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잠식된 몸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몇번이고 내리 찍은 단검에 솟구친 핏줄기는 핀데카노의 얼굴, 몸 할것 없이 모두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미끄러진 검을 고쳐잡는 손에 흔들림은 없었다. 퍽, 제대로 박혀들어간 칼날의 반동에 새된 신음을 흘리며 마에드로스가 축 늘어지자 핀곤은 치켜들던 검을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꽂아 둔 채, 너덜거리는 마에드로스의 손목을 눌러 잡았다. 사냥 중이다. 핀데카노. 튼실한 숫사슴이 이미 화살에 맞은 터라 고통스럽지 않게 목숨을 미리 끊어 주려는 것 뿐이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이고서야 움켜쥔 손에 힘을 실었다. 아슬아슬하게 소론도르의 등에서 흔들리면서도 한쪽 팔로 늘어진 마에드로스를 끌어안아 고정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전사의 손에서 무력하게 부러져 덜렁거리며 절벽 밑으로 떨어진 것은 숫사슴의 목뼈가 아닌 마에드로스의 손목뼈였다.

기절한 상태에서조차 쇼크가 몰려왔는지 이미 혼절한 마에드로스의 몸이 크게 튕겨졌다. 덕분에 중심을 잃고 무너진 핀곤이 주저앉으며 소론도르의 어깨죽지를 움켜쥐었다. 몇 번 크게 날개짓을 해 보았지만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론도르가 빠른 속도로 급하강 했고 핀곤은 그저 품에 가득 찬 마에드로스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모두가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마에드로스가 눈을 뜬 것은 한 달도 더 지난 시기였다.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 훈훈한 온기가 도는 공기.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절로 떠진 눈보다 입술이 먼저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매캐한 냄새가 아닌 고소한 장작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굳어있던 머릿속이 삐걱거리며 상황을 판단하려 애썼다. 꿈은 아니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온기까지 와닿을 순 없었다. 상고로드림의 혹독한 추위를 버텨왔던 그 아득한 시간동안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매번 누군가에게 구해지는 환상. 따듯한 곳에 들어와 있는 환상. 착각. 그리고 나타나는 환영.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듯 나타난 것들에 처음에는 분노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했지만 나중에 가선 그저 부질없는 시간 속에서 버팀목이 되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면 정신을 놓아버려야 했을테니까. 상고로드림은 그런 곳이었기에 마에드로스는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꿈이 아니야. 어쩔 줄 모르는 불안한 얼굴이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질 없었다. 너무도 오랫만에 온 몸으로 동일하게 퍼진 고통의 크기는 이전보다 줄어들었지만 마에드로스를 눈물나게 만들었다. 똑같이 느껴지는 고통. 한쪽 어깨로 쏠리지 않은 감각.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잊고 지낸 균형감각이 몸 전체에 아픔과 함께 퍼져나갔다. 이곳은 상고로드림이 아니었다. 어디인지, 무슨 연유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 곳에서 벗어났다는 건 확실했다.
저도 모르게 흐른 눈물에 시야가 일그러졌다. 무심코 올라간 손이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이상하게 닿질 않았다. 붕대로 감겨버린 손목이 유달리 이질적으로 보였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손가락이 눈에 보이질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놀라기도 전에 벌컥 열린 문으로 그리운 얼굴이 들이닥쳤다.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르는 핀곤의 얼굴. 급히 소리를 질러 치료사를 부르고 어쩔줄을 몰라하며 강하게 어깨를 부여잡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리면 황급히 떨어져나갔다. 그제서야 그 깎아지른듯한 절벽의 끝에서 핀곤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네가 나를 구했구나. 수많은 궁금증보다 살아있는 존재 자체가 유독 반가웠던 '핀데카노'이기에 마에드로스는 서글픔과 안도, 그리고 기쁨을 담아 웃으며 그를 맞았다.

"핀데카노."
"마이티모.."

