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대로라면 안나타르는 눈웃음을 흘리며 스란두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긴 카우치 위에 앉아 가만히 턱을 괴고 바라보며 장난을 거는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피로가 쌓여 주무시고 계시다는 시종의 이야기에 스란두일은 좀더 거칠게 내딛는 발을 쿵쿵 울렸다. 아홉겹의 휘장. 새까만 커튼이 내려앉은 그의 안쪽. 불현듯 떠올려버린 진실에 소스라치듯 놀란 마음이 덩달아 쿵쿵 울렸다. 안나타르는 모르도르의 주인이며 꽃이라 불리우는 사내. 누구에게나 웃음을 팔고 사랑을 팔았다. 그것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여기면서도 스란두일은 마치 그를 연인 대하듯 품었다. 그 사랑이 갈 곳은 한 곳 밖에 없었는데.

스스로가 우스웠다. 말려들었구나. 그의 꿀 같은 속삭임에 날개를 적셔버렸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나는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없던 긴 회랑엔 방을 지키고 서있는 시종들이 그득했다. 그만큼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지고 아려왔다. 성의 주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서슬에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마지막 시종의 얼굴을 위아래로 훝으며 스란두일은 굳게 닫힌 문을 두 손으로 밀어제쳤다. 달콤한 향이 피어오르고 빛 한 조각 들지않는 곳, 안나타르의 침실이었다.

새까만 머리칼에 파뭍히기라도 한 듯, 안나타르는 잠들어 있었다. 잠들 때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며 흘리듯 속삭인 말은 진실인 듯 했다. 아무렇게나 펼쳐져 휘감긴 얇은 이불은 그가 숨 쉴때마다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상기된 뺨과 목. 열이 있는 듯 해 뻗어진 손 끝이 이마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안나타르의 눈이 떠졌다.
변명을 할 새도 없이 두개의 시선이 맞닥뜨렸다. 한참을 바라보다 몇번을 깜빡인 붉은색 눈동자는 그제서야 앞의 엘프가 누구인지 알아챈 모양인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스란두일은 무심히 그대로 손 끝에 힘주어 그를 눕혔다. 오래지 않아 다시 베게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슬그머니 쓸어내린 안나타르의 입술이 열렸다.

"이곳까지 어인일이십니까."
"아프다 들었다."
"별 일 아닙니다. 조금 피로가 쌓여 쉬고싶다 일렀을 뿐입니다."
"열은 없는데."
"다 내렸다 하질 않습니까. 아픈 것이 아닙니다."
"..."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를 슬쩍 한 쪽으로 몰아 가다듬고는 막무가내로 스란두일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그 서슬에 놀라 벨트를 부여잡은 손을 막은 스란두일은 안나타르에게 무슨 짓이냐며 소리를 높였다. 잠깐 머뭇거리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오늘은 입으로 해드리지요. 도저히 흥이 나질 않아서요. 그게 싫으시면.. 허벅지에라도."
"누가 하고 싶어서 왔다 했느냐?"
"그럼 왜 절 찾으셨습니까?"

평소처럼 돌아온 목소리. 동그랗게 떠진 눈이 스란두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잡혀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스란두일 또한 몸에 열이 올랐다. 말문이 막힌 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시선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가만히 움켜쥐었던 손을 제자리에 놓고 안나타르를 자리에 뉘인 스란두일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자신을 향해있는 시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몇 번이고 말을 고르던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걱정이 됐다."
"...제 걱정입니까?"
"여기에 아픈이가 또 있더냐."
"예하."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지금은 듣기 싫으니까."
"스란두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시선이 안나타르를 찍어눌렀다. 일국의 왕자의 이름은 쉽게 불리라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조금 저자세를 보였다 해서 이리도 방만하게 구는것인가.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다 침실에서만큼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것을 허락했다는 것이 기억난 스란두일은 곧 사나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천천히 다가온 손끝이 스란두일의 손을 어루만졌다.

"처음입니다. 이리 걱정해주신 분은."
"..내 앞에서 다른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릴 셈이냐."
"그럴리가요."

기뻐서 그럽니다. 순수하게 주억거리는 말틈에 웃음이 숨겨져 있었다. 다시 시선을 피한 얼굴이 이번엔 조금 풀어졌다. 여전히 스란두일의 손 끝을 만지작거리며 안나타르는 말을 이었다.

"조금 피곤합니다."
"얼굴을 보았으니 이제 되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성큼 일어나려는데 손이 끌려오질 않았다. 강하게 부여잡고 있는 안나타르의 손이 절로 딸려 올라왔다. 다시 내려다 보는 스란두일에게 안나타르는 평소처럼 야살을 부리는 모습이 아닌 수줍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구한 부탁입니다만, 잠 들때 까지만이라도 곁에 있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꿈을 팔고 온기를 파는 곳에서 날더러 시중을 들어달라."
"그리하면 아니됩니까."

버릇없는 말투였지만 잡고있던 손이 떨려왔다. 오늘따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간단히 뿌리치면 될 작은 힘인데 어째서인지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필시 열이 오른 목소리 탓이리라. 실없는 생각을 이으며 한참을 고민하던 스란두일은 그의 손을 놓고 말없이 로브를 벗었다.
겉옷을 벗고 간단한 차림으로 스란두일은 안나타르가 누워있던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옷깃에 스민 한기에 기분이 좋은지 안나타르의 손 끝이 스란두일을 더듬어 올랐다. 하지만 그 마저도 오래지 않아 제지당했다. 얌전히 양 손을 그러모아 배 위에 온전히 놓아둔 스란두일이 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눈을 붙이거라."
"어린아이라도 된 것 같습니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얼굴은 새빨갛게 되어선. 어린아이라 해도 믿겠구나."
"예하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것은 아닐런지요."

올려다보는 시선의 붉은색은 변함이 없었건만, 그 속에 담긴 물음은 일전의 눈물을 떠오르게 했다.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스란두일이 큰 손으로 그 눈을 덮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거라."
"잠이 들면 가실겁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더듬거리며 얼굴로 올라와선 눈을 가린 손 끝을 움켜쥔 안나타르는 그대로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다섯 손가락의 끝에 조심히 입을 맞추며 스란두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때보다 맑아보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예하."
"..좋은 꿈 꾸거라."

