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린디르. 닿음.

톨킨버스 2013. 8. 31. 02:06

어쩌면 이리도 소질이 없을 수 있을까.

검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은 임라드리스의 지형적 특성상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활을 좀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건네봤지만 시위조차 제대로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반쯤 장난으로 가르쳐주마 라고 선생질을 해보았는데 그마저도 소용없을 정도로 이렇게..! 이렇게! 소질이 없었을 줄이야..
시무룩해진 얼굴 표정에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못가르쳐 그런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겨우 머리를 굴려 찾아낸 것이 말이었다. 어자피 드넓은 초원이 근처에 있는 임라드리스에서 말은 필수요소이지 않은가.
해서 이렇게 마굿간에서 순해보이는 말을 꺼내온 것 까진 좋았는데..

"....할디르...님.. 이거 ...으아아.."

...못 탄다. 이것마저.

말고삐를 쥔 채 어쩔줄을 몰라하는 표정으로 울먹이며 쳐다보는 눈동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약하게 움직이는 말의 움직임에 그대로 휘둘려서는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어느 엘프에게서 볼 수 있을까. 이럴때면 옛 선인들의 격언이 머리를 스쳤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에루시여.. 린디르의 약점은 체력입니까?

한참을 비딱하게 서서 린디르를 바라보던 할디르는 결국 한숨을 쉬고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이제서야 땅으로 내려오는 줄 알고 눈에 띄게 안도하던 이는 곧이어 받침대에 올려진 할디르의 발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렇게 에스코트 해주지 않으셔도.. 린디르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날린 할디르가 린디르의 뒤쪽 안장에 그대로 올라타버렸으니까.

당황한 모습으로 굳어버린 어깨 위로 고삐를 잡아당기느라 가까워진 할디르의 숨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고삐를 잡으세요. 낮게 드리워진 목소리에 절로 손이 움직였다. 덜덜 떨며 잡은 고삐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그대로 할디르는 천천히 조여진 말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다각다각. 움직이는 말의 걸음걸이에 몸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할디르가 좀더 바짝 앞으로 앉아 린디르의 허리를 받치고 자세를 잡아주었다. 천천히 길을 따라 작은 동산으로 향한 말의 걸음은 느리기 그지없었지만 이미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 손바닥 덕택에 린디르는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되십니까."
"..ㄴ..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리 잡고 있으니 떨어지지 않습니다."

할디르는 천천히 웃으며 말을 걸어왔지만 린디르는 점점 난감해졌다. 부러 꼿꼿이 세운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고 잔뜩 긴장한 어깨가 결려왔다. 여전히 허공에서 움직이는 느낌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악물어 보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긴장을 풀고 리듬을 타라며 툭툭 건드린 어깨. 귓가에서 바짝 울리는 낮은 목소리. 목덜미에 닿을 듯 말듯하게 스쳐가는 숨.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기묘할 정도로 예민하게 다가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참 말없이 발길 가는대로 걷던 말은 이내 심드렁해졌는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할디르는 할디르대로 난감해졌다. 좀 더 갔으면 했는데.. 바짝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뒤에서도 눈에 선했다. 돌아가야하나 어째야 하나를 고민하던 것도 잠시, 이내 마음을 굳히고 말의 옆구리를 차냈다.

"으아아아아!!!!!!!!!!!!!!!!!!"

갑작스럽게 빨라진 움직임에 린디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비싯비싯 흘러나온 웃음이 귓가를 스쳤다. 꼭 잡고 내려치는 고삐는 할디르가 잡고 있었으니 넘어질 일은 없었다. 로스로리엔에서 어린 엘프들에게 기마를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호되게 말을 한번 겪고 나면 그뒤로 어린 아이들조차 말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린디르의 잘 땋인 머릿결이 시야를 가리는 법이 없도록 할디르는 상체를 낮추고 린디르에게 밀착한 채, 속도를 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을 타다 언덕 어귀로 돌아오자 할디르는 천천히 고삐를 죄었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꽉 잡힌 손에서 뛰었다. 한껏 상쾌한 기분으로 그제서야 린디르의 반응을 살피던 할디르는 발갛게 달아오른 귀끝과 목덜미를 확인하곤 슬쩍 몸을 기울였다. 설마 무서워서 울어버린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으..."

차마 말 할 수 없을정도로 새빨갛게 되어버린 얼굴에 고민했다. 말을 타면 흥분하는 체질이어서 얼굴에 열이..오른다던..가...음....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던 린디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그..몸 좀..떼...어주세요.."
"몸이요?"

그제서야 모습을 보아하니 착 달라붙어있는 모습이 묘했다. 황급히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건만 움찔거리는 등이 어쩔줄을 몰라했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하는 시선 끝에는 완벽하게 밀착되어있는 은밀한..뭐 잠깐만..?
순식간에 안장 끝으로 밀려올라간 몸에 정말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으로 파르르 떨리던 등이 잠잠해졌다.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린디르가 아주 천천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치를 보는데 내 얼굴마저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당연히 로스로리엔에선 이런일이 없었다. 건장한 성인 두명이 아닌 어린아이와 타니까.. 그러니까..

"저.!"
"도..! 돌아가죠!"
"아, 네네네!!"

동시에 내놓은 목소리가 엇갈리자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최대한 떨어진 채, 다시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움찔 움찔 닿는 곳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아. 말도 안돼. 그러니까..

올때는 잠시였는데 돌아오는 길은 한참이었다. 마굿간의 앞에 도달하자마자 재빠른 몸짓으로 내려온 할디르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린디르에게 손을 뻗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린디르가 손을 붙잡고 받침대로 내려왔다.

