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엘쌍. 밤

톨킨버스 2015. 7. 2. 23:20

"엘론드야."

반요정이라고 해서 보통요정들보다 덜 들리는것이 아니라고 수십번 이야기했건만 길갈라드는 늘 엘론드의 창 밑에서 평소보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곤 했다.

"네. 잘 들립니다. 대왕."

하도 고쳐지질 않는 터라 한번은 밖으로 나서지 않아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숨기랴. 낮보다 밤의 소리를 더 또렷히 듣는 요정.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덕에 더욱 더 예민해진 오감. 남들보다 배는 뛰어난 감각을 소유한 왕께서는 엘론드가 방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며 걷고 있는지, 따위를 즐거이 느끼며 더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댔었다.

"지친 이들의 휴식에 방해가 됩니다."
"허나 단잠에 취하기에는 아직 이른시간이란다. 그리고 별들이 쏟아지는 저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손해같은데?"

이렇게 들은척도 안하고 웃어보이는 왕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지. 엘론드는 의례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하고선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려갈까요?"

이불로 크게 몸을 감싼 엘론드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그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톡톡 끊어지는 목소리와 아직 졸음이 몰려와 어쩔줄을 모르는 눈꺼플.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써보고는 있지만 엘론드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노곤함에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만 주렴."

익숙하다는 듯, 엘론드는 테라스에 몸을 기울여 손을 뻗었다.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 이불뭉치가 바닥에 질질 끌려왔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 쭉 뻗은 팔은 왕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투박한 손이 그 팔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뭔가요?"
"토끼풀이란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손끝부터 타고 올라와 팔 전체에 퍼져나갔다. 이제는 익숙한 흔들거림에 엘론드는 제 손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얌전히 자리에 기대 앉았다. 밤은 깊었고 모두가 잠이 들었는데 왕께서는 여지없이 소꿉놀이중이시구나.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해서 혼을 내실것 같지는 않으니까. 흘끗 바라본 손목에선 부지런히 흰 꽃들이 엮어지고 있었고 한참 그것을 바라보다 잠이 든 엘론드의 머리칼이 넘실 불어온 밤바람에 부산스럽게 흩어졌다.

반쯤 엮어온 팔찌를 엘론드 손목에 맞추어 조절하고 매듭까지 끝낸 길갈라드는 고개를 들기도 전에 살랑이는 머리칼을 보고 또 잠이 들었다며 애석해 했다. 오늘은 좀 봐주지. 예쁘게 잘 되었는데.
퉁명스럽게 올려다보다가도 곱게 잠이 든 모습을 보면 또 기분이 좋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훌쩍, 난간을 받침 삼아 뛰어오른 몸이 가볍게 테라스에 안착했다. 얌전히 늘어진 아이를 들어 안으면 살풋 떠진 눈동자에는 푸른 별이 떠 있다 금새 사라지곤 했다. 잠결에 품을 파고드는 온기를 도닥이면서 방 안으로 들어서면 침대 한 구석에 오도카니 앉은 인영이 보였다.

"그러니까 아침에 주시면 되잖아요."
"새벽이슬이 닿으면 꽃이 더 예뻐지니까 꺾기 미안해지잖니."
"어자피 꺾일 꽃."
"인간은 언제든 죽겠지."
"꽃이랑은 다르게 인간은 생을 사니까요."
"꽃은 피어나는 것 자체가 생이란다."
"한 마디도 안 져주시네요."
"너도 그렇잖니?"

어느새 푹 잠이 든 엘론드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을 도닥이던 길갈라드는 엘로스를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안 예뻐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꽃을 말해달라니까?"
"싫어요. 득달같이 만들어올거잖아요."
"둘이 하면 예쁠텐데..매정한 엘로스. 불러도 오지도 않고."
"소꿉놀이는 사절이에요. 어린애도 아니고."
"아직도 내 눈에는 어린아이들이란다."
"아 그러십니까?"

볼멘소리로 툭 던져놓고선 보란듯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간 엘로스가 엘론드를 끌어안고 혀를 낼름거렸다.

"그럼 어린아이들은 잠이나 자야겠으니 대왕도 술주정 그만 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저희 키 안큽니다."
"저런저런.. 키가 크지 않으면 안되지. 가뜩이나 지금도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특히 엘로스 너는 더 안보이잖니."
"..키만 큰 꼰대같으니라고."
"뭐라 하였느냐? 늙어서 귀가 잘 안들리는구나."
"안녕히 주무시라 인사올렸습니다."
"오냐. 잘자거라. 린돈의 애기들아."

웃음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길갈라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큰 손을 들어 엘로스와 엘론드 두 아이들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 놓았다. 뒤척이는 엘론드. 싫다고 투덜대는 엘로스. 그 모습을 눈에 똑똑히 새겨 넣고서야 길갈라드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도 밝고 아이들은 잠을 자고. 나는 또 혼자로군."

