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사방에서 악이 창궐하여 인간과 엘프의 동맹이 실현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깊숙한 곳에서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고, 전쟁의 요지가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르도르 또한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안나타르는 모르도르의 사업채 절반을 감축했고 옮길만한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에 스란두일과 엇갈렸던 적이 꼭 세 번. 오늘이 지나고 나면 네번째가 될 터였다.

막 바깥에서 돌아온 안나타르가 검은 후드를 걷어올리며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하인들을 통해 스란두일이 와 있다는 것을 들은 직였다. 검게 쳐져있는 베일을 들어올리고 안쪽 깊숙한 곳으로 향하면 느릿하게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숫제 제 집이지. 코웃음을 치며 안나타르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어룽대는 빛이 가까워지면서 그가 있는 곳을 짐작케했다. 만면에 웃음을 띈 안나타르의 얼굴이 푸른 눈의 엘프와 조우했다.

"오늘도 일찍 가신 줄 알았습니다."
"헛걸음을 한 것이 벌써 세번째이지 않느냐."
"그렇게까지 되었습니까."

밉상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안나타르는 후드를 바닥에 벗어둔 채 스란두일에게 달려가 안겼다. 가볍게 뒤로 미끌어진 스란두일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좀더 깊숙히 밀어넣으며 안나타르의 무게를 감내했다. '그 날' 이후 안나타르는 알듯 말듯 어리광이 조금 늘었고 스란두일 역시 조금은 편하게 안나타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진실이라 매듭진 관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스란두일과 안나타르는 진실을 거짓으로 연기하며 관계를 지속해왔다. 그것은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주기도 했고 또한 아무런 생각없이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꽤 괜찮은 방법 같았다.
품에안긴 안나타르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스란두일은 가볍게 그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 근처에 와닿았다. 며칠 고생을 했는지 못본새에 조금 까칠해진 것 같은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손끝으로 조물조물 만져대자 안나타르가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그린우드의 군대도 출정을 한다 들었습니다."
"과연 모르도르의 꽃은 모르는 정보가 없군."
"예하도 가십니까?"
"왜, 걱정이 되느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주 조금 시무룩해진 모습에 스란두일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품에 안은 이를 똑바로 곁에 앉혀둔 채 눈을 마주쳤다. 붉은색 동공 안에 들어오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이 흡족해졌다. 다정한 이다. 생각보다. 남들이 뭐라고 여기든 모르도르의 꽃은 가시가 많을 뿐, 다정한 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나도 선봉에 설 것이다."
"그렇습니까.."
"몇 년만 기다리거라.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궐하는 악의 세력은 은밀하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들었습니다. 쉬운 상대는 아닐겁니다."
"그러나 인간과 엘프가 동맹을 맺는 정도의 연합이다. 이쪽도 만만치는 않을테지."
"아무렴요. 예하가 계시는 곳인데 쉬이 패하진 않겠지요."

그제서야 엶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스란두일을 바라보는 안나타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물끄럼히 바라보며 그저 웃던 안나타르는 잠시만 계시라며 홀연히 일어나 좀 더 안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온기에 스란두일은 안나타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도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의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소문은 흉흉해졌고 노랫소리가 들리던 왕궁 안에는 날카로운 쇠붙이들의 맞부딧히는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이곳을 자주 찾게 될는지도 몰랐다. 많은 아픔이 있을거라 했다. 겪어보지 않은 무서운 전쟁의 분위기는 스란두일을 짓눌러왔다. 막연한 공포. 두려움. 짓누르는 슬픔. 모든것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그 기분 더러움에 왕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했다. 겉으로 의연해야 하는 일국의 왕자. 정사에 바빠 눈코뜰 새 없이 일에 매달리는 군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왕성보다는 이곳이 나았다. 거짓. 이라는 진실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이가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이 곳, 모르도르였다.

낑낑대며 안나타르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다소 큰 상자였다. 다시 자세를 바로한 채, 무엇인지 쳐다보던 스란두일의 발 밑에 그것은 놓아졌다. 적지않은 양의 쇠붙이가 걸쳐져 있었다. 웃는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안나타르의 얼굴과 상자를 번갈아 보며 스란두일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예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
"저 멀리 드워프들의 왕국에서만 나오는 귀한 갑옷이라고 하더군요. 그 어떤 날붙이로 뚫리지 않는 미스릴을 사용했다고 하여 받아둔 것입니다. 마침 예하가 생각이 나 따로 빼 두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광물이군. 미스릴이라.."
"나머지 것들은 혹여 필요하실 지 몰라 제작해 놓은 갑주입니다. 물론.. 신다르군의 갑옷이 있으시겠지만. 혹시 몰라서..."

