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렇게 생쥐처럼 도망다니는 건 당신 답지 않은데요."
모퉁이를 막 꺾으려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들켰군. 짧은 한숨과 함께 강제로 돌려진 상체는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다소 화가 난 듯한 표정. 아무렇지 않게 손을 어깨에서 떼어내려고 해 보았지만 무지막한 악력은 인간의 힘으로 이기기엔 다소 힘겨울 때도 있었기에 에스텔은 뿌리치는 것을 재빠르게 단념하고 똑바로 레골라스를 향해 섰다.
"도망친 적 없어요."
"거짓말."
이야기를 할때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늘 경계하며 살아왔던 그에겐 그다지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래에서야 에스텔은 그것이 새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가 시키기라도 했다는 듯, 레골라스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비껴나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돌려진 시선조차 맞춰 오는게 이 요정의 특기이자 장기였지만.
"눈까지 맞추지 않는걸 보면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은건가요?"
화가나면 날카롭게 모든걸 걸고 넘어가는 성격 또한 장기란 걸 잊어먹은 내가 바보지. 에스텔은 겨우 아무렇지 않게 내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계속 날 피하는거죠?"
"피한 적 없다니까요."
"변명해봐요 그럼. 그 날 이후 어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그 매정한 입으로 직접 들어나보죠."
거세게 잡았던 어깨를 놓은 채 넉살좋게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레골라스는 그 잘난 입을 열어보라고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따갑게 내려오는 시선을 또 자연스럽게 회피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에스텔은 이래서야 레골라스를 더 화나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를 겨우 끌어올렸다. 하지만 얼굴까지 미치지 못한 그 불편한 시선은 겨우 요정의 목덜미에 닿았고 슬쩍 열린 튜닉의 깃 사이에 머물렀다. 본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숲의 요정은 쉬이 무방비한 상태를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열어둔 깃 사이에는 시원하게 뻗은 목선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고 그 피부가 평소처럼 빛.....이 나야하는데..눈 앞에 보이는 목덜미는 붉게 일어나 있었다. 오 마이 갓.
"저..레골라스?"
"말해요. 에스텔."
"혹시 그 단추는 일부러 풀어두고 있는.."
"네. 온 동네에 소문이나 내려구요."
당당하게 손가락을 넣어 단추 한 개를 더 풀어버리는 레골라스의 얼굴에 호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대놓고 벌어진 옷깃 사이로 수줍게 자리한 화인은 나흘 전 자신이 충동적으로 새긴 잇자국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는 눈동자가 기어이 올라와 시선을 마주하자 레골라스는 드디어 미소지었다.
"얼굴 참 오랫만에 보네요?"
"...."
"아까는 시선이 움직이질 않더니 이제는 입이 붙어버렸고."
"레골라스."
"이름은 지겹도록 들었어요. 그날 밤에도."
"..."
"이름을 부르면서 밤새 온몸을 저릿하게 만든 상대는 눈 떠보니까 사라져있고. 바쁜일이 있나 싶어 걱정하며 달려나갔더니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심지어 이렇게 숨어있다가 걸리기나 하고."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게 아니에요."
험악해진 요정의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에스텔은 -가능하지 않겠지만-그에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양부께서는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고 린돈 요정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기만 한 리븐델이 일반적인건가 아니면 이렇게 날카롭게 파고드는 본성을 누구나 감출 줄 아는걸까. 아직 다양한 분파의 요정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에스텔은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레골라스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꺼내질 못하고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이는 에스텔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요정은 험악하던 표정을 조금 풀고는 모퉁이 벽에 슬쩍 고개를 틀어 기댔다.
"싫거나 불편한게 있었다면 차라리 대놓고 이야기를 해요. 합의하지 않은 관계도 아닌데 정작 자고나선 무서워졌다고 도망이나 치는 상대도 짜증나지만 질질 끌면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상대는 더 짜증나니까."
그 순간 확 달아오른 열기가 얼굴을 뒤덮었다. 상대.. 도 있고 상대..는 더 짜증... 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여러 명이...
"레골라스, 혹시.. 나 말고도 다른 상대도 있..어요?"
"네?"
비스듬한 자세 그대로 레골라스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다른... 상대... 중얼거리며 문맥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에 에스텔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 맞아. 인간이 아니었지. 그런데 요정은.. 요정은 한번에 여러..상대랑.. 하나..? 내가 부끄러워서 피해다니는게 엄청 이상한 거였나? 좀 쿨하게 행동했어야 했나? 점점 어지러워지는 머릿속에 본능은 생각하길 멈추고 그저 혼란스러움의 근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생각을 읽을 수 없던 은은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있었고 오직 강하게 흔들리는 눈빛만이 에스텔을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는데요?"
