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고 있나?"

있는대로 소파 뒤로 제껴져 보이질 않는 얼굴을 흘낏 바라보면서 엘론드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다짜고짜 찾아오더니 술을 내놓으라 한마디 던지곤 처음 하는 대화였다.

"모르지."
"그렇게 답할 거라고 생각했어."

손 끝에 걸려 위태롭게 흔들리던 잔이 가까스로 탁자위에 안착하는 소리에 엘론드는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이의 금발이 어깨위에 흐드러졌다. 겨우 마주한 푸른 눈동자를 보며 엘론드는 왼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함을 표현했지만 스란두일은 여전히 묵묵 부답으로 훌쩍 밀어둔 잔 속의 술을 마셔버렸다.

"오늘은 거짓말을 해도 되는 날이야."
"거짓말?"

그래 거짓말. 흡사 혼잣말이나 하는 듯한 목소리로 또 다시 눈길도 주지않고 술을 기울이는 모습에 엘론드는 조용히 자세를 바로한 채 다시 서류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만우절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르웬과 옷을 뒤바꿔 입은 건장한 아들들의 애교 넘치는 문안인사를 받고 에레스토르의 자리에 서서 아침 회의를 주재하던 글로르핀델은 충분히 새롭고도 우스워서 진지하게 보직변경을 이야기할 뻔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서재 의자에 고의성을 보이며 대자로 기절해 누워있던 개구리는 덤이지 않았을까. 그러니 아무리 무덤덤한 나였어도 모를리 없었다고 답하고 싶긴 했지만 정작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이의 앞이니 그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은 흘러 자정에 가까울 때인데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이 만우절이었다는것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는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대의 금발이 오늘따라 눈이 부시군."

이런 말이 나오기 전 까지는 말이다.

"지금 혹시 그걸 거짓말이라고 하고 있는건가?"
"거짓말이라니. 나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

다시 마주한 숲의 왕은 스스로가 내뱉고도 그 말이 우스운지 홀로 웃고 있었다. 대체 뭘 어떻게 반응해주길 바라는거야.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바라보면서도 멈출 생각이 들진 않았는지 스란두일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역시 에아렌딜님을 많이 닮았어. 그 꿀 같은 금발 말이야."
"아들이 그 아비를 닮은 것이 거짓말은 아닐텐데?"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하나? 이왕 하는거 좀 맞춰줘."
"...자네의 그 흑발은 언제보아도 탐스럽군."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도 또 맞추어 주는 엘론드를 보며 스란두일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아예 일어나 흔들거리며 다가온 몸이 가볍게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또렷한 금안도 그대와 참 잘어울려."
"고맙네."
"그대도 한마디 더 해야지."
"내 책상에서 엉덩이 좀 치워주지 않겠나?"
"그럴까?"

훅 끼치는 짙은 포도향에도 엘론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마치 제 자리였다는 듯 자연스럽게 기대어 앉은 무릎 위에서 웃는 이의 모습에 오히려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마주했지만 아직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더불어 저렇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 보이는 눈을 마주하는 것 또한 그랬다.

"스란두일."
"난 그대를 좋아해."

만우절이랬잖아?

"늘 함께 있고 싶어."

마주했던 시선이 자연스레 비껴졌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면 좋을지 몰랐다. 무슨 대답을 해야할까. 만우절이랬잖아. 거짓말.. 거짓.. 무슨 말이 하고싶은거야.

"한번도 말했던 적 없었지만 이제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
"... 안 들을래."
"들어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싫어."

두려움이 깃든 눈을 들킬세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주한 이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진지하고도 올곧은 강한 신념으로 차 있는 그 푸른 눈. 술주정이라고 우길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며 농담이 재미 없는 건 여전하다고 이야기 해야 할까.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지만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엘론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스란두일은 작게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주했다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숨기기 어려워 했을 그 얼굴이겠지. 어쩌지도 못하고 바짝 긴장한 몸뚱이에 그 손이 닿았다. 숨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손 끝에 온기가 배어들 때 즈음, 스란두일은 입을 열었다.

"사랑해. 엘론드."

흠칫, 굳은 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장난일까? 라고 치부하기엔 더없이 진지하고 단호했다. 술기운조차 제대로 배이지 않은 목소리의 의도를 구분해 내는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는데. 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엘론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난.."
"응."
"거짓말은 못해."
"알아."

운을 띄워놓고도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을 벌린 채 엘론드는 결국 스란두일을 마주해야했다. 어느새 잡혀버린 손목에 덜덜 떨면서 앞으로 닥칠 일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앞섰다. 진심인 걸까 거짓말인걸까. 불안정한 시선을 담은 눈 속에 스란두일은 웃으며 들이찼다.

"답은?"
"......"
"아쉬운데. 모처럼의 고백인데."
"....무슨 대답을 원해?"
"날 사랑한다는 대답."

