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대령하라!"

두터운 문이 열렸고 제 발로 바닥을 내딛어 걷기도 전에 병사들은 죄인의 목에 매인 줄을 잡아당겨 그들의 주군에게로 향했다.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발걸음을 옮기며 겨우 중심을 잡던 남자는 안대가 풀어지는 감촉에 짧은 신음을 뱉었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가 익숙하지 않은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남자는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미묘하게 변했다. 화려하고도 높이 솟아오른 단 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물러가라, 직접 심문할 것이야."

목줄을 바닥에 연결해 고정시킨 병사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밖으로 향했고, 금침위에 비스듬히 누워 사내를 바라보던 이는 그 얼굴 위에 미소를 올렸다.

"좀 더 멀리 가셨어야지요."
"....."
"고작 백리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 단언하신겁니까?"

아직 어린 태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쟁쟁거리며 홀 안을 울렸다. 공작의 깃털로 만든 화려한 부채가 부드럽게 흔들리다 멈추었다. 왕의 분노를 알아챈 것일까. 시녀들도 하나 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작은 덧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왕의 몸이 일으켜졌다. 희고 고운 발이 비단 끌신 위에 내려앉았고 자연스레 흘러내린 겉옷이 왕의 걸음걸음마다 자취를 남겼다. 정복이 아닌 침실용의 가운을 걸친 왕이 조금씩 다가올 때 마다 사내는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고정된 목줄이 팽팽해질 때 까지 물러난 사내의 코 앞에 오고나서야 왕은 그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훌쩍 사내의 키를 넘어버린 왕은 그를 내려다보기에 충분했으나 부러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었고 드디어 왕은 그토록 염원했던 이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랫만입니다. 마글로르. 아니 카노."
".....엘로스."

쇠를 긁는 것 처럼 거칠고 지저분한 목소리가 입술을 거쳐 밖으로 새어나오는 순간, 사내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온 몸이 결박당하고 목줄마저 채워진 사내는 바닥에 웅크려 고통을 감내했다. 벌겋게 부풀어오른 뺨을 감싸지도 못해 차가운 바닥에 문질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왕은 가만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나라에서 감히 짐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른 자. 누구도 나를 내려다볼 수는 없어요. 당신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더 엄격해야만 하는 상대가 아닙니까 당신은."

오만하게도 일국의 왕자들을 납치했던 죄인 주제에. 피식 피식 웃으며 내뱉기에 적당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왕은 퍽 즐거워보였다. 이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 몸뚱이를 밀쳐 그 흐트러진 얼굴을 드러냈다. 눈을 감지도 않은 채, 그 손에 이끌려 마주한 표정은 이미 조금 전보다 나빠져 있었다. 잡아먹히는 자와 잡아먹으려는 포식자의 관계. 독한 말을 내뱉은 이 치고는 상냥한 손끝이 그 얼굴을 가볍게 쓸어올렸고 그 손길을 피하려 노력하는 남자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너무 어리석었어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당신은 너무도 착해요. 주제를 모르고 착해 빠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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