오랜 시간 함께 밤을 보내면서도 인사를 건네본 것은 처음이었다. 살풋 휘어지는 눈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다시금 자신을 현혹하는 요망한 눈을 가렸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손 위에 안나타르의 손이 얹혔다. 성의 가장 깊은 곳, 모르도르의 주인이라 불리우는 자의 침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간신히 들리는 침대 위에는 어느새 두 명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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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가운 말을 담지못한 입술이 몇 번이고 눈가를 훝었다. 흐으.. 큿, 신음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작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그리고 살이 부딧혀 나는 원색적인 소리가 어우러져 귓가를 울렸다. 바르르 떨리는 귀 끝을 핥아내리며 나는 애써 눈을 감았다. 울 것 처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이다지도 이기적이다. 널 두고 갈 용기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네 손을 잡을 용기도 없으면서 나는 이렇게 네게 몸으로 절실히 이야기했다. 기어코 맑은 눈에 눈물이 차올라 흘러내릴 때까지 나는 네 몸에 나를 새겼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삼키던 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새빨갛게 열오른 얼굴로 다가와 입술을 말아물었다. 으득, 생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싸늘한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밀쳐낼 수 없었다. 마주친 너의 시선은 복잡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슬쩍 피가 고인 부위를 매만지던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또 다시는 이를 세웠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달랐다.

마치 키스마크라도 남기듯, 너는 정성을 다해 상처 부위를 짓씹었다. 피가 빨리고 상처가 후벼지는 느낌에 아찔해진 나는 엉긴 팔을 그대로 끌어당겨 중심을 맞추었다. 물어뜯겨도 씹어먹혀도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것으로 네 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너의 피와 나의 피가 섞이면 나는 영생을 살지 않아도 될까?"
"...레골라스."
"그러면 나는 네가 죽을때 함께할 수 있을지 몰라."
"......"
"나 홀로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 해줘. 응?"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얼굴은 서러움까지 서려있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앞을 가렸고 원망하듯 움켜쥔 어깨를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항변하는 이의 목소리가, 눈빛이, 일그러지는 얼굴이 너무도 가슴아팠다. 끌어안은 품에서 너는 벗어나려 애썼다. 맞닿은 몸뚱아리 위로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말없이 쏟아지는 폭력을 견뎠다.  

"달콤한 꿀을 바른 거짓이라도 속삭여줘."
"미안."
"그렇게 쉽게 사과하지 마."
"미안. 레골라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나를.. 위해주면 안돼?"

흔들리는 옅은 빛의 바다의 눈동자는 슬픈 말들을 내뱉었다. 세치 혀의 농간에 놀아날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처럼 간절한 시선이 내게 비수처럼 꽂혔다. 하지만 그 간단한 소망조차 들어줄 수 없었다. 나는 적어도 네게 거짓을 고하고 싶진 않았다.

"미안."

차라리 웃어보인 나의 얼굴에 너는 말없이 울어버렸다. 급하게 다시 겹쳐진 입술에선 아릿한 피맛이 났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너와 나의 관계. 나는 맹렬히 너를 탐했다. 그것은 지독히 쓰고도 슬픈 입맞춤이었다.  

 

 

*끼님의 설정..인데 전혀..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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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고 싶어서."

몇 십년 만에 찾아온 이는 살갑게 인사를 할 새도 없이 한마디 툭 던져놓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소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리븐델의 군주는 아무말 없이 꽤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당황하며 안절부절하고 있는 가신들에게 동편 가장 높고 넓은 방을 준비시키라 명한 엘론드는 살뜰히 여독에 지친 어둠숲의 전사들까지 챙겼고 할 일들 배정받은 인원이 뿔뿔히 흩어지고 나서야 테라스에 멍하니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숲의 왕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같이 산책이라도 하겠는가?"
"그러지요."

꼿꼿하게 세워진 등과 평소같은 시큰둥한 표정은 무심하고 귀찮아 보였음에도 스란두일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불시의 방문에도 늘 자기집인것 같은 당당한 모습에 속으로 웃어보인 엘론드는 더 이상 거리가 벌어지게 전에 그가 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븐델의 겨울. 새하얗게 내려앉은 눈꽃은 나뭇가지를 꽃피웠고 투명한 햇살을 반사하는 얼음들은 은밀한 계곡을 더욱 신비롭게 감쌌다. 봄이 지척이건만 아직까지 입김을 불면 뽀얗게 피어나는 한기는 가벼운 차림의 두 엘프로드의 귀 끝을 붉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먼저 길을 잡는 이의 발걸음은 도통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스란두일은 이렇게 기별도 없이 훌쩍 리븐델을 찾았다. 가을이 보고 싶어서. 찬란한 햇살이 보고 싶어서. 꽃들이 보고 싶어서. 이유는 다양했지만 매번 달랐고 시기도 제각각 이었다. 처음에는 뜻하지 않은 방문에 매우 당황했었지만 이제는 이런 자유분방함 또한 익숙해졌다. 하기사 이렇게 제멋대로 먼저 찾아오는 일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어지러운 시기에 마음 편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만드는 일조차 엘론드는 만들 수 없었을 터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함께 걷다보면 상대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는 볼주머니 가득 도토리를 깨물은 다람쥐를 관찰 할 때도 있었고, 맑은 소리를 내며 얼음 사이를 흘러가는 냇물을 한참이고 주시하기도 했다. 계곡 굽이굽이 노랫소리가 흐르고 다정함과 온기가 가득한 리븐델. 같은 것들이 있지만 또 전혀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둠숲을 알고 있는 엘론드는 그가 이렇게 찾아올 때 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함께 길을 걷곤했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저 지나버린 영광을 그리워 하는 걸까. 한번도 묻지 못한 질문은 늘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러나 스란두일 역시 그 긴 세월동안 한번도 입을 열지 않은 채, 함께 산책하는 시간만을 온전히 즐겼기에 그 질문이 서로의 입 밖으로 나오는 법은 없었다.

긴 산책이 끝나면 그때부터 진짜 손님 맞이가 시작되는 법이었다. 스란두일은 가신들을 시켜 간단해 보이는 짐들 속에서는 귀한 술들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으로 지체된 로드의 일정을 끼워맞추다가 옮겨지는 '선물'들을 발견하곤 낭패감에 부들부들 떨리는 에레스토르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리며 엘론드는 그저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일정을 비워줘야겠네. 울상인 모습으로 무어라 항변하려는 것을 앞서 가로채 데려가는 글로르핀델의 눈웃음을 받으며 엘론드는 기지개를 펴 몸의 무거운 기운을 털어냈다. 제멋대로 쳐들어온 손님은 어자피 구슬리거나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 이렇게 된 이상 몸도 마음도 편히 늘어지고만 싶었다. 자잘한 일들을 마무리지은 엘론드의 발걸음이 동편 서재로 향했다. 오랫만의 휴식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실컷 보셨습니까?"
"아니,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사방에 널린것이 눈이니 질릴만큼 가득 담아가시지요."
"내가 바라는 것은 함부로 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낮부터 이어진 술자리 덕분에 대화소재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종래에는 대개 그러하듯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가벼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여전히 두리뭉실한 대답에 엘론드는 말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워진 잔을 채워주었다. 굳이 말 하지 않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에 스란두일은 조용히 웃으며 열린 창에서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다가와 부드럽게 잔을 감아쥐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놀랄만큼 우아해서 엘론드는 의자에 기대어 저도 모르게 도톰하게 오르내리는 목울대를 주시했다.
절로 올라가는 시선의 끝에는 시리도록 찬 기운을 내뿜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자신을 힐책하고 위협하는 것 같은 드넓은 바다. 폭풍의 기운을 품고 있는 다정한 존재. 실례라는 것을 잊은 채 엘론드는 그 바다를 한참동안이나 주시했다. 그러다 퍼뜩 넋을 잃고 바라본 그것이 스란두일의 눈동자라는 것을 깨달은 엘론드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자신의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따랐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 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쩐지 귓가에서 파도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대는 원하는 것이 없나?"

