다.

"내 기억을 지울거야. 그러려면 증거도 없어야 돼."
"마에드로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야. 내가 몰랐던 때로."
"...."
"상처 한두개 쯤 더 늘어난다고 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테지. 이미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데."
"잠깐, 잠깐만 마에드로스."
"한번에 없애려면 자상보다는 화상이 더 빠르겠지?"

마에드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곁에 놓인 부지깽이를 들고 이미 숯이 되어버린 벽난로의 안쪽을 뒤적였다. 두꺼운 쇳조각이 금새 빨갛게 달구어졌다. 그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핀데카노가 황급히 그를 벽난로에서 떨어뜨리려 당겼으나 마에드로스는 손에 들린 부지깽이를 놓지 않았다. 뜨거운 것을 들고 휘청이는 그가 다칠까 두려워 금세 행동을 멈춘 핀곤이 천천히 마에드로스의 하나남은 손을 부여잡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응? 네 몸이 온전히 회복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지금 몸상태로는 그 상처들을 이겨낼 수 없어!"
"그 때는 정신적으로조차 이겨낼 수 없을지도 몰라."
"마에드로스!"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 혼자서라도 할거야. 엉망이 되더라도 상관 없어.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강경하게 나오는 마에드로스의 서슬퍼런 태도에 부지깽이를 빼앗으려던 핀곤의 움직임이 멈췄다. 놀랄만큼 냉정한 목소리. 그건 우발적으로 나온 말들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피스틸이고 스테먼이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날 밤 까지는."
"...."
"너무도 생생해. 역겨운 기억들. 억지로 몸을 비틀어 나조차 생경한 곳을 제멋대로 헤집더군."
"..나도 그 끔찍한 기억을 네게 심어줬어."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거야."

입술을 깨물며 그를 놓친 손끝을 바라보았다. 결국 자신도 같은 부류였다. 싫다던 마에드로스를 끌어안고 욕심껏 그를 안았다. 결국 마에드로스는 나와 나누었던 그 밤의 시간을 인정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거다. 이따위 입에 발린말들은 필요 없었다. 시작은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나처럼 싫다는 그를 끌어안았을테고 입을 맞췄겠지. 등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꽃들을 발견한 당시에는 끓어오른 스테먼으로서의 살기가 사방으로 뻗치며 그를 향한 독점욕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분노는 점점 자취를 감췄고 죄책감은 커져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그의 등 한쪽에 자리한 그의 꽃을 발견한 직후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꽃들과 엉켜 마에드로스의 등에 찍혀있는 핀곤의 낙인. 마에드로스의 깨끗했던 등에 피워진 최초의 꽃. 결국 너도 그들과 똑같다며 자신을 혐오하는 눈으로 보는 마에드로스의 환영이 매일밤 나타났다. 아니라고, 나는 결코 마에드로스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없다 몇 번을 부인하고 싶었으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마에드로스의 등에 피워진 꽃은 그에 대한 동경과 사랑과 애정의 증표이자 그를 억지로 취한 자신의 추악한 죄의 낙인이란걸 스스로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핀데카노."

부지깽이를 천천히 내려놓은 마에드로스가 핀곤의 손을 잡아올렸다. 힘없이 끌려올라온 손끝을 감아 억지로 깍지를 낀 마에드로스는 한걸음 다가가 붕대로 감긴 손목 끝으로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울 것 같은 모습으로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핀데카노에게서 마에드로스는 그와 처음으로 함께 했던 아침의 핀곤을 떠올렸다. 어른이 됐건만 속은 전혀 변하질 않는구나. 가만히 핀곤이 자신과 눈을 맞춰줄때까지 기다리던 마에드로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탓하려는게 아니야."
"..."
"정말이야 카노."
"미안해."

처음의 사과였다. 그날의 핀곤은 미안하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올렸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도 아득바득 고집을 부렸다. 절대로 후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을거라고 이야기 했었다. 어린날의 치기로 밀치고 들어온 사촌은 앞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다며 이해받지 못해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런 당돌했던 모습에 휩쓸린 건 마에드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사촌은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사과를 받을 수 없어."
"....."
"그 말은 나를 우습게 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게 아니고..!"
"이 내가!"

내지른 소리에 변명하려던 입술이 닫혔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보단 조금 누그러진 태도였지만 마에드로스는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아노르의 장자 마에드로스가 고작 사촌 꼬맹이 완력 하나 이기지 못했을거라 생각하는건가?"
"....."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나를 무시하는 방법이야. 잘 알고 있을텐데?"
"그러니까.."
"네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잖아."

평소의 나긋한 말투로 돌아온 마에드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핀곤의 손을 놓았다. 이제는 한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동안 용케 익숙해졌는지 마에드로스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대어 둔 채 가만히 허공을 주시하던 시선이 다시 핀곤에게로 돌아와 꽂혔다.

