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글로르. 무제.

톨킨버스 2015. 1. 12. 22:43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마글로르.'

마에드로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내내 울렸다. 곤히 자고 있는 쌍둥이를 바라보며 마글로르는 착잡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들을 버려야 한다고 나직이 내뱉는 형님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항의해 보았지만 사실은 그 역시 그래야하지 않을까 예감하고 있었다. 물자는 점점 부족해졌고 부상자는 늘어갔다. 상황은 긍정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단지 알면서도 순진하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헤어져야 한단다. 에아렌딜과 엘윙의 아이들아.

하염없이 아이들의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길에 조금씩 상냥하게 반응해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슬프고도 우스웠다. 언제 이렇게 마음속에 들어와 버린걸까. 이렇게 가까워서는 안 될 사이었는데. 멍하니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흐트러진 이불을 추켜 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 손길에 닿았는지 엘로스의 눈이 반짝 하고 떠졌다.

"왜 주무시지 않으세요."
"이제 자야지."

깜빡이며 바라보는 눈동자엔 의문이 가득 담겼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행동들과 표정을 보이는 마글로르가 이질적이어서였을까. 늘 하던대로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마글로르는 부러 아이의 코끝까지 이불을 추켜올렸고 성마른 손으로 가슴께를 두어번 두드려 주었다.

"밤이 깊었다. 어서 눈을 붙이렴."
"아저씨도요."
"그래."

대답을 하고나서도 떠진 눈을 보는것이 어쩐지 괴로웠다. 보호해달라고 버리지 말아달라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는 듯 했다. 가만히 인내하며 기다리던 마글로르는 참다못해 아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 눈을 가려버리며 자라고 이야기를 할 생각으로. 그러나 닿은것은 가냘프게 떨리는 눈꺼플이 아닌 조막만한 손이었다.
아이는 마글로르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마글로르는 당연히 끌려가지 않았고 반대로 엘로스의 몸이 일어나 앉았다. 어자피 그걸 노렸다는 듯 아이는 일으켜진 몸을 바로하고 마글로르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마에 조금은 까칠한 입술이 꾸욱 눌렸다 떨어졌다. 눈 앞의 아이는 수줍은 듯 쑥쓰러이 웃었다.

"어릴때 아버지가 이렇게 해주시면 좋은 꿈을 꿨어요."
"..그랬구나."
"악몽을 꿀 것 같은 표정이라서.."
"..그래."
"죄송해요.. 멋대로."

혼자 시무룩해진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글로르는 실없이 웃었다.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린 머리카락이 손 끝에서 흩어졌다. 금새 또 밝아진 아이를 다시 한번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진짜로 자렴."

샐쭉해진 눈매가 사랑스러웠다. 금새 꾸욱 감긴 눈에 내려앉은 새카만 속눈썹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마글로르는 곤히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듣고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상냥한 아이. 자신을 걱정하며 도닥여주는 착한 마음씨. 감상에 젖어있던 머리가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착하고 귀여워도 우리는 헤어져야 해. 나는 또다시 아이들을 버려야 해.

"...악몽을 꾸는게 아니야. 현실이 악몽보다 더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지."

쓰게 웃어보인 시선이 이제는 불이 꺼진 천막 안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숨소리는 희미하고 고르게 퍼져 잔잔한 파도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이제 저걸 듣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군.

마글로르는 아예 천막 입구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스산한 바람이 다시 소리를 내며 흩어졌고 그 틈새로 여전히 들려오는 숨소리에 어쩐지 울컥했다. 아이들은 이곳에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 사이 우리에게는 놀랍게도 우정이 생겼다. 하지만 또다시 헤어진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일테지.
아이들이나 타인이 보기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글로르는 혼자서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너희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어.

뒤늦게 내뱉는 졸렬한 변명이었다.






