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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도무지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곳. 모르는 이가 보고 듣기에는 어둠의 피조물이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뜨거운 용암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곳이라 근처에만 가도 저주 받아버린다는 소문에 황폐해져 버린 검은 산. 가끔 정체모를 비명소리가 들려와 양치기들마저 공포에 몰아넣는 무서운 곳. 모두 이곳을 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서운 소문에도 특별한 것을 원하는 손님들은 자신의 정체를 로브 안에 감추어버린 채 은밀하게 그곳을 방문했다.
어두운 동굴입구를 지나 안쪽 넓은 홀에 도착하면 밖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마치 아름답게 날아오른 나비처럼 화려하게 수놓아진 불빛들이 별처럼 빛났고, 저 멀리 황금 숲이라 불리우는 로스로리엔의 끝자락처럼 끊임없는 노랫소리가 이어지는 곳. 어디서도 맡아본 적 없는 아련한 향내가 코끝을 마비시키고, 헐떡이는 숨소리와 뜨거운 온기가 방문하는 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훝어내는 곳,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따스함 중 가장 뜨거운 온기가 가득 차있는 곳. 알려진 듯, 알려지지 않은 이곳은 저주받았다 여겨지는 암흑의 땅. 모르도르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 망나니가 또 왔단말이지."

서재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안나타르는 미간을 지그시 찌푸렸다. 불쾌한 기분이라도 읽은 양, 앞에 서있던 우르크하이가 어쩔줄을 몰라하며 주절주절 말을 꺼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새까만 머리칼의 엘프를 내어놓으라 호통을 쳐 원하는 대로 넣어 주었는데 여기저기 꼬투리를 잡으며 계속 다른 아이를 들이라며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좆질하러 왔으면 얌전히 고개 처박고 허리나 놀릴 일이지 어디서 취향 운운하며 난동을 피우나. 발록같이 뛰노는 망나니놈이. 잠깐 허공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악물던 안나타르는 깃펜을 도로 펜대에 올려놓은 채, 장부를 덮고 여전히 앞에서 쩔쩔매는 우르크하이에게 명령했다.

"노예들을 다 물리고 안채로 모셔라. 곧 가도록 하지."
"예. 주인님."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안나타르는 느슨하게 흐트러진 머리끈을 풀어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치고 있던 숄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집어 의자에 걸쳐놓으며 옷장으로 향해 짙은 색 겉옷을 꺼낸 안나타르는 붉은 색 띠를 두르고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의복을 정갈히 했다. 벌써 몇 번 째였다. 어둠숲의 망나니가 심심하면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것은.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오늘은 어쩐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무표정하게 노려보던 안나타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넘어가지 않으면 걷어차 쓰러트리면 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큭큭 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른아른하게 흔들리는 불빛에 그림자가 제 키를 늘리며 뒤를 좆았다.

 

 

 

"예하, 참으로 오랫만이십니다."

로브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방 인듯, 자연스럽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엘프에게 안나타르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둠 숲의 왕자. 신다르의 개망나니. 스란두일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벽안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올곧게 내리꽂혔지만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안나타르는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동안 취향이 변하시기라도 했나봅니다. 들여보낸 아이들을 모두 내치신 걸 보면 말입니다."
"글쎄. 내가 오지 않은 동안 이곳의 물이 흐려진 건 아닐까?"
"그럴리가요. 이곳은 예하말고도 많은 분이 찾아주시고 계신 곳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아이들도 많은 곳이지요."
"숫자가 많으면 무엇할까. 머리 빈 천치들이 가득인것을. 실은 자네가 마법을 부려 겉모양만 멀쩡해 보이게 만든 오크나 우르크하이들이 대부분인게 아닌지 모르겠군. 말도 안통하는 머저리들 말이야."

