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서클릿은 너무도 평범해. 에레기온의 왕으로서도. 나의 연인으로서도."

벗겨진 은색의 서클릿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던 안나타르가 불만처럼 속삭였다. 따스한 눈으로 곁에서 바라보던 켈레브림보르는 그저 손을 올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입술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켈레브림보르의 입술을 답답하게 쳐다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그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내가 새로 만들어줄까? 그대에게 잘 어울리도록 작은 진주들과 사파이어로 장식 된 튼튼하고 빛나는 관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대답을 요구하자 한참을 말을 고르던 켈레브림보르가 입을 열었다.

"네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 하지만 내 서클릿은 이정도면 충분해."
"어째서? 너무 투박하잖아?"
"그게 나 답지 않아?"

유리처럼 맑은 흰 빛을 내어놓는 부드러움. 투박한 모양새와 변하지 않는 정결함. 그러나 열을 가하면 쉬이 구부러지는 순수. 어느것과도 어울릴 수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 그것은 켈레브림보르가 지향하고 있는 삶과도 같은 것이었다. 많은 광물들이 있었지만 그는 가장 순수하고 정결한 은을 사랑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채 그저 홀로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우아함. 자신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이 그와 같길 바랬다. 그렇기에 그의 관은 은으로 투박하게 만들어졌다. 자신이 세운 철칙은 지켜져야 했고 불같은 고집은 꺾일 줄을 몰랐다. 그것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부탁일지라도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켈레브림보르를 쳐다보던 안나타르는 손에 들린 관을 도로 그의 머리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뒤 조금은 토라진 모습으로 베게에 얼굴을 파 묻었다. 한참동안이나 머뭇거리던 켈레브림보르의 손이 이불을 끌어올렸고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묵묵히 손길을 받아내던 안나타르가 불현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그래도 그대에겐 화려함 또한 어울려. 왕의 위엄과 에레기온을 상징하는 그 빛 말이야. 언젠가 내가 그대를 위한 관을 만들께.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써줘."
"물론이야."
"안아줘 켈리. 추워."

금새 표정을 바꾸어 미소지으며 제 품안에 달려드는 연인을 온몸으로 받아낸 켈리의 머리 위에 얹혀있던 서클릿이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섬세하게 조각 된 은관의 장식 중 한 부분이 새까맣게 변한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시일이 한참 지나가 버린 뒤였다.

 

 

 

 

 

 

 

 

차가운 손끝이 켈레브림보르의 얼굴을 더듬었다. 핏물에 감기려는 한쪽 눈을 억지로 뜬 채, 켈레브림보르는 흐드러질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것'을 쳐다보았다. 허공으로 매달린 팔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단단한 금속은 손목을 구속했고 살을 파고들었다. 아픔에 신음하면 그 모습이 기쁘다는 듯, 안나타르는 그의 더러워진 이마위에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언젠가 약속했지. 그대를 위한 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그 더러운 입으로 내 귀를 모멸하지 마라"
"그대의 손목에 맞추어 만든거야. 느낌이 어때?"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이 켈리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었다. 화려하게 조각된 문양들은 섬세하게 팔까지 휘감았고 장식된 크고 반짝이는 보석들은 튄 핏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가운데에 크게 박힌 푸른색의 보석이 기쁜 표정으로 웃고있는 안나타르의 얼굴을 온전히 비추었다. 청명히 빛나는 그것은 켈리의 왼쪽 눈 이었다.

"그대에게는 이런 것이 어울려. 내 발 밑에서 짓이겨지고 어둠에 잠식당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갈구하는 그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테지."
"네놈에게 아름다운 것은 끝없는 탐욕과 깊은 어둠뿐이다."
"아니, 찬란한 아름다움을 어둠속으로 끌어내리는것을 좋아해. 그걸 위한 탐욕이다. 좋아하는것을 갖고싶은 욕구가 어째서 나빠?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빙글빙글 웃으며 올라간 손이 천천히 구속구를 쓰다듬었다. 패인 상처들을 헤집고 비어버려 움푹 꺼진 눈꺼플을 핥았다. 아무것도 닿지 않는 혀 끝에선 피맛이 감돌았다.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받을 차례야. 나를 놀라게 하려고 꼭꼭 숨겨두었잖아?"
"악의 피조물에게 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너는 내게 줘야 할 것이 있어."

반지는 어디에 있지? 켈리? 사근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진물이 흐르는 귓가에 달콤하게 스몄다. 마치 어느날의 오후처럼. 제 품에 안겨 웃어보이던 그때처럼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에게 속삭였다. 힐끔 떠진 온전한 눈 한쪽이 안나타르를 바라보다 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서 흉하게 구부러져 있는 서클릿이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카맣게 변한 은. 짓밟힌 순수. 이제 다 끝났는가. 켈레브림보르는 힘없이 웃어보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캄캄해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목이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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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마에. 걱정.

2014. 1. 2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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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오로. 첫만남. 에서 이어집니다. http://secretgarden1.tistory.com/65

 

 

나팔 소리가 보다 가까이 들려왔다. 그것은 신다르 특유의 웅장하고 경쾌한 리듬이었지만 듣는 이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 굳어져 있었다.  참으로 간만에 -길 갈라드로서는 처음이었지만- 조우하는 놀도르와 신다르의 만남은 어렵게 성사된 것이기도했다.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하는 길갈라드의 곁에서 키르단은 넉살좋게 웃어보였다.

"네놈이 긴장하는 꼴을 다 보는구나."
"....솔직히 좀 떨립니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 아무리 신다르가 호전적인 종족이라고는 하나 놀도르의 왕위를 잇는 네게 함부로 대하진 않을테니 말이다."

오로페르 그자가 좀 불같은 성미이긴 하다만 말이다.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던지는 양부의 말을 한귀로 흘려보내며 길갈라드는 막사 안에서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킨 채 심호흡을 시작했다. 엘프와 인간의 동맹. 그 결속은 놀도르와 신다르조차 한 편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명분이었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놀도르에 대한 소문들은 험한 것들 뿐 이었지만 편견을 갖지 말자며 길갈라드는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과거가 어찌되었든 지금은 현재와 앞으로 닥칠 미래가 더욱 중요했다. 그러기엔 첫 단추부터 잘 끼워야지. 앞에 놓였던 찻잔을 들어 막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막사의 휘장이 빠르게 걷혔다.