침묵을 깬 스란두일의 목소리는 단아했다. 낮부터 술잔을 기울였는데 마신 술의 향기조차 배이지 않은 단정함에 엘론드는 기분이 묘해졌다. 아까부터 조금씩 올라오는 열기에 흔들리고 있는것은 자신 혼자 뿐인 것 만 같았다.

"그런 것이 있어야 합니까?"
"자네는 대관절 무슨 재미로 숨을 쉬고 이 생을 살아가는지 궁금해."
"그런 욕구가 들지 않는다 해도 살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바다는 어떠한가. 자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나?"

속내가 들킨 모양새로 화들짝 놀란 엘론드가 스란두일과 눈을 마주쳤다. 동요하듯 일렁이는 바다. 그 곁에 선 이 조차 두근거림을 갖게하는 광활함. 이런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진득하게 주시하는 모습에 엘론드는 늘 스란두일에게 어려움을 느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늘 남을 바라보고 관찰하며 살아온 자신에게 이렇듯 반대로 관찰당하는 시선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한동안 넋을 놓고 질문을 곱씹던 엘론드의 입술이 어렵게 열렸다,

"바다의 속삭임에서 자유로운 요정도 있습니까."
"그대 입으로 방금 욕구가 없다고 했으면서."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해진 답이 있을리 없잖나. 그대가 원하는 것을 물었으니 답은 그대가 알고 있겠지."
"그럼 반대로 물어보죠. 당신은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눈이라고 했잖아?"
"..네?"
"불멸의 삶이라고 해서 원하는 것이 하나일 리 없지. 시시때때로 변하기도 하고 특정 한가지가 오랜시간 머릿속을 점령하는 경우도 있어. 자네는 안 그런가?"
"..그래서 그 눈을 보기 위해서 이곳까지 오셨다고요."
"남는게 시간이니 이런 사치정도야 소소한 것 아닌가."
"원하시는 대로 늘 하실 수 있는 점 하나는 부럽군요."
"누가 자네에게 하지 말라고 명령이라도 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
"축복받은 일루바타르의 자손이라 해도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것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요."

잠시 목을 축인 엘론드는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요정은 상실이라는 감정을 아예 몰랐을겁니다."

새로운 병을 따내며 제멋대로 잔을 채우는 엘론드를 바라보며 스란두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늘히 굳힌 미간의 주름이 누군가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잔을 빙빙 돌려 향을 퍼지게 만들던 엘론드의 잔을 빼앗은 스란두일의 손은 망설이지 않고 엘론드의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두서너걸음 앞질러 가는 그 버릇은 술을 마셔도 변하는 법이 없지."

불시의 기습은 기분나빠할 겨를도 없이 헛웃음으로 번졌다. 이 나이 먹고도 딱콩을 맞을 줄은 몰랐지. 경미한 고통이 번지는 이마를 몇번 문지른 엘론드가 앞에서 무뚝뚝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스란두일을 바라보았다.

"번번이 절 휘두르려 드는 당신만 하겠습니까."
"이제는 남의 탓까지 하는군?"
"취했나 보지요. 말꼬리를 잡고 늘이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간만의 술자리라 몸이 따라주질 않나 봅니다?"
"남의 일인양 이야기하는 버릇도 버릇이지만 그 늙은이 행세는 그만둬. 쉽게 인정하는게 더 재미없어. 알아? 차라리 취하지 않았다고 우겨볼 생각은 들지 않는거야?"
"설사 우긴다고 해도 당신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런 자리에서조차 절 질책하는 이는 당신밖에 없을테니까".
"그리웠다고 돌려 말하지 말게. 좋아할지도 몰라."

농담처럼 던져진 말에 엘론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희미하게 감돌고 있는 웃음에 덩달아 마음이 풀어진 엘론드는 우울한 생각들을 단숨에 털어버리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그리웠다고 고백하면 좀 더 자주 오십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절대 말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끄러우니까요."

풀린 얼굴근육이 보기좋은 모습을 만들었다. 취기가 돌아 어지러운지 엘론드는 탁자에 턱을 괴고 마주한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되려 미간을 찌푸린 것은 스란두일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나를 설레게 만들지?"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꽤나 좋은 핑계이질 않습니까."
"이건 뭐 대놓고 유혹이군."
"그런 점을 이용하는 당신이 제일 나쁜거 아닙니까?"
"나는 원래 성격이 이러니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던지는 말에 엘론드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스란두일 역시 활짝 웃고 있었다. 몇 백년을 이어져 온 이상한 방문.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제멋대로 쳐들어와선 까다로운 요구가 많은 어둠숲의 군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는 좋은 타이밍과 좋은 시기에 맞추어 방문한다는 것을 엘론드는 알고 있었다. 한없이 피곤하고 모든걸 놓아버리고 잠들고 싶을 무렵에만 귀신같이 찾아오는 손님은 딱딱한 듯 보여도 배려를 할 줄 알았고 제멋대로인척 자신을 휘두르면서도 오랜 친우처럼 곁에 있어주었다. 한바탕 크게 웃어버리고 개운한 표정을 짓던 엘론드가 슬며시 눈을 감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더 이상은 정말로 안되겠습니다. 내일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내게는 좋은 일이로군. 그대가 깨어날 때 까지 품에 안고 괴롭혀 줄 수 있을테니 말이야."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기 싫어서라도 일찍 일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가슴아픈 말을 내뱉는 입술과 착한 손의 밸런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오늘의 마지막 잔이라는 의미겠지요. 따라주시겠습니까."
"미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빼앗긴 잔 대신 스란두일의 빈 잔을 움켜쥔 채, 엘론드는 배시시 웃었다. 상기된 얼굴, 기분 좋아보이는 웃음. 건배를 제의하는 엘론드의 모습에 한숨처럼 단숨을 내쉰 스란두일이 못 이기는 척 잔을 들었다. 흔들리는 잔 속에 푸른색과 청회색의 눈동자가 어룽거렸다. 그리고 한순간이나마 둘은 짧게 겹쳤다.