어쩔줄을 모르며 숫제 울먹이기까지 하는 핀곤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마에드로스는 손을 뻗어 사촌의 눈물을 훔치려 얼굴을 어루만졌다. 상처투성이의 손. 그리고 여전히 반대쪽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시야. 한참을 주저하던 마에드로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핀데카노. 이상해. 나 눈을 다쳤나봐."

한쪽 손이 보이질 않아. 이렇게 움직여지는데. 하도 매달려 혹사당하다보니 아예 눈앞에서 사라진걸까?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이야기하는 마에드로스의 물음에 차마 답하지 못한 핀곤이 기어이 참아내던 눈물을 떨구고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어쩔줄을 몰라하던 마에드로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핀곤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여전히 닿질 않았다. 몇 번을 허우적거린 손목을 핀곤이 잡아채고 나서야 잊혀진 기억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핀곤의 울것같은 얼굴. 끊어져버리기라도 한 듯 아파오는 손목. 쿵쿵소리를 내며 온 몸을 고통으로 몰아가던 쇠붙이의 날카로움. 머릿속이 순식간에 뒤엉켜 혼미해졌다. 깨질듯 아파오는 머리를 움켜쥔 채 신음을 내지르던 마에드로스의 몸이 어느순간 픽 쓰러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핀곤의 고함소리에도 몸은 일어날 수 없었다.






겨우 추스리고서야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마에드로스는 핀곤의 수발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목숨을 부지한 것 조차 기적이었기에 정신이 또렷해지는 순간 이후 더더욱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원죄. 그렇게 이름붙여도 과하지 않는 페아노리안의 죗값.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지금 그 죄는 모두 장자인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로 돌아왔다는것을 마에드로스는 잘 알고 있었다. 치료를 받으러 숙소 밖으로 한 걸음만 떼어도 날카롭게 쏟아지는 살기는 그로서도 견디기 힘든 것들이었다. 상고로드림의 그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온갖 모욕과 절망을 느꼈지만 가장 크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세상에게서 소외된 것 같은 고독함이었다. 그 절망적인 고독함에서 해방된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이제는 너무 많은 시선들이 마에드로스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무는 법을 택했다.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인 척 살았다. 이미 죽은 목숨.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은 잊혀진 몸뚱아리를 억지로 끌어내 살려놓은 건 직계혈육도 아닌 핀데카노였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많은 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제멋대로 떠들어 댈 것이라는 건 보지않아도 알수있었다. 둔해진 머리였지만 그 정도도 추론해내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도 서슬퍼런 욕과 폭력이 난무하던 상고로드림의 절벽에서 눈을 뜨는 꿈에 시달리는 자신이 욕 한마디 더 듣는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그의 사촌에게까지 욕 보여서는 안됐다. 그건 마에드로스가 핀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몇번이고 말을 붙이려 노력해보았지만 좀체 입을 열지 않는 마에드로스덕분에 핀곤은 역시 침묵으로 그를 대했다. 때론 급변하는 상황에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한 법이라는 치료사의 조언 덕이기도 했지만 도통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촌 형님의 모습은 그로서도 충격적인 모습이었기에 그 생활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십여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겪고 기어이 살아남은 몸은 한없이 약해져있었고 그의 이름대신 불리던 붉은머리의 전사의 뜻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전에없이 비쩍마른 몸뚱이에는 온기라곤 들지 않았고 그보다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건 온 몸에 가득한 상처들이었다. 핀곤은 이런 류의 상처들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정식으로 대련을 하거나 전투를 벌였다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그저 일방적인 구타와 심심풀이로 이루어지는 폭력의 증거. 빼곡히 앞뒤로 채우고 있는 자상, 화상. 아물지 못해 곪아 썩고 부러졌던 뼈 마저도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채 아물어버렸다. 오히려 그가 손목을 잘린 쇼크에 기절했을 때에 서둘러 돌아와 수술을 진행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깨어나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하는 몸뚱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흘렸던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했다.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며 어쩔 줄을 모르던 시기를 지나 입을 다물고 있으니 차라리 조용하고 편하다면 편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에드로스는 그를 챙겨주던 손길 전부를 거절했다. 무언가를 물어도 답하지 않았고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알고있는 소수의 얼굴이 아닌 '타인'의 존재에 흠칫흠칫 놀라며 겁에 질린 아이처럼 당황했다. 말도 없이 그저 홀로 두려움에 떠는 사촌을 위해 핀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의 곁에서 놀라지 않게 진정시켜주는 것 뿐이었다.