"그린우드의 왕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길 갈라드의 눈이 꾹 감겼다 떠졌다. 결연한 표정으로 나가는 왕의 뒤를 따르던 키르단은 뜻 모를 한숨을 내 쉬었다.

 

당당히 나부끼는 청색의 깃발 틈으로 좀체 볼 수 없던 모습의 갑옷을 입은 엘프군이 대열을 갖추고 서 있었다. 빠른걸음으로 나서는 왕의 발걸음이 황급히 그들에게로 향했다. 투구와 마스크로 무장한 군대의 선두에는 꼿꼿히 등을 세운 가벼운 차림의 엘프가 서 있었다. 그린우드의 왕. 오로페르.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위압감. 고고함. 유독 다른 분위기를 가신들도 느꼈는지 수군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엘론드가 무어라 잔소리를 하는것이 들렸고 곧 길갈라드는 오로페르의 앞에 당도했다. 자신과 비슷한 키의 왕은 슬쩍 눈을 치켜뜬 채 자신을 주시했다. 텅 빈 눈동자.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은빛의 머리카락.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길갈라드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그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밝은 햇살이 그대와 나의 머리 위를 비추는군요. 별빛의 시대에 태어나 중간계의 모든 순간들을 함께하신 지혜로운 현자. 린돈의 군주이신 키르단. 광활한 푸른숲을 지키는 저 오로페르가 인사드립니다."

숙여진 고개에서 흐르는 은빛의 머리칼은 익숙하리만치 눈에 아로새겨졌다. 다시 떠진 눈동자에 담긴 인물은 왕이 아니었다. 당황하는 부관들과 키르단의 표정들도 함께 시선에 와 닿았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키르단의 입이 열렸다.

"우리들의 만남에 별빛이 흐릅니다. 그린우드의 왕이자 용맹한 신다르의 후손 오로페르. 나 키르단이 그대에게 인사합니다. 놀도르와 신다르, 엘프와 인간의 빛나는 결속 이행하러 먼 곳까지 내딛은 그대의 발걸음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더불어 그대에게 소개할 이가 있습니다. 린돈의 진정한 군주이자 놀도르의 대왕. 빛나는 별의 가호를 받는 길 갈라드. 그가 여기에 있으니 제가 받은 인사는 분에 넘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키르단. 그대와 나의 뿌리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가장 지혜롭고 현명하다 일컬어지는 당신께 드리는 인사로서 오히려 부족함이 많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대왕大王이라 일컬어지는 자신의 주군이 철저히 무시당하는 모습에 등 뒤의 엘론드가 검집에 손을 대는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역시 엘론드의 손이 검에 닿기도 전에 오로페르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대와 나는 만난 적이 없지만 그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 같군. 빛나는 별빛을 거머쥔 에아렌딜과 도리아스의 마지막 공주님 엘윙의 아들 엘론드. 그대의 얼굴 곳곳에서 아름다웠던 공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니 어찌 그대를 모른다 할 수 있을까. 온전한 신다르의 이름이 아닐지라도 그대의 몸 반쪽에 흐르는 것은 틀림없는 신다르의 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 여긴 별빛을 그대의 모습을 통해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건만 이렇게 마주하고보니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고 반가움의 미소가 얼굴에 떠오르는군."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엘론드가 당황하는것이 느껴졌다. 눈을 곱게 접어올리며 상냥하게 웃어보이는 모습에서 길갈라드는 또다시 기시감을 느꼈다. 일단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키르단이 먼저 오랜 기간 행군해온 엘프들의 고단함을 언급하며 여독을 풀 수 있는 천막을 안내하겠다 나섰다. 세심한 배려와 친절함에 거듭 감사의 인사를 건넨 오로페르는 그제서야 싸늘한 눈으로 곁에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길갈라드와 다시한번 시선을 마주쳤다.

[천박한 놀도르]

그 시선에 담긴 뜻을 모를리 없었다. 짧게 헛웃는 소리가 새어나가자 등 뒤에 늘어서 있던 가신들이 덩달아 긴장하는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로페르는 이내 몸을 돌려 키르단이 안내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길갈라드는 이제껏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엘론드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가만히 엘론드를 쳐다보다가도 다시 향한 시선의 끝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앞으로 향하는 오로페르의 뒷모습이 있었다. 여전히 헛웃음을 웃으며 뚫어질 듯 쳐다보는 대왕의 모습에 부관들은 제대로 화가 나셨다며 수군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공식적인' 오로페르와 길갈라드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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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아마에. 무제.

2014. 1. 1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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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온통 정신이 멍해졌다. 촛점을 잃은 눈은 들고있는 서류를 그저 검은 글씨와 흰 종이로 구분하고 있었다. 몇번 눈을 깜박여 보였지만 도무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눈가를 문지르며 엘론드는 들고 있던 서류를 놓고 그대로 책상위에 엎드렸다. 어지럽게 쌓인 책더미 사이로 열려있는 창문과 들이치는 비에 젖고있는 카펫이 저 멀리 보였다. 문을 닫아야 할 텐데. 하지만 도무지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들질 않았다. 며칠 내내 내리는 겨울비의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기라도 한 듯, 온몸의 감각이 둔해지고 무뎌졌다. 게으름을 부리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라고 되뇌이면서도 침실까지 누가 옮겨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있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쳐졌다. 어자피 급한 일들은 모두 마무리 지어놓은 상태였으니 하릴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멀리한 채 엘론드는 눈을 감았다. 눅눅해진 비에 젖은 머릿속을 조금 쉬게하고 침실로 돌아가야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어깨위로 풀썩 무언가가 덮였다. 조용히 다가오던 추위에 가늘게 떨리던 몸이 한순간에 포근해졌다. 엉겁결에 눈뜬 엘론드의 시선이 앞에서 어룽대던 금발에 고정됐다. 글로르핀델과는 다른 투명한 빛을 내뿜는 금빛.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는 스란두일이었다.