수줍어하는 시선이 이리저리 튀었다. 차마 마주치지 못한 채, 선물이라며 건네는 것들에 스란두일의 기분이 유쾌해졌다. 조심히 일어나 안나타르의 손을 잡고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에 다가가 짧게 입맞췄다. 살포시 감았던 눈이 떠지며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까.. 안나타르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혹 입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한번쯤은...입은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어려울 것은 없지."

흔쾌히 허락하는 스란두일의 로브를 안나타르가 벗겨냈다. 안의 간단한 옷만들 입은 채, 미스릴을 입히고 갑주를 하나하나 채워주었다. 다리와 팔. 어깨와 손목구를 채운 뒤 가장 마지막에 가슴에 대는 갑주를 들어올렸다. 겉에는 신다르의 문양이 새겨져 화려하게 빛났다. 그러나 진실은 속 안에 있었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던 안나타르가 스란두일에게 입히기 직전 그것을 보여주었다. 갑주 안쪽 한 구석에는 직접 새긴 듯한 문양이 보였다. 안나타르의 문양이었다.

"..새길까 말까 망설였는데...안보이는 곳이기에.."
"이왕이면 크게 새기면 좋았을걸."
"..예하."
"이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갑주를 받아들고 아로새긴 문양을 손끝으로 쓸었다. 안나타르의 이름을 딴 문양이 그대로 마음 속에도 새겨지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안나타르에게 시선을 옮기자 슬쩍 붉어진 얼굴이 미세하게 끄덕였다.

"네가 족하면 되었다. 이것까지 입혀주어야지."

살포시 받아든 채 다가오는 안나타르의 손길에 스란두일은 몸을 내맡겼다. 바짝 조여오는 차가운 금속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오싹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완벽하게 무장한 스란두일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조심히 품으로 안겨왔다. 스란두일이 그토록 지겨워하던 차가운 금속과 날붙이들이 덜컹이며 안나타르를 보듬었다. 한참 동안이나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전쟁은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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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적습니다."

대뜸 와서 한다는 말이 저것이다. 요망한 것이 또 무슨 투정을 속살거릴까 고대하던 스란두일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무릎위에 매달려있는 이를 밀어낼 재간도 없었다. 오늘은 애교를 부리기로 작정을 했나보다며 짧게 혀를 찬 스란두일이 까맣게 흩어진 머리칼을 손 끝으로 훝어내렸다.

"무엇이 말이냐."
"보석 말입니다. 너무 적습니다. 예하."
"충분한 것 같은데."
"제게 주실 것이 그런것 들 뿐이라면 이제부터 예하를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뜯어내기로 작정을 하였구나."
"그런 셈이지요."

돌직구를 날리면 그대로 받아쳐온다. 그런 점이 안나타르를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꾸밈없는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부족하면 부족하다. 마음에들지 않으면 내던져버리는 그 성미가 묘하게 끌리는 게 신기했다. 곱게 웃어보이며 적다 투정하는 보석들은 왕실에 납품되는 것들 중 최상의 것들로 가져온 것이었다. 절대 적을리가 없을 터인데 이리 교태를 부리는 것을 보면 무언가 따로 원하는 바가 있을 법 했다. 짐짓 모른 체, 곁의 상자를 뒤적여 이것 저것을 그의 몸에 대어본다. 붉은색의 루비, 연녹색의 비취. 하나같이 안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입이 비쭉 나와있으면서도 또 스란두일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대어주는 보석이 가장 돋보이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바꾸어주는 것을 보며 또 보람을 느꼈다. 하여간 어찌 할 수 없는 여우였다.

"이리 잘 어울리는데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모르겠구나."
"예하의 연심이 들지 않은 보석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연심이라. 왜 그리 집착하는가?"
"연모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데에 집착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전히 무릎에 매달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연모라. 어려운 것을 말하는 입술을 보며 욕정만을 느끼는 자신이 순간 낯부끄러워졌다. 연모라. 그 어려운 것을 네가 원하면 어찌하느냐. 나는 너를 그리 보고있지 않건만.