 

◈ ◈ ◈

 


의자에 기대어 눈감은 엘론드의 얼굴을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부축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추켜세웠다. 슬쩍 품에 안고 겹친 온기를 온전히 지탱하고서야 얼굴에는 다시 희미한 웃음이 어렸다. 새벽의 한기가 몸에 스쳤는지 엘론드는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고, 온전히 서로를 끌어안게 된 두 요정의 몸은 짝이라도 되는 것 처럼 꾹 맞물렸다. 태평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기대했었는데. 너무 큰 기대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연중 무언가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에 스란두일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대의 말이 맞아. 엘론드. 무한한 생명을 가졌다고 해도 가질수 없는 것은 있기 마련이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던 손 끝이 엘론드의 이마선을 따라 관자놀이에 닿았다. 곱게 감겨진 먹색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스란두일은 조용히 속삭였다. 눈을 보러 왔어. 엘론드. 하지만 엘론드는 고르게 안정된 숨을 내쉬며 조금 몸을 움직였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눈감은 이여. 어찌하여 나를 보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어쩐지 마음은 편해졌다. 오늘로 부족하면 내일도 보고, 내일로도 부족하면 만족할때까지 마음에 담으면 될 일이니까. 리븐델의 현자의 조언은 여간해서 틀리는 법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스란두일은 점차 기울어지는 자세를 고쳐잡고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은 눈을 뜨자마자 눈을 보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대로 해야겠다며 조용히 웃는 그림자 사이로 새벽의 별빛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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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거라. 엘론드."

어슴푸레한 어둠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흐릿한 시야 가득 걱정스러운 얼굴이 들어왔다.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엘론드는 건네진 물 잔을 어렵사리 쥐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는 것을 보니 필시 악몽이라도 꾸었으리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하며 물을 마신 엘론드는 눈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지 궁금한 게로구나."
"그 말씀대로입니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문득 복도를 지나는데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겠니. 누군가 침입이라도 한 줄 알고 놀랬단다. 무뢰배가 아니라 악몽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내 덕분에 깨어났으니 다행이지 않냐 며 웃어 보이는 길갈라드의 표정에는 악의라곤 없었기에 엘론드는 멈칫거렸지만 한숨을 쉬며 자리를 정리하곤 일어서기로 했다. 좀 더 자지 않고. 짧은 만류가 들려왔지만 어차피 진심이 아니란 걸 알기에 엘론드는 말없이 탁자에 놓인 머리핀을 들고 가볍게 묶어 머리를 고정시켰다.

"어차피 잠들어 있어도 깨우러 오셨을 거잖습니까."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이다지도 신뢰가 없다니."
"늘 그러셨으니 까요."
"그랬느냐?"
"이제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 달밤에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이라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역시 린돈의 일등 가신답구나. 주군의 마음을 이토록 헤아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그동안 많이 부족했지?"
"....참으로 중한 것을 빨리도 깨달으십니다."

살짝 질린 눈빛으로 바라보면 금세 상처받은 얼굴로 칭찬을 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둥. 주군의 위엄이 떨어졌다는 둥. 이제는 애정이 식었다는 이상한 말들을 내 뱉을게 분명해 보여 엘론드는 상대치 않고 그저 한숨을 쉬며 옷장으로 향했다. 멀리 나갈 눈치는 아니었으니 그저 가벼운 튜닉에 로브만을 걸치고 여벌의 로브를 가지고 돌아와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주군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순식간에 돌아온 시선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엘론드를 바라보았지만 엘론드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로브를 여미고 작은 핀을 꽂아 제대로 주군의 어깨 언저리에 고정을 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자꾸 미끄러지는 손가락은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장식까지 무사히 달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꼼꼼히 매듭을 살핀 뒤 고개를 들어 올린 엘론드는 끈질기게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길갈라드와 그제야 얼굴을 마주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그냥. 이리 편하게 얼굴을 마주한 것이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바빴으니까요. 더군다나 최근에는 문안인사조차 드리지 못할 정도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리 토라진 것이더냐."

슬그머니 내밀어진 손을 엘론드는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평소였다면 웃어넘기며 당치 않다는 완곡한 말들을 내뱉어야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손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엘론드는 기어이 마음을 담았던 말들을 삼키고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온기는 온 몸을 휘감은 것 처럼 든든했지만 마음이 어째 편하질 않았다. 놓지 않을 것 처럼 맞물린 손을 강하게 끌어당긴 길갈라드는 그저 웃으며 밖으로 엘론드를 이끌었다. 앞을 향해 걷는 길갈라드의 뒷모습은 평소답지 않게 엘론드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고 엘론드는 그 등을 주시하며 조용히 주군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너와 함께 정원을 걷는 것도 꽤 오랜만이구나."
"앞으로 종종 나오시면 됩니다."

"말은 고운데 어째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걸?"
"...이제껏 싫다 한 적은 없습니다만."
"녀석. 살갑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구나."
"어릴 때부터 이 성격으로 살아왔으니 당연하지요."
"그래도 그때는 날 보며 예쁘게도 웃었단다."

한참을 걷다가 정원 깊숙이 들어서면서 길갈라드는 엘론드를 바라보며 짓궂게 웃어보였다. 설핏 붉어지는 뺨을 숨길 곳이 없었다. 애꿎게 잡혀있는 손을 꼼지락거리면 길갈라드는 모른 척 방향을 틀어주었다. 엘론드는 그 틈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솟구친 열기를 바람결에 흩날렸다. 늘 바라보던 모습인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고 알 수 없는 열기가 행동에 배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크게 고동치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크게 심호흡 한 엘론드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좋은 기분은 발걸음마저 가볍게 만들었지만 어쩐지 뭉클하게 목이 메었다.

물이 흐르는 정원 근처에 도달하고 나서야 손을 놓아준 길 갈라드는 부옇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초봄이라고는 하나 린돈의 북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냉기를 품었고 새벽녘 밝아오는 빛은 추위에 시달린 몸을 데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엘론드는 무심코 떨려오는 몸을 감쌌다. 한참을 그렇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엘론드는 길갈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막 엘론드가 걸쳐준 로브를 벗어 자신까지 감싸려 할 때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추워서 그런다."
"..추우시면 이만 침소로 돌아가시지요."
"혹 나랑 있는 것이 싫으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엘론드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자신의 주군은 질문이 많았다. 게다가 모두가 가벼이 답하지 못할 질문들이었다. 짙은 회갈색의 눈동자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엔 들뜬 마음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해보였다. 무어라 대답을 드려야 할까. 한참 고민하면서도 쉬이 열리지 않는 입을 바라보던 길갈라드는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로브를 둘렀고 엘론드가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품에 가둬버렸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스러워 엘론드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애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싫으면 안 되는데..어쩌지?"