"자네가 이곳엔 어쩐 일인가?"
"내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오던가?"
"그도 그렇지만."

평소였다면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며 금세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졌겠지만 오늘은 그다지 기운이 나질 않았다. 엎드린 채, 눈만 껌뻑이자 못볼 꼴을 본다는 듯 찡그려진 미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디 아픈가?"

제멋대로 이마에 손을 얹고 이리저리 자신을 휘두르는 손짓에 엘론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만두게. 밀치고 일어서려는 순간 강한 힘이 그를 막았다.

"뭐 하는겐가?"
"피곤해 보이니 그냥 그대로 있게. 뭘 또 일어나. 대단한 손님 온 것도 아닌데."

버둥거리는 엘론드를 그대로 책상위로 눌러놓고는 근처의 의자를 당겨 가까이 앉았다. 턱을 괴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제서야 또렷하게 잡혔다.

"천하의 엘론드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도 보이고. 임라드리스도 이제 갈 데 까지 간 모양이군."
"매번 그렇게 내 속을 긁으면 재미있지?"
"어떻게 알았지?"

볼멘 소리로 대답했지만 혼자서 웃는 스란두일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길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얼굴을 바라보다 일어선 스란두일은 제멋대로 진열장으로 향했다. - 그 전에 불어오는 바람을 살피고 투덜거리며 열린 창문을 닫는것을 그는 잊지 않았다.- 잔을 들고 다가와 엘론드의 코앞에 내려놓고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뭔가?"
"오랫만의 귀한 술이지."
"오랫만이라는 단어와 술이라는 단어를 함께 듣자니 기분이 이상한걸."
"토달지 마. 어렵게 구한거니까."
"그래서 그거 자랑하러 이곳까지 뛰어온겐가?"
"당연한 일을 묻는군."

씨익 웃는 모습으로 마개를 따내고 두어번 빙그르르 병을 돌리는 스란두일의 손에선 달디단 내음이 났다. 멍하니 코앞의 와인잔이 차오르는것을 지켜보던 엘론드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맞추어 앞쪽으로 밀쳐진 잔에서 술이 요동치며 출렁였다.

"기포가 차올라."
"그렇군."
"처음 맡는 향인데?"
"귀한거니까."
"품종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으셨나? 잔말 말고 맛이나 보시지."
"......"
"싫으면 먹지 말던가."

늘 있어왔던 도발이었지만 소모전을 하기엔 엘론드는 너무 피곤했다. 군말없이 집어든 잔은 부딧혀 소리를 냈다. 코끝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향이 달큰하게 피어올랐고 곧 안을 후끈하게 덥혔다. 어디선가 느껴본 익숙한 향과 맛이었지만 그것을 떠올리기도 전에 엘론드는 이미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켜버렸다.

"목마른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급하게 마셔?"
"...글쎄. 귀한 술이라고 들어서 그런지 착착 붙는군."
"별 일이야. 정말로."
"왜. 아깝나?"
"그럴리가."

연거푸 두 잔을 청해 마시고 난 엘론드가 겨우 일으켰던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고 있던 스란두일이 홀로 웃어보였다. 정말로 오늘은 자네 답지 않아. 빙글빙글 잔을 돌리며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에 엘론드는 못마땅한 모습으로 쳐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피곤해졌어."
"그럼 자면 되지."
"벌써..?"
"벌써라고 하기에는 밤이 이리 깊었는데."
"흐음..."

가늘게 뜬 눈으로 스란두일을 훝어보던 엘론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 깊은 밤중에 연락도 없이 쳐들어온 손님은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술에 뭐 탄거 아니지? 진심으로 피곤해졌어."
"에루께 맹세코 나는 결백해. 아무리 내가 자넬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누가 들으면 내가 음식인 줄 알겠네."
"먼저 의심한 게 누군데."
"그래 내가 잘못했어. 미안."

순순히 사과하며 작게 하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만지작대던 잔을 내려놓았다. 방까지 데려다줄까? 자네 정말 피곤해 보여. 하지만 늘상 그렇듯 호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거워진 몸을 일으킨 엘론드는 술기운이 올라 발그레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오늘은 그냥 아무곳에나 들어가서 눈을 붙이게. 엘크는 제발 안뜰까지 데려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럼 안녕. 좋은 밤 되길.
제멋대로 던진 인사를 끝으로 불안정한 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소리죽여 뒤를 밟으며 스란두일은 미소지었다. 점점 휘청이던 걸음은 불안해졌고 방문에 당도하기도 전에 느릿해졌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먼저 열렸다.

"아버님."

중심을 잃어 앞으로 기울어진 몸을 안아든 엘프가 놀란 목소리로 엘론드를 불렀다. 엉거주춤 일어선 채,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엘프를 확인한 엘론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가 이시간에 어쩐 일이냐."
"너무 늦게까지 서재에 계시길래 걱정이 되서 와봤습니다만.. 손님이 계셨습니다."
"손님은 무슨.. 아무튼 고맙구나. 이제 들어가려던 참이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제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그래. 잠깐 중심을 잃은것이니 괜찮다."
"다행입니다."

꼭 껴안은 손이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가만히 아비의 애정을 받는 아들의 눈이 뒤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있는 스란두일을 도발하듯 웃어보였다. 하지만 스란두일은 그저 코웃음을 보인 채,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얄밉다는 표정으로 변한 엘라단이 이내 엘론드를 일으켰다.

"침실로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혼자 갈 수 있으니 너는 손님을 모셔야겠다."
"그래도.."
"엘라단."
"..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도 양해를 구하지요. 아버님 먼저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괜찮으니 상관하지 말아. 먼저 안으로 모시도록 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가늘게 뜬 스란두일을 쳐다보던 엘론드는 한숨을 쉬곤 엘라단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미소짓는 얼굴이 손을 내밀었고 엘론드는 망설임없이 그 손을 잡았다.

"먼저 들어가겠네."
"좋은 꿈 꾸길."

짧은 인사와 함께 움직인 두개의 몸은 천천히 복도를 나아갔다. 하지만 그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엘론드의 발걸음이 불안해졌고 부축하고 있던 엘라단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아비를 지탱하기에 바빴다.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던 몸짓은 곧 부질없어졌다. 툭, 하고 엘라단의 어깨위에 떨어진 엘론드의 얼굴은 편안히 잠든 모습 그 자체였다.

