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론드 기린 스란두일 왕 느낌으로 보고싶다.

스란두일을 왕위에 올리고 곁에서 보필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나라를 이끌어가며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는데 왕권을 공고히 하려면 속히 혼인을 하고 후계를 세워야 한다며 상소문이 빗발치는거지. 딱 혼인하기 좋은 나이이기도 하고 특히나 외모도 수려하고 빠지는데 없이 완벽한 왕을 싫어할 이 누가 있겠어. 스란두일 본인이 주저하며 아직은 나라를 위해 일을 할 때이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닙니다. 라고 거절하고 있어서 그렇지 노리는 이들이 점점 많아짐. 그걸 보면서 엘기린은 미묘한 감정이 드는거.

 

어두운 밤 둘만이 서재에 앉아 서류를 보는데 넌지시 묻는 엘론드. 외롭지 않으십니까? 혼인을 하고 나만의 사람이 생기게 되면 한층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편해진다고 합니다./그렇습니까... 아직 잘 모르겠네요. 별로 생각이 없기도하고.  하며 얼버무리는 스란두일을 보며 내심 마음에 위안을 얻는 엘론드. 그러다 역으로 허를 찔리지. 그대는 어떠십니까. 외롭지 않으십니까?/..저는 기린입니다. 사람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제게는 공이 계시질 않습니까. 공께서 태평성대로 나라를 이끌어 가신다면 저는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그렇군요...이상합니다. 외모나 성격 어느 하나 다를 것이 없는데 그대가 사람이 아니라 하니 어색합니다. 하며 빙그레 웃어보이곤 다시 서류를 집어드는 스란두일. 어쩐지 긴장해 마른 입술을 축이고선 다시 지나가듯 넘기는 엘론드. 사람이었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공처럼 수려하지도 준수하지도 않은걸요. 하는데 스란두일이 웃는거지. 기린이라 해도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시나 봅니다. 그대는 생각보다 꽤 매력적입니다. 엘론드.

그 말을 듣자마자 세차게 뛰는 가슴. 놀..리지 마십시오. 하며 어설프게 웃는데 환하게 따라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스란두일. 저는 이런식으로 농을 하는 성격이 아니란 걸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실례일수도 있으나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저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습니다. 한마디 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다 붉어진 얼굴을 어둠속에 숨기는 엘론드. 그 모습을 보며 조금 과했습니까? 하하. 마음에 깊이 담아두진 마세요. 엘론드. 하고 어깨를 툭툭 치고 다시 서류를 보는 스란두일. 어쩔줄 모르는 마음에 애꿎은 서류만 넘기는 엘론드.

 

그리고 점점 피할 수 없어진 국혼. 여염집 아씨들이 줄지어 선을 보이는데 그중에 가장 곱고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네를 낙점해 날짜까지 정하여 둔 날. 문득 함께 술자리를 갖는데 그때쯤이면 이 어지러운 감정의 이름을 알아채버려 어쩔줄 몰라하는 엘론드 보고싶다. 혹 제 비가 되실 여인을 보셨습니까? 그렇게 곱다 소문이 자자한데 아직 저는 못 보았습니다. 당일날 봐야 잡귀가 들러붙지 않는다나요. 하며 발갛게 술기운 오른 얼굴로 묻는데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은 엘론드가 술잔을 더 채워주고 한잔 더 마신 뒤에서야 조심스레 묻는거지.

기뻐보이십니다./일전에 그대가 말한 적이 있지요.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안정감을 가지게 될 거라고요. 지금이라면 그 뜻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는게 이리도 기대가 되는 일인줄은 몰랐는데, 내심 어여쁘고 정숙하다 하니 조금은 들뜨게 되는군요. 하며 껄껄 웃는 스란두일. 사실 엘론드는 비가 될 여인을 미리 보았고 어렵지 않게 스란두일의 곁에 선 여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음.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누구도 그 틈에 끼어들 수 없다는걸 확고하게 깨닫는 거. 아주 조금, 잠깐. 정말로 잠깐. 그의 곁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그게 너무나 가슴이 저리도록 좋아서, 두려워서, 어쩔줄을 모르다가 죄스러운 감정에 짓눌려 모른척하는 엘론드의 이성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지. 안 될 일이야. 그는 나의 왕. 나는 그의 기린. 해야 할 일이 있고 공생하는 관계긴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게 두어야지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될 일이라고. 끊임없이 다짐하고 스스로를 옭아매는데 이 순간만큼은 질투가 나서 참을수가 없는거.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다신 기회가 없는데.. 왈칵 치밀어오르는 열기를 삼키면서 웃어보이는 엘론드. 혼인을 경하드립니다. 나의 왕.

 

미소를 띄우다가 문득 손을 뻗는 스란두일. 눈가를 톡, 하니 건드리자마자 쉴새없이 빠져나오는 눈물. 조금 놀란 표정을 보이다가도 금새 양 손을 뻗어 눈물을 흝어주는데. 섭섭하십니까. 어쩐지 아쉬운 표정입니다. 그대만의 왕이 아니라 그렇습니까. 하는데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눈물을 멈추질 못해 입을 열지 못하는 엘론드. 흉하게 보이지 않으려 참아보는데 좀처럼 멈추질 않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안아 주러 오는 스란두일. 품에 끌어안고 토닥이며 울지 마십시오. 잘 살겠습니다. 그대가 걱정할 일을 만들지 않아요. 절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면서 달래주는 스란두일과 그 품에서 소리도 못내고 한참을 우는 엘론드 보고싶다.

