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갈오로. 다툼.

톨킨버스 2013. 6. 18. 00:48

임시 막사가 세워진 엘프들의 주둔지는 밤의 날개 아래 몸을 숨겼다. 평소였다면 한밤중에까지 은은하게 울려퍼졌을 엘프들의 노래가 오늘따라 들리지 않았고, 보초병 몇명을 제외하고는 밖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군데군데 횃불이 타올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 외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는 것이 기이했다. 아마도 한낮에 치뤄진 전투가 매우 길고 지루하고 피곤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그 힘든 와중에도 밝게 불이 들어온 막사가 있었다. 꼭 신다르와 놀도르 주둔지의 정 가운데에 세워진 막사는 다른것보다 화려하고 크기가 컸다. 평소라면 그곳 입구에도 보초가 서 있어야 했지만 기밀유지와 원활한 회의를 위해 상관들 모두가 함께 주변을 물렸다. 그러했기에 그 안에서 격렬이 터져나오는 다툼의 소리는 막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대체 왜 안된다는 겁니까?! 이쪽으로 우회하여 진군해야 가장 안전하단 말입니다!!"
"네놈이 그런 소리를 지껄이니 애송이라는거다. 그렇게 가고싶다면 놀도르 군이나 끌고가도록. 나는 그렇게는 못 가."
"오로페르님!!!"

젊은 청년이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며 탁자를 내려쳤다. 다리를 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로페르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더 울컥한 청년은 홱 고개를 돌린 채, 문가까지 성큼성큼 돌아다녔다. 몇 번을 움직이고 나서야 진정된 숨소리로 돌아온 청년이 다시 탁자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몇번이고 입속에서 말을 골랐지만 쉬이 말을 섞고싶지가 않았다. 청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페르는 그저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근처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술이십니까!"
"그럼 말이나 계속 하던가."
"신다르들은 이렇게 늘상 태평합니까?"
"놀도르처럼 떽떽거리지는 않지."
"....지금 그 언사는 제 종족을 모욕하신겝니까."
"그대가 먼저 시작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태연히 잔을 따라 입에 대는 것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타오를 듯 빛났다. 팽팽한 기싸움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오로페르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채워진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끝까지 비워낸 뒤, 그는 잔을 밀어냈다. 청년의 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잔에 오로페르는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의심의 눈초리를 그대로 받아내며 잔을 채운 엘프는 놀도르의 대표로 나온 청년을 가르치는 투로 비꼬기 시작했다.

"그대가 전투를 치뤄보지 않아서 모를 수도 있겠군. 키르단은 대체 자네에게 뭘 가르쳤는지 알수가 없어. 좁은 협곡이란 말이지. 자네말대로 몸을 숨기고 대군이 이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야, 더군다나 이쪽 산맥은 험준하여 발견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 여기 까지는 맞아. 하지만 이곳은 모르도르에 근접한 산맥이다. 저 멍청한 오크떼들이 생각하는 머리는 없어도 제 집 앞마당은 훤히 꿰뚫고 있을텐데 그 좁은 계곡으로 지나갔다가 위쪽에 가파르게 늘어진 절벽을 따라 혹여나 화살이 날아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나? 더군다나 앞에서 기다린다면? 뒤를 밟아 궁지에 몬다면? 이런것 까지 생각 해 본 적이 있나?"
"........"
"그러니 신다르는 이 길로 가지 않는다. 아니 우리 그린 우드의 병사들은 더더욱 보낼 수 없어. 지형적으로 열세인 곳. 게다가 놀도르의 대표라 나온 어린 왕자의 의견에는 더더욱 찬성을 보낼 수 없단다. 알겠느냐?"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청년을 비웃은 오로페르는 큭큭 웃어보이며 청년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제 입으로 다시 가져갔다. 음주는 어른이 된 뒤에 천천히 배우려무나. 어깨를 툭툭 치고 펼쳐진 지도를 휙 접어버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듯, 오로페르는 그렇게 대강의 소지품을 챙겨 천막을 나서려 했다.

".....그럼 협곡으로 가지 않겠단 말씀이십니까."

이를 악물은 청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오로페르는 빙긋 웃으며 뒤돌아 답했다.

"아니, 협곡으로 간다. 단 네놈들과 같이 가지 않는다. 협곡은 위험하긴 하나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다. 일부를 선발로 보내 동향을 파악한 뒤, 한 길로만 가지 않는다. 본군은 그 길로 향하되, 궁수와 말을 탄 기수들을 사방에서 호위하게 할 것이다. 새벽에 미리 절벽으로 정찰병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지금으로선 가장 안전한 길이 될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 이니까."

네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란다. 애송아. 라는 명백한 도전을 알아들었는지 다시 차갑게 식었던 청년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네까짓 어린놈이 대왕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오로페르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인간과 엘프의 동맹. 절대악을 뿌리치기 위해 나온 전쟁. 명예와 동맹을 지키러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놀도르에게 적대적이었다. 하물며 이런 애송이와 동등한 위치를 겨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치욕이었다. 나이보다 조금 똑똑하긴 하지만 연륜이 달랐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정통성조차 의심받고 있는 핏줄이 아닌가. 제깟놈이 어디서 이런곳에 끼어들어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이정도로 따끔하게 혼을 내주었으면 어느정도 알아들었겠지. 아니라면 곤란해지는데. 머리를 긁적인 오로페르는 기지개를 켜며 막사문을 걷어올리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모든 행동이 멈춰버렸다.