"말은 바로하셨어야지요. 에루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가 너무나도 가볍지 않습니까."
"틀린말을 했더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에 약을 탄 것은 너이지 내가 아니니까."
"...어쩐지 도와드리고도 손해를 보는 느낌입니다."
"기분탓이니 안심해도 좋아."
"아 그러십니까."

한숨을 쉬며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엘론드를 바라보던 엘라단은 금새 다가온 스란두일의 품으로 엘론드를 넘겨주었다. 장신의 엘프는 참으로 간단하게 자신의 아비를 들쳐 업고는 좋은 꿈 꾸라는 한 마디 인사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처구니 없이 바라보던 시선이 황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침실은 그 방향이 아닌데.."
"아, 나도 알아. 하지만 엘론드가 오늘은 그냥 아무곳에나 들어가라고 했으니 그의 말대로 아무곳에나 가보려고."
"...정말 싫은성격이네요."
"뭐 자네에게까지 좋을 성격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하 웃으면서 제 갈길을 가는 스란두일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엘라단은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부디 밤새 숙면하시길 빌게요. 절대 깨지 마시길.
그런 자식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다시한번 거세진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엘론드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길고 긴 복도에 짖궂은 금빛의 미소만을 남기고 숲의 왕은 은밀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스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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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약점.

톨킨버스 2013. 12. 29. 00:30

 

"피곤해 보이십니다."

막 의자에 기대어 눈감은 주군의 곁에 새로 우린 차를 내려놓던 엘론드가 빙긋 웃었다. 오늘 회의의 주 목적은 변방의 수비강화에 대한 군사회의였을 테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음을 엘론드는 알고 있었다. 한시간 남짓 하는 시간동안 충심과 대의를 등에 업은 대신들의 잔소리는 주군의 혼을 쏙 빼놓기에 적절했고 그 여파는 꽤나 오래갈 것이 분명했기에 엘론드는 찻잔에 설탕을 두어스푼 정도 더 집어넣었다.

"알면서도 들여보냈지?"
"들켰습니까?"
"미리 눈치챘으면 언질이라도 주지않고."
"제게는 그들을 막을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하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주군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엘론드가 천천히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신들이 문을 나서자마자 들고 있던 서류를 몽땅 던져버린 주군 덕분에 할일이 아주 많았다. 다행히 많이 섞이지는 않아 정리하기엔 수월하겠다 생각하며 엘론드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잔소리의 늪에 빠져있는 주군께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하긴 저도 걱정입니다."
"너까지 잔소리를 보태려는 것이냐."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요. 가신들이 저렇게 성토해보았자 어자피 대왕께서는 결혼 못하실 것 아닙니까. 저래 보았자 헛수고일텐데.. 서로 끝 없는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대왕을 엘론드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지만 이런 이야기를 정면으로 하기엔 좀 부끄러운데...

"신하된 도리로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그... 안...서시는것 아니었습니까?"
"......응?"
"저는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응?"

충격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왕을 안쓰러히 바라보며 엘론드는 다 정리된 서류들을 책상에 내려 간추렸다. 패닉에 빠져있는 주군을 어찌 처리할 방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 가지가 잘나셨으니 한가지 정도 약점이 있어도 좋겠지요."
"......"
"긍정적인 부분을 찾자면 적이 미인계를 써도 넘어가지 않는다는거잖아요?"
"이봐 엘론드."
"예 대왕."
"그러니까 내가 고자라고?"
"....굳이 부인하고 싶으신거라면..."

삽시간에 주변은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길 갈라드의 눈빛을 아련히 피하면서 엘론드는 슬금슬금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시구나. 아니셨구나. 그랬구나. 들릴락말락하게 문장들을 주억거리며 애써 미소짓는 표정에는 가식이 가득했다. 이래서 머리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랬는데... 주름이 생기려는 미간을 억지로 편 채, 길 갈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춤거리는 엘론드에게 다가섰다.

"엘론드야."
"...네?"
"내가 고자라고?"
"...아니라셨으니..아니겠지요?"
"그걸 어찌 믿느냐?"
"예?"
"내가 고자가 아니라는걸 어찌 믿어."
"그럼 진짜..."

코 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뒷걸음질치는 엘론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라는건지 아니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처음의 곤혹스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꽤나 차가운 눈빛으로 웃고있는 얼굴은 재밌겠단 표정으로 시시각각 바뀌었다. 움찔. 더 이상 물러날 곳 없이 굳어버린 몸뚱이가 경련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입술이 엘론드의 귓가로 향했다.

"진짜인지...아닌지.. 몸소 알아볼테냐?"

그 순간 허벅지를 타고 튜닉 사이로 손이 비집고 올라왔다. 어느새 감겨버린 눈이 번쩍 뜨였다. 엉겁결에 놓친 서류들이 바닥으로 흩어지는데도 길 갈라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엘론드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쪽의 옷까지는 건드리지 않았어도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무어라 한소리 하려는 순간, 귓가에 묘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이렇게 다 자랏건만 아직도 어린아이같구나."

귓가에 들리는 웃음소리가 몸을 울리는 것 같았다. 점점 이상해지는 기분에 손을 들어 밀쳐보았지만 가만히 있을 길 갈라드가 아니었다. 한손으로는 뒷 목을, 한손으로는 허리를 감싸안으며 몸을 완전히 밀착시킨 후 대왕은 느릿하게 뾰족한 귀 끝을 우물거렸다.

"히익..!"
"이런 건 익숙하지 않느냐?"

허리에 걸친 손이 점점 밑으로 향하고 부드러운 둔덕을 지나 강하게 끌어당기면 자극에 서툰 몸이 움찔하고 놀랐다. 어느새 목선까지 내려온 입술의 따스함에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것을 느끼며 엘론드는 그저 힘없이 올려진 손으로 미약하게 그를 밀쳐내는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대왕과 확연히 다른 모습에 두려움이 솟아났다. 아 놀리지 말걸. 장난으로라도 하지 말걸. 질끈 감긴 눈꺼플이 불안하게 파들거렸다. 한참동안이나 어린 피부를 유린하던 입술이 풋,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순식간에 엘론드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놀란 엘론드가 눈을 크게 뜨고 주군을 바라보았다.