"시작이 혼자였지만 끝은 함께였어."
"...마에드로스."
"그리고 그 문제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나는 네게 부탁을 했고 너는 대답을 해주면 돼."

단호하게 끊는 마에드로스 덕분에 핀곤은 몇 번이나 입술을 우물거렸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조차 핀곤은 그를 상처입혀야 하는 괴로운 마음과 그 상처를 낼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성취감을 동시에 맛봤다. 결국 마에드로스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마에드로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핀곤을 이용했다.

"일주일만 더.."
"오늘 당장. 더 이상 질질 끌고싶지 않아."

짓씹듯 내뱉었지만 그 얼굴은 너무도 지쳐보였다. 오랜시간 서 있었던 데다 갑자기 활동량도 늘었고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하기엔 아직은 체력이 부족했다. 힘빠진 시선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에 핀곤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로브를 주워들어 마에드로스를 감쌌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데리고 올 때만 해도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말라있던 몸이 많이 단단해졌다. 꽉 차 넘치는 몸을 바스러지게 끌어안은 핀곤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마에드로스를 보듬었다. 닿은 온기가 너무도 따듯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치익-

끔찍한 냄새와 소리들이 뒤엉켜 예민한 요정의 오감을 고문했다. 고문. 말그대로 고문의 현장이었다. 베겟잇을 짓씹으며 고통을 감내하던 마에드로스는 계속 혼절과 각성을 반복했지만 핀곤은 애써 모른 척 상처 위로 수건을 가져다 대 핏자국을 지웠다. 깊고도 진하게 새겨진 꽃들의 흔적은 검으로 얕게 베어내서도 자잘히 지져내서도 안됐다. 오랜 시간동안 화로에 무쇠로 만들어진 인두가 들락거렸다.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목 뒤에서부터 천천히 피부를 엉겨붙이고 그 껍질을 벗겨냈다. 아직도 너무 많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화상에 효능이 있는 약초와 필요한 물품들. 최대한 많은 수의 치유사. 단시간에 빠르게 끝내려 부산스럽게 준비하던 핀곤을 막아선 이는 마에드로스 본인이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그저 혼자서 천천히 해달라 이야기하는 텅빈 눈동자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언성이 높아지고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핀곤은 마에드로스에게 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방법이었으니까. 다른 방법은 필요 없었다.
등 전체를 인두로 지져내는 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조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흉터가 드세게 남을수도 있어 핀곤은 마에드로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들여온 약초가루를 짓이겨 넓게 펴바른 뒤 힘껏 수건으로 감싸 지혈을 했다. 그리고 다시금 인두가 달궈지면 다음 부위에 대고 힘주어 눌렀다. 열린 창문으로 추위가 몰아쳐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곳에서 핀곤은 더운 땀방울을 흘렸다. 어자피 이곳에는 추위를 느낄만한 요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한참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면적이 점점 줄어 많은 부분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기계적으로 다음 부분에 인두를 대어 힘을 주려던 손끝이 움찔, 하고 떨렸다. 자신의 문양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작게 피어난 꽃. 바로 곁에 엉겨붙은 누군가의 꽃이 크게 피어나 자신의 꽃을 위협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 그 위협적인 꽃을 먼저 짓눌렀다. 흐윽, 흡. 짓눌린 어금니 사이로 다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고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핀곤은 그 부분을 반복해서 몇 번이고 지졌다. 연기가 나지 않을 무렵까지 무게를 싣던 손이 화들짝 떨어졌고 벌겋게 익은 상처 곁에 남은 자신의 꽃이 눈에 들어왔다. 핀곤은 입술을 깨물며 인두를 화로에 던졌고 모른척 그 꽃이 있었던 부분에 겹쳐 수건을 대고 눌렀다. 화끈화끈하게 열오른 상처. 그 짓누른 손가락 사이로 피어난 꽃. 자신이 저지른 죄의 증거.

"욕심내는 건 이번 한 번 뿐이야. 용서해줘 마이티모."

이미 혼절한 마에드로스의 등 뒤에서 핀곤은 조용히 내뱉었고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듯, 굳은 얼굴로 화로안의 숯을 뒤적였다. 곧 빨갛게 달아오른 인두에서 열기가 피어올라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고 그는 지체없이 지혈하던 수건을 떼어놓은 채 손잡이를 들어올렸다. 피범벅이 된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핀곤은 손아귀에 힘을 실어 또 한 송이의 꽃을 뭉그러뜨렸다. 땀인지 눈물일지 모를 액체가 후두둑 떨어져 계속 시야를 방해했다. 지독히도 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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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무제

