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엘. 별.

톨킨버스 2013. 12. 26. 02:54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느냐?"

제법 가까이 들린 목소리에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들켜서는 안될 모습을 보인 것 처럼 무언가 황급히 뒤로 숨기는 모습에 길 갈라드는 머쓱하게 웃었다. 방해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단다. 다정하게 이야기 해 보지만 우물쭈물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혹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냐?"
"...."
"산책을 나왔다가 불이 켜져 있길래 들른 것 뿐인데 괜히 내가 너를 불편하게 했구나. 이만 가볼테니 일찍 자거라."

이제 겨우 며칠이었다. 이리 훌쩍 자라났다고는 해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친해지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곁눈질로 잠든 엘로스의 모습을 확인한 길 갈라드는 설핏 웃어보이며 엘론드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잠이 들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온 목적의 반은 이룬 셈이었다. 그대로 어둠의 장막에 몸을 숨기려는 찰나, 작은 목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딱히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로 감추었던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우물쭈물하며 눈을 맞추는 아이가 속삭였다. 그저 놀라 감추었을 뿐 입니다. 자연스레 향한 시선에는 기묘한 것이 들려 있었다. 두개의 동그란 유리알을 붙여놓은 듯한 얇은 조각이었다. 천천히 내려앉아 시선을 맞춘 길 갈라드는 예의 물건을 주시하며 엘론드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실은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얼결에 건네받은 작은 조각은 길쭉한 네모진 모양이었다. 두 개의 유리알이 둥그렇게 붙은 곳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양새에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처음보는 물건이구나."
"하늘을 보는데 쓰인다고 합니다."
"하늘?"
"정확하는 그 속에 담긴 것 이지만요."
"어디서 났는지 물어봐도 괜찮겠느냐?"
"아저씨....마에드로스가.. 만들어주셨습니다."
"...마에드로스가?"
"네. 장난감이라시며.."

자연스럽게 손 안에서 빠져나간 조각은 엘론드의 작은 손가락 안에서 움직였다. 몇 번 유리알을 돌리고 만지작거리다 밤하늘을 향해 높이 쳐든다. 시선이 그 손길을 따라 올라갔다. 둥근 유리알이 묘하게 겹치며 밤하늘의 빛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흐릿하게나마 눈 앞에 빛이 어렸다. 달이었다.

"달..?"
"아마도요?"

덤덤하게 길 갈라드의 눈가에 조각을 대어준 엘론드가 그것을 건네고는 슬며시 웃었다. 아이가 자랑이라도 하는 모습에 길 갈라드는 흐릿하게 보이는 모양새를 따라 몇 번이고 좌 우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고 은은하게 빛을 비추는 달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높은 하늘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구나. 밝은 낮에는 꽤나 먼 곳도 보일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찾는것이 있었더냐."
"가장 밝고 아름답다는 희망의 별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대 얻어맞은 듯한 대답에 길 갈라드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평온할 정도로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청회색의 눈동자를 쳐다보던 길 갈라드가 몇 번이고 입 속으로 단어를 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동정? 모른척? 어떠한 것도 당장 합당한 답이 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더 이상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엘론드는 그의 손 안에서 조각을 건네받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쌌다. 오늘도 보긴 글렀지만요. 아이같이 웃으며 모른척 졸립다는 말을 뱉고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앞에 둔 길 갈라드의 표정은 한없이 슬퍼 보이다가 싸늘해졌지만 다시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다음에는 꼭 찾았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자는 편이 좋겠다."

의례적인 인사. 다시금 새카만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길갈라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의 잠옷을 여며주었다. 작은 함에 조각을 넣어두고 만지작거리는 손끝과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어쩐지 숨이 막혀왔다. 스스로가 이렇게 무신경하고 배려심 없는 성격이었던가. 감싸주지 못할 아픔을 섣불리 동정하거나 관심가져서는 안된단다. 어릴 적 흘려 들었던 키르단의 목소리가 아이의 시선과 함께 겹쳐 자신을 책망하는듯 보였. 그러나 오래 지체하다간 아이가 이상하게 생각 할 지도 몰랐다. 스스로 굽혔던 자세를 곧게 세운 채, 길 갈라드는 저녁 인사와 함께 황급히 방을 나섰다. 뚫어지게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지고 어룽대던 불이 꺼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행히 아직 잠들지 않았구나."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작은 초를 들고 다가온 길 갈라드가 누운 채로 눈을 뜨고 있던 엘론드의 곁에 조심히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단단한 나무로 짜여진 함은 엘론드가 몸을 일으켰음에도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손 끝을 대어보려다 고개를 들어올린 아이의 시선에 빙긋 웃어보이며 눈짓을 해보였다. 단단하게 잠긴 걸쇠를 열고 뚜껑을 넘기자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찾는 별은 아니지만.. 이 별도 꽤나 괜찮아서 말이다. 괜찮다면 네게 주고싶구나. 혹 뭔지 알겠느냐?"
"사탕...아닙니까?"
"정확히는 별사탕이지."

침대 위에 슬쩍 기대앉은 길 갈라드는 손가락으로 작은 별사탕 하나를 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 차마 받아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길 갈라드는 짖궂게도 아이의 입술에 닿도록 톡톡 두드렸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무어라 볼멘 소리를 내어놓으려 열린 입 사이로 밀어넣어진 사탕이 애매하게 걸렸다. 빙그레 웃으며 먹어보라는 말에 몇 번을 고민하던 아이는 조심스레 사탕을 물었다.

"맛있느냐?"
"....저는 단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 몰랐구나."
"그치만.. 맛있네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길 갈라드가 싱긋 웃어보이곤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움직임에 상자 안의 별사탕이 와르르 쏟아져버렸다. 놀란 두 엘프가 부리나케 이불 위를 훔쳤다. 많이 쏟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있는대로 줍다보니 서로의 양 손에 별들이 가득했다.

"쏟아질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움직이시니 그렇지요."
"어쩐지 날 책망하는 이야기 같은걸?"
"...죄송합니다."
"농담이다 농담. 어쨌거나 미안하구나. 모처럼 선물을 하고도 쏟아버렸으니."
"바닥에 쏟아진 것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럴까?"

상자 속에 쏟아진 사탕을 도로 넣은 채,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에게 그것을 건넸다. 묵직하게 닿아오는 상자를 받아든 엘론드는 조용히 길 갈라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더 좋은걸 주고 싶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주마."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처음보다 훨씬 다정한 시선으로 바뀌었음을 깨달은 길 갈라드는 다시 엘론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로 늦었으니 이만 자거라. 아까와 같은 인사로 끝을 맺은 후, 이번에는 아이가 누울때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다. 작게 너울대는 초를 꺼트린 뒤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길 갈라드는 문가로 다가가기 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희망의 별은 새벽녘이나 태양이 저물 즈음에 볼 수 있을게다.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양과 함께 반짝이기에 쉬이 볼 수 없는 그 별은 높이 빛나는 희망의 별, 길 에스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더구나."

혹, 찾는 것이 그 별일까 싶어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수줍음이 묻어났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좋은 꿈을 꾸라는 인사가 방 안을 울렸다. 복도를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사방이 고요해 질 무렵, 아이는 미처 넣지 못해 손에 쥐어둔 별사탕 한 개를 슬그머니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달콤함에 미소지은 아이는 머리 위에 놓아 둔 상자와 저 멀리 떨어진 창문 밖의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리우면서도 다정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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