"나를 연모하느냐?"
"예하는 어떠십니까. 저를 연모하십니까?"
"나는 너를 연모하지 않는다."
"사실 저도 예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근데 어찌 자꾸 연심을 찾느냐?"
"그러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빙글 웃어보이며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선 안나타르는 손을 뻗어 스란두일의 얼굴을 감싼 채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라 올려보던 눈동자는 시선에 얽혀들었다. 자신을 가둔 붉은빛의 눈동자는 한껏 달콤하고 은밀해보였다. 고운 눈매가 접히면 그 역시 일그러졌다. 점차 다가오는 얼굴에 피하지 않은 채 입술을 벌리면 꼭 그 틈새로 맞는 살덩이가 들어와 안쪽을 휘저어간다. 손을 올려 다가온 머리칼을 부여잡고 세게 누르면 그역시 응수하며 안쪽으로 향해 입안을 내어준다. 한참이고 떨어질 줄 몰랐던 입술이 불현듯 떨어졌다. 촉촉히 젖은 입술이 움직여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밖에서는 모르도르에 예하의 연인을 숨겨두었다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신경쓰이는것이냐."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만?"
"혹 예하께서 불편하시다면 그런 것 처럼 행동해드릴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그러십니까...?"
"..안나타르?"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픽 웃어보이며 가운이 떨어져있는 곳 까지 걸어가 가볍게 걸친 안나타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걸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스란두일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것을 확인 한 뒤 또 한번 웃어보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경쓰이십니까?"
"그러고보면 너는 한번도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보석도, 진귀한 것들도 모두 내가 알아서 준비한 거였지."
"그랬습니까?"
"들은 바로는 그랬다. 모르도르의 꽃은 제 몸을 내어준 대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원한다 했다. 하지만 너는 어찌해서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것이냐?"

싸늘해진 말투. 의심의 눈동자. 안나타르는 미소를 띈 채, 웃었다. 흔한 표정이었다. 상대를 의심할 때의 표정. 어린 왕자여. 아직 본심을 숨기는 방법도 배우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어찌 왕자라 할까. 제왕학을 배운 왕가의 일원이라 할까. 
딱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안나타르는 여몄던 가운을 다시 풀어헤치고 스란두일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피하지는 않지만 경직된 근육이 보여 더더욱 유쾌해졌다. 그래봤자 그대는 나의 맛 좋은 먹잇감 중 하나야. 좀더 몸부림치고 불안해해라.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 이니까.

"저는 처음부터 예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하의 연심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나도 몇번이고 말했다."
"그럼 거짓을 주십시오."
"거짓?"
"예하가 절 연모하고 있다는 거짓 말입니다."
"...그것은 네게 득될것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보석을 주마. 물질이야말로 네게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더냐."
"물질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겐 필요없는 것이지요. 모르도르의 이 거대한 곳. 제가 재물따위를 원했다면 진즉에 그곳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거짓이라도 예하의 연심을 얻고싶습니다. 그것조차 주실수 없다면. 이제 저를 찾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슬핏 웃어보이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허벅지 위로 엎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왕자야 네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뿌리칠 수 있을까. 저 먼곳. 린돈에 위치한 너의 그 마음속 정인에게 달려갈 용기는 없으면서도 나를 외면할 수 있을까. 아니, 넌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그런' 니까.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꽤 무덤덤해진 손이 안나타르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천천히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안나타르의 눈이 감기며 미소가 감돌았다. 몇번이고 말을 골라 낸 스란두일의 입술이 열렸다. 그로서는 꽤나 무거운 말 이었다.

"...나는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을 평생 줄 수 없다."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지고 싶으냐."
"예하. 기억 나십니까? 제 방으로 오셔서 절 처음 안으시던 밤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지."
"처음엔 우스웠습니다. 고작 왕자의 지위를 가지고 저를 취하려 하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예하의 생각보다 저는 이곳에서 오랜 기간을 버텨왔습니다. 어지간한 상대는 돌려보내고 알아서 처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저 가만히 예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안나타르.."
"예하께서 제게 연심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마 저는 이리하고도 예하가 절 다시 찾아주시면 또 바보처럼 웃어보이겠지요. 그런 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욕심이란 걸 좀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란 걸 아는데. 그것이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
"재물. 보석. 필요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가져보고싶은 것이 있는데 장사꾼이라면 욕심내보는 것은 당연한게 아닙니까?"
"안나타르...."
"한번의 욕심입니다. 예하께서 제게 혹여라도 작은 연정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번쯤. 그 마음이 거짓임을 알고있어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장사란 그런것이니까요. 작은 것에 기대를 거는 법이니까요."
"..내가 그래서 그것을 줄 것 같으냐."

