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그린우드에도 며칠에 한번쯤은 해가 드는 날이 있었다. 그런날은 나무밑으로 숨어들어 몸을 움츠리던 새들도 밖으로 나와 노래를 했고 제법 살랑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초여름의 해는 높게 떠올라 모처럼의 맑은 하늘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쉬이 오지 않는 기회를 빌어 영지에 웅크려있던 엘프들은 삼삼오오 짝을지어 밖으로 향해 고즈넉한 숲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먹고 마시며 빛을 즐겼다. 그들과 쉬이 어울리는 법은 없었지만 아주 가끔씩 남들이 접근할 수 없는 숲속 깊은 곳, 평평한 풀밭에는 그린우드의 왕과 그의 어린 왕자가 손을잡고 산책을 나오기도 했.

 

"이렇게요?"
"아니아니, 이렇게 이렇게 하는거라니까."
"아다, 조금만 천천히.."
"옳지. 그래. 그렇게."

어린 왕자는 갓 20살이 될법한 외모로 아비의 곁에 무릎꿇어 조잘대었다. 왕관도 밀쳐놓은 채, 왕이 만들고 있는 것은 짐승들을 잡기위한 덫이었다. 가볍게 끈을 묶어 신다르 특유의 매듭을 지어놓으면 혹 지나가던 작은 짐승들이 걸릴지도 몰랐다. 아직 활 잡기에 익숙치 않은 어린 왕자를 위해 아비가 만드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몇번의 서투른 손짓으로 만들어진 매듭은 빈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왕은 알고 있었다. 절대 끊어지지 않는 엘프의 기술로 만들어진 줄과 신다르의 매듭방식으로 이어진 덫은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튼튼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듯하고 굳건하게 매듭진 아비의 덫과 자신의 덫을 비교하던 왕자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다시 새 줄을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혼자서 해볼래요."
"가능하겠느냐?"
"...무슨 왕자가 이런것도 혼자 못한답니까."
"그럼 혼자 해보거라."

비죽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채, 왕은 낑낑대며 매듭을 엮는 왕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어릴적의 자신을 보는것만 같았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느낌이셨을까. 잘 되지 않는지 또 작게 성질을 내고 이제는 스스로 줄을 잡아 빼내어 다시금 엮는 왕자를 보며 왕은 어릴적의 기억을 조금씩 상기시켰다. 그때에는 나도 이렇게 혼자 끙끙대며 골몰했었지. 아마도 완성시킨 뒤 아버지에게 들고가서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지 꼭 안아주셨는지...어쩐지 그것만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말이다.

"아다, 잠깐 두손을 빌려주세요."

왕자가 말을 건네고서야 왕은 정신을 차린뒤 왕자를 바라보았다. 제법 모양이 잡힌 매듭을 들고 싱글벙글 거리는 왕자의 말대로 왕은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히죽, 싱그러운 웃음이 양 뺨을 타고 번졌다. 삽시간에 두 손목을 옭아맨 매듭이 바짝 조여졌고 불시의 기습에 놀란 왕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벌렁 넘어가버렸다.

"어이쿠-"
"헤헤, 잡았다."

의기양양하게 왕의 가슴팍에 앉아 손목을 구속한 매듭의 끝을 틀어쥔 채 웃어보이는 왕자를 보며 왕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알싸한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잡히고 말았구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비쭉 내밀어보이자 왕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봐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열었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왕자전하.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
"그렇게 말하셔도 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까딱이며 고개를 모로 두번 흔든 왕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옭아맨 왕의 손목을 머리 위로 낑낑 올렸다. 졸지에 가까워진 얼굴이 마주보았다. 엄한 표정으로 아비를 쳐다보다 빙긋 웃은 왕자는 이내 익숙하다는 듯, 조그마한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 아비의 입술 위에 겹쳤다. 꾸욱 누른 살덩이의 감촉이 촉촉하게 닿았다. 기습을 당한 왕은 멍하니 웃음담긴 얼굴을 쳐다보다 삽시간에 묶인 팔을 벌려 왕자를 껴안고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버렸다. 꺄앗! 아직은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가 웃음으로 변모했다. 높고 낮은 웃음소리가 번갈아 풀밭을 울리며 빛 사이를 오갔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따스하고 선명한 유년시절의 기억이었다.

 

 

 

 

 

"기억 나십니까. 아버지."
"....스란두일."

이미 청년이 되어버린 왕자는 꼭 어릴적과 같은 매듭으로 아비를 옭아매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포근하고 따스한 풀밭이 아닌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란 것이고, 반쯤 찢겨져버린 옷매무새였다. 다정하고 사랑이 담긴 눈빛은 왕자에게만 존재했고 그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서 뿜어져나오는 것은 포식자를 바라보는 두려움 가득한 먹잇감의 눈빛이었다. 훌쩍 커버린 왕자는 손목을 구속한 끈을 틀어쥔 채, 왕의 머리위로 올려 거세게 눌렀다. 느껴지는 고통에 작게 신음소리가 퍼지자 왕자의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전리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스란두일..정신차려라. 나는.."
"당신은 위대한 머크우드의 왕이십니다. 저머크우드의 하나뿐인 왕자이지요. 그리고."

목울대가 넘어갔다. 긴장한 심장이 드러나버린 왼쪽 가슴팍을 거세게 울렸다. 유심히 아비의 모든 것을 살펴보던 스란두일이 마치 어릴적 그 때 처럼 오로페르에게 향했다. 코 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오로페르의 고개가 살짝 모로 틀렸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스란두일은 나머지 손으로 턱을 고정해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지금은 당신을 차지한 포획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입술이 맞닿았다. 어릴적의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오로페르는 거부하지 못했다. 차가운 냉기속에 숨어있는 미세한 떨림은 마치 어릴적 자신에게 부비던 온기와도 같았기에, 왕은 차마 왕자를 밀쳐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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