키 큰 어른을 달래줄 것은 술 밖에 없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뚜벅뚜벅 걷는 발자국마다 포도향이 조금씩 묻어나왔다. 평화로운 린돈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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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무제

톨킨버스 2014. 11. 12. 13:37

낌새가 이상했다. 유난히 온화한 린돈의 엘프들은 오늘따라 몸에 배인 친절함의 끝을 보였고 처리해야할 서류들이 산더미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유가 있다며 결재를 올리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숨쉬듯 넘겨도 제 시간에 처리하지 못할 결재서류들이 올라오지 않는 사태에 관하여 엘론드는 답지않게 미간을 찌푸리고 항의해 보았지만 말갛게 웃는 대신들의 얼굴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을 것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내고 있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눈치빠른 엘론드는 바로 이곳 저곳을 찌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써 보았지만 정작 이 일의 주도권을 가진 길 갈라드는 그저 휘파람을 불며 짧게 주어진 휴식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한참동안이나 서기관들을 닥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엘론드의 불퉁한 말투가 들려왔다.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휴식을 즐기던 길 갈라드는 오래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다며 배싯 웃음을 보였다. 지금 웃으실 때 입니까? 라며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길 갈라드는 그저 자장가인 것 마냥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아보였다. 주군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머쓱해진 엘론드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크지 않은 서재에서 익숙하리만치 마음 편해지는 종이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어색했다. 한참이고 바쁠 시기에도 바쁘지 않을 시기에도 엘론드는 주군과 함께 방 안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정리하고 바라보는 그 바쁜 틈틈이 미간을 찌푸려 집중한 대왕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엘론드의 비밀스러운 습관 중 하나였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처음이었기에 엘론드는 혹여나 크게 울리고 있는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혼인 서약을 올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침대는 여전히 두 개였고, 길 갈라드와 엘론드는 다른 두 개의 침대에서 각자 잠을 청했다. 그것이 같은 방이라는 것은 그동안 함께 해온 시간에 비하면 대단한 변화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특별한 설렘을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둘은 바빴고 바빴다. 침실까지 서류더미를 챙겨오는것이 다반사였고 잠에지쳐 꾸벅꾸벅 졸고있을때 슬그머니 이불을 덮어줄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지금의 엘론드와 길 갈라드를 설명할 수 있는 관계의 전부였다. 한때는 불같이 뜨겁고 달콤한 입맞춤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엘론드는 곧 씁쓸히 웃으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남들이 이야기 하기에 대왕과 자신은 소위 신혼생활 중이었지만 그런 평범한 것을 요구하기에는 자신의 성별은 남자였고 길 갈라드는 너무도 지위가 높았다. 정략결혼. 그래, 가신이 주군께 충성하기 위해 기사의 예를 갖추듯 자신 또한 비슷한 방식의 예를 갖추었다고 엘론드는 늘 스스로를 다독였다. 좀더 든든하고 안정된 린돈을 지켜나가기 위해 몸소 뛰며 실천하고 있는 길 갈라드의 앞날을 스스로 막아선 안됐다. 그것은 주군으로서, 혹은 남몰래 연모하는 이로서 모셔야 할 이에 대한 엘론드의 굳건한 다짐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숨 조차 쉬지 못한 채, 길 갈라드의 눈 감은 모습을 훔쳐보던 엘론드를 구한 것은 다름아닌 글로르핀델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쉬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대왕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던 글로르핀델은 주무시는 대왕을 뒤로 한 채 욕실로 엘론드의 등을 떠밀었다. 크고 화려한 욕조의 입구에는 사자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조각했고 섬세하게 장식된 벽들은 이른 새벽녘에 따온 향 좋은 장미로 꾸며져 있었다. 평소와는 현저히 다른 욕실의 모습에 당혹감을 보인 엘론드였지만 꿀을 바른듯 달콤하게 이끄는 글로르핀델의 말에 오늘은 그저 잠자코 있기로 했다.


더운 물을 욕조 가득 손수 채우며 꽃잎을 띄운 글로르핀델은 피로를 푸시라며 목욕을 권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간들 속에 이런 여유는 정말이지 오랫만이었다. 혼인 서약 후 공식적으로 대왕의 결재가 필요한 것들이 자신에게로 분배되기 시작하며 엘론드는 그 흔한 산책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혹 이렇게 서류가 올려지지 않는 것이 글로르핀델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 엘론드는 불편했던 마음을 편히 갖기로 했다. 뜨끈한 물이 온 몸을 적시고 마음까지 노곤하게 풀어질 무렵까지 참으로 오랫만에 엘론드는 한낮의 느긋함을 즐겼다.

 

 

급하게 두드려진 노크소리에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슬쩍 감싼 엘론드의 양 뺨이 열기에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가벼운 가운만 입고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손님에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에레스토르가 유들하게 웃으며 별다른 일이 없을듯 하니 바로 침실로 오라는 길 갈라드의 전언을 전했다.

 

"...방 구조가 변하였구나."
"...그렇네요."
"날 왜 보자 하였느냐?"
"...대왕께서 절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옷도 못 갈아입고 오는 길이었는데.."

불안한 눈빛이 서로를 마주했다. 어색한 기분이 양 옆을 휙휙 돌아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야 할 서류들이 모조리 사라졌고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 또한 사라졌다. 늘 바깥을 볼 수 있게 열어둔 창문은 꼭꼭 닫힌 채 커튼까지 내려져 있었고 가끔 차를 마시던 작은 탁자와 의자 또한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방 안에 있는것은 엘론드가 쓰던 작은 침대 하나 뿐 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황급히 문으로 다가가 열어제치려는데, 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번 덜컹여 밀어보았지만 꿈적도 하지 않는 문에 엘론드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글로르핀델? 에레스토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문을 두드리던 엘론드가 급하게 몸을 숙였다. 문 아래 좁은 틈으로 무언가 삐죽 나와 있었다. 얇은 종이였다.
어느새 다가온 길 갈라드가 엘론드의 손에서 그 종이를 건네받았다. 유려한 필기체로 써진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좋은 밤 보내시길.]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론드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질 못하고 파르라니 흔들렸다. 종이를 들고 있던 길 갈라드 조차 조금씩 우그러지는 종이를 바라보며 당혹감에 젖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아주 작은 침대가 있었다. 엘론드의 침대였다.