"..아.."
안심해도 되는건가? 지금은 없다잖아. 그러니까...애인을 사귈수도 있고. 그렇지. 성인인데 결혼과 다르게 성관계는.. 할 수도 있으니까. 에스텔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마음을 주었던 상대는 레골라스가 처음이었고 타인과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모를 수도 있는거라고. 게다가 [인간]과 [요정]이 어떻게 사랑을 하고 내밀한 관계를 맺는지 알 수 없었으니 방식의 차이일거라고 조심스레 되뇌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은 레골라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해야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는건데.'
가볍게 접근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호감이었고 마음이 잘 맞기에 몸도 맞춘 것 뿐이었다. 그가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함께 했던 시간들 또한 즐겁고 특별했기에 늘 그래왔듯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골라스 또한 요정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만약 인간들의 사랑이 요정의 연애와 방식이 다른거라면? 에스텔이 보여줬던 모든 행동이 인간들이 보이는 행동 그 자체라면? 혹 몸부터 시작한 사랑이 가벼워 보여 내가 싫어지고 거부감이 든거라면 어쩌지? 두근두근 거리며 열리려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것 처럼 에스텔에게 그렇고 그런 요정으로 보였을까 불안해졌다. 빠르게 깜빡인 시선이 이번엔 반대로 흔들렸고 이걸 어떻게 이야기 해야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에스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 잘못했어요."
"...아니, 뭐."
"레골라스가 내게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 그래서 좀 무서워졌어요. 그런데 처음..이라서 진짜 이 감정이 레골라스와 동등한 감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다 내 잘못이에요."
"처음이었습니까?!"
되묻듯 던져진 말의 뜻을 이해하느라 멍하니 떠진 눈동자가 두어번 더 깜빡였다. 곧이어 열오른 얼굴은 눈 앞의 인간을 순식간에 어린 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대답.. 대답을.. 그러니까. 이게.. 내가 생각한 의미가 맞는거지?
"...응."
한참동안이나 아무말도 없이 서로만 바라보는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먼 곳에서 요정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노랫소리 또한 흘러들었지만 둘이 서 있는 이 곳에는 공기마저 움츠러들고 아무것도 움직이질 않았다. 처음이면 안되는 건가? 무슨 의미라도.. 한참을 또 고민하던 에스텔의 고개가 슬금슬금 돌려졌고 또다시 시선은 주위를 맴돌았다. 그 순간 맑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나참,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잖아요."
쑥 뻗어진 손끝에 잡힌것은 자신의 팔이었다. 우왁스러울 정도로 강한 힘이 단숨에 몸뚱이를 휘감아 끌어당겨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삼키며 질질 끌려갔다. 품 안에 가득 안은채로 레골라스는 의미모를 웃음을 짓고선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 볼 때까지 휘감긴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사실은 나 혼자서만 섣부르게 진도 나간게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구요. 말하지 그랬어요. 하도 자신감있고 능숙하게 리드하길래 경험이 있는 줄 알았네."
"능....숙...하게.."
"어라 또 얼굴 빨개졌다. 부끄러움 엄청 타나봐요?"
이제는 아예 대놓고 놀리는 목소리는 이전에 에스텔의 가슴을 뛰게 했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부끄럽기도 하고 멋적기도 해 잠자코 아무말 없이 크흠큼 거리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아라곤을 지켜보며 다시 끌어안는 레골라스의 품이 놀랄만큼 따듯해서 도통 붉어진 얼굴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제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해 줘요."
"..네."
"나도 불안해 한단 말이에요."
"다 이야기 할게요."
"그날 기분 좋았어요?"
"...네."
"나 좋아해요?"
"레골라스는요?"
용기내어 되묻는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소리내지 않고 웃어보인 레골라스가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다시한번 확인 해 볼래요?"
푸드득 날아간 새의 날개짓이 유독 크게 들려왔다. 얼굴은 이미 터질듯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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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간만입니다 >_<)/
오랫만이에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오지않으려고 했던건 아니고 긴긴 휴가기간을 보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 결국 호빗3을 보기도 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냈어요!