톨킨버스 2014. 11. 12. 13:37

낌새가 이상했다. 유난히 온화한 린돈의 엘프들은 오늘따라 몸에 배인 친절함의 끝을 보였고 처리해야할 서류들이 산더미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유가 있다며 결재를 올리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숨쉬듯 넘겨도 제 시간에 처리하지 못할 결재서류들이 올라오지 않는 사태에 관하여 엘론드는 답지않게 미간을 찌푸리고 항의해 보았지만 말갛게 웃는 대신들의 얼굴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을 것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내고 있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눈치빠른 엘론드는 바로 이곳 저곳을 찌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써 보았지만 정작 이 일의 주도권을 가진 길 갈라드는 그저 휘파람을 불며 짧게 주어진 휴식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한참동안이나 서기관들을 닥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엘론드의 불퉁한 말투가 들려왔다.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휴식을 즐기던 길 갈라드는 오래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다며 배싯 웃음을 보였다. 지금 웃으실 때 입니까? 라며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길 갈라드는 그저 자장가인 것 마냥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아보였다. 주군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머쓱해진 엘론드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크지 않은 서재에서 익숙하리만치 마음 편해지는 종이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어색했다. 한참이고 바쁠 시기에도 바쁘지 않을 시기에도 엘론드는 주군과 함께 방 안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정리하고 바라보는 그 바쁜 틈틈이 미간을 찌푸려 집중한 대왕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엘론드의 비밀스러운 습관 중 하나였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처음이었기에 엘론드는 혹여나 크게 울리고 있는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혼인 서약을 올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침대는 여전히 두 개였고, 길 갈라드와 엘론드는 다른 두 개의 침대에서 각자 잠을 청했다. 그것이 같은 방이라는 것은 그동안 함께 해온 시간에 비하면 대단한 변화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특별한 설렘을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둘은 바빴고 바빴다. 침실까지 서류더미를 챙겨오는것이 다반사였고 잠에지쳐 꾸벅꾸벅 졸고있을때 슬그머니 이불을 덮어줄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지금의 엘론드와 길 갈라드를 설명할 수 있는 관계의 전부였다. 한때는 불같이 뜨겁고 달콤한 입맞춤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엘론드는 곧 씁쓸히 웃으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남들이 이야기 하기에 대왕과 자신은 소위 신혼생활 중이었지만 그런 평범한 것을 요구하기에는 자신의 성별은 남자였고 길 갈라드는 너무도 지위가 높았다. 정략결혼. 그래, 가신이 주군께 충성하기 위해 기사의 예를 갖추듯 자신 또한 비슷한 방식의 예를 갖추었다고 엘론드는 늘 스스로를 다독였다. 좀더 든든하고 안정된 린돈을 지켜나가기 위해 몸소 뛰며 실천하고 있는 길 갈라드의 앞날을 스스로 막아선 안됐다. 그것은 주군으로서, 혹은 남몰래 연모하는 이로서 모셔야 할 이에 대한 엘론드의 굳건한 다짐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숨 조차 쉬지 못한 채, 길 갈라드의 눈 감은 모습을 훔쳐보던 엘론드를 구한 것은 다름아닌 글로르핀델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쉬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대왕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던 글로르핀델은 주무시는 대왕을 뒤로 한 채 욕실로 엘론드의 등을 떠밀었다. 크고 화려한 욕조의 입구에는 사자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조각했고 섬세하게 장식된 벽들은 이른 새벽녘에 따온 향 좋은 장미로 꾸며져 있었다. 평소와는 현저히 다른 욕실의 모습에 당혹감을 보인 엘론드였지만 꿀을 바른듯 달콤하게 이끄는 글로르핀델의 말에 오늘은 그저 잠자코 있기로 했다.


더운 물을 욕조 가득 손수 채우며 꽃잎을 띄운 글로르핀델은 피로를 푸시라며 목욕을 권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간들 속에 이런 여유는 정말이지 오랫만이었다. 혼인 서약 후 공식적으로 대왕의 결재가 필요한 것들이 자신에게로 분배되기 시작하며 엘론드는 그 흔한 산책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혹 이렇게 서류가 올려지지 않는 것이 글로르핀델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 엘론드는 불편했던 마음을 편히 갖기로 했다. 뜨끈한 물이 온 몸을 적시고 마음까지 노곤하게 풀어질 무렵까지 참으로 오랫만에 엘론드는 한낮의 느긋함을 즐겼다.

 

 

급하게 두드려진 노크소리에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슬쩍 감싼 엘론드의 양 뺨이 열기에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가벼운 가운만 입고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손님에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에레스토르가 유들하게 웃으며 별다른 일이 없을듯 하니 바로 침실로 오라는 길 갈라드의 전언을 전했다.

 

"...방 구조가 변하였구나."
"...그렇네요."
"날 왜 보자 하였느냐?"
"...대왕께서 절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옷도 못 갈아입고 오는 길이었는데.."