 

 

 

+ 4월에 썼던건데 왜 비공개로 되어있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끌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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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불안함에 잠들지 못하면 푸른 큰 망토로 감싸 재웠던 버릇에 부끄럽고도 황홀한 첫날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엘론드의 맨몸을 푸른망토로 감싸주는 대왕님. 그건 아마도 완벽한 한쌍.

피곤함에 반쯤 감긴 눈매가 바르르 떨렸다. 온 몸에 꽃길을 낸 흰 피부가 파르라니 빛나는 새벽녘이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밤이건만 차마 꿈일성 싶어 잠들지 못하는 작은새는 여즉 대왕의 팔을 붙잡는다. 두렵습니다. 눈뜨고나면 아무것도 없을까봐. 곁에 계시지 않을것 같아 무섭습니다. 이토록 행복해져 본 일이 없으니까요. 가만가만 두려움을 표하는 아이의 입술을 바라보며 대왕은 다시한번 가볍게 그 작은 부리를 오물거린다. 그리고 잠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망토를 끌어왔다. 폭 둘러쌓인 모양새가 우스웠다. 이제는 완연히 어른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토는 엘론드에게 버거웠다. 그러나 대왕은 그것이 좋았다. 마치 어릴적 쌍둥이를 한 품에 안았을 때 처럼. 자신의 망토 아래에 잘 감싸인 작은 새를 보는것이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운 일인지 아이는 모를것이다. 돌돌 감싸 다시 품에 안고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를 본다.

자장가를 불러주마. 어릴적 처럼./아직도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십니까/ 오늘을 기념해야지 않겠느냐/무엇을 말입니까/이젠 돌아갈 수 없는 너의 아이시절을 말이다. 동그란 눈동자는 곰곰히 생각을 하다 말 사이에 숨은 뜻을 알아내고 새하얗게 질렸다 핏기가 오른다. 그 모습조차 어여쁘다는 듯 대왕님은 흐트러진 고수머리에 코를박고 깊이 숨을 마셨다. 그 좁은 틈 속에서 한참이고 부끄러워 하던 어린새가 속삭인다. 노래를 불러 주십시오 그때처럼. 올려다 본 눈가에 사랑이 일렁인다. 대왕님은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새가 듣게될 마지막 자장가를 나직히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작은 새가 힘차게 날아오르려는 날개짓이 시작되었다.  성인식의 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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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거라. 엘론드."

어슴푸레한 어둠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흐릿한 시야 가득 걱정스러운 얼굴이 들어왔다.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엘론드는 건네진 물 잔을 어렵사리 쥐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는 것을 보니 필시 악몽이라도 꾸었으리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하며 물을 마신 엘론드는 눈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지 궁금한 게로구나."
"그 말씀대로입니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문득 복도를 지나는데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겠니. 누군가 침입이라도 한 줄 알고 놀랬단다. 무뢰배가 아니라 악몽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내 덕분에 깨어났으니 다행이지 않냐 며 웃어 보이는 길갈라드의 표정에는 악의라곤 없었기에 엘론드는 멈칫거렸지만 한숨을 쉬며 자리를 정리하곤 일어서기로 했다. 좀 더 자지 않고. 짧은 만류가 들려왔지만 어차피 진심이 아니란 걸 알기에 엘론드는 말없이 탁자에 놓인 머리핀을 들고 가볍게 묶어 머리를 고정시켰다.

"어차피 잠들어 있어도 깨우러 오셨을 거잖습니까."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이다지도 신뢰가 없다니."
"늘 그러셨으니 까요."
"그랬느냐?"
"이제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 달밤에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이라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역시 린돈의 일등 가신답구나. 주군의 마음을 이토록 헤아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그동안 많이 부족했지?"
"....참으로 중한 것을 빨리도 깨달으십니다."

살짝 질린 눈빛으로 바라보면 금세 상처받은 얼굴로 칭찬을 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둥. 주군의 위엄이 떨어졌다는 둥. 이제는 애정이 식었다는 이상한 말들을 내 뱉을게 분명해 보여 엘론드는 상대치 않고 그저 한숨을 쉬며 옷장으로 향했다. 멀리 나갈 눈치는 아니었으니 그저 가벼운 튜닉에 로브만을 걸치고 여벌의 로브를 가지고 돌아와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주군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순식간에 돌아온 시선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엘론드를 바라보았지만 엘론드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로브를 여미고 작은 핀을 꽂아 제대로 주군의 어깨 언저리에 고정을 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자꾸 미끄러지는 손가락은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장식까지 무사히 달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꼼꼼히 매듭을 살핀 뒤 고개를 들어 올린 엘론드는 끈질기게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길갈라드와 그제야 얼굴을 마주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그냥. 이리 편하게 얼굴을 마주한 것이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바빴으니까요. 더군다나 최근에는 문안인사조차 드리지 못할 정도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리 토라진 것이더냐."

슬그머니 내밀어진 손을 엘론드는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평소였다면 웃어넘기며 당치 않다는 완곡한 말들을 내뱉어야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손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엘론드는 기어이 마음을 담았던 말들을 삼키고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온기는 온 몸을 휘감은 것 처럼 든든했지만 마음이 어째 편하질 않았다. 놓지 않을 것 처럼 맞물린 손을 강하게 끌어당긴 길갈라드는 그저 웃으며 밖으로 엘론드를 이끌었다. 앞을 향해 걷는 길갈라드의 뒷모습은 평소답지 않게 엘론드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고 엘론드는 그 등을 주시하며 조용히 주군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너와 함께 정원을 걷는 것도 꽤 오랜만이구나."
"앞으로 종종 나오시면 됩니다."

"말은 고운데 어째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걸?"
"...이제껏 싫다 한 적은 없습니다만."
"녀석. 살갑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구나."
"어릴 때부터 이 성격으로 살아왔으니 당연하지요."
"그래도 그때는 날 보며 예쁘게도 웃었단다."