날짜를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수많은 시간들이 그대로 흘렀다. 겨우 요정꼴로 만들어 놓은 몸이 이제는 스스로 일어서고 조금씩 움직여댔다. 여전히 방문 밖을 나서는 것을 꺼려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른 이들과 섞여있어도 크게 이질적이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됐다. 이제는 핀곤이 잠깐씩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도 크게 놀라지 않는 마에드로스의 모습에 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금 있으면 제 자리로 돌아오겠지. 원래의 마에드로스로 돌아올거야. 가벼웠던 마음에 방심의 틈이 생긴거였을까. 바빴던 오전의 일 처리를 끝내고선 손목의 붕대와 화상자국을 보살피러 들어온 핀곤이 마에드로스가 있는 방문을 열자마자 무언가가 얼굴로 날아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감쌌다. 침입자..?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마에드로스부터 찾는데 이상하게 방 안은 깔끔했다. 자신의 얼굴로 날아온 것은 얇은 웃옷. 고개를 들자마자 벗은 마에드로스의 나신이 보였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에드로스의 모습은 과거 핀곤의 기억속에 자리한 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이티모?"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핀데카노."

사나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마이티모야. 내가 알고 있는 마에드로스. 나의 사촌 형님. 핀곤은 평정을 가장하고는 허리를 굽혀 떨어뜨린 붕대와 약을 주웠다. 두근대는 가슴 속의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너무도 오랫만에 듣는 목소리. 나의 마에드로스. 얼굴근육을 간신히 긴장시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사촌 동생으로서, 유순하고 착한 핀데카노의 얼굴로.

"무슨 일이야. 옷은 왜.."
"너, 일부러 그랬지."
"응?"

주어가 없는 물음에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도 핀곤은 다가오는걸 멈추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빠른 눈으로 벗은 마에드로스의 몸을 훑었다. 씻을때조차 부득부득 우겨서 몇 번 같이 들어가긴 했지만 움직이기 시작하고 난 뒤의 마에드로스는 늘 스스로 씻겠다며 문을 닫아걸었기에 다 나은 뒤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순 없었다. 거진 아물어 흉터만 남은 상처들을 꼼꼼히 눈으로 확인한 뒤 핀곤은 침대 위에 던져진 로브를 들어올려 넓게 펼쳤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어봐야겠지만 우선 몸에 간신히 자리잡은 체온 유지가 더 급했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끝이 핀곤이 펼쳐쥔 로브를 후려쳤고 그 반동에 우습게도 마에드로스 자신이 휘청거리며 무너졌다. 몸뚱이가 주저 앉기 전 낚아챈 핀곤덕에 엉거주춤 매달리게된 마에드로스가 몇 번 반항하다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결국 바닥에 그대로 웅크린 마에드로스 덕에 핀곤도 함께 그 곁에 무릎을 꿇었다. 가늘게 경련하는 몸뚱이가 품 안에 바싹 들어왔다. 벗은 등을 쓰다듬고 고개를 숙여 보여주지 않으려는 마에드로스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넘겨주며 다독거렸다. 무슨일인데. 말을 해야 알지. 응? 형님. 왜그러는데.

"스스로를 괴롭히던 기억은 지워지기도 한다더군."

흠칫, 등을 쓰다듬던 핀곤의 손끝이 떨려왔다. 그 반응이 우습다는 듯, 작게 웃어보인 마에드로스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한층 가까워진 얼굴에 시선이 바로 겹쳤다. 서슬퍼렇게 쳐다보는 그 위압에 저도 모르게 물러선 핀곤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 입술이 열렸다.

"내 등에 낙인이 찍혀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지?"