+ 엘로스마글로르였는데....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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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집이라 불리우는 엘론드의 자택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고 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어떠한 손님이 방문하고 머무르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것은 임라드리스의 불문율. 그저 그들은 마음과 몸이 고단한 손님일 뿐, 스스로가 원한다면 꽤나 오랜시간동안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임라드리스의 로드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몸과 마음의 안정.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을 얻지 못한 이는 쉬이 임라드리스의 울타리를 마음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여름의 태양이 따사로이 나뭇잎 위에 쏟아질 무렾, 동편 서재에는 한 손님이 자리를 잡았다. 새까만 머리칼은 흑단과도 같았지만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고, 항상 기괴한 모양의 짐을 등에 멘 채 다니는 그는 한번도 스스로를 소개한 적이 없었기에 엘프들은 그를 일컬어 짐을 진 자 라고 불렀다. 초췌한 모습으로 다 떨어진 옷을 주워입으며 한낮에 잠시 볕을 쬐러 나오는 것 외에 그가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 없는 엘프들은 조금씩 커져가는 호기심을 억누르곤 신중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매서운 눈매. 한때 검을 잡은 흔적이 있는 손.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는 등에 짊어진 짐.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어린 엘프들은 묘한 분위기가 있다며 소근거렸고 연륜이 넘치는 이들은 그저 기억속에 그려진 과거의 누군가를 설핏 떠올리며 말을 아꼈다.

엘론드는 먼 길을 돌아 이곳을 찾아온 이들을 늘 환영했다. 해야할 일들이 있었고 바쁜 시간들이었지만 그에게 임라드리스를 찾아온 이들이 주는 의미는 꽤나 각별해 보였다. 틈틈히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베풀었다. 그 기간은 길기도 했지만 짧기도 했다. 더러는 몇 개월 씩 걸리는 일도 있었지만 머무르는 이들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 시간을 기다렸다. 영겁을 사는 엘프들이 대부분인 이 곳에서 임라드리스를 찾아올 정도로 지친 이들 이었다면 기다림의 시간이 결코 지루한 법은 없었고 생각보다 임라드리스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남들과 다르게 방 안에서 늘 식사를 하고 타인과 어울리지 않았던 짐을 진 자는 시중을 들러 방문한 엘프에게 차례가 당도했음을 전해들었다. 누군가가 들어와도 꿈쩍도 안하던 몸이 갑작스레 일어나 말을 전한 그를 바라보았다. 결코 작지 않은 덩치의 몸은 상당히 마른 상태였지만 상대를 위압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끄러미 작은 아이를 바라보던 짐을 진 자는 고맙다며 한마디 말을 건네곤 평소처럼 다시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놀랄 정도로 고운 미성. 화들짝 붉어진 뺨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방문을 닫은 어린 엘프는 자신의 동기들에게 달려가 재잘재잘 새로운 정보를 떠들어댔다. 우연이었을지 필연이었을지는 몰랐으나 그 밤, 짐을 진 자의 창 밖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유독 달콤하고도 아름다운 음색을 뽐내고 있었다.

해가 높다랗게 솟아 대지를 비추어내고 있을 시간에 엘론드는 오후에 훝어보아야 할 서류들을 분류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었다. 천천히 종이를 넘겨 미리 적어둔 정보를 확인한 엘론드의 미간에 가벼운 주름이 아로새겨졌다. 등에 짐을 진 자. 간결하게 씌인 필체는 꾹꾹 눌려 단단해 보였지만 속에 담긴 뜻은 꽤나 무섭고도 슬픈 것이었다. 눈을 감아 사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임라드리스의 로드는 등을 꼿꼿하게 편 채, 방문을 나섰다.

가볍게 두드린 문의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매번 이렇습니다. 작게 속삭이며 문을 밀치는 린디르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엘론드는 곧 침대위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아이를 내보낸 뒤 임라드리스의 로드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좋은 낮입니다.
새들이 지져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등돌린 이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곁으로 다가가 앞으로 향하려는 순간 부스스 고개를 돌린 이의 모습에 엘론드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머릿속은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는 마치 바닥에 박혀버린 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짐을 진 자는 눈꼬리를 휘며 그에게 웃어보였다. 내게서, 우리에게서 도망쳐라. 엘론드. 결코 잊혀지지 않을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심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끼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론드의 앞에 다가섰고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의 몸이 숙여져 예를 갖추었다.

"우리의 만남이 별과 같이 빛납니다. 치유와 안식의 저택 임라드리스의 로드 엘론드. 그대와 이렇게 마주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나는 길을 지나는 떠돌이. 세월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름 없는 미천한 자로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지요. 그대의 저택에서는 나를 짐을 진 자라고 부르기도 한다더군요. 그 또한 나를 표현하기에 나쁘지 않은 이름입니다. 수백가지의 이름 중 그대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나를 부르세요. 그대의 입술 끝에서 소리가 되어 나올 때…"
"그만두세요. 마글로르."