한참을 걷다가 정원 깊숙이 들어서면서 길갈라드는 엘론드를 바라보며 짓궂게 웃어보였다. 설핏 붉어지는 뺨을 숨길 곳이 없었다. 애꿎게 잡혀있는 손을 꼼지락거리면 길갈라드는 모른 척 방향을 틀어주었다. 엘론드는 그 틈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솟구친 열기를 바람결에 흩날렸다. 늘 바라보던 모습인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고 알 수 없는 열기가 행동에 배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크게 고동치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크게 심호흡 한 엘론드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좋은 기분은 발걸음마저 가볍게 만들었지만 어쩐지 뭉클하게 목이 메었다.

물이 흐르는 정원 근처에 도달하고 나서야 손을 놓아준 길 갈라드는 부옇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초봄이라고는 하나 린돈의 북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냉기를 품었고 새벽녘 밝아오는 빛은 추위에 시달린 몸을 데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엘론드는 무심코 떨려오는 몸을 감쌌다. 한참을 그렇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엘론드는 길갈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막 엘론드가 걸쳐준 로브를 벗어 자신까지 감싸려 할 때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추워서 그런다."
"..추우시면 이만 침소로 돌아가시지요."
"혹 나랑 있는 것이 싫으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엘론드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자신의 주군은 질문이 많았다. 게다가 모두가 가벼이 답하지 못할 질문들이었다. 짙은 회갈색의 눈동자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엔 들뜬 마음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해보였다. 무어라 대답을 드려야 할까. 한참 고민하면서도 쉬이 열리지 않는 입을 바라보던 길갈라드는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로브를 둘렀고 엘론드가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품에 가둬버렸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스러워 엘론드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애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싫으면 안 되는데..어쩌지?"

급히 떠진 눈동자가 다시 마주쳤다. 방금 전의 짓궂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대왕은 슬픈 눈으로 엘론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긴 것은 길갈라드 뿐만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새들이 지저귀던 정원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속에 자신과 주군이 있었다. 그리고 엘론드는 금세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이건..

"제가.. 주군을.. 싫어할 리가.."

없질 않습니까. 악물은 잇새로 그렇게 말했을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시라도 놓치면 주군의 모습이 사라져 버릴까봐 엘론드는 맑아져 버린 머릿속을 억지로 헝클어뜨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보려 했지만 엘론드는 손아귀에 들어온 그의 옷을 움켜쥐고 무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 처럼 파르르 떨었다. 크게 떠진 눈은 길갈라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떨림에 일자로 우묵하게 닫힌 입술은 핏기 없이 질려 있었다. 로브가 구겨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자신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길갈라드는 그제야 설핏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엘론드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혹 날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할까봐 조금은 걱정했단다."

생전의 다정한 말투 그대로였다. 답하려 열린 입에서 어쩐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가슴 깊이 숨겨둔 심장만이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 엘론드를 안으며 길 갈라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맞닿은 온기와 어깨를 끌어안은 묵직함이 마치 꿈만 같았다. 아니 이건 꿈이었다. 잔인하고도 슬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원했던 바람. 현실을 인지한 몸은 성실히 반응했다. 왈칵 뜨거움이 몰려왔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모습은 어릴 적 자신을 어르던 서투름 그대로라는 것을 엘론드는 깨달았다. 혹 나를 잊었을까 싶어 두려웠다며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제야 외면하고픈 현실을 전했다. 말 하지 말지. 아무 말도 하지 말지. 언제까지나 그대의 뒤를 따를 수 있었는데. 모른 척 퉁명스레 대답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곁에 있을 수 있었는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엘론드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안쓰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쉰 길갈라드는 선한 눈매를 늘어뜨리며 천천히 엘론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나하나 기억하겠다는 듯, 단단한 손끝이 이마부터 턱까지 세밀히 오갔다. 많이 자랐구나. 좀 더 어른스러워졌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속에 박혔다. 마음 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소망들이 간절히 듣고 싶어 했던 이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길갈라드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부여잡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간절하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엘론드."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억지로 참아내는 통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내밀어진 손가락이 눈가를 가볍게 쓸어내리면 그제서야 그 손끝을 타고 터진 둑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달려든 품 안이 따듯해서, 너무나도 따듯해서 엘론드는 소리 내어 엉엉 울어버렸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엘론드는 길갈라드의 품에 안긴 채 서럽게 울었다.


"떠나지 마세요."
"엘론드."
"에레이니온. 제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다. 엘론드."
"아니요..가지 마세요.. 이렇게..이렇게..곁에서."

또다시 가득한 눈물이 흘러내리자 길갈라드는 슬픈 눈으로 엘론드를 바라보다 고개 숙여 지그시 입술을 맞댔다. 품에서 벗어나려는 엘론드를 꼭 끌어안은 채,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귀한 대지에 길갈라드는 조심히 발을 디뎠다. 천천히 떼어진 입술이 가파른 숨결에 오물거렸고 길갈라드는 그것을 바라보며 또 한 번 입술을 겹쳐 올렸다. 그리던 이와의 첫 입맞춤이 꿈꿔왔던 달콤함이 아닌 아련한 눈물맛이 나는 것을 느끼며 엘론드는 다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웬일로 늦잠을 다 주무십니다."