크게 떠진 눈동자는 이제 자신을 힐난하고 있었다. 손목에 칼을 댈 때도 구하러 온 자신을 향해 다가오지 말라고 잔인한 말들을 내뱉을 때도 마에드로스는 이런 눈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핀곤의 기억 속에 자리한 마에드로스는 타인에게 결코 이런 눈을 한 적이 없었다. 쏟아지는 무언의 비난. 슬픔. 바닥까지 내쳐진 절망. 모든 감정들이 화살로 변해 오롯이 자신에게 꽂혔다. 그의 등에 올린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낙인은 바로 그 손바닥 밑에 펼쳐져 있었다.

모를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펄떡이며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손목을 꺾고 핀곤의 품으로 떨어진 마에드로스의 몸을 끌어안고 추락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마주한 현실에 그는 눈을 몇번이고 감았다 뜨며 현실을 부정했다. 다 삭아 없어지다시피 한 옷감들 사이로 매끈한 등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상처는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그가 상상했던 정도가 아니었다. 꽃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지고 비틀린 문양들. 어둠의 힘을 양분삼아 피어난 수 많은 악마의 열매. 보기만 해도 소름돋을 정도로 징그러운 낙인들이 하나하나 밖으로 드러났다. 빼곡하게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새겨진 등을 수놓은 꽃들은 그동안 마에드로스가 견뎌온 일들을 자연스레 깨닫게 했다. 울컥울컥 나오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어 핀곤은 몇 번이고 토악질을 해댔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언젠간 말하겠지 싶다가도 침묵하는 마에드로스의 모습에 안일하게 마음을 놓은 채 대비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설마 기억하지 못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만 묻자. 날 동정했니?"

벼락같이 떨어진 물음에 핀곤의 얼굴이 번개같이 들렸다. 아니라고 거세게 도리질치며 변명했지만 싸늘한 눈동자는 자신을 오래도록 주시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시선을 마주한 채 핀곤이 끊임없이 속삭여 주었지만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마에드로스 쪽이었다. 가만히 허공을 향하는 텅 빈 눈동자를 걱정하면서도 핀곤은 그를 부여잡은 손을 떼지 않았다.




"부탁 하나만 하자."

적막한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 숙여진 핀곤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면 마에드로스는 평소같이 텅 비어버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면서도 스스로 일어선 후에 그는 천천히 벽난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편의 숙소는 조용했지만 외풍이 심해 겨울에는 빛이 드는 낮에도 벽난로에 불을 지펴야했기에 일찌감치 넣어두었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타닥타닥 빨갛게 익어가는 난로 앞에 멈춘 마에드로스를 따라 핀곤 역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다가서자마자 마에드로스는 몸을 돌려 핀곤을 쳐다보았다. 결연한 의지. 살짝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더이상 떨리고 있지 않았다.

"내 기억을 지울거야. 그러려면 증거도 없어야 돼."
"마에드로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야. 내가 몰랐던 때로."
"...."
"상처 한두개 쯤 더 늘어난다고 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테지. 이미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데."
"잠깐, 잠깐만 마에드로스."
"한번에 없애려면 자상보다는 화상이 더 빠르겠지?"

마에드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곁에 놓인 부지깽이를 들고 이미 숯이 되어버린 벽난로의 안쪽을 뒤적였다. 두꺼운 쇳조각이 금새 빨갛게 달구어졌다. 그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핀데카노가 황급히 그를 벽난로에서 떨어뜨리려 당겼으나 마에드로스는 손에 들린 부지깽이를 놓지 않았다. 뜨거운 것을 들고 휘청이는 그가 다칠까 두려워 금세 행동을 멈춘 핀곤이 천천히 마에드로스의 하나남은 손을 부여잡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응? 네 몸이 온전히 회복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지금 몸상태로는 그 상처들을 이겨낼 수 없어!"
"그 때는 정신적으로조차 이겨낼 수 없을지도 몰라."
"마에드로스!"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 혼자서라도 할거야. 엉망이 되더라도 상관 없어.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강경하게 나오는 마에드로스의 서슬퍼런 태도에 부지깽이를 빼앗으려던 핀곤의 움직임이 멈췄다. 놀랄만큼 냉정한 목소리. 그건 우발적으로 나온 말들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피스틸이고 스테먼이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날 밤 까지는."
"...."
"너무도 생생해. 역겨운 기억들. 억지로 몸을 비틀어 나조차 생경한 곳을 제멋대로 헤집더군."
"..나도 그 끔찍한 기억을 네게 심어줬어."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거야."