힘이 들어간 미간은 도통 풀릴 줄을 몰랐다. 단호하게 내뱉은 엘론드의 얼굴을 물끄럼히 바라보던 마글로르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 이름을 선택할 줄은 몰랐는데. 더듬더듬 이어지던 신다린을 멈춘 채 이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퀘냐를 듣는 순간 엘론드는 그동안 잊고 있던 시간들이 무색하리만치 되살아나는것을 느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 표정은 엘론드의 기억에 있는 이와 같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빛바랜 로브. 그 속에 단단히 만져지는 몸. 환영이 아닌 현실이란 것을 깨달은 손은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작게 숨을 멈춘 채, 엘론드의 품에 안겨 가만히 온기를 나누어 받는 몸뚱이는 그저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 이었다.

"오랫만에 만난 이와 해야하는 인사는 잊어버렸어."
"사실은 배우지도 않았던 것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나에게 있어서 도통 쓸모 없는 언어였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신다린을 가르쳐주지도 않았었다는 점이 이해가 될 순 없겠죠. 덕분에 다 커서 공부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논리정연하게 말 할 줄도 아는구나."
"어릴 적의 저를 기억하고 있는 이가 이제 아무도 없으니 말입니다만 저는 어릴때부터 꽤 똑똑했거든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 그 점은 딱히 부인하고 싶진 않아. 너와 엘로스가 영민했다는 건 형님과 내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며 툭툭 내 뱉던 말들은 형님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끊겨버렸다. 다시금 긴장한 등을 천천히 쓰다듬던 마글로르가 아릿하게 미소지었다. 아직도 내 눈에는 어린 아이인데.. 후회가 잔뜩 묻은 목소리가 우울하게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끄집어올려져 날뛰었다.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심장박동에 엘론드의 얼굴이 한껏 흐려졌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다. 자칫 호흡이 흐트러지면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절박함에 엘론드는 끌어안은 팔에 힘을주었다. 그러나 한번 흥분해버린 몸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가빠지는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글로르는 천천히 엘론드의 등을 쓰다듬었다. 툭. 툭. 툭. 툭. 일정하게 닿아오는 손의 무게에 거짓말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진정 할 수가 없었다.

울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곤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엘론드는 옴짝달싹 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준 채, 놓칠까봐 안달내는 어린아이처럼 마글로르를 움켜쥐었다. 소리내지 못한 채, 눈물만을 떨구어내는 그 모습을 도닥이며 마글로르는 아득히 먼 기억을 더듬어 떠올렸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이는 한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하물며 먼저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 적도 없었다. 그러했으니 이토록 강하게 자신을 끌어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마글로르였다. 이제와서 무슨 낯으로 찾아온거냐며 호통을 치고 박대를 당했어도 모든 것을 감내할 참이었는데.. 마치 어릴적의 그 아이는 어른이었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이가 아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글로르는 몇 번이고 엘론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한 번 쯤은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이전과 같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마글로르의 앞에서 엘론드는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한층 길어진 머리칼과 깊어진 눈매가 다시 가슴속에 새겨졌다. 보고싶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입술이 몇번이고 달싹였지만 끝내 목울대는 속엣말을 뱉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엘프는 그저 눈앞에 자리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꼬옥 잡은 두 손이 거두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금 곤란하게 웃어보인 마글로르는 천천히 자신의 손에서 엘론드의 손을 떼어냈다.

"못 본 새에 울보가 되어버렸어."
"누구 덕인데요. 잘 오셨습니다."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지만 전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죄."

툭 던져진 단어에 엘론드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말씀대로 그저 흘러간 시간일 뿐 입니다. 뒤늦은 변명이라도 대신 하는 것 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엘론드를 마글로르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너라면 그렇게 말을 할 줄 알았지. 하지만 내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해. 물론 그 사죄를 한다고 해서 내가 행한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테지만 말이야."
"마글로르."
"긴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내가 응당 해야할 일 중 하나였고 넬랴핀웨의 뜻이기도 했다."
"아저씨..께서.."
"물론 말로써 내뱉진 않았지. 형님의 성격을 알고 있잖니?"
"그렇지요."

