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아엘윙. 아침.

톨킨버스 2013. 9. 22. 20:51

"에아렌딜. 그만.."

새하얗게 빛나는 햇살이 부서지는 곳에 새까만 머리칼이 빛났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것은 마치 고운 비단처럼 흐트러졌다 펴지길 반복했다. 햇빛에 잘 말려 포근한 이불은 서걱이며 부산스레 움직였고 간혹 높은 웃음소리가 섞였다. 한참을 불쑥 불쑥 움직이던 이불 속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금과 흑. 사방으로 흐트러지며 겹쳐지던 머리칼이 빠르게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아으.ㅇ..."

달싹이는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허리에 감겨오는 따스함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닿아오는 단단한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면 자신만 바라보는 눈동자가 사르르 감겼다.
코 끝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면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보답이라도 하듯 턱과 목 근처에 키스하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그의 머리칼을 손안 가득 움켜쥐면 반사적으로 손끝이 골반을 부여잡았다. 침의 사이로 스며든 손가락이 톡톡 노크하듯 두드리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간지럽다는 듯 허리를 비틀면 놓칠세라 쫒아왔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조르며 다리를 얽었다. 옴짝달싹 하지 못할 정도로 다잡은 팔 안에서 엘윙은 그저 웃어버렸다.

"아침인데 안 일어 날거야?"
"오늘은 조금 늦장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가씨?"

그제서야 품 속에서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여주는 이의 모습이 얄미워 엘윙은 귀를 잡아당겼다. 아무렇게나 자라 삐죽삐죽 흩어진 머리칼이 손끝에 함께 감겼는지 금세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놀란 손끝이 떨어져나가고 귀 뒤로 머리칼을 정리해 넘겼다. 하지만 얼얼한 아픔이 좀체 가시질 않아 보였다.

"아파?"
"응."
"어쩌지."
"어쩌긴. 벌 받아야지."
"응?"

금세 몸을 돌려 엘윙의 위로 올라간 에아렌딜이 짖궂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멀뚱하게 바라보던 엘윙의 머리칼을 걷고 에아렌딜은 동그랗게 솟아오른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가슴선을 매만지던 손은 턱을 조금 들어올렸고, 눈가와 뺨에 키스하던 입술은 귀 끝으로 향했다. 부러 소리를 내며 짖궂을 정도로 집요하게 애무하던 에아렌딜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새카맣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한참을 키스하고 나서야 에아렌딜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귀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겨우 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얽힌 감정이 재미있는지 씩 웃어보이는 모습은 마치 짖궂은 소년과도 같았다.

"못됐어."
"어쩌지?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혼을 무를수도 없는데."
"엘론드랑 엘로스한테 이를거야. 아다가 나 괴롭혔다고."
"그것만은 참아줘. 요전에도 하루종일 잔소리를 들었다고."

금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한번 허리를 감고 밀착해오는 에아렌딜을 보며 엘윙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전에 지나가듯 투정부린것을 쌍둥이들은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에도 얼마나 약한척을 하던지.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엘윙은 코끝에서 움직이는 색바랜 금발을 쓰다듬었다.

"또 언제 나가?"
"이제 곧."
"금방 올거야?"
"응. 금방 올게."
"거짓말."
"거짓말같아?"
"응."

너무도 당연하게 나온 답변에 조금 놀랐는지 에아렌딜이 고개를 들었다. 깜빡이는 눈동자를 한참이나 쳐다본 시선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슬그머니 떨어져 미안한 듯 바라보는 모습에도 엘윙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저하며 입을 연 것은 에아렌딜 이었다.

"미안해."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과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 엘윙은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단하게 굳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까칠해진 얼굴을 매만졌다. 만져도 만져도 그리웠다. 사랑하는 이의 체취가, 온기가, 모습이 그립지 않다고 하면 그것이 진정 거짓일 터였다. 하지만 엘윙은 모든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의 모습은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었으니까.

"금방 오지 않아도 괜찮아."
"엘윙."
"돌아오기만 하면 돼."
"...돌아올게. 꼭."
"정말?"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럼 맹세의 키스를 해 주세요."

말갛게 웃으며 접히는 눈동자를 보며 그제서야 안심한 에아렌딜은 그녀의 손을 잡아올려 입술을 묻었다. 한참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엘윙은 부러 마음에 들지 않는 투로 입을 열었다.

"요즘 뱃사람들은 촌스럽게 맹세의 키스를 손등에다 하나봐요."
"사실 뱃사람들은 이렇게 안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는데요?"
"음.. 공주님이 하시기엔 조금 거칠 것 같은데요."
"지금 절 무시하는 거에요?"

날카롭게 올라간 눈동자엔 장난끼가 돌았다. 뾰족하게 내밀어진 입술을 쳐다보던 에아렌딜은 정말 어쩔 수 없단 모습으로 경고했다.

"못 견딜거 같은데."
"뱃사람들의 맹세 정도야. 뭐."
"그래요? 그럼 하죠. 맹세."

갑자기 다가온 얼굴에 엘윙의 입술이 먹혀들었다. 키득거리며 달아나려 했지만 단단히 끌어안긴 목과 허리는 좀체 움직일 틈을 주지 않았다. 품에 가두었으면서 계속 안으로 파고드는 몸짓에 겨우 뻗어나온 하얀 손가락이 에아렌딜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신음소리 섞인 웃음은 서로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부스럭대는 작은 소리와 조급하게 서로의 온기를 갈구하는 모습이 이제는 선명하게 떠오른 아침 햇살속에 담겼다. 따스한 여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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