진득하게 내뱉어진 말에 안나타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를 환히 지어보였다. 눈빛이 떨렸다. 벗어날 수 없다.

"네, 한번 이라면. 예하께선 주실 것 같았습니다."

머리칼을 쓸던 손이 멈추었다. 녹아내릴듯 예쁘게 웃음짓는 안나타르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몸을 겹치고 살을 섞던 이였다. 닳고 닳은 창녀라고 생각했다. 모르도르의 꽃은 피어난 것이 꽤나 아름답고 유혹적이라 그것을 꺾으려 달려드는 이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밀쳐낼 수 없었다.

"....거짓이다. 내가 말하는 모든것들은."

안나타르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꿈꾸는 듯한 모습으로 눈빛이 바뀌었다. 다시금 손을 올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주 잔잔하게 몸이 떨려오는것이 느껴졌다.

"...사랑한다. 안나타르."

 

차오르는 눈물이 금세 무릎위로 뚝뚝 떨어져내렸다. 채 감지 못한 시선이 스란두일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 이것은 거짓인데...

머리보다 손이 빨랐다. 고개가 숙여졌다. 울고있는 이의 눈가에 입술이 닿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또다른 손이 다가와 그를 옥죄었다. 뜨거운 키스를 받아내고 있는 눈가에선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스란두일은 알 수 없었다. 중요한것은 안나타르가 "자신" 때문에 눈물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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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와닿은 맨살의 감촉에 안나타르는 황홀한 듯 웃어댔다. 하지만 웃음이 오래가진 못했다. 왈칵 올라오는 비릿한 체액이 바닥으로 뿌려졌다. 제 입에서 떨어지는 피웅덩이를 보고도 그는 웃었다. 아니 즐거워했다.

"미친새끼."
"큭...큭크큭..흣.."
"말해. 엘론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하아..왜. 왜 그분을..크큭.. 입에 담으십니까?"

참으로 이상하다는 듯 안나타르는 고개를 올려 스란두일을 쳐다보았다. 웃으며. 입가에는 피범벅이 된 채로. 그저 웃었다. 정말 말로 해서는 안될것 같다는 생각에 스란두일의 표정이 한껏 험해졌다. 거칠게 다뤄 찢어진 상의덕에 잡을 곳이 없어진 스란두일은 두 손에 온전히 힘을 넣어 안나타르의 목을 감싸쥐었다. 한껏 가늘어진 눈가. 벌벌 떨리는 입술. 울컥울컥 나오는 피가 주위에 지저분하게 퍼졌다. 숨이 가빠 헐떡이는 순간에서도 안나타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진정 제멋대로 굴며 끝까지 하고픈 말을 지껄였다.

"정인..큭..이..라도. 되십니까? 크큭. 흑..흡..그는 단지..길 갈..라드..의. 가솔..일 뿐..히익!!!"
"닥쳐라. 네 입에 담을만한 이가 아니다."

목을 강하게 조여오는 압박감에 안나타르의 눈이 크게 떠지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이런 미친 놈은 내버려두고 엘론드부터 찾아야 했다. 해명해야 했다. 팔에 온 힘을 실어 안나타르를 내팽개쳤다. 바닥에 고꾸라진 채 밭은 기침을 내뱉는 안나타르를 내버려 둔 채, 스란두일은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미친듯이 뛰던 심장이 겨우 진정됐다. 강하게도 묶여있지도 않은 손목의 끈을 흔들어 빼낸 뒤, 안나타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손 끝에 피가 가득 묻어났다. 즐거웠다. 그래, 찾아낼 수 있을까. 너 따위가. 이 안나타르를 모욕한 대가는 작지 않을텐데 말이지.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미친놈처럼 보여도 상관없었다. 기쁘고 통쾌하고 속이 다 후련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소원을 깨뜨렸다. 사랑? 정인? 다 소용없는 말이었다. 한낯 감정에 호소하고 밀어를 속삭인다 해서 굳건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말의 불씨로 갈라놓을 수 있었고 혼란에 빠뜨릴수도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용맹스럽고 위엄있는 어둠숲의 왕자의 하룻밤 정을 받았던 이는 그가 그리도 원했던 엘론드가 아닌 안나타르. 바로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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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시작과 함께 안채에 발을 들인것만 같았는데 벌써 엘베레스의 별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나타르는 놓아버리고 싶은 정신을 그러모아 힘겹게 눈꺼플을 들어올렸다. 불확실한 촛점이 겨우 맞춰져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제 곁에 누워 잠든 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뻔뻔스럽게도 제 곁을 차지하고 자신을 쿠션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둠 숲의 왕자는 세상 모를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온 몸이 꽉 묶인 듯 껴안긴 탓에 벗어날 방도가 보이질 않았다. 작게 혀를 차내며 팔을 밀어 움직여 보려했지만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고통에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하여튼 어린게 무식하게 힘만 세서.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내 뱉으며 안나타르는 잠시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간만의 노동을 끝낸 몸은 피로를 견디지 못했다. 하필 며칠 일이 몰려 무리를 했던 차에 쌓인 피로라 쉬고싶은 욕망이 살금살금 올라왔다. 하지만 씻고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몸은 열기가 식어갈수록 불쾌한 기운을 더해가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안나타르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안쪽의 어딘가를 조용히 응시했다. 고급스럽게 걸쳐진 휘장이 미세하게 움직이는가 했더니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방 안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씻을 물을 준비해라. 그리고 시트를 좀 갈아야겠다."
"네 주인님."
"조금 있다가 물이 데워지면 날 부축해라. 소리가 나지 않는 녀석으로 데려와."