급히 떠진 눈동자가 다시 마주쳤다. 방금 전의 짓궂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대왕은 슬픈 눈으로 엘론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긴 것은 길갈라드 뿐만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새들이 지저귀던 정원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속에 자신과 주군이 있었다. 그리고 엘론드는 금세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이건..

"제가.. 주군을.. 싫어할 리가.."

없질 않습니까. 악물은 잇새로 그렇게 말했을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시라도 놓치면 주군의 모습이 사라져 버릴까봐 엘론드는 맑아져 버린 머릿속을 억지로 헝클어뜨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보려 했지만 엘론드는 손아귀에 들어온 그의 옷을 움켜쥐고 무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 처럼 파르르 떨었다. 크게 떠진 눈은 길갈라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떨림에 일자로 우묵하게 닫힌 입술은 핏기 없이 질려 있었다. 로브가 구겨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자신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길갈라드는 그제야 설핏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엘론드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혹 날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할까봐 조금은 걱정했단다."

생전의 다정한 말투 그대로였다. 답하려 열린 입에서 어쩐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가슴 깊이 숨겨둔 심장만이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 엘론드를 안으며 길 갈라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맞닿은 온기와 어깨를 끌어안은 묵직함이 마치 꿈만 같았다. 아니 이건 꿈이었다. 잔인하고도 슬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원했던 바람. 현실을 인지한 몸은 성실히 반응했다. 왈칵 뜨거움이 몰려왔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모습은 어릴 적 자신을 어르던 서투름 그대로라는 것을 엘론드는 깨달았다. 혹 나를 잊었을까 싶어 두려웠다며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제야 외면하고픈 현실을 전했다. 말 하지 말지. 아무 말도 하지 말지. 언제까지나 그대의 뒤를 따를 수 있었는데. 모른 척 퉁명스레 대답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곁에 있을 수 있었는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엘론드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안쓰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쉰 길갈라드는 선한 눈매를 늘어뜨리며 천천히 엘론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나하나 기억하겠다는 듯, 단단한 손끝이 이마부터 턱까지 세밀히 오갔다. 많이 자랐구나. 좀 더 어른스러워졌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속에 박혔다. 마음 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소망들이 간절히 듣고 싶어 했던 이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길갈라드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부여잡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간절하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엘론드."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억지로 참아내는 통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내밀어진 손가락이 눈가를 가볍게 쓸어내리면 그제서야 그 손끝을 타고 터진 둑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달려든 품 안이 따듯해서, 너무나도 따듯해서 엘론드는 소리 내어 엉엉 울어버렸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엘론드는 길갈라드의 품에 안긴 채 서럽게 울었다.


"떠나지 마세요."
"엘론드."
"에레이니온. 제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다. 엘론드."
"아니요..가지 마세요.. 이렇게..이렇게..곁에서."

또다시 가득한 눈물이 흘러내리자 길갈라드는 슬픈 눈으로 엘론드를 바라보다 고개 숙여 지그시 입술을 맞댔다. 품에서 벗어나려는 엘론드를 꼭 끌어안은 채,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귀한 대지에 길갈라드는 조심히 발을 디뎠다. 천천히 떼어진 입술이 가파른 숨결에 오물거렸고 길갈라드는 그것을 바라보며 또 한 번 입술을 겹쳐 올렸다. 그리던 이와의 첫 입맞춤이 꿈꿔왔던 달콤함이 아닌 아련한 눈물맛이 나는 것을 느끼며 엘론드는 다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웬일로 늦잠을 다 주무십니다."

눈가에 따스한 빛이 간질거리며 돌아다녔다. 밤새 울었는지 부어버린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엘론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땀에 젖은 듯 무거운 것을 보니 필시 악몽이라도 꾼 듯 싶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 컵을 건네며 웃어 보인 글로르핀델은 재빠르게 창문을 활짝 열어 늦은 주군의 아침을 도왔다. 침대 근처로 다가와 열을 재기도 하며 장난스레 농을 걸어오는 넉살좋은 모습에 엘론드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느지막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설마 긴장하신 겁니까?"
".. 그럴리가요."
"밤새 뒤척이시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것 같은데요."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만둬주세요. 글로르핀델. 열 달 내내 놀림을 받았더니 벌써 혼례를 치른 느낌입니다."
"모두가 기뻐서 그런 것을요. 하지만 이 재미있는 장난도 오늘로 끝이네요."

싱긋, 만면에 미소를 띤 글로르핀델이 엘론드의 손을 잡았다. 덤덤하게 바라보는 엘론드의 눈길을 받으며 머쓱한 모습으로 고민하던 이는 침대 위 탁자에 놓아둔 상자를 끌어 엘론드의 손 위에 놓았다. 상급왕의 문양이 새겨진 푸른빛의 작은 상자. 가만히 상자를 바라보던 엘론드가 고개를 들자 조심스레 글로르핀델은 입을 열었다.

"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반지를 두개나 올리기엔 손이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공께서 이리 가져오신걸 보면 제가 어찌 답할지 예견하셨다는 거겠죠."
"한번 맘먹으신 건 설득해봐야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요."

평온하게 이야기하는 엘론드를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글로르핀델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곧게 편 상태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조금 허리를 숙였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마이 로드. 밝은 금색의 머리칼 한올한올이 흔들리며 빛을 흩뿌렸다. 그 환함에 눈이 부신 듯, 엘론드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은연 중 사라져가는 빛무리 속에서 그리운 얼굴이 스쳤다. 그 생각과 동시에 손에 들린 작은 상자 속 반지의 무게가 좀 더 무거워 진 것 처럼 느껴졌지만 담담한 얼굴로 엘론드는 상자를 꼭 쥔 채 입가에 미소를 올려 화답했다. 따사로운 기운이 가득한 아름다운 봄. 임라드리스의 새 안주인을 맞이하기에 더할 나 위없이 좋은 봄날이었다.

 

 

 

 

꿈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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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집이라 불리우는 엘론드의 자택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고 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어떠한 손님이 방문하고 머무르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것은 임라드리스의 불문율. 그저 그들은 마음과 몸이 고단한 손님일 뿐, 스스로가 원한다면 꽤나 오랜시간동안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임라드리스의 로드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몸과 마음의 안정.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을 얻지 못한 이는 쉬이 임라드리스의 울타리를 마음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여름의 태양이 따사로이 나뭇잎 위에 쏟아질 무렾, 동편 서재에는 한 손님이 자리를 잡았다. 새까만 머리칼은 흑단과도 같았지만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고, 항상 기괴한 모양의 짐을 등에 멘 채 다니는 그는 한번도 스스로를 소개한 적이 없었기에 엘프들은 그를 일컬어 짐을 진 자 라고 불렀다. 초췌한 모습으로 다 떨어진 옷을 주워입으며 한낮에 잠시 볕을 쬐러 나오는 것 외에 그가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 없는 엘프들은 조금씩 커져가는 호기심을 억누르곤 신중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매서운 눈매. 한때 검을 잡은 흔적이 있는 손.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는 등에 짊어진 짐.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어린 엘프들은 묘한 분위기가 있다며 소근거렸고 연륜이 넘치는 이들은 그저 기억속에 그려진 과거의 누군가를 설핏 떠올리며 말을 아꼈다.