빈정빈정 거리며 손을 뻗어 과일 바구니 속의 포도 한 알을 따 제 입으로 쏙 넣는 스란두일을 안나타르는 여전히 미소지으면서 바라보았다. 우르크하이는 말을 할줄 안단다. 이 멍청아. 무어라 반박해야 저 곱상한 얼굴이 일그러질까를 고민하는 도중 스란두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새까만 머리의 엘프를 찾는다. 신다르든 놀도르든 상관없어. 키는.. 아, 그대 정도면 괜찮겠군. 몸매도...그대 정도가 좋겠어.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기고 튕기는 맛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바라면 무리려나. 이 조그만 촌구석에서 말이야."

키들키들 웃으며 노골적으로 악의가 담긴 말투에 안나타르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하지만 이런 말장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안나타르는 좀더 환하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튕기는 맛이 있는 엘프라..마침 새로 들어온 아이가 두엇 있는데 선을 보여보지요. 아직 교육이 덜 되어 손님을 받는 법을 모르지만 예하의 입맛에는 맞으실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곳에 그렇게 정신이 멀쩡한 엘프도 있었나? 아까는 약에 취하고 침을 흘리는 쓰레기들 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물론 있지요. 저도 그렇지만 예하가 약에 취하고 침을 흘리고 계신 쓰레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 술에 취하고 색에 취해 계신 것 같긴 합니다만."
"흘려들으면 내게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 같군. 농담이라고 한 말 이었으면 성공이야. 생각보다 재미 있었어."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말과는 다르게 싸늘한 눈빛이 오갔다. 한참을 노려보던 스란두일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미끄러진 손가락이 와인잔으로 향했다. 벌컥벌컥 소리내어 들이키는 것 치곤 우아함이 흘러나왔다. 신다르답게 곧고 장대한 기골. 제 아비를 닮아 은색이 섞여 빛나는 금발. 뚜렷한 이목구비와 짙은 바다를 담고 일렁이는 눈동자. 언뜻 지나다 마주치면 꼭 한번이라도 돌아볼 정도의 미남이었으니 그런 고귀함을 품고 있는 것도 어쩜 당연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는 그가 자신의 노예가 아닌 이상 쓸모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입만 열면 간교한 혀를 놀려 남의 속을 긁어놓고 조롱하기 일쑤였으니 안나타르로선 아쉬움이 더해지는 일이 되었다. 일루바타르는 정말 쓸모없는 것에 쓸모없는 축복을 내리셨구나. 저 외모와 분위기를 나누어 내 노예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면 자신의 모르도르는 조금 더 번성할 수 있었을텐데.. 아주 조금 씁쓸함을 느끼며 안나타르는 그저 침묵했다. 일개 손님일지언정 함부로 대하는 선의 간극을 조절해야 했다. 어쨌거나 그는 '이 곳'에 들른 손님이기 이전에 어둠 숲의 왕자였으니까.

"그럼 잠시 쉬고 계십시오. 아이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알아서 하도록 해."

잔에 와인병을 기울여 술을 따라낸 스란두일을 뒤로한 채, 안나타르는 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머릿속으론 새로 온 아이들 중 흑발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보며 굳게 닫힌 문에 손을 대고 밀어제치려고 할 무렵.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어떤가?"
"..무엇을 말입니까?"
"무엇일까...?"
"예하?"

돌아선 안나타르의 코앞에 어느샌가 스란두일이 다가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의도치않게 좁은 틈에 갖혀버린 안나타르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올려 저지하는 제스쳐를 취해보아도 스란두일은 보지 못한 척 시치미를 떼며 시선을 그저 마주쳐왔다. 한걸음. 뒤로 반걸음. 한걸음. 뒤로 반걸음. 어느새 벽에 맞닿은 등에 오싹한 냉기가 스쳤다. 오늘은 정말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속으로 한숨을 내쉰 안나타르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스란두일이 조금 더 빨랐다. 어정쩡하게 들린 안나타르의 손목을 잡아 벽으로 밀친 채, 다른 손으로 단단히 매어져 있는 그의 허리띠를 잡아당겨 풀어냈다.

"어떤가. 내게 하룻밤 웃음을 팔아보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만 예하,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항간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더군. 모르도르의 꽃 안나타르는 귀하신 분께만 그 다리를 벌린다고 말이야."
"근거없는 소문 일 뿐 입니다."