눈가에 따스한 빛이 간질거리며 돌아다녔다. 밤새 울었는지 부어버린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엘론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땀에 젖은 듯 무거운 것을 보니 필시 악몽이라도 꾼 듯 싶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 컵을 건네며 웃어 보인 글로르핀델은 재빠르게 창문을 활짝 열어 늦은 주군의 아침을 도왔다. 침대 근처로 다가와 열을 재기도 하며 장난스레 농을 걸어오는 넉살좋은 모습에 엘론드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느지막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설마 긴장하신 겁니까?"
".. 그럴리가요."
"밤새 뒤척이시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것 같은데요."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만둬주세요. 글로르핀델. 열 달 내내 놀림을 받았더니 벌써 혼례를 치른 느낌입니다."
"모두가 기뻐서 그런 것을요. 하지만 이 재미있는 장난도 오늘로 끝이네요."

싱긋, 만면에 미소를 띤 글로르핀델이 엘론드의 손을 잡았다. 덤덤하게 바라보는 엘론드의 눈길을 받으며 머쓱한 모습으로 고민하던 이는 침대 위 탁자에 놓아둔 상자를 끌어 엘론드의 손 위에 놓았다. 상급왕의 문양이 새겨진 푸른빛의 작은 상자. 가만히 상자를 바라보던 엘론드가 고개를 들자 조심스레 글로르핀델은 입을 열었다.

"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반지를 두개나 올리기엔 손이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공께서 이리 가져오신걸 보면 제가 어찌 답할지 예견하셨다는 거겠죠."
"한번 맘먹으신 건 설득해봐야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요."

평온하게 이야기하는 엘론드를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글로르핀델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곧게 편 상태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조금 허리를 숙였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마이 로드. 밝은 금색의 머리칼 한올한올이 흔들리며 빛을 흩뿌렸다. 그 환함에 눈이 부신 듯, 엘론드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은연 중 사라져가는 빛무리 속에서 그리운 얼굴이 스쳤다. 그 생각과 동시에 손에 들린 작은 상자 속 반지의 무게가 좀 더 무거워 진 것 처럼 느껴졌지만 담담한 얼굴로 엘론드는 상자를 꼭 쥔 채 입가에 미소를 올려 화답했다. 따사로운 기운이 가득한 아름다운 봄. 임라드리스의 새 안주인을 맞이하기에 더할 나 위없이 좋은 봄날이었다.

 

 

 

 

꿈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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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갈라드,엘론드합작 => http://blog.naver.com/mahamayuri

스란두일,엘론드합작 => http://blog.naver.com/wiipit/

 

으아니 ㅠㅠㅠ존잘님들이 ㅠㅠ 절 말려죽이시려고 ㅠㅠㅠ

글,그림 합작 모집하신대요 ㅠㅠ 으어 ㅠㅠ 넘 좋다 ㅠㅠ

존잘님들 얼른얼른 신청해주세요 8ㅅ8!!

 

 

 

..마지막 스란엘 합작은 제가 진행하는게 개그..
존잘님들 많이 와주세요 어흐흑 ㅠㅠ 스란엘 보고싶어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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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꿈으로 꾼 썰.

2014. 1. 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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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약점.

톨킨버스 2013. 12. 29. 00:30

 

"피곤해 보이십니다."

막 의자에 기대어 눈감은 주군의 곁에 새로 우린 차를 내려놓던 엘론드가 빙긋 웃었다. 오늘 회의의 주 목적은 변방의 수비강화에 대한 군사회의였을 테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음을 엘론드는 알고 있었다. 한시간 남짓 하는 시간동안 충심과 대의를 등에 업은 대신들의 잔소리는 주군의 혼을 쏙 빼놓기에 적절했고 그 여파는 꽤나 오래갈 것이 분명했기에 엘론드는 찻잔에 설탕을 두어스푼 정도 더 집어넣었다.

"알면서도 들여보냈지?"
"들켰습니까?"
"미리 눈치챘으면 언질이라도 주지않고."
"제게는 그들을 막을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하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주군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엘론드가 천천히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신들이 문을 나서자마자 들고 있던 서류를 몽땅 던져버린 주군 덕분에 할일이 아주 많았다. 다행히 많이 섞이지는 않아 정리하기엔 수월하겠다 생각하며 엘론드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잔소리의 늪에 빠져있는 주군께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하긴 저도 걱정입니다."
"너까지 잔소리를 보태려는 것이냐."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요. 가신들이 저렇게 성토해보았자 어자피 대왕께서는 결혼 못하실 것 아닙니까. 저래 보았자 헛수고일텐데.. 서로 끝 없는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대왕을 엘론드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지만 이런 이야기를 정면으로 하기엔 좀 부끄러운데...

"신하된 도리로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그... 안...서시는것 아니었습니까?"
"......응?"
"저는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응?"

충격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왕을 안쓰러히 바라보며 엘론드는 다 정리된 서류들을 책상에 내려 간추렸다. 패닉에 빠져있는 주군을 어찌 처리할 방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 가지가 잘나셨으니 한가지 정도 약점이 있어도 좋겠지요."
"......"
"긍정적인 부분을 찾자면 적이 미인계를 써도 넘어가지 않는다는거잖아요?"
"이봐 엘론드."
"예 대왕."
"그러니까 내가 고자라고?"
"....굳이 부인하고 싶으신거라면..."

삽시간에 주변은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길 갈라드의 눈빛을 아련히 피하면서 엘론드는 슬금슬금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시구나. 아니셨구나. 그랬구나. 들릴락말락하게 문장들을 주억거리며 애써 미소짓는 표정에는 가식이 가득했다. 이래서 머리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랬는데... 주름이 생기려는 미간을 억지로 편 채, 길 갈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춤거리는 엘론드에게 다가섰다.

"엘론드야."
"...네?"
"내가 고자라고?"
"...아니라셨으니..아니겠지요?"
"그걸 어찌 믿느냐?"
"예?"
"내가 고자가 아니라는걸 어찌 믿어."
"그럼 진짜..."