"큽..크큽크하하하하하하"
"........"
"흡.푸흡..흡큭큭..엘론드야.크흡흡."

자신의 앞에서 배를 쥐고 웃는 대왕을 쳐다보다 몸의 이상을 깨닫고 엘론드는 얼굴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우물쭈물하다가 옆으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곤 쏜살같이 방 안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길 갈라드는 아예 주저 앉아 웃으며 소리쳤다.

"너는 그래도 푸흡 고자는 아니로구나 크하핫."

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가며 열오른 얼굴로 싸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엘론드는 이를 갈았다. 네, 잘 알았습니다 아주. 본인이 고자가 아니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알려 주실 필요는 없으셨는데. 머릿속으로 길 갈라드가 유독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가신들의 리스트를 뽑으며 엘론드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고자가 아니시니 결혼은 하셔야겠죠. 전하의 가신인 제가 적극 도와야겠습니다. 차갑게 미소짓는것도 잠시, 다시 얼굴에 가라앉지 않은 열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엘론드는 발을 재게 놀렸다. 화장실은 왜 이리도 먼 거야. 투덜거리는 것도 한 순간, 이를 악물고 달려가는 발소리만이 복도에 크게 울려퍼졌다.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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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별.

톨킨버스 2013. 12. 26. 02:54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느냐?"

제법 가까이 들린 목소리에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들켜서는 안될 모습을 보인 것 처럼 무언가 황급히 뒤로 숨기는 모습에 길 갈라드는 머쓱하게 웃었다. 방해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단다. 다정하게 이야기 해 보지만 우물쭈물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혹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냐?"
"...."
"산책을 나왔다가 불이 켜져 있길래 들른 것 뿐인데 괜히 내가 너를 불편하게 했구나. 이만 가볼테니 일찍 자거라."

이제 겨우 며칠이었다. 이리 훌쩍 자라났다고는 해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친해지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곁눈질로 잠든 엘로스의 모습을 확인한 길 갈라드는 설핏 웃어보이며 엘론드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잠이 들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온 목적의 반은 이룬 셈이었다. 그대로 어둠의 장막에 몸을 숨기려는 찰나, 작은 목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딱히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로 감추었던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우물쭈물하며 눈을 맞추는 아이가 속삭였다. 그저 놀라 감추었을 뿐 입니다. 자연스레 향한 시선에는 기묘한 것이 들려 있었다. 두개의 동그란 유리알을 붙여놓은 듯한 얇은 조각이었다. 천천히 내려앉아 시선을 맞춘 길 갈라드는 예의 물건을 주시하며 엘론드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실은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얼결에 건네받은 작은 조각은 길쭉한 네모진 모양이었다. 두 개의 유리알이 둥그렇게 붙은 곳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양새에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처음보는 물건이구나."
"하늘을 보는데 쓰인다고 합니다."
"하늘?"
"정확하는 그 속에 담긴 것 이지만요."
"어디서 났는지 물어봐도 괜찮겠느냐?"
"아저씨....마에드로스가.. 만들어주셨습니다."
"...마에드로스가?"
"네. 장난감이라시며.."

자연스럽게 손 안에서 빠져나간 조각은 엘론드의 작은 손가락 안에서 움직였다. 몇 번 유리알을 돌리고 만지작거리다 밤하늘을 향해 높이 쳐든다. 시선이 그 손길을 따라 올라갔다. 둥근 유리알이 묘하게 겹치며 밤하늘의 빛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흐릿하게나마 눈 앞에 빛이 어렸다. 달이었다.

"달..?"
"아마도요?"

덤덤하게 길 갈라드의 눈가에 조각을 대어준 엘론드가 그것을 건네고는 슬며시 웃었다. 아이가 자랑이라도 하는 모습에 길 갈라드는 흐릿하게 보이는 모양새를 따라 몇 번이고 좌 우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고 은은하게 빛을 비추는 달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높은 하늘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구나. 밝은 낮에는 꽤나 먼 곳도 보일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찾는것이 있었더냐."
"가장 밝고 아름답다는 희망의 별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대 얻어맞은 듯한 대답에 길 갈라드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평온할 정도로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청회색의 눈동자를 쳐다보던 길 갈라드가 몇 번이고 입 속으로 단어를 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동정? 모른척? 어떠한 것도 당장 합당한 답이 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더 이상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엘론드는 그의 손 안에서 조각을 건네받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쌌다. 오늘도 보긴 글렀지만요. 아이같이 웃으며 모른척 졸립다는 말을 뱉고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앞에 둔 길 갈라드의 표정은 한없이 슬퍼 보이다가 싸늘해졌지만 다시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다음에는 꼭 찾았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자는 편이 좋겠다."

의례적인 인사. 다시금 새카만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길갈라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의 잠옷을 여며주었다. 작은 함에 조각을 넣어두고 만지작거리는 손끝과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어쩐지 숨이 막혀왔다. 스스로가 이렇게 무신경하고 배려심 없는 성격이었던가. 감싸주지 못할 아픔을 섣불리 동정하거나 관심가져서는 안된단다. 어릴 적 흘려 들었던 키르단의 목소리가 아이의 시선과 함께 겹쳐 자신을 책망하는듯 보였. 그러나 오래 지체하다간 아이가 이상하게 생각 할 지도 몰랐다. 스스로 굽혔던 자세를 곧게 세운 채, 길 갈라드는 저녁 인사와 함께 황급히 방을 나섰다. 뚫어지게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지고 어룽대던 불이 꺼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행히 아직 잠들지 않았구나."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작은 초를 들고 다가온 길 갈라드가 누운 채로 눈을 뜨고 있던 엘론드의 곁에 조심히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단단한 나무로 짜여진 함은 엘론드가 몸을 일으켰음에도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손 끝을 대어보려다 고개를 들어올린 아이의 시선에 빙긋 웃어보이며 눈짓을 해보였다. 단단하게 잠긴 걸쇠를 열고 뚜껑을 넘기자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찾는 별은 아니지만.. 이 별도 꽤나 괜찮아서 말이다. 괜찮다면 네게 주고싶구나. 혹 뭔지 알겠느냐?"
"사탕...아닙니까?"
"정확히는 별사탕이지."