물론 욕을 하기위해서 이쪽엔 감상을 쓰지 않기로 했지만요 ^.^ 피잭 잊지않으마 ^.^
개인적으로 다른거 다 필요없고 내가 스란두일을 보러 간 영화에서 드워프가 잘생겼구나 허허 를 외치게 만들었다는게 정말 이해가 안가구요 ㅜㅜㅜ 드워프는 멋졌고 스토리도 무리없이 이어졌지만 뭐랄까.. 전 드워프 잘난거 보러 간건 아니었는데 ㅎ.ㅎ.ㅎㅎㅎ 우리 전하는 보이지도 않더라~_~ 그 얼마 없는 시간조차 트루러브!!!!그놈의 트루러브에 다 잡아먹혀서 보이지도 않더라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ㅜㅜㅜㅜㅜ 아니야 욕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후 그래요 전 어자피 피잭걸 파는게아니라 톨킨걸 파는거니깐.. ㅜㅜ 근데 의외로 급 스란엘 지분이 좀 떠오르는것 같아서 이상하게 묘한 느낌이 드는 저. 희안하다.. 왜때문에.. 아 물론 막판에 급 아라레골(?)을 연결하면서 스란엘(?)을 연상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긴 했었죠 흑흑 ㅠㅠㅠㅠㅠ이렇게라도 살아남아라 스란엘 8ㅅ8!!!
하여튼 뭐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드디어! 기다리던! 고대하던! 톨킨온리가 열릴거 같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현재는 트위터에서 수요조사 후 가참가 신청까지 끝난 상태이구요 8월달에 열리는 동네페스티발(이하 동페)에 소규모 온리전 형식으로 64p 부스로 참가신청서를 넣으셨다고 합니다!
https://twitter.com/tolkienonly/status/551597945313689600
자세한 사항은 해당 링크를 참고하시구요!
저는 아마...아마 책이 나오긴 할것 같은데 작년 먹고살기프로젝트에서 실패해 올해에도 또 매여살아야 하는 몸이라 확실할지는 모르겠어요 ㅠ 일단 참가신청은 했지만 8ㅅ8
호빗 3이 끝난 시점에서 다소 멀리잡힌 온리전일정이지만 이 시기를 놓치면 언제다시 열릴지 알 수 없는 본진이라서 ㅠㅠㅠㅠ 이번 기회가 너무 소중하네요 ㅠㅠ 참가의향 있으신 분들은 해당 트윗 살피시면서 참가신청때 신청서를 넣어보시는것도 좋을거 같아요! 우리함께해요 ㅠㅠ
그리고 그 톨킨온리가 열리는것에 힘입어 앤솔로지나 게스트북 모집도 많이 하더라구요 ㅠㅠ
1. 아라레골 엔솔로지 : https://twitter.com/axl_anthology/status/551617934741630976
2. 호빗시리즈 게스트북 : http://ghqldldlt.tistory.com
3. 길엘 게스트북 : http://blog.naver.com/mahamayuri/220224838148
현재로서는 모집하는 분야가 세개가 있는 것 같구요. 아직 모집중에 있으니 생각 있으신 분들은 기간 놓치지않게 멤버신청해주셔요 ㅠㅠ 존잘님들 연성 모아서 보고싶습니다 ㅠㅠㅠㅠ
아마도 좀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엔솔만 보다가 게스트북을 보니까 또 새롭네요. (앤솔: 원고+초기자금->책->수익나눔 , 게스트북 : 원고 -> 총대가 초기자금, 수익모두 가지고 댐. 참가자 -> 원고낸 뒤 책+A)
예년에 들어서 활동을 자주 할 수 없다는게 좀 슬프긴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행사나 이런것들은 체크하고 있으니까요 ㅠㅠ 많이많이 나오면 좋겠네요 ㅠㅠㅠㅠ
뭣보다 스란엘러분들이 많이 늘어나셨으면 좋겠어요 ㅠㅠㅠ 제가 연성을 못하니원 ㅠㅠ연성을 보고싶은데 볼 수도 없고 흑흑 언제 이렇게 불모지였던지 ㅠㅠㅠㅠㅠ
그래도 틈틈히 연성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ㅠ!