코 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뒷걸음질치는 엘론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라는건지 아니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처음의 곤혹스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꽤나 차가운 눈빛으로 웃고있는 얼굴은 재밌겠단 표정으로 시시각각 바뀌었다. 움찔. 더 이상 물러날 곳 없이 굳어버린 몸뚱이가 경련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입술이 엘론드의 귓가로 향했다.

"진짜인지...아닌지.. 몸소 알아볼테냐?"

그 순간 허벅지를 타고 튜닉 사이로 손이 비집고 올라왔다. 어느새 감겨버린 눈이 번쩍 뜨였다. 엉겁결에 놓친 서류들이 바닥으로 흩어지는데도 길 갈라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엘론드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쪽의 옷까지는 건드리지 않았어도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무어라 한소리 하려는 순간, 귓가에 묘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이렇게 다 자랏건만 아직도 어린아이같구나."

귓가에 들리는 웃음소리가 몸을 울리는 것 같았다. 점점 이상해지는 기분에 손을 들어 밀쳐보았지만 가만히 있을 길 갈라드가 아니었다. 한손으로는 뒷 목을, 한손으로는 허리를 감싸안으며 몸을 완전히 밀착시킨 후 대왕은 느릿하게 뾰족한 귀 끝을 우물거렸다.

"히익..!"
"이런 건 익숙하지 않느냐?"

허리에 걸친 손이 점점 밑으로 향하고 부드러운 둔덕을 지나 강하게 끌어당기면 자극에 서툰 몸이 움찔하고 놀랐다. 어느새 목선까지 내려온 입술의 따스함에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것을 느끼며 엘론드는 그저 힘없이 올려진 손으로 미약하게 그를 밀쳐내는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대왕과 확연히 다른 모습에 두려움이 솟아났다. 아 놀리지 말걸. 장난으로라도 하지 말걸. 질끈 감긴 눈꺼플이 불안하게 파들거렸다. 한참동안이나 어린 피부를 유린하던 입술이 풋,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순식간에 엘론드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놀란 엘론드가 눈을 크게 뜨고 주군을 바라보았다.

"큽..크큽크하하하하하하"
"........"
"흡.푸흡..흡큭큭..엘론드야.크흡흡."

자신의 앞에서 배를 쥐고 웃는 대왕을 쳐다보다 몸의 이상을 깨닫고 엘론드는 얼굴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우물쭈물하다가 옆으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곤 쏜살같이 방 안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길 갈라드는 아예 주저 앉아 웃으며 소리쳤다.

"너는 그래도 푸흡 고자는 아니로구나 크하핫."

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가며 열오른 얼굴로 싸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엘론드는 이를 갈았다. 네, 잘 알았습니다 아주. 본인이 고자가 아니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알려 주실 필요는 없으셨는데. 머릿속으로 길 갈라드가 유독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가신들의 리스트를 뽑으며 엘론드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고자가 아니시니 결혼은 하셔야겠죠. 전하의 가신인 제가 적극 도와야겠습니다. 차갑게 미소짓는것도 잠시, 다시 얼굴에 가라앉지 않은 열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엘론드는 발을 재게 놀렸다. 화장실은 왜 이리도 먼 거야. 투덜거리는 것도 한 순간, 이를 악물고 달려가는 발소리만이 복도에 크게 울려퍼졌다.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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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별.

톨킨버스 2013. 12. 26. 02:54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느냐?"

제법 가까이 들린 목소리에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들켜서는 안될 모습을 보인 것 처럼 무언가 황급히 뒤로 숨기는 모습에 길 갈라드는 머쓱하게 웃었다. 방해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단다. 다정하게 이야기 해 보지만 우물쭈물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혹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냐?"
"...."
"산책을 나왔다가 불이 켜져 있길래 들른 것 뿐인데 괜히 내가 너를 불편하게 했구나. 이만 가볼테니 일찍 자거라."

이제 겨우 며칠이었다. 이리 훌쩍 자라났다고는 해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친해지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곁눈질로 잠든 엘로스의 모습을 확인한 길 갈라드는 설핏 웃어보이며 엘론드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잠이 들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온 목적의 반은 이룬 셈이었다. 그대로 어둠의 장막에 몸을 숨기려는 찰나, 작은 목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딱히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로 감추었던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우물쭈물하며 눈을 맞추는 아이가 속삭였다. 그저 놀라 감추었을 뿐 입니다. 자연스레 향한 시선에는 기묘한 것이 들려 있었다. 두개의 동그란 유리알을 붙여놓은 듯한 얇은 조각이었다. 천천히 내려앉아 시선을 맞춘 길 갈라드는 예의 물건을 주시하며 엘론드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실은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얼결에 건네받은 작은 조각은 길쭉한 네모진 모양이었다. 두 개의 유리알이 둥그렇게 붙은 곳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양새에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처음보는 물건이구나."
"하늘을 보는데 쓰인다고 합니다."
"하늘?"
"정확하는 그 속에 담긴 것 이지만요."
"어디서 났는지 물어봐도 괜찮겠느냐?"
"아저씨....마에드로스가.. 만들어주셨습니다."
"...마에드로스가?"
"네. 장난감이라시며.."

자연스럽게 손 안에서 빠져나간 조각은 엘론드의 작은 손가락 안에서 움직였다. 몇 번 유리알을 돌리고 만지작거리다 밤하늘을 향해 높이 쳐든다. 시선이 그 손길을 따라 올라갔다. 둥근 유리알이 묘하게 겹치며 밤하늘의 빛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흐릿하게나마 눈 앞에 빛이 어렸다. 달이었다.

"달..?"
"아마도요?"