대체 어떤 개새끼가 그런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건지 발견하기만 하면 가운뎃다리를 부러뜨려주겠노라고 생각하며 안나타르는 잡혀있는 손목을 슬쩍 비틀었다. 꽉 잡고있는 스란두일이 좀체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아 오크를 불러 망신을 줄까 생각하던 안나타르의 몸에 스란두일의 손가락이 닿아 점점 위를 향해 올라왔다. 예하. 장난은 그만하십시오. 점점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전달되었음에도 스란두일은 움직이는 손가락이나 꽉 잡은 손목의 힘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릇없는 그의 손가락은 어금니를 꽉 깨물어 미세하게 떨리는 안나타르의 얼굴까지 닿고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보드라운 볼을 만지작거리며 움직이다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위협당한 긴장에 굳은 안나타르의 턱끝에 가볍게 입맞춘 스란두일이 눈을 치켜뜨고 시선을 맞췄다. 내려다보는 붉은 색의 용암과 올려다보는 푸른색의 바다가 맞부딧히며 섞였다.

"황금숲의 요정은 모르는 것이 없더군."

비틀린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동시에 안나타르의 입가도 얇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런.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권력을 가진 족속들은 늘 이래왔다. 몇 천년 동안 서로 위엄있는 척 헛기침을 하며 뒤로는 은밀한 취미를 지닌 이들끼리 음험한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모르도르의 꽃 안나타르.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 저 이름의 주인은 그저 호색한 취미를 가진 노예상인이라 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온갖 정보의 근원. 어둠속의 거대한 힘을 움직이는 지배자. 필요할때는 스스로 옷을 벗어던지고 상대를 농락해 피 한방울마저 뽑아내는 검은 꽃. 암암리에 퍼진 소문에 일부러 권력자들이 찾아와 정보나 그에 상응하는것을 내밀며 그를 욕보일 기회를 갖길 원했다. 일일히 받아주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케이스가 없진 않았다. 고작 하룻밤 몸을 굴려 받을수 있는 대가 이상을 받아낼 수 있을 때, 그 때 뿐이었다. 이곳은 모르도르. 환락과 쾌락이 가득한 도시. 그 안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상 적법한 대가를 치룬다면 제 몸뚱아리 또한 거래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안나타르는 눈앞에 웃고있는 먹잇감을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먹어도 되는 달콤한 먹이인가, 아니라면 썩어 버릴 쓰레기인가. 그러고보면 높으신 분들이 오신지 꽤 되었다. 발라들의 입을 통해 이녀석의 귀로 들어갔을 테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치기어린 유희의 상대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인가. 가늠하는 안나타르에게 스란두일은 그저 황홀한 웃음을 지으며 세게 잡았던 손목을 놓고 슬쩍 쓸어내렸다. 그렇게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스스로의 몸매에 자신이 없는건가? 비웃음 섞인 시선을 앞에 두고 잠시 멈칫한 안나타르는 곧 고민을 끝마쳤다는 듯, 아까와는 다른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자피 순순히 가지 않을 녀석이다. 지위가 있으니 제대로 막을 방도도 없고. 어둠 숲에는 보석이 유명하다고 했었나. 정보가 아니면 재물을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흥미를 돋궜다. 가끔은 이런 기분전환도 나쁘진 않을것 같다고 생각하며 안나타르는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들어 스란두일의 허리를 감아 자신에게 당겼다. 갑자기 180도 바뀐 분위기에 스란두일이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금세 안나타르의 허리를 감아 자신의 몸에 단단히 붙이고 입술을 내리 누르려 고개를 올렸다.

"무엇을."

막 겹치려던 입술이 멈췄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제게."

새까만 꽃의 봉우리가 열리듯 붉은 입술이 낼름거렸다. 꽤나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스란두일 역시 입술을 열였다.

