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안나타르는 겨우 눈을 떴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후 흩어졌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한 안나타르는 그제서야 긴장을 늦춘 채 포근하게 감겨오는 흰 이불자락에 몸을 둘둘 감고 아직 떨쳐지지 않은 잠기운을 즐겼다. 먼 곳에서 봄을 환영하는 엘프들의 노랫소리가 창문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를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침대에서 좀체 나오지 못하는 안나를 깨운 것은 어느새 익숙해진 발자국 소리였다.


혼자 있는것을 알면서도 문을 노크한 뒤에서야 방안으로 들어온 켈레브림보르는 행여라도 잠든 이가 눈뜰까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침대 곁으로 다가와선 손에 양껏 든 것을 근처에 놓아두고 발치에 앉아 가만히 잠든 이를 지켜보았다. 시원한 이마. 느슨하게 땋아 반쯤은 흐트러진 검은 머릿결. 반쯤 가리워진 얼굴에 곱게 감겨있는 눈과 오똑한 코가 보였다. 새빨간 입술끝에 시선이 머무를 무렵, 잠투정을 하듯 안나타르의 몸이 뒤척거리며 움직였다. 마법에라도 걸린 양, 무심코 뻗어진 손 끝이 따스한 볼에 닿았다.

투박한 손끝에 보드라운 살결이 닿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너무도 부드러워 혹 상처가 날까 두려웠다. 어젯밤의 뜨거운 숨결을 나누었던 일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쉬이 더듬지 못하고 그저 아주 작은 부분만 닿은 채로 켈레브림보르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없어질까 두려웠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볼에서 느껴지는 따스함과 작은 경직에 안나타르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의 볼에 손을 댄 채 바라만 보는 켈레브림보르가 눈 앞에 보이자 안나타르는 저도모르게 웃어보였다. 돌돌 말아둔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어 볼에 닿아있는 켈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안나타르의 얼굴을 졸지에 감싸게 된 켈레브림보르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큼큼거렸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안나타르를 바라보았다.

 

"해가 높다랗게 떠올랐으면 깨우시면 될 일 아닙니까. 어찌하여 쳐다만 보고 계십니까."
"...너무 곤히 잠이 들어 혹 방해할까봐.."
"그럼 재워주시려고 이리 손을 대셨습니까."
"그건..!"
"농담입니다. 켈리. 좋은 아침이에요."


움찔거리는 그의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이며 작게 웃어보이는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와 같아 켈레브림보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한참을 미약한 힘으로 오며가며 장난을 친 안나와 켈리는 곧 동시에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실은 아까 잠깐 잠에서 깼습니다만, 켈리가 보이지않아 꿈인 줄 알고 다시 눈을 감았지요."
"미안하다.. 단지.."
"단지...?"
"어젯밤에..혹 나 때문에 식사를 못한게 아닐까 싶어..서."
"...아.."
"아침이면 배가고플게 아니냐. 그래서 간단하게 좀 요깃거리를 준비하느라 일찍 곁을 비웠다. 미안하구나."
"직접..말입니까?"
"...부족한 솜씨지만 말이다."


 

쑥스럼하게 웃어보이며 시선을 모로 돌리는 켈레브림보르를 쳐다보며 안나타르는 지난밤을 회상했다. 분명 저녁을 먹기도 전인 애매한 시간에 그의 대장간에 조언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방문해 그를 유혹했었다. 어쩐지 불붙어 달려드는 그를 막기도 애매해져 밤새 품에 안겨 울다지쳐 잠든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는걸까. 이상한 남자다. 이 자는 어째서 이렇게 내게 맹목적일 수 있는걸까..
하지만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만이 떠올랐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거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슬쩍 몸을 일으켜 손을 뻗으면 켈레브림보르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역시 손을 뻗어 부축해주었다. 똑바로 앉아 떨어지려는 손을 마주잡아 꽉 쥐어주면 또 진중한 눈빛이 안나타르를 향해 쏟아졌다. 달콤한 입술이 열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아니다...내가 어제 부주의.."

"쉿."

 

황급히 다가서 켈레브림보르의 입술을 손끝으로 막았다. 움찔거리며 아주 조금 뒤쪽으로 물러난 그의 눈빛에 동요를 읽었다. 금새 떨어진 손끝은 다시 켈리의 손을 잡았다.

"어젠..저도 조르지 않았습니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안나타르."
"네?"
".....아니다. 고맙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든게 고맙다. 네 존재가..이렇게 내 앞에 있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그리 말씀해주시면..제가 더 감사하지요."


따스한 눈빛이 오갔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끼며 안나타르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켈레브림보르의 품으로 조금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시장합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아, 미안하다. 한눈을 또 팔았구나. 잠시만.."

 

잡았던 손을 황급히 놓아두곤 켈레브림보르는 근처에 놔두었던 것을 째로 들고왔다. 작은 테이블같이 생긴것 위에 가벼운 음식들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안나타르의 앞에 그것들을 통채로 놓고 병을 기울여 우유를 따라냈다. 컵이 찰랑찰랑 차오르자 그제서야 미소를 지어보이며 침대위에 함께 앉아 식기를 건넸다.

 

"가볍게 먹기엔 괜찮을게다."
"...이것도 직접 만드신 겁니까?"
"아, 응.."

음식보단 제 무릎위에 놓인 트레이에 관심을 가지는 안나타르에게 반응해 또 귀끝이 새빨개져버렸다. 좌 우로 기웃거리며 모양을 살펴본 안나타르가 방긋 웃으며 예쁘다고 칭찬하자 볼까지 물들어버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켈레브림보르는 음식이 더 식을까 걱정돼 나이프와 포크를 붙잡고 먹기좋은 크기로 음식을 조각냈다. 접시째 건네주려 고개를 들자 안나타르는 빙글빙글 웃으며 살짝 입을 벌린 채, 켈레브림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어제 무리를 해서 팔과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몸이 불편하면 진작에 말을 해야 할 것이아니냐.. 어디 자세히 보자."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엇이냐. 내 뭐든 들어주마."

"켈리가 만든 음식. 직접 먹여주시면..안되겠습니까?"

"아..."

"부탁입니다. 켈리."

 

진득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피할수가 없었다. 흠. 흠흠.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켈레브림보르는 포크로 음식을 찍어올리고 잠시 멈칫 하다가 안나타르의 입 근처로 가져갔다. 활짝 웃는 입술이 좋은 호선을 그리다가 덥썩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움직이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켈리의 시선을 느끼며 안나타르는 충분히 음식의 맛을 음미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꿀꺽 넘긴 채 입술을 혀로 슬쩍 쓸어내린 안나타르는 눈웃음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켈리."

"..다..행이구나."
"하나 더 주시겠습니까."

"아, 응. 그래. 이번엔 이거. 이게 괜찮을 것 같다."

"아-"

 

 

 

신이난 켈리의 손짓과 오물오물 받아먹는 안나타르의 사이엔 달큰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이들 사이로 높게 솟아오른 햇빛이 내비쳤다. 밖에선 여전히 에레기온의 엘프들이 부르는 즐거운 환희의 노래가 넘실대며 사방으로 퍼졌다.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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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안나. 유혹.

2013. 5. 12.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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