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레오로. 무제.

톨킨버스 2013. 12. 12. 14:59

로스로리엔의 로드 켈레보른은 엘웨의 동생인 엘모의 손자로, 갈라드리엘과 결혼하여 딸 켈레브리안을 두었다. 갈라드리엘이 서녘으로 떠난 후, 켈레보른과 그를 따르는 엘프들은 로스로리엔을 떠나 머크우드라고 불렸던 숲 남부에 동(東) 로리엔을 건설하였다. @Arda_wikib_kr

 

 

"의외로군요."
"어떤것이 말인가? 차를 내리는 것이?"

시종도 없이 손수 거름망을 들어올리는 이의 얼굴엔 여느때처럼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언제나 금색의 찬란함을 끌어안고 빛나던 은색의 머리카락은 본래의 투명한 색으로 돌아와 어깨위에 보기좋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평온함은 좀체 변하는 법이 없었다. 스란두일은 말없이 그가 건넨 찻잔을 받았다. 오렌지향이 감도는 달콤한 향내가 코끝을 간질거렸다.

"이래뵈도 꽤 세심한 취미라네. 어떤가 자네도 이 참에 배워보는것이."
"사양하죠. 제 집사가 내리는 것도 꽤 먹을만 합니다."
"아쉽군."

반대편 의자에 앉아 조용히 음미하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묻지 않는 이의 모습에 스란두일은 되려 짜증이 났다. 

"왜 웃으십니까?"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참고 있는 것이 자네답지 않아서."
"질문은 이미 던졌죠. 의외인 점이 있다고."
"그래서 되물었잖나. 어떤 것이 그리도 의외였냐고?"
"이젠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도 불구하고 켈레보른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침착하게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곧게 등을 편 채 스란두일을 바라보았다. 기대를 벗어난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너무나도 간결했다.

"아직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네."
"그래서 의외라고 한겁니다. 어째서 이곳에 남으셨습니까?"
"그런 자네는?"
"...."

허를 찔린 스란두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몇 번이고 말을 골라내던 혀끝은 결국 답을 찾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질문은 제가 먼저 드렸습니다만."
"글쎄, 왜일까."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담은 시선이 그를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동등하게 눈높이를 마주한 채 담소를 나눌만한 이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기에 스란두일은 새삼 이 자리가 생경하고도 어색했다. 하지만 눈앞에 자리한 이는 그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그저 씩 웃어보였다. 

"정든 곳을 잊지 못하는 늙은이의 고집이라고 해두지."
"그렇다고 제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알고 있었나?"
"임라드리스의 현자라 불리우는 이처럼 예지의 능력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저도 몇 천년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모르는게 더 우습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굉장히 평온하십니다?"
"평온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공께서는 지금 그 오로페르의 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신겁니다."
"그렇다고 그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뭐 이야기 하는 정도야 괜찮지 않겠나?"
"......"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스란두일의 표정을 잠시 지켜보던 켈레보른은 다시금 손을 뻗어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찻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다시 조용해진 방안에 홀짝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실은 내가 먼저 차였어."
"....네?"
"그녀가 먼저 날 놓아줬다네."
"......"
"내게 묻더군. 자신과 함께 서쪽으로 가겠느냐고."
"매우 뻔한 질문이네요."
"물론 그랬지. 그녀의 손을 잡고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했었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내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았으니 함께 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어."
"그런데요?"
"그녀가 웃더군."

사랑에 빠진 달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켈레보른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모습은 천진한 어린아이와도 같았지만 그 모습은 이내 사라지고 덤덤한 모습만이 남았다.

"더이상 욕심부리면 안될 것 같다며 내 손을 놓았지. 사랑하는 나의 켈레보른. 이제 가세요. 자유롭게.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무슨 전해 내려오는 노래같습니다."
"앞으로 전해지게 되겠지. 황금 숲의 여주인이 남긴 마지막 노래라던지?"
"재미 없는데요."
"그대의 재미는 내 알 바 아니라네. 여전히 내게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이니."
"그렇게 사랑하던 분은 놀도르의 공주셨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나를 비난할 텐가?"
"네. 힘 닿는데까지요."
"그런 점은 정말이지 오로페르와 많이 닮았군."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자네였다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그러나 켈레보른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설탕을 조금 더 넣고 찻잔속을 휘저었을 뿐 이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처럼 그는 우아하게 혼자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 평화로워보이는 모습에 작은 새 한마리가 탁자 위로 날아와 앉았다. 

"솔직히 눈치채지 못할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건 나는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을 품에 안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왔네. 그 뿐이야."
".... 정작 아버지에게 제대로 이야기 한 적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자네는 내가 오로페르에게 사랑이라도 고백하길 바랬나?"

내밀어진 손 위에 올라선 작은 새는 부리로 손가락을 쪼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켈레보른이 재미없다는 듯, 금세 포르르 날아가버렸다. 아쉬운 듯, 움켜쥐어보아도 남은것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새가 날아가버린 곳으로 향했다.

"지나가 버린 기회가 돌아오는 법은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셨습니다."
"가끔은 가슴 속에 묻은 케케묵은 감정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네. 이유는 그것 뿐이야."
"....."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기억이 자네에게도 있겠지. 이만하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나?"

숲의 레이디는 항상 숨기고 싶은 모든 것을 비추어냈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면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짙고 단단한 눈동자는 마치 호수와 같이 고요했다.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던 스란두일이 먼저 눈을 감았다. 어쩐지 그 올곧은 시선 끝에 닿은 이가 누구인지 보여버릴 것 같아서.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궁금한 것을 물을 시간은 충분했지만 나와 차 한잔 같이 할 여유는 없었나보군."

작은 핀잔에도 스란두일은 자리를 털고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식은 찻잔이 그대로 어여쁘게 놓여 있었다. 성큼성큼 문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배웅하는 이에겐 인사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이별을 하던 두 엘프의 사이의 고요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저 추억하는 것 만으로 만족하십니까?"

문득 제자리에 우뚝 선 스란두일이 물었다. 의자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던 켈레보른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물론."
"힘드실겁니다."
"곁에 없는 이를 그리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지.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선택한 길인걸."
"......"
"조심히 가게. 에린 라스갈렌의 왕. 오로페르의 아들 스란두일. 그대의 앞길에 평안이 있기를."
"나마리에. 언제나 별빛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단단하고 규칙적인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방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비로소 온 몸에서 힘을 뺀 켈레보른은 가만히 눈을 감고 기억속에 자리한 이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려진 이의 모습에 그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아야 희미해질 터인데 앞으로 칠백년 정도는 문제 없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켈레보른은 문득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저귀던 작은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자신을 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멀리 가버리기 전에 그리던 이와 함께 차 한잔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포트를 들어올렸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석양이 아름다운 여름 날이었다.

 

 

 

 

 

 

 카르님.....사랑합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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