침대 위에 슬쩍 기대앉은 길 갈라드는 손가락으로 작은 별사탕 하나를 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 차마 받아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길 갈라드는 짖궂게도 아이의 입술에 닿도록 톡톡 두드렸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무어라 볼멘 소리를 내어놓으려 열린 입 사이로 밀어넣어진 사탕이 애매하게 걸렸다. 빙그레 웃으며 먹어보라는 말에 몇 번을 고민하던 아이는 조심스레 사탕을 물었다.

"맛있느냐?"
"....저는 단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 몰랐구나."
"그치만.. 맛있네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길 갈라드가 싱긋 웃어보이곤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움직임에 상자 안의 별사탕이 와르르 쏟아져버렸다. 놀란 두 엘프가 부리나케 이불 위를 훔쳤다. 많이 쏟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있는대로 줍다보니 서로의 양 손에 별들이 가득했다.

"쏟아질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움직이시니 그렇지요."
"어쩐지 날 책망하는 이야기 같은걸?"
"...죄송합니다."
"농담이다 농담. 어쨌거나 미안하구나. 모처럼 선물을 하고도 쏟아버렸으니."
"바닥에 쏟아진 것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럴까?"

상자 속에 쏟아진 사탕을 도로 넣은 채,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에게 그것을 건넸다. 묵직하게 닿아오는 상자를 받아든 엘론드는 조용히 길 갈라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더 좋은걸 주고 싶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주마."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처음보다 훨씬 다정한 시선으로 바뀌었음을 깨달은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로 늦었으니 이만 자거라. 아까와 같은 인사로 끝을 맺은 후, 이번에는 아이가 누울때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다. 작게 너울대는 초를 꺼트린 뒤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길 갈라드는 문가로 다가가기 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희망의 별은 새벽녘이나 태양이 저물 즈음에 볼 수 있을게다.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양과 함께 반짝이기에 쉬이 볼 수 없는 그 별은 높이 빛나는 희망의 별, 길 에스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더구나."

혹, 찾는 것이 그 별일까 싶어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수줍음이 묻어났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좋은 꿈을 꾸라는 인사가 방 안을 울렸다. 복도를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사방이 고요해 질 무렵, 아이는 미처 넣지 못해 손에 쥐어둔 별사탕 한 개를 슬그머니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달콤함에 미소지은 아이는 머리 위에 놓아 둔 상자와 저 멀리 떨어진 창문 밖의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리우면서도 다정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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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레오로. 무제.

톨킨버스 2013. 12. 12. 14:59

로스로리엔의 로드 켈레보른은 엘웨의 동생인 엘모의 손자로, 갈라드리엘과 결혼하여 딸 켈레브리안을 두었다. 갈라드리엘이 서녘으로 떠난 후, 켈레보른과 그를 따르는 엘프들은 로스로리엔을 떠나 머크우드라고 불렸던 숲 남부에 동(東) 로리엔을 건설하였다. @Arda_wikib_kr

 

 

"의외로군요."
"어떤것이 말인가? 차를 내리는 것이?"

시종도 없이 손수 거름망을 들어올리는 이의 얼굴엔 여느때처럼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언제나 금색의 찬란함을 끌어안고 빛나던 은색의 머리카락은 본래의 투명한 색으로 돌아와 어깨위에 보기좋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평온함은 좀체 변하는 법이 없었다. 스란두일은 말없이 그가 건넨 찻잔을 받았다. 오렌지향이 감도는 달콤한 향내가 코끝을 간질거렸다.

"이래뵈도 꽤 세심한 취미라네. 어떤가 자네도 이 참에 배워보는것이."
"사양하죠. 제 집사가 내리는 것도 꽤 먹을만 합니다."
"아쉽군."

반대편 의자에 앉아 조용히 음미하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묻지 않는 이의 모습에 스란두일은 되려 짜증이 났다. 

"왜 웃으십니까?"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참고 있는 것이 자네답지 않아서."
"질문은 이미 던졌죠. 의외인 점이 있다고."
"그래서 되물었잖나. 어떤 것이 그리도 의외였냐고?"
"이젠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도 불구하고 켈레보른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침착하게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곧게 등을 편 채 스란두일을 바라보았다. 기대를 벗어난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너무나도 간결했다.

"아직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네."
"그래서 의외라고 한겁니다. 어째서 이곳에 남으셨습니까?"
"그런 자네는?"
"...."

허를 찔린 스란두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몇 번이고 말을 골라내던 혀끝은 결국 답을 찾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질문은 제가 먼저 드렸습니다만."
"글쎄, 왜일까."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담은 시선이 그를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동등하게 눈높이를 마주한 채 담소를 나눌만한 이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기에 스란두일은 새삼 이 자리가 생경하고도 어색했다. 하지만 눈앞에 자리한 이는 그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그저 씩 웃어보였다. 

"정든 곳을 잊지 못하는 늙은이의 고집이라고 해두지."
"그렇다고 제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알고 있었나?"
"임라드리스의 현자라 불리우는 이처럼 예지의 능력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저도 몇 천년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모르는게 더 우습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굉장히 평온하십니다?"
"평온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공께서는 지금 그 오로페르의 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신겁니다."
"그렇다고 그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뭐 이야기 하는 정도야 괜찮지 않겠나?"
"......"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스란두일의 표정을 잠시 지켜보던 켈레보른은 다시금 손을 뻗어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찻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다시 조용해진 방안에 홀짝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실은 내가 먼저 차였어."
"....네?"
"그녀가 먼저 날 놓아줬다네."
"......"
"내게 묻더군. 자신과 함께 서쪽으로 가겠느냐고."
"매우 뻔한 질문이네요."
"물론 그랬지. 그녀의 손을 잡고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했었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내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았으니 함께 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어."
"그런데요?"
"그녀가 웃더군."

사랑에 빠진 달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켈레보른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모습은 천진한 어린아이와도 같았지만 그 모습은 이내 사라지고 덤덤한 모습만이 남았다.