엘론드는 먼 길을 돌아 이곳을 찾아온 이들을 늘 환영했다. 해야할 일들이 있었고 바쁜 시간들이었지만 그에게 임라드리스를 찾아온 이들이 주는 의미는 꽤나 각별해 보였다. 틈틈히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베풀었다. 그 기간은 길기도 했지만 짧기도 했다. 더러는 몇 개월 씩 걸리는 일도 있었지만 머무르는 이들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 시간을 기다렸다. 영겁을 사는 엘프들이 대부분인 이 곳에서 임라드리스를 찾아올 정도로 지친 이들 이었다면 기다림의 시간이 결코 지루한 법은 없었고 생각보다 임라드리스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남들과 다르게 방 안에서 늘 식사를 하고 타인과 어울리지 않았던 짐을 진 자는 시중을 들러 방문한 엘프에게 차례가 당도했음을 전해들었다. 누군가가 들어와도 꿈쩍도 안하던 몸이 갑작스레 일어나 말을 전한 그를 바라보았다. 결코 작지 않은 덩치의 몸은 상당히 마른 상태였지만 상대를 위압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끄러미 작은 아이를 바라보던 짐을 진 자는 고맙다며 한마디 말을 건네곤 평소처럼 다시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놀랄 정도로 고운 미성. 화들짝 붉어진 뺨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방문을 닫은 어린 엘프는 자신의 동기들에게 달려가 재잘재잘 새로운 정보를 떠들어댔다. 우연이었을지 필연이었을지는 몰랐으나 그 밤, 짐을 진 자의 창 밖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유독 달콤하고도 아름다운 음색을 뽐내고 있었다.

해가 높다랗게 솟아 대지를 비추어내고 있을 시간에 엘론드는 오후에 훝어보아야 할 서류들을 분류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었다. 천천히 종이를 넘겨 미리 적어둔 정보를 확인한 엘론드의 미간에 가벼운 주름이 아로새겨졌다. 등에 짐을 진 자. 간결하게 씌인 필체는 꾹꾹 눌려 단단해 보였지만 속에 담긴 뜻은 꽤나 무섭고도 슬픈 것이었다. 눈을 감아 사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임라드리스의 로드는 등을 꼿꼿하게 편 채, 방문을 나섰다.

가볍게 두드린 문의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매번 이렇습니다. 작게 속삭이며 문을 밀치는 린디르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엘론드는 곧 침대위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아이를 내보낸 뒤 임라드리스의 로드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좋은 낮입니다.
새들이 지져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등돌린 이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곁으로 다가가 앞으로 향하려는 순간 부스스 고개를 돌린 이의 모습에 엘론드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머릿속은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는 마치 바닥에 박혀버린 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짐을 진 자는 눈꼬리를 휘며 그에게 웃어보였다. 내게서, 우리에게서 도망쳐라. 엘론드. 결코 잊혀지지 않을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심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끼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론드의 앞에 다가섰고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의 몸이 숙여져 예를 갖추었다.

"우리의 만남이 별과 같이 빛납니다. 치유와 안식의 저택 임라드리스의 로드 엘론드. 그대와 이렇게 마주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나는 길을 지나는 떠돌이. 세월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름 없는 미천한 자로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지요. 그대의 저택에서는 나를 짐을 진 자라고 부르기도 한다더군요. 그 또한 나를 표현하기에 나쁘지 않은 이름입니다. 수백가지의 이름 중 그대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나를 부르세요. 그대의 입술 끝에서 소리가 되어 나올 때…"
"그만두세요. 마글로르."

힘이 들어간 미간은 도통 풀릴 줄을 몰랐다. 단호하게 내뱉은 엘론드의 얼굴을 물끄럼히 바라보던 마글로르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 이름을 선택할 줄은 몰랐는데. 더듬더듬 이어지던 신다린을 멈춘 채 이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퀘냐를 듣는 순간 엘론드는 그동안 잊고 있던 시간들이 무색하리만치 되살아나는것을 느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 표정은 엘론드의 기억에 있는 이와 같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빛바랜 로브. 그 속에 단단히 만져지는 몸. 환영이 아닌 현실이란 것을 깨달은 손은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작게 숨을 멈춘 채, 엘론드의 품에 안겨 가만히 온기를 나누어 받는 몸뚱이는 그저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 이었다.

"오랫만에 만난 이와 해야하는 인사는 잊어버렸어."
"사실은 배우지도 않았던 것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나에게 있어서 도통 쓸모 없는 언어였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신다린을 가르쳐주지도 않았었다는 점이 이해가 될 순 없겠죠. 덕분에 다 커서 공부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논리정연하게 말 할 줄도 아는구나."
"어릴 적의 저를 기억하고 있는 이가 이제 아무도 없으니 말입니다만 저는 어릴때부터 꽤 똑똑했거든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 그 점은 딱히 부인하고 싶진 않아. 너와 엘로스가 영민했다는 건 형님과 내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며 툭툭 내 뱉던 말들은 형님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끊겨버렸다. 다시금 긴장한 등을 천천히 쓰다듬던 마글로르가 아릿하게 미소지었다. 아직도 내 눈에는 어린 아이인데.. 후회가 잔뜩 묻은 목소리가 우울하게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끄집어올려져 날뛰었다.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심장박동에 엘론드의 얼굴이 한껏 흐려졌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다. 자칫 호흡이 흐트러지면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절박함에 엘론드는 끌어안은 팔에 힘을주었다. 그러나 한번 흥분해버린 몸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가빠지는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글로르는 천천히 엘론드의 등을 쓰다듬었다. 툭. 툭. 툭. 툭. 일정하게 닿아오는 손의 무게에 거짓말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진정 할 수가 없었다.