덤덤하게 길 갈라드의 눈가에 조각을 대어준 엘론드가 그것을 건네고는 슬며시 웃었다. 아이가 자랑이라도 하는 모습에 길 갈라드는 흐릿하게 보이는 모양새를 따라 몇 번이고 좌 우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고 은은하게 빛을 비추는 달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높은 하늘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구나. 밝은 낮에는 꽤나 먼 곳도 보일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찾는것이 있었더냐."
"가장 밝고 아름답다는 희망의 별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대 얻어맞은 듯한 대답에 길 갈라드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평온할 정도로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청회색의 눈동자를 쳐다보던 길 갈라드가 몇 번이고 입 속으로 단어를 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동정? 모른척? 어떠한 것도 당장 합당한 답이 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더 이상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엘론드는 그의 손 안에서 조각을 건네받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쌌다. 오늘도 보긴 글렀지만요. 아이같이 웃으며 모른척 졸립다는 말을 뱉고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앞에 둔 길 갈라드의 표정은 한없이 슬퍼 보이다가 싸늘해졌지만 다시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다음에는 꼭 찾았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자는 편이 좋겠다."

의례적인 인사. 다시금 새카만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길갈라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의 잠옷을 여며주었다. 작은 함에 조각을 넣어두고 만지작거리는 손끝과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어쩐지 숨이 막혀왔다. 스스로가 이렇게 무신경하고 배려심 없는 성격이었던가. 감싸주지 못할 아픔을 섣불리 동정하거나 관심가져서는 안된단다. 어릴 적 흘려 들었던 키르단의 목소리가 아이의 시선과 함께 겹쳐 자신을 책망하는듯 보였. 그러나 오래 지체하다간 아이가 이상하게 생각 할 지도 몰랐다. 스스로 굽혔던 자세를 곧게 세운 채, 길 갈라드는 저녁 인사와 함께 황급히 방을 나섰다. 뚫어지게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지고 어룽대던 불이 꺼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행히 아직 잠들지 않았구나."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작은 초를 들고 다가온 길 갈라드가 누운 채로 눈을 뜨고 있던 엘론드의 곁에 조심히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단단한 나무로 짜여진 함은 엘론드가 몸을 일으켰음에도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손 끝을 대어보려다 고개를 들어올린 아이의 시선에 빙긋 웃어보이며 눈짓을 해보였다. 단단하게 잠긴 걸쇠를 열고 뚜껑을 넘기자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찾는 별은 아니지만.. 이 별도 꽤나 괜찮아서 말이다. 괜찮다면 네게 주고싶구나. 혹 뭔지 알겠느냐?"
"사탕...아닙니까?"
"정확히는 별사탕이지."

침대 위에 슬쩍 기대앉은 길 갈라드는 손가락으로 작은 별사탕 하나를 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 차마 받아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길 갈라드는 짖궂게도 아이의 입술에 닿도록 톡톡 두드렸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무어라 볼멘 소리를 내어놓으려 열린 입 사이로 밀어넣어진 사탕이 애매하게 걸렸다. 빙그레 웃으며 먹어보라는 말에 몇 번을 고민하던 아이는 조심스레 사탕을 물었다.

"맛있느냐?"
"....저는 단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 몰랐구나."
"그치만.. 맛있네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길 갈라드가 싱긋 웃어보이곤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움직임에 상자 안의 별사탕이 와르르 쏟아져버렸다. 놀란 두 엘프가 부리나케 이불 위를 훔쳤다. 많이 쏟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있는대로 줍다보니 서로의 양 손에 별들이 가득했다.

"쏟아질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움직이시니 그렇지요."
"어쩐지 날 책망하는 이야기 같은걸?"
"...죄송합니다."
"농담이다 농담. 어쨌거나 미안하구나. 모처럼 선물을 하고도 쏟아버렸으니."
"바닥에 쏟아진 것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럴까?"

상자 속에 쏟아진 사탕을 도로 넣은 채,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에게 그것을 건넸다. 묵직하게 닿아오는 상자를 받아든 엘론드는 조용히 길 갈라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더 좋은걸 주고 싶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주마."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처음보다 훨씬 다정한 시선으로 바뀌었음을 깨달은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로 늦었으니 이만 자거라. 아까와 같은 인사로 끝을 맺은 후, 이번에는 아이가 누울때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다. 작게 너울대는 초를 꺼트린 뒤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길 갈라드는 문가로 다가가기 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희망의 별은 새벽녘이나 태양이 저물 즈음에 볼 수 있을게다.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양과 함께 반짝이기에 쉬이 볼 수 없는 그 별은 높이 빛나는 희망의 별, 길 에스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더구나."

혹, 찾는 것이 그 별일까 싶어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수줍음이 묻어났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좋은 꿈을 꾸라는 인사가 방 안을 울렸다. 복도를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사방이 고요해 질 무렵, 아이는 미처 넣지 못해 손에 쥐어둔 별사탕 한 개를 슬그머니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달콤함에 미소지은 아이는 머리 위에 놓아 둔 상자와 저 멀리 떨어진 창문 밖의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리우면서도 다정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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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뻘 조금.

