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에 텁텁하게 놀아나는 액체를 혀끝으로 굴리며 펜골로드는 탁자의 끝을 톡 톡 쳐내려갔다. 톡, 한번 쳐 낼때 목에서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미량의 액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입안에선 묵직한 단 내음과 함께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그러면 또 한번 손은 잔을 지척으로 밀어냈고 기다렸다는 듯, 다시 채워진 포도주의 향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이 이상은 무리에요. 여기까지가 제 한계라서요."
"한계까지 스스로 기억하고 있는건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말이지요."
"조금 실수한다고 해서 책 잡을 이가 없을텐데."
"당신에게 책 잡히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조금은 불쾌한 표정으로 내밀어진 잔을 외면한 펜골로드가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앉았다. 포도의 향과 질을 따져 세분화하고 우량품종을 골라내어 보다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작업을 도와줄 수 있냐는 그럴듯한 둘러댐을 믿은 내가 바보였지. 한창 달콤한 말로 구슬려 입 안으로 사라진 수많은 포도주들을 떠올리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슬슬 올라오는 취기에 눈 앞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두려워서. 죄라도 지었나?"

사람좋게 웃어 보이며 장난을 거는 입술이 요요하게 빛났다. 취기가 돌고 있는 와중에서도 그것이 참으로 얄미워보여 펜골로드는 차라리 그 얼굴을 외면하며 탁자 위의 청포도로 손을 뻗었다. 포도주에 청포도라니, 대체 어디로 붙어먹은 센스야.
말없이 포도알을 집어먹는 펜골로드를 보며 엑셀리온은 밀쳐진 잔을 대신 감아쥐었다. 우아하게 꺾인 손목을 따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펜골로드의 시선이 올라간다. 움직이는 목울대, 도도하게 올라간 턱선. 그 잔이 맞닿아 비틀린 입술. 홀리기라도 한 것 처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살풋 감긴 눈가까지. 모른 척 하기에는 아주 도가 트신 분이라고 한 마디 내뱉어주고픈 욕망을 억누른 채, 펜골로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릎이 속절없이 무너진 건 한 순간이었다

"당신 짐승같아요."
"뜬금없이 실례되는 말을 하는군."
"아니라고 말 할 건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요?"
"그대는 모르고 있었나?"
"그건 아니지만."

싫은 듯 일그러진 눈썹과 답지않게 조금 늘어지는 말투. 그러나 단단히 붙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많이 취했어."
"그 말대로에요. 걷지도 못할 정도죠."
"침실까지 부축해줘야겠는데?"
"속 시커먼 짐승의 부축을 받아도 좋은지 헷갈리네요."
"친애하는 선생님의 안전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을 오해하면 쓰나."

말과는 달리 이미 몸을 붙잡아 일으키던 손끝이 펜골로드의 가슴께에 닿았다. 낯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쿵쾅거리는 속삭임을 모두 듣고 있다는 것 처럼 엑셀리온은 그 요란한 대지를 쓰다듬어 달랬다. 입술은 여전히 솔직할 수 없어도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지. 슬핏 웃어보인 엑셀리온이 고개를 숙여 짧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선생님께서는 오늘 자신의 침실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부르짖는 중이군. 잘 들었어."
"당신은 늘 무언가를 곡해하는 버릇이 있어요. 어떻게 그리도 자기중심적인거죠?"
"칭찬은 언제 들어도 즐거운 법이지. 고마워?"
"저기요. 내 말 좀 들어줄래요. 귀머거리씨?"
"그 이상은 침실에서 듣는 편이 좋겠군. 밤 공기는 차고 당신은 취했으니까."

다시금 맥없이 고꾸라지는 다리마저 안아들어 그 어깨위로 올려둔 기사님은 성큼성큼 테라스를 나섰다. 뭐 하는 짓이냐며 분노를 내뿜는 몸뚱이를 진정시키느라 그 깡마르고 단단한 엉덩이를 몇번이고 도닥여주었다는 것. 그러자 거짓말같이 움직이던 몸이 얌전해졌었다는 것은 아마도 별빛만이 알고 있을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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