입술을 깨물며 그를 놓친 손끝을 바라보았다. 결국 자신도 같은 부류였다. 싫다던 마에드로스를 끌어안고 욕심껏 그를 안았다. 결국 마에드로스는 나와 나누었던 그 밤의 시간을 인정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거다. 이따위 입에 발린말들은 필요 없었다. 시작은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나처럼 싫다는 그를 끌어안았을테고 입을 맞췄겠지. 등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꽃들을 발견한 당시에는 끓어오른 스테먼으로서의 살기가 사방으로 뻗치며 그를 향한 독점욕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분노는 점점 자취를 감췄고 죄책감은 커져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그의 등 한쪽에 자리한 그의 꽃을 발견한 직후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꽃들과 엉켜 마에드로스의 등에 찍혀있는 핀곤의 낙인. 마에드로스의 깨끗했던 등에 피워진 최초의 꽃. 결국 너도 그들과 똑같다며 자신을 혐오하는 눈으로 보는 마에드로스의 환영이 매일밤 나타났다. 아니라고, 나는 결코 마에드로스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없다 몇 번을 부인하고 싶었으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마에드로스의 등에 피워진 꽃은 그에 대한 동경과 사랑과 애정의 증표이자 그를 억지로 취한 자신의 추악한 죄의 낙인이란걸 스스로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핀데카노."

부지깽이를 천천히 내려놓은 마에드로스가 핀곤의 손을 잡아올렸다. 힘없이 끌려올라온 손끝을 감아 억지로 깍지를 낀 마에드로스는 한걸음 다가가 붕대로 감긴 손목 끝으로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울 것 같은 모습으로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핀데카노에게서 마에드로스는 그와 처음으로 함께 했던 아침의 핀곤을 떠올렸다. 어른이 됐건만 속은 전혀 변하질 않는구나. 가만히 핀곤이 자신과 눈을 맞춰줄때까지 기다리던 마에드로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탓하려는게 아니야."
"..."
"정말이야 카노."
"미안해."

처음의 사과였다. 그날의 핀곤은 미안하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올렸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도 아득바득 고집을 부렸다. 절대로 후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을거라고 이야기 했었다. 어린날의 치기로 밀치고 들어온 사촌은 앞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다며 이해받지 못해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런 당돌했던 모습에 휩쓸린 건 마에드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사촌은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사과를 받을 수 없어."
"....."
"그 말은 나를 우습게 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게 아니고..!"
"이 내가!"

내지른 소리에 변명하려던 입술이 닫혔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보단 조금 누그러진 태도였지만 마에드로스는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아노르의 장자 마에드로스가 고작 사촌 꼬맹이 완력 하나 이기지 못했을거라 생각하는건가?"
"....."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나를 무시하는 방법이야. 잘 알고 있을텐데?"
"그러니까.."
"네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잖아."

평소의 나긋한 말투로 돌아온 마에드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핀곤의 손을 놓았다. 이제는 한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동안 용케 익숙해졌는지 마에드로스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대어 둔 채 가만히 허공을 주시하던 시선이 다시 핀곤에게로 돌아와 꽂혔다.

"시작이 혼자였지만 끝은 함께였어."
"...마에드로스."
"그리고 그 문제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나는 네게 부탁을 했고 너는 대답을 해주면 돼."

단호하게 끊는 마에드로스 덕분에 핀곤은 몇 번이나 입술을 우물거렸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조차 핀곤은 그를 상처입혀야 하는 괴로운 마음과 그 상처를 낼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성취감을 동시에 맛봤다. 결국 마에드로스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마에드로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핀곤을 이용했다.

