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엘. 약점.

톨킨버스 2013. 12. 29. 00:30

 

"피곤해 보이십니다."

막 의자에 기대어 눈감은 주군의 곁에 새로 우린 차를 내려놓던 엘론드가 빙긋 웃었다. 오늘 회의의 주 목적은 변방의 수비강화에 대한 군사회의였을 테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음을 엘론드는 알고 있었다. 한시간 남짓 하는 시간동안 충심과 대의를 등에 업은 대신들의 잔소리는 주군의 혼을 쏙 빼놓기에 적절했고 그 여파는 꽤나 오래갈 것이 분명했기에 엘론드는 찻잔에 설탕을 두어스푼 정도 더 집어넣었다.

"알면서도 들여보냈지?"
"들켰습니까?"
"미리 눈치챘으면 언질이라도 주지않고."
"제게는 그들을 막을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하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주군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엘론드가 천천히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신들이 문을 나서자마자 들고 있던 서류를 몽땅 던져버린 주군 덕분에 할일이 아주 많았다. 다행히 많이 섞이지는 않아 정리하기엔 수월하겠다 생각하며 엘론드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잔소리의 늪에 빠져있는 주군께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하긴 저도 걱정입니다."
"너까지 잔소리를 보태려는 것이냐."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요. 가신들이 저렇게 성토해보았자 어자피 대왕께서는 결혼 못하실 것 아닙니까. 저래 보았자 헛수고일텐데.. 서로 끝 없는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대왕을 엘론드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지만 이런 이야기를 정면으로 하기엔 좀 부끄러운데...

"신하된 도리로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그... 안...서시는것 아니었습니까?"
"......응?"
"저는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응?"

충격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왕을 안쓰러히 바라보며 엘론드는 다 정리된 서류들을 책상에 내려 간추렸다. 패닉에 빠져있는 주군을 어찌 처리할 방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 가지가 잘나셨으니 한가지 정도 약점이 있어도 좋겠지요."
"......"
"긍정적인 부분을 찾자면 적이 미인계를 써도 넘어가지 않는다는거잖아요?"
"이봐 엘론드."
"예 대왕."
"그러니까 내가 고자라고?"
"....굳이 부인하고 싶으신거라면..."

삽시간에 주변은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길 갈라드의 눈빛을 아련히 피하면서 엘론드는 슬금슬금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시구나. 아니셨구나. 그랬구나. 들릴락말락하게 문장들을 주억거리며 애써 미소짓는 표정에는 가식이 가득했다. 이래서 머리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랬는데... 주름이 생기려는 미간을 억지로 편 채, 길 갈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춤거리는 엘론드에게 다가섰다.

"엘론드야."
"...네?"
"내가 고자라고?"
"...아니라셨으니..아니겠지요?"
"그걸 어찌 믿느냐?"
"예?"
"내가 고자가 아니라는걸 어찌 믿어."
"그럼 진짜..."

코 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뒷걸음질치는 엘론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라는건지 아니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처음의 곤혹스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꽤나 차가운 눈빛으로 웃고있는 얼굴은 재밌겠단 표정으로 시시각각 바뀌었다. 움찔. 더 이상 물러날 곳 없이 굳어버린 몸뚱이가 경련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입술이 엘론드의 귓가로 향했다.

"진짜인지...아닌지.. 몸소 알아볼테냐?"

그 순간 허벅지를 타고 튜닉 사이로 손이 비집고 올라왔다. 어느새 감겨버린 눈이 번쩍 뜨였다. 엉겁결에 놓친 서류들이 바닥으로 흩어지는데도 길 갈라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엘론드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쪽의 옷까지는 건드리지 않았어도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무어라 한소리 하려는 순간, 귓가에 묘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이렇게 다 자랏건만 아직도 어린아이같구나."

귓가에 들리는 웃음소리가 몸을 울리는 것 같았다. 점점 이상해지는 기분에 손을 들어 밀쳐보았지만 가만히 있을 길 갈라드가 아니었다. 한손으로는 뒷 목을, 한손으로는 허리를 감싸안으며 몸을 완전히 밀착시킨 후 대왕은 느릿하게 뾰족한 귀 끝을 우물거렸다.

"히익..!"
"이런 건 익숙하지 않느냐?"

허리에 걸친 손이 점점 밑으로 향하고 부드러운 둔덕을 지나 강하게 끌어당기면 자극에 서툰 몸이 움찔하고 놀랐다. 어느새 목선까지 내려온 입술의 따스함에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것을 느끼며 엘론드는 그저 힘없이 올려진 손으로 미약하게 그를 밀쳐내는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대왕과 확연히 다른 모습에 두려움이 솟아났다. 아 놀리지 말걸. 장난으로라도 하지 말걸. 질끈 감긴 눈꺼플이 불안하게 파들거렸다. 한참동안이나 어린 피부를 유린하던 입술이 풋,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순식간에 엘론드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놀란 엘론드가 눈을 크게 뜨고 주군을 바라보았다.

"큽..크큽크하하하하하하"
"........"
"흡.푸흡..흡큭큭..엘론드야.크흡흡."

자신의 앞에서 배를 쥐고 웃는 대왕을 쳐다보다 몸의 이상을 깨닫고 엘론드는 얼굴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우물쭈물하다가 옆으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곤 쏜살같이 방 안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길 갈라드는 아예 주저 앉아 웃으며 소리쳤다.

"너는 그래도 푸흡 고자는 아니로구나 크하핫."

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가며 열오른 얼굴로 싸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엘론드는 이를 갈았다. 네, 잘 알았습니다 아주. 본인이 고자가 아니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알려 주실 필요는 없으셨는데. 머릿속으로 길 갈라드가 유독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가신들의 리스트를 뽑으며 엘론드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고자가 아니시니 결혼은 하셔야겠죠. 전하의 가신인 제가 적극 도와야겠습니다. 차갑게 미소짓는것도 잠시, 다시 얼굴에 가라앉지 않은 열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엘론드는 발을 재게 놀렸다. 화장실은 왜 이리도 먼 거야. 투덜거리는 것도 한 순간, 이를 악물고 달려가는 발소리만이 복도에 크게 울려퍼졌다.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톨킨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아마에. 무제.  (0) 2014.01.12
스란엘. 겨울비.  (0) 2014.01.09
길엘. 별.  (2) 2013.12.26
켈레오로. 무제.  (2) 2013.12.12
핀마에. 온기.  (2) 2013.11.21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