고개를 짧게 숙여보인 사내가 다시 방 밖으로 사라졌다. 돌아올 시간을 가늠해보며 다시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정말 오랫만이었다. 모르도르의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손님을 체계적으로 관리한 후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화하고 발라들 또한 바쁜것이 사실이었다. 크고작은 세력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분화하고 합쳐지는 역사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머리 쓰기에 골몰했고 모르도르는 자연스럽게 핀트를 벗어나 한가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스란두일은 말하자면 평온한 호수에 갑자기 던져진 작은 조약돌 이었다. 아무도 날아오는걸 신경쓰지 않았고 맞을수도, 맞지 않을수도 있는 그런 작은 돌이었지만 맞으면 제대로 아플것 같은 마치 극약과도 같은 조약돌이었다. 결국 맞아버렸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변변치 않은 이라면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처리해 버리려고 했는데.. 신다르의 개망나니라는 별명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몸을 합치며 슬쩍 힘을 빼어 안달내는 찰나는 있었지만 스란두일은 본래 부드러운 스타일은 아닌터라 밤새 힘으로 강하게 몰아붙여왔다. 교태를 부리면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답했고 그 이상이면 또 그 이상을 안겨줬다. 기이하게도 그 합이 맞아떨어져 보기드물게 진심으로 흥분해버렸다.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연기와 조련에 능숙한 터라 본심을 굳이 보이지 않아도 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어쨌거나 결론은 간단했다. 속궁합은 최고였다. 멜코르님 이후로 쉽게 만족해보지 못했던 몸의 기쁨이 느껴졌다. 오르가즘에서 느낄 수 있는 한계치가 어디인지 시험해 본 기분이었다. 검은숲의 왕자가 아닌 그저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면 눈을 뽑고 팔다리를 부러트린 채 자신의 전용 노예로 사용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더이상의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었다. 남은 문제는 하나. 어떤것을 대가로 받고 옭아매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새벽의 한기가 이불틈에 스몄는지 왕자가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감촉에 다시 반짝, 눈이 떠졌다.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어떤것을 주고 내 발밑에 엎드릴테냐. 무엇이 가장 너에게 있어 값지고 사랑스러우냐. 사랑과 애욕이 담긴 시선으로 곱게 감긴 눈가를 한참 쳐다보았다. 무엇이라도 대답해주길 원했다. 들을 수 없는 머릿속 상념이었지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자라면.

그때 거짓말처럼 스란두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엘론드.."

 

 

온몸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동그랗게 뜨인 눈매가 가늘해지고 입술 끝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자였느냐. 너를 옭아맬 수 있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밖으로 터졌다. 계속되는 웃음에 몸이 떨려오자 스란두일이 다시 몸을 뒤척이며 꼭 안았던 몸을 그제서야 놓아주었다. 구속된 것이 모두 풀렸음에도 안나타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종이 와 그를 안아올릴 때까지 그저 미친놈처럼 계속 웃었다.

 

더러움을 남김없이 씻어낸 뒤 다시 방안으로 돌아온 안나타르는 아직 덜 마른 제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내린 뒤 이불을 열어 스란두일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선선한 느낌에 다시 스란두일의 팔이 허리에 감겨왔다. 온기를 그대로 느끼며 밀착해 코끝이 닿을 거리가 되어서야 안나타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니 꽃은 아름답게 피어야겠지요. 예하."