또다른 소식이 있을때 혹은 글쓰고싶을때 다시 올게요~ 오늘도 들러주시는 분들 매우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해 가장 행복하시고 즐거운 해 되시길 빌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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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누구나 에레보르의 백성들을 동정했다. 당장 이쪽 땅으로 넘어오라 채근하는 이들도 있었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손길이 넘쳐났다. 그러나 그것이 불쌍한 에레보르의 백성들과 아비와 나라를 동시에 잃은 어린 왕자에 대한 동정때문이 아니라 에레보르에 남은 수많은 보물때문이라는 것을 어린 소린은 아직 몰랐다. 그 용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변덕을 내고 날아가 버린다면 소린과 백성들은 다시 삶의 터전을 찾을 수 있을것이고 그때가 되면 도움을 주었던 손길들을 잊지 않을거라고 예견한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각외로 금방 해결될 양상을 보이지 않았던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금방 무찌르거나 내쫒을 수 있을거라 여겼던 고대의 용 스마우그는 너무도 강력했고 삶의 터전을 되찾으려던 전투는 허망하리만치 무력하게 끝났다.
드워프들은 점점 희망을 잃기 시작했다. 재빠른 이들은 먹고살 만한 방법을 찾으려 빠르게 모든것을 단념한 뒤 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몇몇은 인간들의 틈으로 흡수되었다. 지치고 배고픈 백성들은 너무도 손쉽게 수를 줄여갔고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다. 하루 하루 눈을 뜨는것이 고역이라고 할 정도로 소린은 지쳐갔다. 아버지는 사라졌고 자신은 더 이상 에레보르의 왕자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흩어지는 백성들을 막을 방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할 두 조카가 함께 있었다. 난생 처음 소린은 비단신이 아닌 투박한 가죽으로 얼기설기 엮은 신을 신었고. 섬세하게 보석을 세공하던 손 끝은 뭉툭한 망치를 잡은 채 열기에 데여가며 대장간에서 밤새도록 일을 해야했다. 미학과는 상관도 없는 멋들어지지 못한 농기구를 만들고, 제대로 다듬어지지 못한 허술한 갑옷을 새 제품이라며 내보내야 했다. 남들보다 배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만들려 고집을 부리면 대장간의 주인은 말없이 문을 열고 그를 쫒아내기 일쑤였고 대가도 떼어먹히기를 여러번 반복하며 소린은 결국 생존의 문제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14시간이 넘는 고된 일을 하고도 대가로 받는 돈은 은화 두닢. 겨우 오늘 먹을 식량을 사고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허름한 쪽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루종일 좁은 곳에 갇혀있다가 뛰쳐나오는 말썽쟁이 조카들이 있었다. 허겁지겁 마른 빵을 입에 쑤셔넣은 채, 종알종알 떠드는 필리와 킬리를 바라보면서 소린은 몸에 남은 피로를 억지로나마 떨쳐내려 애썼다. 복수를 하려면 일단 힘을 키워야 했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두 조카가 커서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힘을 키울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이 버텨야 한다는 걸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 하며 버텨온 세월이었지만 곧 한계는 찾아오고 있었다.
의욕만으로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호의를 가지고 내어주던 돈과 재물의 양은 점점 불어났고 나중에는 소린의 이름 앞으로 달아진 빚 이라는 명목이 되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틈틈히 여러가지 일을 하며 늘어나는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천천히 시작된 압박은 종종 소린을 위협했고 두 조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 불안함 속에 살아가며 아득바득 벼텨내고 있던 소린에게 어느날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무슨.."
"빚을 탕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소."
"스라인의 아들 소린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고?"
숨겨두었던 칼을 겨누며 순식간에 달려들었지만 소린은 그 자리에서 억지로 주저앉혔다. 책상에서 놀라지도 않은 힐데가 끌끌 혀를 차올렸다.
"그런 단도를 만들 돈이라도 있었으면 얼른 갚는 편이 좋았잖아."
"닥쳐라. 애초에 네놈이 고리대금으로 설정해 두었기에 금액이 말도 안되는 정도로 불어난 거잖아!"
"그걸 알고도 내게 돈을 빌렸던 건 당신이었지. 참나무 방패의 소린."
멈칫, 몸뚱이가 분노로 덜덜 떨렸다. 한숨을 쉬면서 외알안경을 벗은 힐데가 콧잔등을 꾹꾹 누르곤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애초에 강제로 밀어붙이고 탈탈 털어내보았자 돈이 나올 구멍은 보이질 않으니 해본 말이야. 솔직히 가장 효율적이고 손쉽게 빚을 탕감할 수 있는 방법 아닌가?"