"더이상 욕심부리면 안될 것 같다며 내 손을 놓았지. 사랑하는 나의 켈레보른. 이제 가세요. 자유롭게.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무슨 전해 내려오는 노래같습니다."
"앞으로 전해지게 되겠지. 황금 숲의 여주인이 남긴 마지막 노래라던지?"
"재미 없는데요."
"그대의 재미는 내 알 바 아니라네. 여전히 내게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이니."
"그렇게 사랑하던 분은 놀도르의 공주셨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나를 비난할 텐가?"
"네. 힘 닿는데까지요."
"그런 점은 정말이지 오로페르와 많이 닮았군."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자네였다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그러나 켈레보른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설탕을 조금 더 넣고 찻잔속을 휘저었을 뿐 이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처럼 그는 우아하게 혼자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 평화로워보이는 모습에 작은 새 한마리가 탁자 위로 날아와 앉았다. 

"솔직히 눈치채지 못할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건 나는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을 품에 안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왔네. 그 뿐이야."
".... 정작 아버지에게 제대로 이야기 한 적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자네는 내가 오로페르에게 사랑이라도 고백하길 바랬나?"

내밀어진 손 위에 올라선 작은 새는 부리로 손가락을 쪼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켈레보른이 재미없다는 듯, 금세 포르르 날아가버렸다. 아쉬운 듯, 움켜쥐어보아도 남은것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새가 날아가버린 곳으로 향했다.

"지나가 버린 기회가 돌아오는 법은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셨습니다."
"가끔은 가슴 속에 묻은 케케묵은 감정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네. 이유는 그것 뿐이야."
"....."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기억이 자네에게도 있겠지. 이만하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나?"

숲의 레이디는 항상 숨기고 싶은 모든 것을 비추어냈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면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짙고 단단한 눈동자는 마치 호수와 같이 고요했다.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던 스란두일이 먼저 눈을 감았다. 어쩐지 그 올곧은 시선 끝에 닿은 이가 누구인지 보여버릴 것 같아서.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궁금한 것을 물을 시간은 충분했지만 나와 차 한잔 같이 할 여유는 없었나보군."

작은 핀잔에도 스란두일은 자리를 털고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식은 찻잔이 그대로 어여쁘게 놓여 있었다. 성큼성큼 문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배웅하는 이에겐 인사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이별을 하던 두 엘프의 사이의 고요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저 추억하는 것 만으로 만족하십니까?"

문득 제자리에 우뚝 선 스란두일이 물었다. 의자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던 켈레보른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물론."
"힘드실겁니다."
"곁에 없는 이를 그리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지.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선택한 길인걸."
"......"
"조심히 가게. 에린 라스갈렌의 왕. 오로페르의 아들 스란두일. 그대의 앞길에 평안이 있기를."
"나마리에. 언제나 별빛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단단하고 규칙적인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방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비로소 온 몸에서 힘을 뺀 켈레보른은 가만히 눈을 감고 기억속에 자리한 이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려진 이의 모습에 그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아야 희미해질 터인데 앞으로 칠백년 정도는 문제 없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켈레보른은 문득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저귀던 작은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자신을 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멀리 가버리기 전에 그리던 이와 함께 차 한잔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포트를 들어올렸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석양이 아름다운 여름 날이었다.

 

 

 

 

 

 

 카르님.....사랑합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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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마에. 온기.

톨킨버스 2013. 11. 21. 00:53

사촌의 몸은 언제나 서늘했지만 나는 그 서늘함에도 어쩐지 온기를 느꼈다. 무심코 감겨오는 팔과 다리에 가만히 몸을 맡긴 채,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밀어내도 밀릴 힘이 아니었고 지금은 몸을 비틀 힘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새까맣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숨이 막혔다. 평온했다. 조용했다. 여느때처럼 조용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랐다. 나는 매달려있지 않았고,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는 없어져 버린 오른손이 있던 자리가 아파왔다. 흠칫, 놀라며 무심코 맞잡은 곳에 비어버린 공간이 어색했다. 하나 둘 무뎌지면서 감정이 메마르고 신경마저 감각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것은 또 아닌 듯 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적응하려 애썼다. 미미하게 이어지는 신경의 저림은 지금껏 겪어왔던 아픔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살아남은 자신은 결국 패배자에 불과했다.

꿈속의 나는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한쪽 팔이 끊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추위와 더위를 견뎠다. 타는듯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구차한 목숨이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끊없이 이어지는 산능선. 가파르게 깎아지른 절벽들. 에루께서 창조한 광활한 자연만이 주위에 있었다. 간혹 지나는 것은 어둠의 기운을 담고 주변을 정찰하던 새들. 매달려있던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한번씩 휘감고 지나가던 바람. 그 뿐이었다. 오로지 인내와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곳. 눈을 감아도 그려질 정도로 지긋지긋한 풍경. 철의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맞는 무섭고도 두려운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비워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커다란 손이 내게 다가왔다. 손목을 부러트릴 정도로 힘주어 잡아당기던 손이 사라지고 꽉 죄인 아픔에 헐떡이고 있으면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통증에 온몸이 잠식당했다. 잠긴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오고 부르튼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이를 악물면 후둑 떨어지는 핏방울은 사촌의 얼굴에 비처럼 흩뿌려졌다. 오랜 시간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몸이 무섭게 삐그덕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더듬거리며 맞잡은 곳에서 샘솟는 피는 나의 머리색보다 짙었다. 흔들리는 시야에는 늘 보던 풍경이 서서히 이그러졌다. 귓가에선 여전히 나를 비웃는 모르고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스며든 어둠의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정신을 다잡고 나서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겨우 귀에 들렸다. 마이티모 괜찮아. 울지마. 울지마.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주문이라도 되는 듯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억눌린 슬픔을 전하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

갑자기 커다란 손이 꿈에서처럼 비어버린 팔목을 매만졌다. 천천히 둥글리듯 상처부위를 다독이던 손은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 품 안으로 가뒀다.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잡힌곳을 비틀며 떨어지려고 했지만 몸은 주인의 의지를 거부했다. 파묻힌 꼴이 되어서야 끌어당기는 것을 멈춘 커다란 손이 다시금 팔목으로 향했고 나는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아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힘주어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노곤함이 묻은 목소리. 잠결이라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를 듣고나선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눈뜨지 않은 채로 상처부위를 매만지던 손은 눈물이 날 정도로 다정했다.