 

그리고 기린으로서 왕의 혼인을 축사하고 증인이 되어야 하는 엘론드.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는 스란두일에게 스스로의 입으로 여인만을 평생 사랑할 것이냐 묻는 엘론드. 국본의 혼인을 공표하고 선언해 하늘에 직접 고해야 하는 엘론드. 새까맣게 타들어간 가슴을 숨긴 채 새로이 빛나는 한 쌍을 축복하는 엘론드. 첫날밤을 치룰 곳에 미리 당도해 축성하고 도망치듯 신전으로 들어와 소리없이 절규하며 가슴을 쳐대는 엘론드. 욕심을 가져선 안된다. 너는 기린이다. 왕의 앞에 서 있다고 해서 그가 네 욕망에 휩쓸리게 두어서는 안된다. 기린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다가 흠칫 정신을 차리는 엘론드. 안돼. 기린으로서도 있을 수 없다면.. 더이상 왕의 곁에 있을 수 없어.. 안돼. 그것만은. 안 돼. 하며 마음을 다잡는 엘론드.

 

왕과 왕비의 첫 동침이 있던 날. 기린은 국가의 태평성대와 국본의 바로세워짐을 가슴에 담고 밤새 하늘께 축복을 기원 했다고 전해져왔다. 다음날 왕께선 기린의 앞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비를 맞이하였다 고하고 비와 함께 무릎 꿇어 하늘의 축복을 함께 기도했다.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왕비는 태기를 보였고, 이듬해 튼튼한 왕자아기씨를 생산하시어 국본을 바로 세우셨다. 왕은 크게 기뻐하였고 기린 또한 그 아기씨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 무럭무럭 자라난 왕자와 전쟁없는 태평성대가 계속되었지만 왕비가 먼저 소천했고 슬픔에 빠진 왕이 다음 해에 숨을 거두었다. 끝까지 곁을 지킨 기린은 식음을 전폐하고 성군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러다 피를 토하며 그 명을 다했다. 곧 새로운 기린이 모습을 드러냈고 새로운 왕으로 올라선 왕자의 곁을 보필하며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스란두일이 병석에 누워 길게 자리를 보전할 때, 엘론드는 빠짐없이 곁을 지켰겠지. 이제는 주름이 지고 말랑해진 손을 잡고 쉴새없이 기도하는 엘론드를 보며 스란두일은 이따금씩 눈을 뜨고 가만히 쳐다보았을 것 같다. 십수년도 넘어 곁에서 평생 자신을 지켜봐 온 엘론드를 바라보면서 무언가 말 하고 싶어했지만 쉽게 용기내지 못하던 스란두일을 엘론드는 묵묵히 수발을 들고 기도를 해주었겠지. 그러다 마지막임을 깨달은 스란두일이 엘론드를 불러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여주면 좋겠다. 내가 너무도 주위에 무심했습니다.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오랜 시간 망설였지만 이제는 이야기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하며 웃어보이는 스란두일. 

 

심하게 흔들리는 엘론드의 얼굴을 살살 매만지며 한자한자 분명하게 내뱉는거지. 그대를 남겨두고 떠나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을 전해서 또 미안합니다. 주제넘게 제가 그대를 은애했습니다. 하고 수줍어 하는 스란두일. 턱 막힌 숨을 쉬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엘론드. 안쓰러히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던 손 끝을 그때처럼 눈가에 가져가는 스란두일. 울지마십시오. 이젠 제가 달래줄 수가 없어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올리며 눈물을 떨구는 엘론드.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내어 처음으로 울어보는 기린.

아니라고, 제가 먼저.. 제가.. 제가 주제넘은 마음을 품은 거라고. 공께서는 잘못하신 것이 없다고 변명하고 부정하고 싶은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흉하고 매서운 숨소리 밖에 나질 않아 울부짖는 기린. 아닙니다. 아닙니다 주군. 나의 왕이시어. 아닙니다........제발...

다 울때까지 가만히 엘론드의 뺨을 붙잡고 있는 스란두일. 눈이 퉁퉁 붓고 히끅거리면서도 눈은 스란두일을 바라보고있는 엘론드. 가볍게 웃으면서도 농을 던지는 스란두일. 이렇게 그대 얼굴을 보고있자니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기린은 늙지 않아 조금 질투한 적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어쩐지 젊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합니다. 하며 웃어주는 스란두일. 날 선택해줘서 고맙습니다. 곁에 하루도 빠짐없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그대가 있어 삶이 더 행복했어요. 깜빡이는 눈. 점점 힘이 빠지는 손길. 나긋나긋하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 한 수 청하는 스란두일. 울컥 솟는 울음을 억누르고 가만가만 불러주는 곡조에 천천히 고개가 끄덕여지고 감긴 눈꺼플이 떨림을 멈추며 곧 미동하지 않는데...

 

가신들이 들어와 기린을 떼어놓을 때 까지. 엘론드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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