잘 보이지 않아 가늘게 떠진 눈으로 소린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드워프는 거세게 반항했다. 지금 저 자는 에레보르의 적법한 후계에게 고작 돈에 몸을 팔라 요구하고 있었다. 한번에 20굴덴. 특별히 책정한 가격이라며 흥정을 붙이는 모습은 정말 악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꽤나 빨리크지. 아낀다고 해도 비용이 더 들어갈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그 아이들이 제대로 된 식사라도 하던가? 또래보다 비쩍 마르고 배우지도 못해 덜떨어진 드워프로 자라난다면 결국 그 공은 모두 자네에게 돌아갈테고. 산밑의 왕의 유일한 후계자 소린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조카들을 매정하게 외면한 채 살고있다. 라는 이야기라도 돌면 흠.. 후원하고 있는 나로서도 기분이 유쾌하진 않거든."
"남의 앞날을 신경쓸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네 걱정이나 하는 편이 효율적이겠군. 이런 모욕을 받고도 참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내 앞날은 말이지 소린. 네게 돈을 받는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니까 나로서도 여러가지 방법을 찾는 것 뿐이야. 그러나 그 방법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제의를 할 뿐이니까. 강요하진 않아. 하지만.."
똑바로 고쳐쓴 안경의 유리 사이로 크게 떠진 눈이 소린과 마주했다. 뱀같이 교활한 입술이 열렸다.
"상환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나는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어. 스스로 가느냐, 혹은 끌려가느냐. 그 차이 이지 않을까?"
높게 비웃는 목소리는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어라 욕지거리라도 한번 제대로 날려보지 못한 채 소린은 힐데의 사병들에 의해 질질 밖으로 끌려나갔다. 애써 만든 작은 단도조차 빼앗긴 채, 말그대로 소린을 바닥에 내던져 버린채, 문은 냉정하게 닫혔다.
"언제든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다음 상환일 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처음은 특별히 50굴덴이라고 했다.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흥정을 한 결과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누군가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소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등을 꼿꼿이 편 채 협상에 임했다. 킬킬거리며 손을 비비는 힐데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후에 다시 일어선다면 제일 먼저 돌로 쳐죽이리라 생각했다. 이를 악물며 노예문서보다 더한 내용에 인장을 찍었고 그 후에 바로 이 방으로 끌려왔다. 처음이냐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힐데는 충분히 알겠다며 음흉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에레보르에 스마우그가 침범했을 시기에 소린은 미성년이었고 방랑하며 성인의 시기를 지나쳤으니 상황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쉽게 얻을 정보였을 터였다.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해달라는 힘겨운 부탁을 들어준 것이 그나마 소린의 마음을 위안되게 했다. 사전 정보도 없이 불안해진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 소린은 좁은 방 안을 몇 번이고 오갔다.
방 한구석의 침대와 간단한 탁자. 그리고 싸구려 술. 마시는 편이 좋을거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한잔 따라내어 입에 대어 보았지만 차라리 이 치욕을 몸에 새기는 편이 더 좋을거라는 말도 안되는 자존심에 소린은 도로 손을 거뒀다. 누가 이런곳을 올런지는 몰랐지만 제발 아는 이가 아니기를. 한참을 그렇게 홀로 상념하며 있던 방의 문이 열린 것은 조금 전 이었다.
다짜고짜 달려든 인간들의 손에 간단히 제압당한 소린은 손을 구속당한 채 안대가 씌워졌다. 버둥거리는 몸을 엎드리게 만든 뒤 움직일 수 없게 구석구석 짓누른 손에 극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빠르게 벗겨진 하체에 차가운 바람이 들었고 그만 하라고 소리지르는 입에는 재갈까지 물렸다. 킬킬거리며 몸을 쓰다듬는 손길은 뱀과 같은 느낌이어서 버둥거리며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벌써부터 발정나 몸을 헤프게 조롱까지 받았다.
"너무 겁 먹지 마쇼. 하다가 좋아서 더 해달라고 엉덩이를 흔들게 될 지 누가 알아 응?"
반쯤 벗겨진 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내린 사내는 드러난 속살에 쩍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 자국을 새겨두었다. 작은 신음소리가 앞에서 들려왔지만 그 소리를 내는 행위마저도 치욕스럽다는 듯, 몸을 웅크린 드워프는 눈을 꾹 감은 채 바들바들 떨어대고 있었다. 이런 거였다면.. 하지 않는거였어. 이럴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런 소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특별히 첫 손님이라 귀하신 분으로 모셨다고. 잠자코 그분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잘 모시라는 이야기를 내뱉곤 힐데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린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싫다고. 없는것으로 하자고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를 해도 소리는 재갈에 막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불안함에 공포는 배가되면서 이런 선택을 내린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필리와 킬리의 얼굴이 교차되고 아버지 또한 뇌리에 스쳤지만 진정보다 원망이 앞섰고 깎여나간 자존심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당장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거리며 제대로 아귀가 맞지 않는 문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질겁하며 뒤로 물러서려는 본능적인 모습에도 방 안으로 한걸음 들어온 이는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도 커서 그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건지도 몰랐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의자를 가볍게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렸고 고급재질의 원단이 겹쳐져 걸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절경이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들어본게 다가 아니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 저주스러운 목소리를. 가장 보고싶지 않은 상대를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에 소린은 마주하고 말았다. 이 목소리는 분명 스란두일의 목소리였다.