썰/뻘설정 2013. 11. 30. 11:06

그날도 일을 하던 중인 엘론드는 어스름한 저녁 즈음에 방문한 꼬마 공주님 덕에 서류에서 눈을 떼는거지. 우리 공주님 잠이 오질 않니? 다정하게 웃어주는 아버지에게 투정부리듯 안긴 아르웬이 입술을 비쭉 내밀고 불평을 늘어놔. 아다. 춤 선생님이 너무 엄해요. 아르웬한테 막 재능이 없다고 했어요. 이러면서 투덜투덜. 아마도 왈츠의 첫수업을 받은 모양인데 춤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아르웬에게는 조금 어려웠던 모양이야. 한참 투정을 듣고만 있던 엘론드가 새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웃어. 아다랑 같이 해볼까?/ 정말?/ 그러엄. 하면서 엘론드가 자리에서 아르웬을 안아들고 일어나.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으면서 엉거주춤하게 맞지않는 키높이로 마주서. 아름다운 공주님과 춤출수 있는 기회를. 전통의 방식으로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아르웬의 얼굴엔 흥분이 가득했어. 서툴지만 배운대로 답하고 맞잡은 고사리같은 손이 엘론드의 손을 꽉 부여잡아.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입으론 박자를 맞춰주는 엘론드. 자꾸 꼬여 발을 밟혔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부드럽게 리드해나가는 그런게 보고싶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둘, 둘. 셋. 천천히 박자에 맞추어 빙글빙글도는 아버지와 딸. 조금씩 자신감을 찾는 아르웬의 모습을 보며 뿌듯한 엘론드의 마음 한구석에 어릴적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맞잡고 엘로스와 자신에게 보여주셨던 춤사위를 떠올릴것 같다.

 

 

 

예지의 능력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을 것 같다.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이 갓 성인이 될 무렵. 어두운 하늘에 핏빛 안개가 깔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엘론드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저 불운의 전조일 뿐 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몇번이고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우연이라기에 현실은 너무도 잔혹하게 들어맞았다.  '그대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하는군요.' 얼음과 같이 싸늘한 시선이 내리꽂히는 순간 엘론드는 부정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채,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부질없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엘론드는 두고두고 그것을 후회했다.

시체가 쌓인 언덕. 갈기갈기 찢겨진 깃발. 푸른색의 망토. 익숙한 뒷모습. 확인하지 못한 얼굴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 채, 엘론드는 침묵했다. 가만히 입을 닫고 지옥과 같은 시간을 견뎠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해. 대왕께선 나와 함께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그대의 탓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벌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레이디. 그것은 제 탓 입니다.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띄며 엘론드는 답했다. 숲의 숙녀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리게만 보였던 반요정은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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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님과 기린님과 두런두런~

리븐델와서 헤어지기 싫어서 매일 밤 술을 청하는 엘론드도 좀 좋다. 둘다 술은 쎄서 밤늦게까지 마시면 꼭 일찍 못일어나서 느지막히 눈뜨는 길갈라드라던지. 한참을 그러다가 길갈라드가 밤중에 술잔을 기울이며 그리도 헤어지기 싫으냐. 운을 띄우면 화들짝 놀라다가 덤덤하게 웃으며 예. 싫습니다. 하는 엘론드 좋다. 그러면 술잔을 다 받고 내려놓은 후 머리를 쓰다듬어주실까. 아직도 내보기엔 어린아이와도 같은데. 어찌 이리도 빨리 컸는지 모르겠다. 하하. 하며 웃는걸 보며 엘론드는 그저 눈을 감겠지. 세월이 대왕께만 흐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허나 이상합니다. 제 눈에도 대왕이 보이질 않습니다. 젋고 당찬 에레이니온만 보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하면서 둘이서 서로를 토닥토닥.

 

스란엘.

한창 바쁠 시기에 리븐델에는 서찰 한 통이 도착하는데 갈리온이 보낸 거였으면 좋겠다. 왕께서 몸이 안좋으시니 한번 방문해주십사 하는 편지였는데 스란두일도 아닌 갈리온이 보낸 편지는 필체 한 획 한획을 꾹꾹 눌러 쓴 티가 역력해 긴장하고 있음을 보였다. 엘론드는 그 길로 짐을 꾸려 머크우드로 향했다. 바쁜 일처리를 맡게된 글로리는 한숨을 쉬어냈지만 이내 다녀오시라며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밤낮을 움직여 일주일 후에서야 도착한 어둠숲은 어둠고 캄캄해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겠지. 마치 맹수의 입처럼.
과연 숲의 왕은 갈리온의 말대로 앓아누워 있었고 엘론드는 로브도 벗지 않은 채, 그에게로 향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맥을 짚으려 소매를 걷어 막 닿으려는데 스란두일이 눈을 뜨는거지. 그리고 빙긋 웃겠지. 이젠 꿈을 다 꾸는군. 엘론드는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침대위에 앉으며 다시 소매를 걷어올려서 맥을 짚으며 눈을 맞추겠지. 그래 꿈일세. 그대는 지금 꿈을 꾸고있어. 좀 더 자고 일어나야지. 다정하게 말하며 눈맞추는 이에게 스란두일은 가볍게 웃으며 툭툭거리면 좋겠다.
이렇게 다정한 걸 보니 정말 꿈인가보군. 그렇지만 좋아. 그대의 말을 들어서 안좋은 적이 없었으니 이만 다시 자야겠어. 꿈속의 이여. 안녕. 좋은 꿈이었네. 감은 눈을 몇번 가늘게 떨던 이는 금새 곤히 잠이 들었어. 잡았던 손목을 정리하고 이불을 덮어주고 온전히 잠에 빠질때까지 엘론드가 그저 가만히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다음날 여전히 아픈 스란두일이 제정신으로 눈을 뜨면 그제서야 엘론드는 인사를 하겠지. 좋은 낮일세. 숲의 왕이여.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평소의 삐딱한 눈으로 엘론드를 훑으면 그제서야 왕의 손님맞이가 시작되면 좋겠다. 속으로는 그저 어젯밤의 꿈이 예지몽이었던 것 같다 웃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엘론드를 대하는 그 모습에 그저 임라드리스의 현자는 미소짓겠지. 여전하군. 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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