씁쓸하게 웃어보이는 엘론드의 모습을 바라보던 마글로르는 곁에서 늘 등에 지고 다니던 괴이한 물건을 끌어왔다. 세월이 그대로 담긴 천들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집중하는 통에 엘론드의 시선이 마글로르의 손 끝에 닿았다.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깨끗한 천으로 감싸인 그것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크기였다. 눈에띄게 작고 가벼워진 덩어리 속에서 마글로르는 남은 것들을 걷어내 오랜 시간동안 등에 지고 다니던 것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작은 하프였다.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어릴 적 그것으로 자장가를 들려주셨죠."
"우리에게 살갑게 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너와 엘로스는 늘 노래를 들어야 잠을 잤었지."
"알고 계셨습니까?"
"꾹 다물어진 아이의 입술 속에 숨은 말들을 찾는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단다. 오히려 나의 동생들에 비하면 너희는 유순한 사슴과도 같았어."
"생각만큼 살갑게 대해 주시지 않았던 것은 아저씨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서로가 너무나도 어리고 철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적당한 표현이네요."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것이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가지가 남아 있었어."
"...."
"듣기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듣고 싶습니다."

투박하게 변해버린 손이 하프의 줄을 더듬어 음을 맞추었다. 퍽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처럼 보이는 하프에는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보였지만 보이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맑은 음색을 뽑아낼 줄 알았다. 어릴 적 그리도 커 보였던 하프가 이제는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것은 마글로르도 마찬가지였다.

"작아지셨습니다."
"네가 그만큼 큰 것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엘론드."

몇번 목을 가다듬던 이는 섬세한 손으로 줄을 뜯었다. 아련한 음률을 연주하는 마글로르의 모습은 남루하고 볼 품 없었지만 어딘가에 조각되어진 전설속의 영웅처럼 보였다. 기억하는 이들도 점차 사라져 다시는 듣지 못할 줄 알았던 도리아스의 옛 노래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조금 크게 떠졌던 엘론드의 눈은 금새 부드럽게 감겼다. 이제는 가물가물해 싯구조차 기록에 남지 않은 아주 옛날의 노래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가장 잔인하면서도 아릿한 추억. 천천히 읊조리는 음 만을 가물게 기억하고 있는 엘론드의 머릿속에 분명한 가사가 덧입혀졌다. 명확하고도 우아한 발음. 고운 미성으로 단호히 노래하는 마글로르의 노래가 방 밖으로까지 퍼지자 은은히 먼 곳에서 들려오던 엘프들의 노랫소리도 어느순간 뚝 끊겼고 듣는 이들 모두가 아련히 향수에 젖어 아름다웠던 도리아스와 저 멀리 서녘의 푸른 바다를 은밀하게 훔쳐보는 환희를 느꼈다. 길고 긴 노래가 끝날 때까지 방 안을 비롯한 임라드리스의 어느 곳에서도 그 음색을 방해할 만한 속삭임조차 들려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리 급하게 떠나시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과분한 대우를 받았으니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오랜 시간을 주제에 맞지 않게 편하게 보냈다."
"어디로 가십니까?"
"발길이 닿는대로 흘러가겠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말이다."
"..아쉽네요."
"징그럽다. 생각도 않던 말을 들으니 간지럽기만 하구나."

놀라울 정도로 살갑게 대하는 엘론드의 행동은 생경했지만 그리 싫지많은 않은지 마글로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평생 그림자에도 닿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먹으니 이리 쉽기만 했다. 그것은 물론 모든 일을 덮어둔 채, 자신을 손님으로서 예우하는 엘론드의 덕이기도 했다.

작은 흰색 하프는 이제 엘론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다시 지저분한 로브를 두른 마글로르는 언제 웃어보였냐는 듯, 다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그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곧게 뻗은 길목을 따라 걸어가던 마글로르는 한번 뒤를 돌아 엘론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여렸던 아이는 어느새 임라드리스의 로드라 불리울 정도로 강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었고 보듬어야 할 가족이 있었다. 다행이야. 형님. 아이는 이제 불행하지 않아. 마글로르는 설핏 미소를 입술에 띄운 채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여러 불길 중 가장 아프고도 뜨거운 불길 하나를 오늘 꺼트린 참 이었다.

 

치유의 집이라 불리우는 엘론드의 자택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고 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어떠한 손님이 방문하고 머무르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것은 임라드리스의 불문율. 자애로운 임라드리스의 로드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몸과 마음의 안정. 그것을 얻은 이는 언제라도 임라드리스를 떠날 수 있었고 그 발걸음을 지켜봐 주는것은 로드의 일이기도 했다. 그대 가는 발걸음이 언제나 평안하기를. 그대의 앞길에 언제나 별빛이 비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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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글로르. 밤.