"몰락한 머크우드의 군주라 여기저기 빌붙기가 대단하십니다."
".....애송이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머크우드의 군주 오로페르."
"네놈이 지금 신다르와 그린우드를 모욕한것이냐."
"군주께서 먼저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전 말입니다."
"이놈이..!"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청년 또한 잔뼈로 다져진 몸이었지만 그런 것 쯤은 아무런 문제되지 않았다. 세게 내리치고 맞닿은 뺨이 돌아가고 나서야 오로페르는 청년의 멱살을 틀어 쥔 채,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다시한번 그 잘난 혓바닥으로 말해보거라. 에레이니온. 네놈이 뭐라고 했는지 말이다."
"말조심하십시오. 당신이 신다르의 수장이듯 저 또한 놀도르의 수장입니다. 큭-."
"수장? 수장 좋아하시네. 그것이 개나소나 되는 것인 줄 아느냐?"
"....분명 경고를 드렸습니다."

차가운 은발과 흑발의 머릿결이 지척으로 가까워져 엉킬듯 나부꼈다. 코끝까지 멱살을 잡아 당긴 오로페르가 비틀린 입술을 열었다.

"경고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싶군요. 놀.도.르.의.수.장. 길. 갈라드. 님.?"
"그대가 원하시는대로 해드리죠."
"원하는 것? 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 주겠다고? 오 그야말로 고마운 일이로군 그래?"
"그것 말고 말입니다."

싸늘하게 웃은 검은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멱살을 잡고있는 것은 이쪽인데 어쩐지 오로페르는 등쪽에 서늘하게 맞닿은 날붙이의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내리십시오. 오로페르 전하. 지금 이순간부터 모든 무장은 해제당할 것이며 신다르는 저희 군에 재 편성될 것입니다. 혹 불만이 있으시다면 당장 이 몸뚱이에 쇠붙이를 쑤셔넣어드리지요."
".....누구냐."
"저희 부대에 빛나는 사자 한마리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군주여."

빠르게 멱살을 풀어낸 길갈라드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동안 엘론드는 밧줄로 오로페르를 제압시켰다. 기습으로 순식간에 무장해제된 오로페르가 호통을 치며 저항해왔지만 신다르의 군대는 아무도 그의 호령을 듣지 못했다. 결국 탁자에 볼썽사낲게 엎어져 결박당한 오로페르를 물끄럼히 주시하던 길 갈라드는 그의 어린 책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엘론드. 이만 물러가거라. 나는 이 자와 좀더 할 이야기가 있다."
"주군.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는 신다르의 수장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도 방법이 있으니 나를 믿어봐주지 않겠느냐."
"...."
"오늘은 푹 쉬거라. 곧 나도 들어가마."
"...존명."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진 어린 책사가 향했던 방향을 잠시 쳐다보며 미소짓던 길갈라드는 바로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엎드려 결박당한 오로페르의 뒤쪽으로 돌아와 탁자에 기대두었던 작은 검 한자루를 들어 검집에서 빼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와서 무서워지신겁니까. 전하."
".....닥쳐라."
"입은 살아계시니 좋습니다. 앞으로도 주욱 살아계시면 좋겠습니다만.."
"네놈이 신다르의 정예병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뇨. 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싸우지도 않을 겁니다. 왜 싸워야합니까? 그저 모두 거둬들이면 되는것을 말입니다."
"...이놈이.."
"시끄럽습니다. 전하. 아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전하의 말투. 꽤나 거슬립니다. 알고 계십니까?"
"네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오로페르는 묶인 줄을 끊어낼 듯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어찌나 꼼꼼하게 묶어놨는지 전혀 미동도 없는 몸을 느끼며 아주 조금 절망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길갈라드의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졌다.

"앞으로 못하는 말을 하게 되실분은 전하십니다."

손이 허리께로 다가섰다. 흠칫, 굳는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길갈라드의 입에 걸린 미소가 좀더 크게 벌어지고 환해졌다. 그대로 몸을 굽혀 상체를 밀착한 뒤 탁자에 바짝 붙은 오로페르의 귓가에 조심히 입술을 가져다 댄 뒤, 그가 속삭였다.

"말로해서는 못알아먹으시는 분이니 몸으로 친히 가르쳐드려야지요. 안그렇습니까? 아, 저는 비명대신 교성이면 좋겠습니다만, 부디 편하신 대로 내뱉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전하."

칼날이 천천히 옷 사이를 파고 들었다. 하반신을 그대로 그어내리는 느낌에 오로페르의 심장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설마. 설마..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로브의 절반이 찢겨져 나갔다. 갑작스레 찬 공기에 노출된 살갗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오로페르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벗겨진 둔부에 닿은 손길은 저도 모르게 몸을 경련시켰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 거라는 것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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