"내가 만족한다면 오늘 매상의 세 배쯤 어떠하냐."
"저를 가지시기에 턱없이 부족한 대가가 아닙니까."
"그대가 그리도 비싼가?"
"부족합니다. 저는 그 정도 싸구려가 아닙니다. 예하께서 가지고 계신 것 중 가장 크고 귀한것을 주십시오."
"무엇을 주면 좋을까. 그래, 만도스의 전당을 구경해보는건 어떻겠느냐."
"고작 예하의 것으로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대가 내것을 받아낼 수 있을까 걱정인데 그대는 나를 걱정하는군.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 할 것 같은데 어떤가?"

 

나른한 눈동자에 힘이 담겼다. 잡아먹을 듯, 물 밀듯 몰아치는 파도에 뜨거운 불길은 숨죽이며 자신의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당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날개를 펴 저것을 말려버리리라. 웃으며 혀 끝을 떠난 단어가 허공을 가로지르자마자 겹쳐진 입술에선 떠나지 못한 신음소리가 맴돌았다. 파고든 손길과 거친 숨소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옷가지가 밤의 시작을 알렸다.  

 

 

 

>>노예상인 안나와 고객 스란이요!!!! ㅋㅋㅋ 스란이 맘에드는 상품이 없었든 안나가 그날 심심했었든 뭔가 둘의 야릇한 분위기가 보고싶어요...  라는 리퀘: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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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했다. 보이지 않는 앞에는 나의 주군이 무릎꿇은 채, 치욕을 견뎌내고 계셨다. 주군을 부르짖으며 달려나가려 했지만 날카로운 창과 날붙이들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엄있는 체 하며 앉아있는 발라들을 향해 나는 침을 뱉으며 소리높여 비웃었다. 만웨시여. 발라시여. 의혹의 눈과 어두운 마음으로 나의 주군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네들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고 총명한 분입니다. 주군의 뜻을 곡해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있는대로 잔인한 저주와 그를위한 간청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들의 훈련된 군사들은 나의 입을 막고 내 무릎을 꿇리고 손발을 묶어 구속했다. 몸부림치는대로 더러운 밧줄이 나의 몸을 옭아 매었다. 내게 들리지 않는 발라들의 회의가 오가고 그 모든것을 감내하고 있는 주군의 고개가 점차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마이 로드. 고개를 드세요. 당신은 한 올의 죄책감도 그릇된 점도 없습니다. 고개를. 고개를 드세요.. 채 입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울음이 재갈 안에서 맴돌았다. 

그 순간, 울부짖는 내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했는지 주군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안개속에서도 선연히 빛나는 초록의 눈동자. 그 속에 내가 새겨졌다. 눈물흘리던 나는 무릎꿇고 주군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온 몸 구석구석에 와 닿았다.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지워버리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수치를 잊지마라. 나는..』

갑자기 로드의 주변에 있던 엘프들이 로드를 일으켜 세웠다. 온몸을 지배하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눈앞이 다시 또렷해졌다. 나는 몸부림쳤다. 주군이시여.. 다음. 다음 말은..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 얼룩이 질 때까지 주군은 나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커다란 두개의 돌이 마치 제 의지를 가진 양 굉음을 내며 거대하게 열렸다. 그 칠흑의 어둠속으로 끌려 들어가던 주군이 잠시 멈칫하며 멈춰섰다. 나는 그 순간 발라들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불시에 일어나 주군에게로 달려갔다.
아무런 방어도구를 갖추지 않은 채 도망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군사들은 어렵지 않게 나를 막아섰다. 억지로 흔들고 풀어헤쳐 뱉어낸 재갈을 떨쳐버리고 나는 소리질렀다.

"절대! 절대 주군을 잊지 않겠습니다! 발라의 앞에서! 실마릴의 앞에서 맹세합니다!"

다시 묶인 재갈이 더욱 단단한 것으로 바뀌었다. 바닥으로 밀쳐진 나를 둥글게 막아선 채 군사들은 내게 날붙이들을 겨눴다. 목 바로 아래에 들어온 선연한 칼날의 느낌에 온몸이 부르르떨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위협당해서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둘러싼 군사들의 다리 사이로 보인 잠깐 뒤돌던 주군의 마지막. 아니, 그저 잠시 돌아섰던 얼굴엔, 내게 보내주신 미소가. 대답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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