"금방 나을거야. 얼른 기운을 차려야지. 이제 정말 자자."

들릴 듯 말 듯 스며든 목소리.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는 손길. 맞닿은 이마의 열기까지. 마치 어릴적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할 때 처럼 따스한 온기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이젠 진정으로 혼자가 아니란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꿈보다는 잠이, 과거보다는 미래가 필요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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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입맞춤.

톨킨버스 2013. 11. 16. 01:00

"엘론드!"

멀리서부터 빠르게 다가오는 친우의 모습을 확인한 엘론드는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정식으로 머크우드에 발을 들인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정식방문이 아닌 소수의 인원이었지만 팔벌려 자신을 맞이하는 숲의 왕은 그런 소소한 것은 신경쓰지 않을것이 분명했다. 지척으로 다가온 왕에게 엘론드는 친근함을 버리고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우리들의 만남에 별이 빛납..

인사는 쉬이 이어지지 못했다. 가볍게 올린 가슴의 손이 채 내려가기도 전에 스란두일은 덥석 엘론드를 안아버렸다. 미동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강한 힘으로 껴안고 톡톡 울리는 심장소리만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엘론드는 무어라 한마디 말 조차 꺼내질 못했다.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말간 눈으로 스란두일을 바라볼 뿐 이었다.

"보고싶었어. 엘론드."
"나도 보고싶었어. 스란두일."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질 않아. 자네를 잊어버릴뻔 했다고."
"그럴리가. 자네가 나를 잊는다니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날 리 없어."
"그런 부분에선 묘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게 조금 기분이 나쁜데."
"나쁘면 이것 좀 놓아줘. 가신들이 놀라잖...?"

흘낏,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가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던 엘론드는 당황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도 남아있질 않았다. 분명 함께 들어왔는데.. 크게 뜬 눈으로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엘론드를 바라보던 스란두일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섭섭한걸. 이곳까지 와선 가신들 걱정인가?"
"그게 아니라.."
"쉴 곳을 안내했을 뿐이야.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네. 머크우드의 엘프들은 손님을 맞는것이 익숙치 않아도 실례를 저지르진 않아. 내가 장담하지."
"....그다지 신뢰가 가는 이야기는 아니로군."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여긴 내 성이고 나의 왕국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누구든 이곳의 법을 따라야 하네. 하지만 손님이기 이전에 그대는 각별한 나의 친우지. 그대와 함께 걸음한 손님들에게는 편안한 쉴 곳을 제공할거야. 그러니 지금은 내게만 집중해줬으면 좋겠어."
"매번 말하지만 자네의 방식은 꽤나 급하고 저돌적이야.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것이 나 스란두일이야. 이제와서 내 방식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굳이 바꾸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고 있으니 걱정마. 그래도 조금은 섭섭한걸. 나는 오래된 친우를 만난 기쁨에 두근거리고 있는데 자네는 고작 가신들 걱정과 나에 대한 불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버렸군."

시릴정도로 새파란 바다가 펼쳐진 눈동자가 자신의 모습을 담는것을 보자마자 그가 원하는 답이 어떤것인지 강하게 와 닿았지만 막상 원하는 대로 말해주려니 조금은 쑥스러워졌다. 더군다나 스란두일은 아직 자신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숨결이 닿을듯한 거리에서의 시선은 꽤나 노골적으로 엘론드를 훝었다. 묘한 긴장감이 둘을 감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결국 한참을 바라보던 시선을 피한 채, 엘론드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텐데."
"말 하지 않으면 모른다네. 나는 누구처럼 미래를 보는 능력 같은건 없으니 말이야."
"나이를 먹을수록 성격이 더 안좋아지는 것 같은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 안그런가?"

시치미를 떼고 되물어오는 모습에 엘론드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엘론드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쓸데없는 소모전을 할 시간보다 함께 할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엘론드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네. 하지만 자네 때문에 일부러 일정을 조정한 성의를 봐주면 좋겠는데."
"그 점은 높이 사지. 하지만 너무도 오랫만이었어. 정말로.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인정해. 그래서 이곳까지 왔잖나."
"자네가 바빠서 벌어진 일이니 책임을 지게."
"책임?"
"키스해줘."
"뭐?"
"잘못했다며. 그럼 벌을 받아야지."

꽉 껴안았던 팔을 들어 허리를 끌어당기고 밀착했다. 이마가 닿고 코가 부벼질만큼 가까운 공간에서 스란두일은 들릴 듯 말듯 조용하게 속삭였다. 키스해주지 않으면 놔주지 않을거야. 답지 않은 투정과 오랫만에 닿은 온기가 합쳐져 달콤하게 물 흐르듯 귓가를 스쳤다. 확 달아오른 낯빛을 눈치채기라도 했다는 듯 그저 웃고만 있는 모습이 얄미웠다. 하지만 이미 녹아버린 마음의 견고함으론 어떤 공격도 막아낼 힘이 남아있질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입술이 단단하게 닫혔고 겹쳐진 속눈썹이 몇번 닿아 깜박일 즈음, 엘론드의 입술은 가볍게 스란두일의 볼에 스쳐 지나갔다.

"했으니 놔줘."
"이건 반칙인데."
"입에다 라고 전제가 붙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지금 붙이면 되겠군. 내가 만족할 때까지 입에다 키스해줘."
"이미 한 건 어쩌고."
"없던 일로 하지 뭐."
"굉장한 손해를 보는 기분인데.."
"어쩔 수 없어. 이건 벌이니까."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서 안해줄거야?"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그럼 얼른 해줘. 아까부터 기다리는 중이야."

웃던 눈이 곱게 감겼다. 당당하게 요구하며 입술을 들이미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 제멋대로인 뻔뻔함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하면 재촉하듯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덕에 반항하려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처음 발들인 어둠숲에는 마음을 현혹시키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엘론드 역시 눈을 감았다. 수줍게 닿은 말캉한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것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다정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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