"가..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아닙니다."
"저..저 그만 해야할 일이 있어서..!"
"아, 네!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한 린디르는 겨우 눈을 한번 마주치고나서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멍하니 린디르가 향한곳을 바라보던 할디르는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밖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결국 성질이 난 말이 낮게 울며 할디르를 툭툭 치자, 그제서야 할디르는 안장을 내려준 후 말을 몰아 마굿간으로 향했다.
정리를 끝마치고 나서야 웃음이 났다. 에루시여. 운동을 전혀 못해도 할 수 있는게 최소 한가지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귀엽네요. 거기까지 생각하던 할디르는 저도 모르게 열오른 느낌에 괜히 부채질을 하며 린디르가 사라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자피 저렇게 도망쳐도 저녁 식사때에는 볼 수 있겠지. 하루종일 헛고생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예감에 기분이 좋아진 할디르의 마음을 마치 말이 안다는 듯 높게 울었다. 숲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따스한 주홍빛 석양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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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어둠이 찾아오고 고요가 사방을 뒤덮은 야심한 밤. 들릴듯, 들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이 풀벌레가 우는 소리에 묻혔다. 몇 번이고 넘어질 듯 급하게 찾은 장소는 달조차 보이지 않는 무성한 수풀과 높은 나무들로 가리워져 있었다. 가파르게 넘어가는 숨을 애써 고른 채, 어린 엘프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약속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남았으니 숨을 고르고 어여삐 보일 정도로 자신을 돌아볼 여유는 조금 남아보였다. 두근두근 진정하지 못하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검은 머리의 엘프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눈을 감았다. 곧 있으면 보게 될 이를 생각하면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어떤 인사를 꺼내야 하지. 소소한 것 하나하나가 고민이 되었고 두근거림으로 이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달려온 열기를 식히다 바로 곁에서 난 인기척에 흠칫 놀란 그 순간.

"일찍이네."

귓가에 속삭여진 목소리는 꿈에도 그리던 이의 목소리였다. 파들, 떨린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차마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수줍음에 속삭이던 이는 가벼이 웃으며 뒤에서부터 그를 껴안았다. 자신을 감싼 온기에 답하듯 천천히 올려진 손끝이 잘게 떨리며 꾹 부여잡은 단단한 팔을 더듬었다. 고개를 조금 돌려 시선을 올리면 곱게 접힌 눈웃음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발의 엘프가 보였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잡은 팔을 몇번이고 고쳐잡던 린디르는 황급히 돌려진 동작에 잡았던 손을 놓쳤다. 목 근처에 닿은 코 끝에선 알싸한 숲의 향기가 감돌았다.

"보고싶었어."

낮은 저음이 온통 머릿속을 울렸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 발끝을 들어 시선을 맞추고 그에게 매달렸다. 천천히 뒤로 밀쳐져 크고 거대한 나무에 등을 바짝 대고나서야 그는 꽉 안았던 팔로 내 얼굴을 감쌌다.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춰오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보고싶었어요. 한마디 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쉬이 닿을 수 없는 온기이기에. 모든것이 톡톡 뛰는 심장박동처럼 조급했다.

아래서부터 올라온 손이 옷을 걷어냈다. 어딘가로 향하는지 깨달은 린디르의 얼굴이 불과같이 뜨거워졌다. 막 그의 턱끝에 입을 맞춘 후, 목선으로 입술을 가져가던 할디르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쇄골과 어깨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튜닉 안쪽을 향하던 손을 그대로 허리께까지 밀어올렸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노출된 곳은 여보란 듯, 파르라니 빛낳다. 맨살을 거리낌없이 쓸어올리며 튜닉을 모두 들어올린 할디르가 몇번 더 입을 맞추다 기어이 큭큭 거리며 어깨에 기댔다. 발갛게 올라온 열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혹 싫어하면 어쩌지. 어쩌지.
한참을 낮게 웃던 할디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올려 어린 엘프를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모르는 눈빛에 긴장이 감돌면서도 천천히 허리께와 툭 튀어나온 골반을 쓰다듬으면 움찔움찔 떨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며 그의 위에서 맴돌던 손끝은 다시 얼굴로 향했다.

"이렇게 귀여운 유혹을 할 줄은 몰랐는걸?"
"......당신에게만 하는거에요."
"알아, 알고있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유혹은 참을수 없을지도 몰라."
"참지 말아요. 난 이제 성인이에요. 당신을 받아들여도 된다구요."

어둠속에 파르라니 빛나는 맑은 눈동자에 할디르의 얼굴이 맺혔다. 진심을 담은 고백에 그는 그저 웃어보이며 사랑스럽게 그의 뺨을 감싸안았다. 올곧은 마음. 성년이 되길 기다려온것은 그대 뿐이 아닌데.. 천천히 시간을 가늠해보며 할디르는 조금은 떨리고 있는 린디르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말랑한 감촉이 입안에 퍼졌다. 몇번이고 핥고 물어 맛을 음미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말간 눈매가 어느덧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플지도 몰라."
"괜찮아요."
"행복하지 않을지도.."
"할디르 그만..오늘은.."

슬픈 얼굴로 자신을 막아내는 단호함에 은발의 엘프는 다시 미소지었다. 그래.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오늘은 행복에 취하고 사랑의 온기에 몸을 묻어도 되는 그런 날 이니까.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쉬이 사과하고 만 입술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조용조용히 애정을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어린 엘프의 뺨은 다시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아주 약한 끄덕거림을 시작으로 두 엘프의 입술이 다시 겹쳤다. 끝나지 않을 성인식의 밤이 이제서야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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