불안한 눈빛이 서로를 마주했다. 어색한 기분이 양 옆을 휙휙 돌아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야 할 서류들이 모조리 사라졌고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 또한 사라졌다. 늘 바깥을 볼 수 있게 열어둔 창문은 꼭꼭 닫힌 채 커튼까지 내려져 있었고 가끔 차를 마시던 작은 탁자와 의자 또한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방 안에 있는것은 엘론드가 쓰던 작은 침대 하나 뿐 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황급히 문으로 다가가 열어제치려는데, 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번 덜컹여 밀어보았지만 꿈적도 하지 않는 문에 엘론드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글로르핀델? 에레스토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문을 두드리던 엘론드가 급하게 몸을 숙였다. 문 아래 좁은 틈으로 무언가 삐죽 나와 있었다. 얇은 종이였다.
어느새 다가온 길 갈라드가 엘론드의 손에서 그 종이를 건네받았다. 유려한 필기체로 써진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좋은 밤 보내시길.]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론드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질 못하고 파르라니 흔들렸다. 종이를 들고 있던 길 갈라드 조차 조금씩 우그러지는 종이를 바라보며 당혹감에 젖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아주 작은 침대가 있었다. 엘론드의 침대였다.

 

 

 

+ 4월에 썼던건데 왜 비공개로 되어있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끌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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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마에. 밤.

2014. 4. 15.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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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골라스. 무제.

톨킨버스 2014. 4. 14. 22:14

@끼님: 레골라스에게 최음제를 먹이자 풀린 다리로 간신히 일어나선 입을 크게 벌리고 제어가 되지 않는 몸을 붙들고 당신에게 프렌치키스를 한다. http://t.co/UcYzML9JDL


"흡..!"

달콤한 맛의 음료였을 뿐이었다. 과일의 즙을 짜내어 만든 특제 주스는 레골라스가 늘 즐겨먹던 음료이기도 했다. 모처럼 땀을 흘린 뒤라 갈증이 나기도 했고 지나가던 엘프(얼굴은 처음보는 이였지만)가 친절하게 건네어 주길래 경계하지 않은 채, 받아마셨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 폐쇄적인 어둠숲 안에 첩자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왕자였기에 충격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이미 떨리기 시작한 몸뚱이는 간신히 다리힘을 지탱하고 있을 정도로 힘겹게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맛이 어떤가요 왕자?"

새카만 머리의 엘프.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엘프는 아직 나이가 어려보였다. 하지만 빛나는 눈동자 속에 탐욕이 보였다. 벽을 짚고 흔들리는 시야를 확보하려 찡그려진 미간이 아파왔다. 점차 다가오는 엘프의 행동을 막을 새도 없이 레골라스는 간단하리만치 얼굴을 내 줘야 했다.

"불쌍하게도... 떨고 있잖아요?"
"무얼...먹인겁니까.."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은 레골라스가 독기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살살 볼을 감싸며 웃던 엘프가 속삭였다. 별거 아니에요. 최음제를 조금 탔어요. 마치 몸에 좋은 약재를 하나 넣었다는 식의 말투는 레골라스를 거슬리게 했다. 인상을 다시한번 구기며 반항하려는 순간 볼을 감쌌던 손이 떨어졌다. 거짓말 처럼 레골라스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흐으..윽.."
"저런..괴로운가요? 하긴..조금 셀 지도 모르겠어요. 적정양보다 조금 더 많이 넣었거든요."

쉬이 듣지 않을 것 같아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서 왕왕 울렸다. 스며든 소리는 온 몸의 핏줄을 타고 레골라스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뜨거움과 괴로움에 몸부림 치던 레골라스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원하는..흐윽, 게.. 뭐길래.!"
"원하는거요? 별거 없어요. 당신을 원해요."

당연한거 아닐까요? 살갑게 웃어보이는 엘프는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그 티 없는 순진함에 헛웃음이 나온 레골라스가 웃자 덩달아 그는 웃어보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은 외진 곳이었다. 궁까지 무사히 돌아갈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고 설사 당도한다고 해도 해결 방법은 없었다. 단 한가지 밖에.

"더러워.'
"미안해요."
"젠..흐..장"

짧은 욕지거리를 내 뱉으며 레골라스는 일어서려 노력했다. 몇번을 허우적대며 무너지기 일쑤였건만 왕자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벽에 기대다시피 몸을 가누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엘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세 걸음, 두 걸음, 한걸음.

거짓말처럼 잡힌 멱살에도 엘프는 놀라지 않았다. 그 멱살을 잡은 레골라스도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제어가 풀린 몸뚱이를 진정시켰다. 들린 얼굴에서 푸른 인광이 쏟아졌다. 이후를 각오해야 할거야. 엘프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레골라스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 앓는 소리가 잘게 울렸다. 미지의 엘프는 레골라스의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적막함이 감돌던 어둠숲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오래지 않아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달은 모든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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