울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곤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엘론드는 옴짝달싹 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준 채, 놓칠까봐 안달내는 어린아이처럼 마글로르를 움켜쥐었다. 소리내지 못한 채, 눈물만을 떨구어내는 그 모습을 도닥이며 마글로르는 아득히 먼 기억을 더듬어 떠올렸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이는 한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하물며 먼저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 적도 없었다. 그러했으니 이토록 강하게 자신을 끌어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마글로르였다. 이제와서 무슨 낯으로 찾아온거냐며 호통을 치고 박대를 당했어도 모든 것을 감내할 참이었는데.. 마치 어릴적의 그 아이는 어른이었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이가 아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글로르는 몇 번이고 엘론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한 번 쯤은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이전과 같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마글로르의 앞에서 엘론드는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한층 길어진 머리칼과 깊어진 눈매가 다시 가슴속에 새겨졌다. 보고싶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입술이 몇번이고 달싹였지만 끝내 목울대는 속엣말을 뱉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엘프는 그저 눈앞에 자리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꼬옥 잡은 두 손이 거두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금 곤란하게 웃어보인 마글로르는 천천히 자신의 손에서 엘론드의 손을 떼어냈다.

"못 본 새에 울보가 되어버렸어."
"누구 덕인데요. 잘 오셨습니다."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지만 전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죄."

툭 던져진 단어에 엘론드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말씀대로 그저 흘러간 시간일 뿐 입니다. 뒤늦은 변명이라도 대신 하는 것 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엘론드를 마글로르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너라면 그렇게 말을 할 줄 알았지. 하지만 내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해. 물론 그 사죄를 한다고 해서 내가 행한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테지만 말이야."
"마글로르."
"긴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내가 응당 해야할 일 중 하나였고 넬랴핀웨의 뜻이기도 했다."
"아저씨..께서.."
"물론 말로써 내뱉진 않았지. 형님의 성격을 알고 있잖니?"
"그렇지요."

씁쓸하게 웃어보이는 엘론드의 모습을 바라보던 마글로르는 곁에서 늘 등에 지고 다니던 괴이한 물건을 끌어왔다. 세월이 그대로 담긴 천들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집중하는 통에 엘론드의 시선이 마글로르의 손 끝에 닿았다.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깨끗한 천으로 감싸인 그것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크기였다. 눈에띄게 작고 가벼워진 덩어리 속에서 마글로르는 남은 것들을 걷어내 오랜 시간동안 등에 지고 다니던 것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작은 하프였다.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어릴 적 그것으로 자장가를 들려주셨죠."
"우리에게 살갑게 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너와 엘로스는 늘 노래를 들어야 잠을 잤었지."
"알고 계셨습니까?"
"꾹 다물어진 아이의 입술 속에 숨은 말들을 찾는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단다. 오히려 나의 동생들에 비하면 너희는 유순한 사슴과도 같았어."
"생각만큼 살갑게 대해 주시지 않았던 것은 아저씨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서로가 너무나도 어리고 철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적당한 표현이네요."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것이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가지가 남아 있었어."
"...."
"듣기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듣고 싶습니다."

투박하게 변해버린 손이 하프의 줄을 더듬어 음을 맞추었다. 퍽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처럼 보이는 하프에는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보였지만 보이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맑은 음색을 뽑아낼 줄 알았다. 어릴 적 그리도 커 보였던 하프가 이제는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것은 마글로르도 마찬가지였다.

"작아지셨습니다."
"네가 그만큼 큰 것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엘론드."

몇번 목을 가다듬던 이는 섬세한 손으로 줄을 뜯었다. 아련한 음률을 연주하는 마글로르의 모습은 남루하고 볼 품 없었지만 어딘가에 조각되어진 전설속의 영웅처럼 보였다. 기억하는 이들도 점차 사라져 다시는 듣지 못할 줄 알았던 도리아스의 옛 노래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조금 크게 떠졌던 엘론드의 눈은 금새 부드럽게 감겼다. 이제는 가물가물해 싯구조차 기록에 남지 않은 아주 옛날의 노래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가장 잔인하면서도 아릿한 추억. 천천히 읊조리는 음 만을 가물게 기억하고 있는 엘론드의 머릿속에 분명한 가사가 덧입혀졌다. 명확하고도 우아한 발음. 고운 미성으로 단호히 노래하는 마글로르의 노래가 방 밖으로까지 퍼지자 은은히 먼 곳에서 들려오던 엘프들의 노랫소리도 어느순간 뚝 끊겼고 듣는 이들 모두가 아련히 향수에 젖어 아름다웠던 도리아스와 저 멀리 서녘의 푸른 바다를 은밀하게 훔쳐보는 환희를 느꼈다. 길고 긴 노래가 끝날 때까지 방 안을 비롯한 임라드리스의 어느 곳에서도 그 음색을 방해할 만한 속삭임조차 들려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리 급하게 떠나시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과분한 대우를 받았으니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오랜 시간을 주제에 맞지 않게 편하게 보냈다."
"어디로 가십니까?"
"발길이 닿는대로 흘러가겠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말이다."
"..아쉽네요."
"징그럽다. 생각도 않던 말을 들으니 간지럽기만 하구나."

놀라울 정도로 살갑게 대하는 엘론드의 행동은 생경했지만 그리 싫지많은 않은지 마글로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평생 그림자에도 닿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먹으니 이리 쉽기만 했다. 그것은 물론 모든 일을 덮어둔 채, 자신을 손님으로서 예우하는 엘론드의 덕이기도 했다.

작은 흰색 하프는 이제 엘론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다시 지저분한 로브를 두른 마글로르는 언제 웃어보였냐는 듯, 다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그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곧게 뻗은 길목을 따라 걸어가던 마글로르는 한번 뒤를 돌아 엘론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여렸던 아이는 어느새 임라드리스의 로드라 불리울 정도로 강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었고 보듬어야 할 가족이 있었다. 다행이야. 형님. 아이는 이제 불행하지 않아. 마글로르는 설핏 미소를 입술에 띄운 채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여러 불길 중 가장 아프고도 뜨거운 불길 하나를 오늘 꺼트린 참 이었다.

 

치유의 집이라 불리우는 엘론드의 자택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고 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어떠한 손님이 방문하고 머무르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것은 임라드리스의 불문율. 자애로운 임라드리스의 로드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몸과 마음의 안정. 그것을 얻은 이는 언제라도 임라드리스를 떠날 수 있었고 그 발걸음을 지켜봐 주는것은 로드의 일이기도 했다. 그대 가는 발걸음이 언제나 평안하기를. 그대의 앞길에 언제나 별빛이 비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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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안나. 키스.

2014. 2. 8.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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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할거라 생각하십니까?"

투명하게 빛나는 은색의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고개만 비스듬히 꺾어 목소리를 낸 이를 바라본 엘웨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글쎄."
"멜리안의 장막을 뚫었습니다. 평범한 이는 아닙니다."
"실마릴을 가져오는것도 쉬운 일은 아닐테지."
"루시엔을 지키고 싶으신거죠."
"아니, 나는 나의 모든 핏줄을 위험에서 지키고 싶은거란다."