창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찬란한 빛 속에 붉은 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라졌다. 조용한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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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도무지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곳. 모르는 이가 보고 듣기에는 어둠의 피조물이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뜨거운 용암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곳이라 근처에만 가도 저주 받아버린다는 소문에 황폐해져 버린 검은 산. 가끔 정체모를 비명소리가 들려와 양치기들마저 공포에 몰아넣는 무서운 곳. 모두 이곳을 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서운 소문에도 특별한 것을 원하는 손님들은 자신의 정체를 로브 안에 감추어버린 채 은밀하게 그곳을 방문했다.
어두운 동굴입구를 지나 안쪽 넓은 홀에 도착하면 밖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마치 아름답게 날아오른 나비처럼 화려하게 수놓아진 불빛들이 별처럼 빛났고, 저 멀리 황금 숲이라 불리우는 로스로리엔의 끝자락처럼 끊임없는 노랫소리가 이어지는 곳. 어디서도 맡아본 적 없는 아련한 향내가 코끝을 마비시키고, 헐떡이는 숨소리와 뜨거운 온기가 방문하는 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훝어내는 곳,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따스함 중 가장 뜨거운 온기가 가득 차있는 곳. 알려진 듯, 알려지지 않은 이곳은 저주받았다 여겨지는 암흑의 땅. 모르도르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 망나니가 또 왔단말이지."

서재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안나타르는 미간을 지그시 찌푸렸다. 불쾌한 기분이라도 읽은 양, 앞에 서있던 우르크하이가 어쩔줄을 몰라하며 주절주절 말을 꺼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새까만 머리칼의 엘프를 내어놓으라 호통을 쳐 원하는 대로 넣어 주었는데 여기저기 꼬투리를 잡으며 계속 다른 아이를 들이라며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좆질하러 왔으면 얌전히 고개 처박고 허리나 놀릴 일이지 어디서 취향 운운하며 난동을 피우나. 발록같이 뛰노는 망나니놈이. 잠깐 허공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악물던 안나타르는 깃펜을 도로 펜대에 올려놓은 채, 장부를 덮고 여전히 앞에서 쩔쩔매는 우르크하이에게 명령했다.

"노예들을 다 물리고 안채로 모셔라. 곧 가도록 하지."
"예. 주인님."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안나타르는 느슨하게 흐트러진 머리끈을 풀어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치고 있던 숄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집어 의자에 걸쳐놓으며 옷장으로 향해 짙은 색 겉옷을 꺼낸 안나타르는 붉은 색 띠를 두르고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의복을 정갈히 했다. 벌써 몇 번 째였다. 어둠숲의 망나니가 심심하면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것은.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오늘은 어쩐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무표정하게 노려보던 안나타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넘어가지 않으면 걷어차 쓰러트리면 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큭큭 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른아른하게 흔들리는 불빛에 그림자가 제 키를 늘리며 뒤를 좆았다.

 

 

 

"예하, 참으로 오랫만이십니다."

로브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방 인듯, 자연스럽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엘프에게 안나타르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둠 숲의 왕자. 신다르의 개망나니. 스란두일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벽안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올곧게 내리꽂혔지만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안나타르는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동안 취향이 변하시기라도 했나봅니다. 들여보낸 아이들을 모두 내치신 걸 보면 말입니다."
"글쎄. 내가 오지 않은 동안 이곳의 물이 흐려진 건 아닐까?"
"그럴리가요. 이곳은 예하말고도 많은 분이 찾아주시고 계신 곳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아이들도 많은 곳이지요."
"숫자가 많으면 무엇할까. 머리 빈 천치들이 가득인것을. 실은 자네가 마법을 부려 겉모양만 멀쩡해 보이게 만든 오크나 우르크하이들이 대부분인게 아닌지 모르겠군. 말도 안통하는 머저리들 말이야."

빈정빈정 거리며 손을 뻗어 과일 바구니 속의 포도 한 알을 따 제 입으로 쏙 넣는 스란두일을 안나타르는 여전히 미소지으면서 바라보았다. 우르크하이는 말을 할줄 안단다. 이 멍청아. 무어라 반박해야 저 곱상한 얼굴이 일그러질까를 고민하는 도중 스란두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새까만 머리의 엘프를 찾는다. 신다르든 놀도르든 상관없어. 키는.. 아, 그대 정도면 괜찮겠군. 몸매도...그대 정도가 좋겠어.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기고 튕기는 맛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바라면 무리려나. 이 조그만 촌구석에서 말이야."