"귀한 것을 구했다고 하도 하도 호들갑을 떨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수다스러운 입을 도려내버릴까 했는데."
"그래도 이만하면 귀한 것이 아닙니까요."
뒤따라 들어온 힐데는 흘끗흘끗 숲의 군주를 올려다보며 손바닥을 비벼댔다. 인간이긴 했지만 힐데는 숲의 가능성을 보고 대담하게 사업에 뛰어든 참이었다. 다른 이었다면 감히 시도도 하지 못했을 일을 그는 저질렀다. 폐쇄적이기로 소문난 어둠숲의 군주를 과감히 끌어내 테이블에 앉히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요정들이 구하고 있는 잘 말린 과일들과 질좋은 포도주의 판로를 제시하며 파격적인 조건으로 딜을 건 것과 동시에 왕께 진상할 귀한 선물이 있으니 친히 발걸음을 해주신다면 더 없이 기쁠 것이라고 하루가 멀다하게 연통을 보내 애쓴 보람이 있었다. 숲의 군주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았을 때 힐데는 당장이라도 거래가 이루어 진 것 같은 기쁨이 도취되어 있었다. 스란두일의 흰 보석을 가로채간 것이 에레보르의 드워프들이라는 것은 알음알음 퍼져있는 사실이었고 결국 스란두일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드워프와 요정의 사이가 나빠진 계기라는걸 어렵사리 캐낸 힐데는 숲의 군주에게 그 왕자를 직접 취하게 하는 것 자체가 나쁘지 않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어린 왕자를 짓밟는 것 자체가 훌륭한 화풀이가 될 수 있었고 마음에 들어 취한다면 그것대로 좋았다. 손 안에 이미 들어온 순진한 드워프 하나를 휘말리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성인도 아닌 어린 드워프 둘은 노예로 팔아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계획된 일이었다.
"듣자하니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몸이라 합니다."
아직 피우지도 못한 몸입지요. 힐데는 성큼성큼 걸어가 소린이 발버둥쳐 엉망이 되어버린 이불을 거칠게 걷어냈다. 순식간에 헐벗은 하반신이 그대로 노출되어버렸다. 움찔거리는 움직임 모두를 눈에 담은 스란두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감돌자. 힐데는 더욱 흥분해 소린의 엉덩이를 억지로 벌려 스란두일에게 보였다.
"기념할만한 성인식이 아니겠습니까."
"내게 바쳐진 것에 쓸데없는 손을 보태는구나."
순식간에 떨어진 힐데의 손이 다시금 비벼졌다. 눈치를 살살 보면서 스란두일의 앞에 무릎을 꿇은 힐데는 금새 나긋한 목소리로 설탕발린 말들을 꺼내놓았다.
"미천한 인간이 많은 것을 갖고계신 전하께 드릴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유익한 것을 드리는 것 뿐입니다. 어여삐 봐 주십시요."
"그 성의는 고맙게 받지."
"그럼..."
"일단은 물건의 확인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네만."
"물론입죠,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확인이 불편하시다면 지금 아예 데리고 돌아가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린이 별안간 몸부림을 쳤다. 이곳에서만 하기로 했던 계약과는 이야기가 다르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 자는 지금 자신을 스란두일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치욕을 당하는것과 팔려가는 것은 달랐다. 소린은 안간힘을 내어 자신의 몸을 묶은 줄을 풀어내려 애쓰며 소리질렀다.
"저자도 기대가 되는지 기쁨의 몸부림을 치는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손을 비벼오는 힐데를 스란두일은 느긋하게 내려다보았다. 악취미로군. 어쨌거나 선물은 선물이니 선물의 의지같은 건 살필 필요 없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스란두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포장해서 마차에 싣거라. 돌아가서 느긋하게 확인해보지."
발소리가 나지 않는 가벼운 몸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다시 끼익 소리를 내며 닫힌 문 틈에서 울부짖는 비명소리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