톨킨버스 2013. 10. 20. 02:23

어미의 손길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추운 날씨를 따라 이동하는 군대 안에서 철저한 이방인 취급당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닿을 따스한 손길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나마 마글로르만이 바쁜 와중에 먼 눈으로 그들을 챙겼다. 마에드로스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모양새로 그들을 잊은 듯 했다. 순식간에 메말라버린 환경은 쌍둥이들을 체념하게 만들었고 적응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도리아스의 일원이 아닌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광야를 헤치는 떠돌이 일족이 되어버린 듯 보였다.

해가 저물 즈음.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마글로르는 자신의 막사로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손장난을 하다 들킨 모양으로 굳어버린 그들에게 모처럼 더운 물에 목욕도 하고 조금은 풍족한 저녁을 챙겨줄 수 있겠다며 유쾌하게 웃어보였지만 아이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법은 없었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조용함에 그는 크게 신경쓰는 내색 없이 먹을 것을 늘어놓고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작은 옷을 찾느라 등을 돌려 부산스레 몸을 움직였다. 그의 말대로 평소의 먹던 것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형태의 음식을 마주한 아이들의 입가에 그제서야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들의 표정이 없어진 것은 환경 덕분이었지 성격 탓이 아니라는 걸 마글로르는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떠들거나 서투르게 식기가 부딧히거나 하는 아이다운 행동은 없었지만 부드러워진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어린 쌍둥이가 맘 편하게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이미 찾은 옷들을 주물거리며 오랜시간 짐을 뒤적였다.

꽁꽁 싸매진 옷을 벗기고 나면 가느다랗고 통통한 몸 두개가 뽀얗게 피어났다. 광야의 먼지도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 어찌보면 당연했다.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마른 몸들은 내심 안쓰러웠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엉성하게 땋여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조금은 뜨거운 물을 끼얹으며 거칠고 투박한 손바닥이 이곳 저곳을 문지르면 줄줄 땟국물이 빠졌다. 그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목욕통 안에서 좀체 나오려 하지않던 아이들은 결국 손발이 쪼글쪼글해지고 발갛게 열이 오르고 나서야 마글로르 손에 번쩍 들려 밖으로 꺼내졌다.
열오른 양 뺨이 사과처럼 붉었다. 수건으로 채 닦지 못한 물기를 닦고 잠옷을 입혀 나란히 앉히면 그제서야 제법 처음의 생기 넘쳤던 그 모습이 보였다. 나란히 등 돌려 앉은 아이들의 작은 어깨를 보며 마글로르는 머리를 말렸고 그새 나른해진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얼기설기 움켜잡고 조심스럽게 발장난을 했다.

느슨하게 머리를 땋고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몸 위로 겉옷을 하나씩 덧입히며 마글로르는 잘 자라고 인사했다. 언젠가서부터 늘 그래왔듯 머리 위를 한번씩 쓰다듬고는 아이들이 잠자리로 들어가 모포를 덮는 것 까지 지켜보고 훅 입김을 불어 아른대는 촛불을 집어삼켰다. 겨우 반짝이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새까맣게 내려앉은 어둠이 사방을 채웠다. 막사가 비좁고 모자른 덕분에 아이들은 따로 머물 곳이 없었고 돌봐줄 만한 이도 없었기에 마글로르는 늘 자신의 막사로 아이들을 데려왔다. 자신 또한 모든 것이 서툴었지만 누군가를 위한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방이 고요해지면 다시 조심스레 부싯돌을 부딧혀 불을 피워올렸다. 아까보다는 조금 어두워진 불빛이 날름날름 혓바닥을 내밀며 사방을 밝혔다. 자연스럽게 향한 시선이 보이기라도 한 듯, 조금 짧게 덮인 모포의 틈새로 도톰한 발 두 쌍이 꼬물거리다 사라졌다. 내일이면 다시 자취를 감출 반짝임을 끈질기게 주시하던 마글로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괜시리 아이들의 모포를 추켜올려 주었다. 미세하게 달라진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역시 못 들은 척, 제 자리로 돌아왔다. 내일은 조금 더 넉넉한 크기의 모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아이들은 잠을 자고 어른은 일을 해야지. 저 멀리 국경에서 들어온 보고서를 펼치며 나무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신의 밤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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