키들키들 웃으며 노골적으로 악의가 담긴 말투에 안나타르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하지만 이런 말장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안나타르는 좀더 환하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튕기는 맛이 있는 엘프라..마침 새로 들어온 아이가 두엇 있는데 선을 보여보지요. 아직 교육이 덜 되어 손님을 받는 법을 모르지만 예하의 입맛에는 맞으실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곳에 그렇게 정신이 멀쩡한 엘프도 있었나? 아까는 약에 취하고 침을 흘리는 쓰레기들 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물론 있지요. 저도 그렇지만 예하가 약에 취하고 침을 흘리고 계신 쓰레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 술에 취하고 색에 취해 계신 것 같긴 합니다만."
"흘려들으면 내게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 같군. 농담이라고 한 말 이었으면 성공이야. 생각보다 재미 있었어."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말과는 다르게 싸늘한 눈빛이 오갔다. 한참을 노려보던 스란두일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미끄러진 손가락이 와인잔으로 향했다. 벌컥벌컥 소리내어 들이키는 것 치곤 우아함이 흘러나왔다. 신다르답게 곧고 장대한 기골. 제 아비를 닮아 은색이 섞여 빛나는 금발. 뚜렷한 이목구비와 짙은 바다를 담고 일렁이는 눈동자. 언뜻 지나다 마주치면 꼭 한번이라도 돌아볼 정도의 미남이었으니 그런 고귀함을 품고 있는 것도 어쩜 당연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는 그가 자신의 노예가 아닌 이상 쓸모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입만 열면 간교한 혀를 놀려 남의 속을 긁어놓고 조롱하기 일쑤였으니 안나타르로선 아쉬움이 더해지는 일이 되었다. 일루바타르는 정말 쓸모없는 것에 쓸모없는 축복을 내리셨구나. 저 외모와 분위기를 나누어 내 노예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면 자신의 모르도르는 조금 더 번성할 수 있었을텐데.. 아주 조금 씁쓸함을 느끼며 안나타르는 그저 침묵했다. 일개 손님일지언정 함부로 대하는 선의 간극을 조절해야 했다. 어쨌거나 그는 '이 곳'에 들른 손님이기 이전에 어둠 숲의 왕자였으니까.

"그럼 잠시 쉬고 계십시오. 아이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알아서 하도록 해."

잔에 와인병을 기울여 술을 따라낸 스란두일을 뒤로한 채, 안나타르는 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머릿속으론 새로 온 아이들 중 흑발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보며 굳게 닫힌 문에 손을 대고 밀어제치려고 할 무렵.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어떤가?"
"..무엇을 말입니까?"
"무엇일까...?"
"예하?"

돌아선 안나타르의 코앞에 어느샌가 스란두일이 다가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의도치않게 좁은 틈에 갖혀버린 안나타르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올려 저지하는 제스쳐를 취해보아도 스란두일은 보지 못한 척 시치미를 떼며 시선을 그저 마주쳐왔다. 한걸음. 뒤로 반걸음. 한걸음. 뒤로 반걸음. 어느새 벽에 맞닿은 등에 오싹한 냉기가 스쳤다. 오늘은 정말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속으로 한숨을 내쉰 안나타르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스란두일이 조금 더 빨랐다. 어정쩡하게 들린 안나타르의 손목을 잡아 벽으로 밀친 채, 다른 손으로 단단히 매어져 있는 그의 허리띠를 잡아당겨 풀어냈다.

"어떤가. 내게 하룻밤 웃음을 팔아보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만 예하,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항간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더군. 모르도르의 꽃 안나타르는 귀하신 분께만 그 다리를 벌린다고 말이야."
"근거없는 소문 일 뿐 입니다."

대체 어떤 개새끼가 그런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건지 발견하기만 하면 가운뎃다리를 부러뜨려주겠노라고 생각하며 안나타르는 잡혀있는 손목을 슬쩍 비틀었다. 꽉 잡고있는 스란두일이 좀체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아 오크를 불러 망신을 줄까 생각하던 안나타르의 몸에 스란두일의 손가락이 닿아 점점 위를 향해 올라왔다. 예하. 장난은 그만하십시오. 점점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전달되었음에도 스란두일은 움직이는 손가락이나 꽉 잡은 손목의 힘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릇없는 그의 손가락은 어금니를 꽉 깨물어 미세하게 떨리는 안나타르의 얼굴까지 닿고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보드라운 볼을 만지작거리며 움직이다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위협당한 긴장에 굳은 안나타르의 턱끝에 가볍게 입맞춘 스란두일이 눈을 치켜뜨고 시선을 맞췄다. 내려다보는 붉은 색의 용암과 올려다보는 푸른색의 바다가 맞부딧히며 섞였다.