고민도 하지 않고 답을 내놓은 스란두일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마저 걸려있었다. 영겁과 같은 일분, 일초. 얼마나 지났는지 깨닫지 못하고 토하지 못한 숨만이 가슴을 두드려 온몸을 경련하게 만들기 전 까지 엘론드는 멈추어 있었다. 그 어쩔줄 모르는 얼굴을 바라보며 스란두일은 한참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반대쪽 손을 뻗어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톡. 톡. 톡. 까딱이며 꺾어지는 시선. 그 모습을 따라 자연스레 돌아간 시야에는 자정이 한참 지났음을 알리는 시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군."
"...."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날의 다음날은 진실만을 말 해야 하는 날이야."
"....."
"대답 안 해줄거야?"

급하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고 어이쿠, 하는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숨에 일어나 테라스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평소답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거칠게 문을 닫으려 뿌리치는 손길의 끝을 스란두일은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그러나 만만찮은 순발력은 그 손길을 피하고 스란두일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가지고 놀아보니 어떤가. 재밌었나?"
"과대망상이야."
"우습게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귀공의 유희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숨에 딱딱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존대를 하는 얼굴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마주하던 스란두일이 아랑곳 하지 않고 끌어 안으려 하자 엘론드는 그 팔을 붙잡은 손을 비틀어 힘을 실었다. 아야아 소리가 나오고 스란두일이 어줍잖은 동작을 멈추고 나서야 엘론드 또한 힘을 풀었다. 아까보단 조금 덜 가까워진, 그러나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뜨겁게 교차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리븐델의 영주를 우습게 볼까."
"귀공께서 그리하고 계시군요."
"사랑한다는 고백이 그대를 우습게 보는 태도인가?"
"오늘은!"

벌컥 화를 낼까 싶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만우절이랬잖아? 거짓을 말하는 날이라고? 무슨 화를 어떻게 내야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게다가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 매달리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는 쉽게 대답하질 못했을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틈타 스란두일은 다시금 엘론드를 끌어안으려 했다. 반사적인 몸놀림이 더 빨랐지만 저항이 시작되기 전 어렵지 않게 스란두일은 엘론드를 품을 수 있었다.

"만우절의 다음 날이지."
"......"
"아닌가?"
".....놓아주십시오."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가 방안을 맴돌았다. 어쨌거나 불쾌하고도 부끄러워졌다. 장난을 거는 자와 받는 자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야 했다. 쉽게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이 관계는 포기하고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라고 쉬울리 없잖아."

다시 흠칫, 하고 몸이 떨렸다. 조금 전 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끌어안은 팔 안쪽이 좀더 옥죄어 가슴이 맞닿았다. 머리칼 사이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문질러 오는 그 온기가 어쩐지 불같이 뜨거워 데일 것만 같아서 엘론드는 뒤로 물러서며 더듬더듬 책상을 짚었다. 그러나 스란두일 또한 한걸음 더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방. 빛조차 들지 않은 새카만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스란두일은 엘론드를 끌어안고 그 품에 자신을 숨겼다.

"가끔은 유치하고 재미없는 장난에 빗대서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거짓말을 하는 날이라며."
"그대와 이야기를 시작한 때에 이미 밤은 지나고 있었어."

저 멀리 새의 날개짓이 들려왔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가벼운 소리까지 모조리 들릴 것 같은 침묵이 방 안을 감돌았다. 그러나 엘론드는 뛰는 심장소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 달아오른 귀 끝을 어쩌지도 못한 채, 또다시 한참을 망설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란두일은 닿은 입술을 움직여 천천히 속삭였다.

"사랑해."

마치 주문이라도 외운 것 처럼 엘론드의 다리힘이 풀렸다. 얼마 만에 들어본 말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느릿하게 미끄러진 몸이 스란두일의 손이 이끄는대로 무너져내렸다. 방금 전 까지 업무를 보던 책상의 서류들은 거칠게 밀쳐졌고 검은색과 금색의 머리칼이 겹쳐 나풀거리며 그 위로 내려앉았다. 그 틈에 엘론드의 품을 벗어난 스란두일의 얼굴은 달빛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다. 천천히 입술을 쓸어낸 손가락이 틈새를 파고들 듯 하다 곁으로 물러섰다.

"대답해줘."

나라고 쉬울리 없잖아. 방금 전 말했던 문장이 귓가에 몇 번이고 울렸다. 나라고 쉬울리가 없는데. 너라고 쉬울리가 없을텐데..

뻗어진 손이 스란두일을 붙잡았다. 끌어당겨진 몸이 순순히 엘론드의 위로 겹쳐졌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귓가에 엘론드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고여있던 말을 내 뱉었다.

"... .... ....."

두 번째 주문이었다는 듯, 열린 입술 틈새로 순식간에 뜨거움이 밀려들어왔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엘론드는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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