"일주일만 더.."
"오늘 당장. 더 이상 질질 끌고싶지 않아."

짓씹듯 내뱉었지만 그 얼굴은 너무도 지쳐보였다. 오랜시간 서 있었던 데다 갑자기 활동량도 늘었고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하기엔 아직은 체력이 부족했다. 힘빠진 시선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에 핀곤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로브를 주워들어 마에드로스를 감쌌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데리고 올 때만 해도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말라있던 몸이 많이 단단해졌다. 꽉 차 넘치는 몸을 바스러지게 끌어안은 핀곤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마에드로스를 보듬었다. 닿은 온기가 너무도 따듯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치익-

끔찍한 냄새와 소리들이 뒤엉켜 예민한 요정의 오감을 고문했다. 고문. 말그대로 고문의 현장이었다. 베겟잇을 짓씹으며 고통을 감내하던 마에드로스는 계속 혼절과 각성을 반복했지만 핀곤은 애써 모른 척 상처 위로 수건을 가져다 대 핏자국을 지웠다. 깊고도 진하게 새겨진 꽃들의 흔적은 검으로 얕게 베어내서도 자잘히 지져내서도 안됐다. 오랜 시간동안 화로에 무쇠로 만들어진 인두가 들락거렸다.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목 뒤에서부터 천천히 피부를 엉겨붙이고 그 껍질을 벗겨냈다. 아직도 너무 많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화상에 효능이 있는 약초와 필요한 물품들. 최대한 많은 수의 치유사. 단시간에 빠르게 끝내려 부산스럽게 준비하던 핀곤을 막아선 이는 마에드로스 본인이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그저 혼자서 천천히 해달라 이야기하는 텅빈 눈동자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언성이 높아지고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핀곤은 마에드로스에게 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방법이었으니까. 다른 방법은 필요 없었다.
등 전체를 인두로 지져내는 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조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흉터가 드세게 남을수도 있어 핀곤은 마에드로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들여온 약초가루를 짓이겨 넓게 펴바른 뒤 힘껏 수건으로 감싸 지혈을 했다. 그리고 다시금 인두가 달궈지면 다음 부위에 대고 힘주어 눌렀다. 열린 창문으로 추위가 몰아쳐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곳에서 핀곤은 더운 땀방울을 흘렸다. 어자피 이곳에는 추위를 느낄만한 요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한참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면적이 점점 줄어 많은 부분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기계적으로 다음 부분에 인두를 대어 힘을 주려던 손끝이 움찔, 하고 떨렸다. 자신의 문양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작게 피어난 꽃. 바로 곁에 엉겨붙은 누군가의 꽃이 크게 피어나 자신의 꽃을 위협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 그 위협적인 꽃을 먼저 짓눌렀다. 흐윽, 흡. 짓눌린 어금니 사이로 다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고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핀곤은 그 부분을 반복해서 몇 번이고 지졌다. 연기가 나지 않을 무렵까지 무게를 싣던 손이 화들짝 떨어졌고 벌겋게 익은 상처 곁에 남은 자신의 꽃이 눈에 들어왔다. 핀곤은 입술을 깨물며 인두를 화로에 던졌고 모른척 그 꽃이 있었던 부분에 겹쳐 수건을 대고 눌렀다. 화끈화끈하게 열오른 상처. 그 짓누른 손가락 사이로 피어난 꽃. 자신이 저지른 죄의 증거.

"욕심내는 건 이번 한 번 뿐이야. 용서해줘 마이티모."

이미 혼절한 마에드로스의 등 뒤에서 핀곤은 조용히 내뱉었고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듯, 굳은 얼굴로 화로안의 숯을 뒤적였다. 곧 빨갛게 달아오른 인두에서 열기가 피어올라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고 그는 지체없이 지혈하던 수건을 떼어놓은 채 손잡이를 들어올렸다. 피범벅이 된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핀곤은 손아귀에 힘을 실어 또 한 송이의 꽃을 뭉그러뜨렸다. 땀인지 눈물일지 모를 액체가 후두둑 떨어져 계속 시야를 방해했다. 지독히도 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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