"황금숲의 요정은 모르는 것이 없더군."

비틀린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동시에 안나타르의 입가도 얇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런.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권력을 가진 족속들은 늘 이래왔다. 몇 천년 동안 서로 위엄있는 척 헛기침을 하며 뒤로는 은밀한 취미를 지닌 이들끼리 음험한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모르도르의 꽃 안나타르.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 저 이름의 주인은 그저 호색한 취미를 가진 노예상인이라 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온갖 정보의 근원. 어둠속의 거대한 힘을 움직이는 지배자. 필요할때는 스스로 옷을 벗어던지고 상대를 농락해 피 한방울마저 뽑아내는 검은 꽃. 암암리에 퍼진 소문에 일부러 권력자들이 찾아와 정보나 그에 상응하는것을 내밀며 그를 욕보일 기회를 갖길 원했다. 일일히 받아주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케이스가 없진 않았다. 고작 하룻밤 몸을 굴려 받을수 있는 대가 이상을 받아낼 수 있을 때, 그 때 뿐이었다. 이곳은 모르도르. 환락과 쾌락이 가득한 도시. 그 안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상 적법한 대가를 치룬다면 제 몸뚱아리 또한 거래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안나타르는 눈앞에 웃고있는 먹잇감을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먹어도 되는 달콤한 먹이인가, 아니라면 썩어 버릴 쓰레기인가. 그러고보면 높으신 분들이 오신지 꽤 되었다. 발라들의 입을 통해 이녀석의 귀로 들어갔을 테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치기어린 유희의 상대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인가. 가늠하는 안나타르에게 스란두일은 그저 황홀한 웃음을 지으며 세게 잡았던 손목을 놓고 슬쩍 쓸어내렸다. 그렇게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스스로의 몸매에 자신이 없는건가? 비웃음 섞인 시선을 앞에 두고 잠시 멈칫한 안나타르는 곧 고민을 끝마쳤다는 듯, 아까와는 다른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자피 순순히 가지 않을 녀석이다. 지위가 있으니 제대로 막을 방도도 없고. 어둠 숲에는 보석이 유명하다고 했었나. 정보가 아니면 재물을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흥미를 돋궜다. 가끔은 이런 기분전환도 나쁘진 않을것 같다고 생각하며 안나타르는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들어 스란두일의 허리를 감아 자신에게 당겼다. 갑자기 180도 바뀐 분위기에 스란두일이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금세 안나타르의 허리를 감아 자신의 몸에 단단히 붙이고 입술을 내리 누르려 고개를 올렸다.

"무엇을."

막 겹치려던 입술이 멈췄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제게."

새까만 꽃의 봉우리가 열리듯 붉은 입술이 낼름거렸다. 꽤나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스란두일 역시 입술을 열였다.

"내가 만족한다면 오늘 매상의 세 배쯤 어떠하냐."
"저를 가지시기에 턱없이 부족한 대가가 아닙니까."
"그대가 그리도 비싼가?"
"부족합니다. 저는 그 정도 싸구려가 아닙니다. 예하께서 가지고 계신 것 중 가장 크고 귀한것을 주십시오."
"무엇을 주면 좋을까. 그래, 만도스의 전당을 구경해보는건 어떻겠느냐."
"고작 예하의 것으로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대가 내것을 받아낼 수 있을까 걱정인데 그대는 나를 걱정하는군.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 할 것 같은데 어떤가?"

 

나른한 눈동자에 힘이 담겼다. 잡아먹을 듯, 물 밀듯 몰아치는 파도에 뜨거운 불길은 숨죽이며 자신의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당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날개를 펴 저것을 말려버리리라. 웃으며 혀 끝을 떠난 단어가 허공을 가로지르자마자 겹쳐진 입술에선 떠나지 못한 신음소리가 맴돌았다. 파고든 손길과 거친 숨소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옷가지가 밤의 시작을 알렸다.  

 

 

 

>>노예상인 안나와 고객 스란이요!!!! ㅋㅋㅋ 스란이 맘에드는 상품이 없었든 안나가 그날 심심했었든 뭔가 둘의 야릇한 분위기가 보고싶어요...  라는 리퀘: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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