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란안나. 노예상인과 왕자 3
밤의 시작과 함께 안채에 발을 들인것만 같았는데 벌써 엘베레스의 별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나타르는 놓아버리고 싶은 정신을 그러모아 힘겹게 눈꺼플을 들어올렸다. 불확실한 촛점이 겨우 맞춰져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제 곁에 누워 잠든 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뻔뻔스럽게도 제 곁을 차지하고 자신을 쿠션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둠 숲의 왕자는 세상 모를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온 몸이 꽉 묶인 듯 껴안긴 탓에 벗어날 방도가 보이질 않았다. 작게 혀를 차내며 팔을 밀어 움직여 보려했지만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고통에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하여튼 어린게 무식하게 힘만 세서.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내 뱉으며 안나타르는 잠시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간만의 노동을 끝낸 몸은 피로를 견디지 못했다. 하필 며칠 일이 몰려 무리를 했던 차에 쌓인 피로라 쉬고싶은 욕망이 살금살금 올라왔다. 하지만 씻고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몸은 열기가 식어갈수록 불쾌한 기운을 더해가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안나타르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안쪽의 어딘가를 조용히 응시했다. 고급스럽게 걸쳐진 휘장이 미세하게 움직이는가 했더니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방 안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씻을 물을 준비해라. 그리고 시트를 좀 갈아야겠다."
"네 주인님."
"조금 있다가 물이 데워지면 날 부축해라. 소리가 나지 않는 녀석으로 데려와."
고개를 짧게 숙여보인 사내가 다시 방 밖으로 사라졌다. 돌아올 시간을 가늠해보며 다시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정말 오랫만이었다. 모르도르의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손님을 체계적으로 관리한 후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화하고 발라들 또한 바쁜것이 사실이었다. 크고작은 세력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분화하고 합쳐지는 역사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머리 쓰기에 골몰했고 모르도르는 자연스럽게 핀트를 벗어나 한가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스란두일은 말하자면 평온한 호수에 갑자기 던져진 작은 조약돌 이었다. 아무도 날아오는걸 신경쓰지 않았고 맞을수도, 맞지 않을수도 있는 그런 작은 돌이었지만 맞으면 제대로 아플것 같은 마치 극약과도 같은 조약돌이었다. 결국 맞아버렸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변변치 않은 이라면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처리해 버리려고 했는데.. 신다르의 개망나니라는 별명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몸을 합치며 슬쩍 힘을 빼어 안달내는 찰나는 있었지만 스란두일은 본래 부드러운 스타일은 아닌터라 밤새 힘으로 강하게 몰아붙여왔다. 교태를 부리면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답했고 그 이상이면 또 그 이상을 안겨줬다. 기이하게도 그 합이 맞아떨어져 보기드물게 진심으로 흥분해버렸다.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연기와 조련에 능숙한 터라 본심을 굳이 보이지 않아도 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어쨌거나 결론은 간단했다. 속궁합은 최고였다. 멜코르님 이후로 쉽게 만족해보지 못했던 몸의 기쁨이 느껴졌다. 오르가즘에서 느낄 수 있는 한계치가 어디인지 시험해 본 기분이었다. 검은숲의 왕자가 아닌 그저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면 눈을 뽑고 팔다리를 부러트린 채 자신의 전용 노예로 사용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더이상의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었다. 남은 문제는 하나. 어떤것을 대가로 받고 옭아매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새벽의 한기가 이불틈에 스몄는지 왕자가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감촉에 다시 반짝, 눈이 떠졌다.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어떤것을 주고 내 발밑에 엎드릴테냐. 무엇이 가장 너에게 있어 값지고 사랑스러우냐. 사랑과 애욕이 담긴 시선으로 곱게 감긴 눈가를 한참 쳐다보았다. 무엇이라도 대답해주길 원했다. 들을 수 없는 머릿속 상념이었지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자라면.
그때 거짓말처럼 스란두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엘론드.."
온몸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동그랗게 뜨인 눈매가 가늘해지고 입술 끝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자였느냐. 너를 옭아맬 수 있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밖으로 터졌다. 계속되는 웃음에 몸이 떨려오자 스란두일이 다시 몸을 뒤척이며 꼭 안았던 몸을 그제서야 놓아주었다. 구속된 것이 모두 풀렸음에도 안나타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종이 와 그를 안아올릴 때까지 그저 미친놈처럼 계속 웃었다.
더러움을 남김없이 씻어낸 뒤 다시 방안으로 돌아온 안나타르는 아직 덜 마른 제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내린 뒤 이불을 열어 스란두일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선선한 느낌에 다시 스란두일의 팔이 허리에 감겨왔다. 온기를 그대로 느끼며 밀착해 코끝이 닿을 거리가 되어서야 안나타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니 꽃은 아름답게 피어야겠지요. 예하."
창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찬란한 빛 속에 붉은 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라졌다. 조용한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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