그 중엔 너도 있겠지. 슬그머니 웃음이 피어난 얼굴에 오로페르는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이번에는 오로페르가 한숨을 쉬었다. 혈족이라는 굴레를 떠나서라도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럽고 머쓱한 일이었다.

"사실은 실패하길 바랄지도 몰라."
"그러십니까."
"이 안전한 곳에 다른 이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 장막이 열리고 우리와 다른 이들이 들어오게 된다면 저 놀도르처럼 분열되고 말거야."
"과한 걱정이십니다."
"아니, 과한 걱정이 아니야.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고 현실이란다. 나는 그저 조금 더 시간을 늦추고 싶을 뿐이지."
"왕께서 뜻하시는 대로 이루어지실겁니다."
"너는 너무 어른스러운 말들을 뱉는구나. 오로페르."
"...이제 성인입니다. 저도."
"그렇지. 너도 루시엔도 성인이지."

다물린 입술과 다시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쉬이 다가갈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한참 복잡하게 흔들리던 눈빛이 금새 평정을 되찾고 평소의 짖궂은 표정으로 오로페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른으로 대우해주기엔 너는 너무 작지 않느냐?"
"..클겁니다."
"이제 겨우 내 가슴팍인데 언제 클꼬. 성인이 되고나서는 키가 많이 크지 않는 법인데."
"왕께서 너무 크시단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내가 좀 크긴 하지만 너도 유달리 작잖니. 루시엔보다 더 작은 것 같은데.."
"루시엔보단 큽니다!"
"몰랐구나. 이거 당장 가서 재 봐야 겠는걸?"

큭큭 웃으며 습관처럼 오로페르를 껴안는 엘웨의 행동에 은발의 엘프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며 멈칫 했을 뿐, 밀어내진 않았다. 거부의사를 보였다가는 당장 이 밤중에 루시엔의 방까지 끌려갈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그저 한숨을 내쉬며 왕의 근심이 덜어지길 기도했다. 어린 엘프의 깊은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엘웨는 그저 품안에 쏙 들어오는 아이를 껴안고 즐거워하기에 바빴다. 멜리안의 장벽은 오늘도 단단했고 약간의 변수가 던져졌지만 도리아스는 오늘도 평화로웠다. 마이아의 축복이 함께하는 자신들의 왕국이 오래도록 안녕하기를 바라는 두 엘프의 마음은 별이 되어 하늘에 닿았다. 좋은 여름 밤 이었다.  

 

 

+) ( mm) 리퀘하신건 나무의 시대였는데 제가 착각을..OTL 으어어어어어ㅓ ㅜㅜㅜㅜㅜㅜ 일단 이거라도 ㅜㅜㅜ받아주시면 ㅠㅠㅠ어흐흐허ㅠㅠㅡ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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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켈리. 처음

2014. 2. 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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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과 같은 밤이 지난 후의 시간은 아득하니 빛나기 마련이었다. 서로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에 겨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엘프의 눈이 좀처럼 떠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보이지 않아도 입을 맞추고 속삭이며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둘은 서로의 온기를 맞대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야 해."
"싫어. 더 있다가 가."
"조금 있으면 갈리온이 올텐데?"
"그놈의 영감. 내가 소리 한번 지르면 그만이야."
"그러지마. 스란두일. 좀 더 아랫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줘."
"내 집사에게 관심 꺼줘. 더이상 관심을 가진다면 네가 그를 좋아하는 걸로 오해할테니까."
"하여간에 억지는."

살포시 눈뜬 청회색의 눈동자가 여전히 감은 채로 자신을 껴안은 이를 바라보았다. 별빛 아래에서 산산히 부서지는 금색의 머리칼은 언제 보아도 찬란하고 눈이 부셨다. 흐트러진것을 곱게 손끝으로 내려빗으며 정리하고 있자니 반짝 떠지는 푸른색의 바다가 엘론드를 주시했다.

"머리 만지는게 그렇게 좋아?"
"그럼 싫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아서."
"사실 좋아해. 땋는것도 좋아하고 고운 머릿결을 빗는것도 좋아하지."
"괴상한 취미를 지녔군."
"자꾸 그러면 자네것만 만져주지 않을거야."
"그럼 내 머리는 항상 흐트러져 있겠군."
"그 꼴을 못보는 건 나일테고?"
"잘 아네."

웃음을 지으며 와락 끌어안는 스란두일의 팔이 단단했다. 덩달아 미소를 띄운 얼굴이 금빛 정원에 파묻혔다. 목덜미에서 배어나오는 살냄새를 가득 맡으며 엘론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
"가지마."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떨어지지 마."
"혼자 있기 싫어."
"내가 계속 안아줄께."
"돌려말하는 청혼같아."
"청혼해줄게."
"할게도 아니고 해줄게?"
"네가 원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해줄 수 있어."
"거짓말."
"진심인데."
"해봐 그럼."
"나랑 결혼해줄래?"
"......."

살갑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굳어진 몸이 미동없이 그대로 안겼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어찌할 줄 모르는 눈동자가 조용히 감겼다. 어깨 위로 따스함이 밀려들었다.

"대답도 못할 거면서 조르긴."
"....미안."
"괜찮아."
"미안해...미안해."
"뭘 이런걸 가지고. 정말 괜찮아."
"...좋아해."
"...다시 한번 말해줘."
"좋아해. 스란두일."

밀쳐져 새로운 공간이 생기고 비어버린 품안에 놀라 눈뜬 엘론드의 앞엔 발그랗게 열오른 스란두일이 있었다. 세상 모든 온기를 모아둔 것 같이 붉어진 얼굴에 엘론드마저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만 더."
".... 좋아해. 스란두일."
"나도 좋아해. 엘론드."

두 눈을 바라본 채로 또박또박 내뱉어진 말이 가슴에 닿았다. 새삼스럽게 두근거리는 가슴에 기분이 좋아졌다. 누구랄 것 없이 둘은 웃어버렸다. 좋아서 울어버리기엔 너무나도 나이를 먹었으니까. 세월을 지나 이겨낸 둘은 그저 소리내어 웃었다.

"기분이다. 내가 씻겨줄게."
"됐거든."
"신혼 첫날밤이라고 생각해."
"누구맘대로?"
"당연히 내 맘대로지."

자리에서 일어난 스란두일이 엘론드를 안아들었다. 맨몸의 엘프 둘이 스스럼 없이 엉겼다. 어깨에 팔을 두르다 흠칫 놀란 엘론드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스란두일은 몸을 굽혀 침대 저 멀리 널부러진 자신의 로브를 끌어올려 엘론드를 감쌌다. 둘둘 감아 얼굴만 빼꼼하게 나온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같았다. 그렇게 소중하게 감싼 연인을 껴안고 맨몸의 왕은 걸음을 옮겼다. 둘이 함께 걸어야 할 길을 별들이 찬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벌써 이른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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